- 록산느




- 피에라










아, 속 쓰리다.

 

나는 위장약을 한입에 털어 넣은 뒤, 지옥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었어, 내가 분명 9시까지 봐준다고 했을 텐데?”


“오타 좀 고치고 오느라-”


“변명이나 하러 왔어? 빨리 리포트나 내놔.”


오늘도 저기압이군, 하긴 교수님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긴

했었나? 아마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쯧, 커피나 한 잔 타와. 매번 먹던 걸로.”


“넵.”


나는 커피를 내리면서, 내 리포트를 집중해서 읽고 있는

교수님을 흘깃 훔쳐보았다.

 

‘저 얼굴로 저 싸가지라니, 이게 그 얼굴값 한다는 건가?’

 

록산느 아엘 브리티시아, 통칭 록시 교수님.

 

무려 현대에는 몇 남지 않은 순혈 엘프이자, 이 학교에서

가장 오랫동안 교수직을 맡은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아담한 체구에 반해 흉악한 몸매, 엘프 특유의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미모, 그리어 항상 V자를 유지하는 눈썹.

 

외모만 보면 어지간한 남자들은 한눈에 반할 법한 엄청난

미녀지만, 정작 성격이 개떡 같아서 아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괴팍한 마녀.

 

‘그러니까 130살 넘게 먹고도 결혼을 못했지.’

 

누가 저 미친 성격을 감당한단 말인가, 노처녀 히스테리도

130년 넘게 묵으면 맹독을 품은 전갈 같은 성격이 된다는 걸

그녀를 통해 알았다.

 

“어이, 커피 빨리 내놔.”

 

“아, 네.”

 

나는 그녀에게 공손히 커피를 바쳤고.

 

그녀는 주저없이 커피를 내 리포트에 쏟아부었다.

 

“으아아아!? 내, 내 리포트가!?”


“이게 리포트라고? 휴지가 아니라? 너, 마법이 장난인 줄

알아? 누가 리포트 써오라고 했지 네 망상 끄적이라고 했어?

그런 걸 시킬 거면 널 비싼 돈 주고 왜 데리고 있냐고, 내가.”

 

아아아아...이거 하나 쓰자고 주말까지 반납하고 무려 2달

넘게 밤샘을 밥 먹듯이 하며 버텼는데...!

 

“어지간하면 그냥 봐주려고 했는데, 이건 도를 지나쳤어.”


“어, 어디가 문제였단 말입니까!?”


“논제부터 틀려먹었어! 요스-고라몬 공식을 이용해서 마력

소모율을 줄여? 다차원 해석 응용 마법진? 그딴 건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논쟁 끝난 것들이라고!”

 

“저, 저는 거기서 부족한 점을 보충-”


“그러니까 논제부터 틀렸다고 했잖아! 애초에, 이게 정말

성공하더라도, 고작 이 정도 성과로 박사 달고 교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진심으로?”

 

그녀가 나를 향해 커피에 젖은 리포트를 집어 던졌다.

 

“그랬으면 이 학교에 교수가 300명쯤은 있었겠지! 너는

내가 직접 가르치는데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응?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잖아, 너. 얼마 안 남은 시간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낭비하고 싶어서 여기 온 거냐고?”

 

나는, 나는.

 

...나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아, 됐다, 됐어. 쯧, 어쩌자고 남은 제자가 너 하나인지...

나도 어지간히 제자복이 없긴 해, 정말로.”

 

그녀가 나가라고 손짓했고, 난 군말없이 방을 나왔다.

 

“아...진짜 씨발...”

 

이번에도 빠꾸다, 이번에도.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무려 5년이다. 록산느 교수님 밑으로 들어간지 5년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박사 학위는 윤곽조차 보이질 않는다.

 

보통은 3년 정도면 박사 추천을 받고, 4년차에는 심사를

통과해 박사가 된다. 나처럼 5년차에 박사 추천도 못받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그래, 어지간히도 게으르고 재능이 없지 않은 한은...

 

‘나도 분명 재능은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록산느 교수님 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들 무서워서 함부로 말도 못거는 사람이지만, 그녀는

내 재능을 알아보았고, 직접 나를 간택해 제자로 삼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부끄러워서 도대체 얼굴을 들 수조차 없다.

 

“그만...둬야 하나...?”

 

나도 이제 나이가 있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내 동기들은 벌써 다른 곳에서 박사 학위를 달았거나,

아니면 자기 일자리를 잡아 정착한지 오래였다.

 

‘학비야 교수님이 대신 내주고 있다지만, 계속 이렇게

폐만 끼칠 순 없어. 뭔가, 뭔가 다른 수를...’

 

“뭐하고 있어?”

 

우왓!?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아하하, 뭐해? 또 왜 이리 죽상이야?”


“...피에라 교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피에라 아엘 브리티시아, 록산느 교수님의 언니이자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수님이시다.

 

동생인 록산느 교수님하고는 달리 키가 크고, 성격도

정반대로 사근사근하고 나긋나긋해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실제로 그녀는 무려 20명이나 되는 제자를 데리고 다니며,

피에라 교수님에게 간택된다는 것은 학생, 아니 마법사로서

가장 큰 영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실적과 실력을 가진 사람이다.

 

‘거기에 엄청 미인이고. 엘프는 부럽구나.’

 

뭐라고 해야 하나, 옷이 너무 과감하다고 해야 하나...

 

가릴 곳은 다 가린 록산느 교수님하고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가리지 않고 과감하게 뽐내고 다녔다.

 

오죽하면 나이가 140살이 넘는데 매년 교수님한테 고백하는

학생이 나오겠는가.

 

“표정 보니까 또 그 녀석이 지랄발광을 떨었구나?”


“그, 말씀이 조금...”


“뭐 어때? 실제로 그런데. 하여간, 하나뿐인 제자를 이리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어지간히 해야지.”

 

그녀가 큭큭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따라와, 아침 아직 안 먹었지?”


“아, 네...근데 제가 같이 먹어도 될지...”


“고작 아침 식사 같이 하는 걸로 유난 떨지 마.”


“넵.”

 

나는 잠자코 교수님의 뒤를 따라갔다.

 

학교 식당은 한산했고, 대부분은 먹는 건지 자는 건지

모를 정도여서 우리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창가 자리에 앉자. 난 이 자리가 제일 좋더라고.”

 

커다란 창문 너머로 햇볕이 들어왔고, 고개를 돌리니 밖에는

바람이 부는 건지 나무와 풀이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이렇게 좋은 날씨엔, 역시 나도 조금은 놀고 싶어진다.

 

“메뉴는-”


“나 온 거 봤으니까 알아서 가져다 줄 거야.”

 

그 말대로, 식당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커피와 샐러드를

내려놓고 갔다.

 

“샐러드...네요.”


“응. 나 채식주의자거든.”


“아.”

 

하긴 엘프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엘프 중에서는 종교나 신념에 따라 채식주의를 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록산느 교수님은 반대로 고기를 사랑하지만.

 

식성마저 정반대라니, 진짜 자매가 맞는지 의심됐다.

 

“나 말이야, 이야기를 빙빙 돌려서 하는 걸 싫어하거든.”

그녀가 우아하게 커피를 마신 뒤 말했다.

 

“너, 내 밑으로 와.”

 

“네?”

 

“내 밑으로 오라고. 너, 이제 5년차잖아?”

 

아니, 느닷없이 그렇게 말해도...

 

그녀가 포크로 샐러드를 푹 찍어 입에 쏙 넣었다.

 

“록산느 걔도 어지간히 해야지. 아직 박사도 못 달은 애한테

어지간한 교수급 성과를 원하니 만족을 못하는 거 아니야.”

 

“그건...뭐...그렇죠.”


“내 동생이지만 성격이 글러 먹었어, 아주. 그러니까 제자들이

전부 도망을 가지. 원래 네 위로 4명 더 있었던 거 알지?”

 

선배들, 그러니까 나보다 먼저 탈주한 선배들이 있었다.

 

다들 자기 분야에선 꽤 재능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록산느 교수님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가거나

아예 다른 교수님 밑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종종 마주치면 나를 측은하다 못해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보곤 하셨다.

 

“넌 의리도 있고, 성격도 좋으니까 5년이나 버텼지 남들은

1년도 못 버티고 도망쳐. 그게 보통이야.”

 

“...”


“너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네 실력이면 벌써 박사는

물론이고 조교수 정도는 달았어. 아니야?”

 

“맞...습니다.”


“네가 쓴 리포트 읽어봤어. 제법 괜찮던데, 그거 전부

빠꾸 먹었잖아. 참나, 지는 20살 때 그런 거 쓸 줄 알았나?

주위에서 천재라고 띄어주니까 진짜 천잰줄 알아.”

 

피에라 교수님이 큭큭 웃으며 샐러드를 마저 먹었다.

 

“아...이거 말해주면 안 되는데, 비밀 하나 가르쳐줄까?”


“무슨 비밀이요?”


“록산느 걔,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순간, 내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설마...”


“너까지 사라지면 누가 걔 뒤치다꺼리를 해주겠어? 안 그래?

커피 타주고, 욕받이 해주고, 청소해주는 노예가 하나쯤은

있어야지. 명색이 교수인데 제자, 아니 노예가 있어야지.”

 

그녀가 다시 우아하게 커피를 마셨지만.

 

왠지 모르게, 그 모습에서 나는 혐오감을 느꼈다.

 

“다 그런 거야. 시스템이라는 게 그래, 여기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런 거라고. 누군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래에서 희생당하고, 상위권에 있는 사람들은 그 희생을

영양분 삼아 살아가지. 너, 그래. 너는.”

 

피에라 교수님이 날 가리켰다.

 

“너는 그 아이한테 희생당한 거라고.”


“...”


“하지만 난 재능있는 아이가 그렇게 희생당하는 걸 보고만

있지 않아. 능력 있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야 마땅하니까.”

 

그녀가 씩 웃으며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뭔지는 알지?”


“전과 신청서...네요.”

 

“다시 말할게, 내 밑으로 와. 1년 안에 너, 박사 학위 따게

해줄게. 조교수, 부교수도 지금부터 4년이면 달 수 있어.”

 

4년. 그 시간을 버티면, 난 부교수가 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교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쩔래? 답도 안 보이는 그 아이 밑에서 노예로 살래?

아니면 눈 딱 감고 4년 버텨서 교수 한 번 해볼래?”

 

“정말로...정말로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까?”


“내가 구라쟁이였으면 내 밑에 제자가 20명이나 있었겠니?

그 애들도 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내 밑에 있는 거야.”

 

맞는 말이다. 아마 피에라 교수님은 지금, 진심으로 나를

구해주려고 하는 것이리라.

 

더는 눈치보지 않아도 된다, 더는 덜덜 떨며 살지 않아도

된다. 이제 더는...록산느 교수님에게 고통받지 않아도...

 

“...하루...하루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어서요.”

 

그래도 5년이나 신세를 진 사람이다.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녀 밑에 있었기 때문에 배울 수 

있었던 것도 많았다. 아니, 아마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이건 마지막 예의다.

 

최소한 바로 홀라당 넘어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좋아, 그럼. 내일 이 시간에 여기 있을게, 서류 꼭 가지고

오고, 록시한테는...뭐,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뭘 이 정도로. 내일 보자, 우후후.”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워졌다.

 

 

 

 

 

쾅!!

 

내 방문을 발로 차서 열다니, 이럴 수 있는 사람은, 아니

이렇게 할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야!! 피에라 이 걸레년아, 내 제자한테 또 꼬리쳤지!?”


“쉿, 학교 안에서 소리를 지르면 어쩌니?”


“지랄하고 앉았네!! 이 망할 할망구야, 그 녀석을 네가

왜 빼가는데? 제자만 20명이나 있으면서!”

 

록시가 의자를 걷어차고 내 멱살을 콱 붙잡았다.

 

“어머, 어머. 교수끼리 이러면 쓰겠어?”


“상도덕도 없는 년 같으니, 하나뿐인 제자를 훔쳐가려고 해?

네가 그러고도 엘프냐? 솔직히 말해, 느그 애비 고블린이지!?”

 

“배다르다고 막말하는 거 아니다, 얘.”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록시의 몸이 붕 떴다.


“이 씨...! 반중력 마법 안 풀어!?”


“직접 풀어보던가. 아무튼 그 상태로 얘기 좀 하자.”

 

록시의 분야는 원소랑 기본 마법학, 나 같은 공간이나

중력을 다루진 않는다. 그러니 이 마법을 자력으로

푸는 건 꽤 오래 걸릴 것이다.

 

“너, 진짜 너무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


“뭐?”


“그 아이 말이야. 어떻게 5년이나 그렇게 못살게 굴 수가

있어? 내가 원래 남의 일에 참견을 안 하는데, 이번에는

정도를 지나쳤어.”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록시의 표정이 확 굳었다.

 

“남의 제자한테 참견하지 마시지.”

 

“그 아이한테는 재능이 있어. 처음부터 내 밑에 있었으면

아마 벌써 조교수쯤 달았을지도 모르지. 너도 알잖아?”

 

“...”


거봐, 할 말 없으면서 소리는 왜 질러.

 

록시의 기준이 엄격한 건 사실이지만, 그 아이의 실력은

이미 록시의 기준을 넘어설 수준이었다.

 

리포트만 읽어봐도 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얼마나 창의적인 발상을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뭐, 내가 데리고 있겠다는데 네가 뭔 참견이야?”


“하아...그러다가 그 아이가 그냥 전부 그만두면 어쩌려고?

5년이야, 록시. 보통 사람 같으면 5년은 고사하고 2년이면

그만뒀어. 게다가 그 아이는 우리 같은 엘프도 아닌 그냥

인간이야. 오래 살아도 100년이라고.”

 

거기에 우리처럼 죽을 때까지 젊은 것도 아니다.

 

앞으로 10, 20년만 지나도 시들어버린다. 지성도 능력도

뒤떨어지고 만다. 그런 종족인 것이다, 인간이란.

 

“언제까지 그렇게 붙잡고 있을 건데?”

 

“...”

 

“아니, 사실 나도 다 알아. 네가 그러는 이유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거. 내가 네 언니로 100년 넘게 산 거 알지?”

 

내 말에 록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무, 무슨 개소리를...”


“다 눈치챘거든? 일부러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왜

박사도 못 달게 붙잡아두겠어? 마음 있는 거잖아, 걔한테.”


“아...아니야. 뭘 멋대로 착각하고 앉아있어...기분 나빠...”

“그래? 그럼 내가 먹어도 돼?”

 

그 순간, 반중력 마법이 풀리면 주먹이 날아들었다.

 

나는 가볍게 주먹을 받아낸 뒤, 록시의 멱살을 잡았다.

 

“이 씨발, 그러기만 해봐, 진짜 죽여버릴 거야...!”
 
“왜? 나도 시집 좀 들어보자. 140년 넘게 처녀로 사는 게

얼마나 좆같은지는 너도 알잖아?”

 

“나, 난 처녀 아니거든!?”


“맞잖아. 너한테 남자가 있을 리 없지, 성격이 이 모양인데.”


얼굴만 예쁘면 뭐하나, 성격이 똥침 맞은 울버린 같은데.

 

물론 나도 마법 연구하랴, 강의하랴, 하루도 안 빼먹고

바빠서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 한 번을 못해봤다.

 

...엘프는 결혼하기 힘들다는 옛말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걔도 나한테 아주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던데?”

 

“뭐? 또, 또 개소리-”
 
“시험해볼까?”

 

어이쿠, 이제 진짜 울려고 하네.

 

록시는 항상 이랬다. 한참 버럭버럭 화내다가, 진짜로

빡돌면 아예 울어버리곤 했다.

 

100년을 넘게 살아도 옛날 버릇은 못 고치는구나.

 

“너, 너 진짜, 너 진짜 싫어. 죽어 그냥, 끄윽.”


“아, 아! 미안해, 그냥 해본 말이야. 근데 말이지, 걔를

내 밑으로 두려는 건 진심이야.”


록시가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았다.

 

“재능도 있고, 야망도 있어. 그런 아이를 키워주는 게

교수로서의 의무야.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해야지.”

 

“...”

 

“내일 아침에 나한테 서류 가지고 올 거야. 뭐, 설득을

하든 매달리든 네가 알아서 해. 나는 걔가 내 밑으로 오겠다

하면 받아줄 거야. 이해했어?”

 

탁, 나는 록시를 풀어준 뒤 돌아섰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행동해, 록산느 교수.”

 

“...좆까.”

 

쾅! 록시가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어휴,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왜 이리 다른 거람.”

나머지는, 뭐.

 

그 두 사람이 알아서 할 문제다.

 

 

 

 

 

내가 잘못했다는 거, 그 정돈 나도 알고 있어.

 

알고 있어. 내가 너무했다는 거, 정도를 지나쳤다는 거.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내 밑으로 오겠다고 하는 학생은 거의 없단 말이야.

 

어찌어찌 끌고 와도 1년도 못 버티고 나가버린단 말이야.

 

나도 알아, 내 성격이 진짜 지랄 맞다는 거.

 

하지만, 이런 성격으로 태어난 건 어쩔 수 없잖아?

 

이런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어버리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반해버리는 것도.

 

보내주고 싶지 않다는 것도, 어쩔 수 없잖아?

 

“...”


나는 그 녀석의 방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내일, 내 유일한 제자가 내 곁을 떠난다.

 

그리고 그 망할 불여시의 또 다른 제자가 된다.

 

“싫어.”


그건 싫다, 내 잘못은 알겠지만, 그것만은 죽어도 싫다.

 

하필이면 그 여자 밑으로 간다고? 

 

‘정말로 그런 쪽으로 뺏는 것도...노리고 있을지도...’

 

재능도 있겠다, 젊고 잘생겼겠다, 빼앗으려고 드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어, 교수님?”


“아.”

 

문이 열렸고, 그 아이가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무슨 일로-”


“잠깐 얘기 좀 하자. 나 들어간다.”


쿵! 나는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갔다.

 

방안은, 생각보다는 깔끔했다. 책상에는 쓰다 만 리포트가

쌓여있었고, 책장의 책은 전부 손떼로 닳은 것인지 꽤나

낡아보였다.

 

“그, 이런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그 서류, 나 보여줘.”
 
“서류요?”


“뭔지 다 알면서 시치미 떼지 마.”

 

그제야 그 아이가 내게 전과 신청서를 가져왔다.

 

“...그래, 피에라가 제안했다고?”


“네.”

 

“넌 어쩔 생각인데?”


“...저도 5년이나 교수님 밑에 있었고, 절 가르쳐주신 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저도, 제 인생이 있는 거잖아요.”


“...”

 

할 말이 없다. 전부 내 잘못이어서, 내 욕심이어서.

 

너를 내 곁에 영원히 두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서.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짓도, 아마 용서받지 못하겠지.

 

“교수님?”


부욱, 부욱, 부우욱-!

 

나는 전과 신청서를 갈기갈기 찢은 다음 발로 짓밟았다.

 

“누구 멋대로.”

 

누구 멋대로 내 곁을 떠나겠다고 하는 거야.

 

내가 허락을 안 해줬는데, 내가 아직 놓아주질 못했는데.

 

“네 멋대로 날 떠나겠다고? 내가, 내가 허락할 것 같아?

아직 넌 부족해.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그냥 있으라고.”

 

“그럼 제 인생은요? 전 언제까지 박사 학위도 못 달고

대학원생으로 있어야 하는데요? 30살? 40살? 아니,

그 이전에, 정말 박사 추천을 해줄 생각은 있으신 거예요?”

 

“닥쳐! 넌 아무것도 몰라, 아직 한참 부족하다고! 건방지게

굴지 마, 고작해야 조교수 수준밖에 안 되는 주제에!”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이럴수록 미움받는다는 거, 나도 아는데.

 

이런 식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어서, 나도 아픈데.

 

“그럼 더더욱 떠나야겠죠. 재능없는 놈이 제자랍시고 있는

것도 문제잖아요. 아니에요?”

 

“그건!”

 

이래도 절벽, 저래도 절벽. 온통 절벽뿐이다.

 

결국 네가 내 곁을 떠난다는 결말밖에 보이질 않는다.

 

“가지 마...”

 

비참하고, 비굴하고, 비련하게, 나는 빌었다.

 

“가지 마, 너 없으면 나 혼자 뭐 하라고. 너 없이는 이제

안 된단 말이야, 혼자는 싫어...또 혼자가 되긴 싫어...”

 

결국 모두 내 곁을 떠나버린다.

 

언니는 언제나 사랑받는데, 나는 항상 외톨이다.

 

이제야 겨우, 겨우 한 사람, 너만이 내 곁에 있어주었는데.

 

“제발...”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래.

 

그렇겠지, 나도 알아.

 

내가 아무리 추하게 빌어봤자 소용없다는 거.

 

이미 네 마음은 떠나버렸다는 거.

 

“...하지만 난 아니야.”


쿵! 나는 널 바닥에 밀어버린 뒤, 그 위에 올라탔다.

 

“잠, 교수님!?”


“생각해보니까 방법이 딱 하나 있었어.”

 

나는 네 가슴에 손을 올렸다.

 

“박사 추천도 해줄게, 교수 임용도 내가 책임지고 시켜줄게.

근데 있잖아, 그럼 네가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겠지? 그래도

방법이 하나 있었어. 진짜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그냥, 내 걸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잖아?

 

내 남편으로 삼아버리면, 어쨌거나 내 곁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거잖아?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기다려요, 교수-”

 

나는 네 입에 내 양말을 처박은 뒤, 셔츠를 벗었다.

 

“그거 알아? 엘프와 인간 사이의 혼혈은 잘 안 생긴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다.

 

“그럼 될 때까지 하면 그만이겠네, 그치?”

 

전부 내 잘못이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외근 복귀 후 첫 소설...어려운 주제지만...썼다...

공포 대회 소설은 솔직히 망작이라서 나도 상 못 탈 거 같기는 했어...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번만큼은! 

그래도 솔직히 이번 것도 걍 평작 수준인 거 같긴 함 ㄹㅇㅋㅋ

아무튼 실례가 아니라면 싸이버거 좀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