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한번 더 지팡이 끝에 힘을 싣는다. 



 "마데스... 룬데르!"



 들판 위에 잔잔히 불어오던 바람이 순식간에 내 주변으로 모여들더니, 광풍으로 변해 저 앞에 서 있는 여인을 향해 칼날처럼 쏘아져 나갔다.



 -쐐애액!!



 소리만으로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만들었던 칼날바람 중에 가장 날카롭게 벼려졌다. 아마 스스로 힘을 잃기 전까진 앞에 놓인 모든 걸 베어버리고 지나가겠지. 강철마저도 뚫을 것이다.



 하지만,



 "페아리 스루마테스."



 -파지직!!



 맹렬하게 풀과 나무를 찢어발기며 날아가던 바람칼날은 가벼운 손짓 하나에 어이없이 튕겨져 나가 허공 위로 흩어져버렸다.



 창백한 밤하늘에 풀잎들이 흐드러져 쏟아져 내렸다.



 "훌륭해요, 마나도 얼마 남지 않았었을 텐데."



 가녀린 손이 떨어지는 풀잎 하나를 부드럽게 잡았다.



 "엉겅퀴 잎은 바람을 타면 바늘보다 날카로워지죠. 그걸 노리고 일부러 바람을 밑으로 쏘아보냈군요. 정말 괜찮은 방법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미리안 교수님."



 미리안 레데이라.



 최초의 마녀가 들판 위에 고고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에 뜻을 두는 이라면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시리도록 푸른 보름달을 빼닮은 두 눈동자와 은은하게 빛을 내는 잿빛 머리칼은 대강당 끝에서도 시선을 잡아끌었고, 겨울철에 얼어붙은 연못처럼 차분한 목소리는 가장 나태한 학생마저도 귀를 기울이게 하는 마력이 담겨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밤이 깊었네요."

 "...예."



 미리안이 후 하고 입김을 불자 엉겅퀴 잎이 파르르 떨리더니 흙바닥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10초도 채 되지않아 순식간에 보라색 꽃이 그자리에서 피어났다.



 가장 어려운 마법인 생명탄생을 영창도 없이, 지팡이도 없이 간단하게 해내는 모습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느때와 같이 녹초가 된 나는 마치 가벼운 마실을 나온 것처럼 들판을 거니는 미리안의 뒤를 힘없이 뒤따랐다.



 벌써 반년 째 같은 일상이었다. 낮에는 미리안 교수의 이론 수업을 다른 학생들과 함께 들었고, 밤에는 따로 그녀에게 불려와 학교 밖 들판에서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마법을 연마해야 했다.



 처음 그녀가 기숙사 문을 두드렸을 땐 심장이 멎는줄 알았다. 아름다운 푸른 눈에 놀라서 그랬고, 그녀의 찬란한 마나에 압도되어서 그랬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마법을 배우러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특출난 재능을 보인 학생들은 차고 넘쳤었다. 내 동기인 아나페는 얼음으로 집을 한채 만들 정도였고, 선배인 헤나는 아예 학교 전체를 버섯밭으로 만들어버린 이력이 있었다. 그날 저녁 메뉴는 온통 버섯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저 평범한 학생 중 하나에 불과했다. 자그마한 바람을 일으키고 이론 시험도 턱걸이를 간신히 하는, 둔재에 가까운 학생. 하지만 미리안 교수는 나를 찾아왔었다.



 "저... 교수님, 여쭙고 싶은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왜 굳이 저를 고르신 겁니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매일 밤마다 하는 이 마법 수련 말입니다. 저 같은 놈 말고 재능 넘치고 교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어하는 학생들은 널려있을텐데, 아니, 아마 이 학교의 모든 사람들은 다 교수님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왜 저를-,"

 "마법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히안?"



 갑작스레 날아온 질문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보름달을 등진 마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질문은 저번에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첫 강의의 첫마디가 바로 저 질문이었다.




 <여러분들은 마법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열의가 넘치는 학생들의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불가사의한 힘입니다."

 "재능이자 축복이죠."

 "선택받은 사람만이 다룰 수 있는 특권입니다."

 "삶을 편하게 해주는 도구요!"

 "세상의 보이지 않는 법칙 아닐까요?"



 나는 그 수많은 부르짖음 속에서 작게 말했었다. 그 대답을 이번에도 다시한번 말했다.



 "인간의 의지입니다."



 미리안이 미소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바람이 불어오고 번개가 치는 것은 자연의 섭리입니다. 막을 수도,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의 방향을 바꾸고 번개가 내리꽂힐 곳을 정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어도 제가 원하는 대로 굽힐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게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하고자 하는 힘, 믿음... 같은 거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마법같은 일이라고 해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모두가 안될거라 생각할 때 기어이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이 있기에 그리 부르기도 하죠. 히안의 말 그대로 '의지', 그리고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에요."



 그녀가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서늘한 감촉과 함께, 정확히 내가 감당해 낼 수 있을 정도의 마나가 흘러들어왔다.



 "마법은 그리 거창한게 아니에요. 재능이랄 것도 없죠. 그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연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냉정함만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는게 마법이에요. 꺾지 않고 구부린다. 거스르지 않고 다스린다. 될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저는 아직 아무것도..."

 "나는 마음에 들었어요."

 "네?"



 미리안은 고개를 돌려 보름달을 올려다봤다. 



 "아까 왜 내가 히안을 골랐느냐고 물었죠? 히안의 답변이 나는 마음에 들었어요. 그게 다에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웃었다. 그러자 작은 바람이 내 주변에 일었다.



 "괜찮아요. 내가 아니까."



 미리안의 손길과 같은 서늘한 바람이 내 뺨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그저 허공을 저으며 풀벌레들의 합창을 지휘할 뿐이었다.











 §








 "히안 매카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복도엔 사람이 없어야했다. 야밤의 복도는 사방이 촛불로 밝혀져 있어도 으시시해서 굳이 방 밖으로 나오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창가쪽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 믿음이 확실한 여자, 선택받은 사람만이 마법을 누릴 수 있다 여기는 자들 중 하나.



 "...아나페 크세트리나."



 검은 머릿결을 한 그녀가 손끝으로 고드름 하나를 빙글빙글 돌렸다. 가을철에 얼음이 있을리가 없었다. 분명 마법으로 만들어낸 거겠지.



 "언제 돌아오나 했어. 기다리다 여기서 잠들 뻔했다고. 뭐하다가 이제 온거야?"

 "만나자는 약속도 안했잖아. 너야말로 여기서 뭐해?"

 "뭐하긴, 널 기다렸지."

 "난 별로 할말 없어."



 아나페를 지나쳐 내 방으로 걸어가려는 순간,



"아이사리아 시클레."



 -콰드득.



 혹한의 얼음 기둥이 바닥에서 솟아올라 내 앞을 막아섰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을 안했는데, 히안."



 아나페는 고드름을 창밖으로 휙 던지고는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얼음기둥을 피해 지나가보려 했지만 어찌나 큰지 빈틈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탓에 올려다보는 꼴이 되었다.



 "소문이 들려. 매일 밤마다 누군가가 학교 밖 들판으로 나간다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아나페. 이 얼음기둥 치워."

 "직접 치워봐."



 천재라는 이름엔 언제나 오만함이 뒤따른다. 실력에 확신이 있는 자는 확신이 없는 자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아나페는 그 누구보다 천재였다.



 "미리안 교수님이지? 너랑 같이 들판으로 갔던 사람."

 "..."

 "아니라고 거짓말할 생각하지마. 내가 직접 다 봤으니까."

 "알면서 왜 물어본거야."

 "너가 아니라고 할까봐."

 "...그래, 맞아. 미리안 교수님이야. 그게 뭐."



 아나페는 날이 선 내 말에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는 나를 노려봤다.



 "앞으로 교수님이랑 개인적으로 만나지 마."

 "뭐?"

 "만나지 말라고. 야밤에 단둘이 인적없는 곳에 가는 걸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따로 교육 받나보다 싶겠지."

 "야!"



 침착함은 5초도 채 가지 않았다. 아나페의 성난 얼굴은 퍽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 미모가 아까웠다.



 "만나지 말라면 만나지 마!"

 "네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어. 게다가 교수님쪽에서 먼저 오신거고."

 "그래서야, 이 바보야! 미리안 그 사람이 너한테 왜 찾아오겠어? 너같이 재능도 없는... 아."



 아나페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복도를 맴돌았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재능없는 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인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긴 시간 끝에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아나페였다.



 "...그냥 만나지 마. 그게 네 안전에 좋을거야."

 "지금 협박하는거야?"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나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의 얼굴에선 분노나 짜증 대신 안타까움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메리아메스 리빌라."



 그녀가 지팡이를 꺼내더니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작은 연기가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나오더니 곧 사람의 형상 2개로 변했다. 



 하나는 긴 머리칼에 가녀린 체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짧은 머리에 평범한 체구였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미리안 교수님과 나였다.



 "이게 무슨... 너 설마 몰래 쫓아와서 훔쳐본-,"

 "입다물고 자세히 봐봐."



 내 형상이 무언가 중얼거리자, 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교수님이 입을 움직이며 손을 휘젓자 칼날바람이 맥없이 흩어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한시간 전의 일이 생생하게 반복되는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봤어? 봤지?"

 "...그래, 내 마법이 형편없는 게 아주 잘 보이네. 이게 네가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아냐, 이 멍청... 아으, 미치겠네! 다시 봐봐! 미리안 교수의 입을 보라고!"



 다시한번 반복되는 마법 대결. 미리안 교수님이 무어라 말하며 손을 휘젓는 순간, 아나페가 그녀의 입을 가리켰다.



 "봐, 방금 뭐라 중얼거린거 같아?"

 "당연히 마법 영창이겠지. 마법의 기본인 영창. 그것도 까먹었-,"

 "너 미리안 교수가 직접 입으로 영창하는거 들어본 적 있어?"

 "뭐?"

 "교수들끼리 하는 시범 마법 대결이나, 평상시에 그 사람이 영창하는 거 들어본 적 있냐고. 애초에 생명탄생 마법도 무영창으로 하는 여자가 왜 입으로 직접 주문을 외겠어?"



 불현듯 미리안 교수님이 엉겅퀴 잎으로 꽃을 피워낸 모습이 떠올랐다. 무영창, 맨손이었다.



 "그야 나한테 방어 마법이 뭔지 알려주려고 그러신거겠지."

 "그때 외운 주문을 읊어봐."

 "나? 내가 한건 마데스 룬데르. 칼날바람 마법이었어."

 "그거 말고, 미리안 교수가 한 거."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때 교수님이 뭐라고 했더라. 마나가 바닥난 상태였던지라 명확히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페아... 페아리... 스루마테스. 그래, '페아리 스루마테스'였어."

 "그거야!"



 아나페가 재빨리 내가 말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분홍빛 연기가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와 교수님의 형상에 스며들었다.



 "이게 뭐인거 같아?"

 "아직 우리가 배우지 않은 고등 방어 마법인거 같은데."

 "틀렸어, 바보야. 저 분홍색 안보여? 저건 방어 마법같은게 아냐. 매혹이야. 정신 매혹 마법!"



 매혹 마법.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말 그대로 누군가의 감정을 조작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마법이다. 치기어린 젊은 마법사들은 그걸 배우려고 혈안이 되어 도서관을 찾기도 하는 골치아픈 주문.



 "...그럴리가 없어. 영창이 다르잖아. 매혹 마법의 주문은 '로베나메'야. 게다가 교수님 자신한테 걸었고."

 "하급 매혹이랑은 달라. 저건 옛 마법이야. 저번에 도서관에서 읽어본 적이 있어. 옛 마법은 너무 강력하고 원시적이라 지팡이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어. 그래서 옛날 마법사들은 자기에게 마법을 건 뒤에 신체적 접촉을 통해 마법을 상대에게 흘려넣는다고 했단 말이야."

 "하지만... 너무 비효율적이라서 없어진 방법이잖아."

 "대신에 은밀하고 티가 안나지. 게다가 옛 마법이면 하급 매혹처럼 일시적으로 감정을 일으키는게 아니라 영구적으로 감정을 각인시켜버릴수도 있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말일까? 정말로 교수님이 매혹 주문을? 하지만 왜?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닐까? 아나페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이 모든게 짓궃은 장난이 아닐까?



 그러나 교수님의 형상에 깃든 분홍색 연기는 명백하게 그것이 매혹 마법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나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신체접촉은 안했으니 다행이야. 왜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앞으론 미리안 교수랑 개인적으로 만나지 마. 알겠지? ...도대체 그 여자는 무슨 속셈인거야? 너한테 주문을 걸려고 하다니..."



 하지만 나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경악했다.



 "너 설마..."



 미리안 교수님의 형상이 내 형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분홍빛 연기가 손을 통해 나에게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기억난다. 그 서늘하고 부드러운 손과 자로 잰듯이 정확하게 내 한계만큼 들어왔던 교수님의 마나.



"디, 디아스펠레! 디아스펠레!"



 아나페가 다급하게 해제 주문을 외쳤다. 내 몸에서 순간 빛이 나다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망할 옛 마법! 기다려, 내가 지금 당장 다른 교수님들을-,"



 그 순간, 밤하늘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복도 안에 울려퍼졌다.









 "최초의 마녀 미리안이 고하노니, 만월의 하늘 아래 세 사람만 남을지어다."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타오르던 촛불과 높다란 기둥들, 창문과 드높은 천장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암흑이 대신했다.



 두꺼운 카펫이 깔린 바닥은 흙과 풀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백한 하늘 위에, 거대한 보름달이 떠올라 시린 달빛을 온 세상에 흩뿌렸다.



 우리는 다시금 학교 밖 들판에 나와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야? 히안? 히안!"



 겁에 질린 아나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집어 빛을 내는 주문을 외웠다.



 "리, 리히타-,"

 "조용."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목소리만 빼고.






 "달은 나의 눈이자 귀에요, 달빛이 닿는 곳에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없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에 보름달을 빼닮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미리안 교수님."

 "결국 다 들어버리고 말았군요, 히안."



 나무 그림자 속에서 미리안 교수가 걸어나왔다. 모든 게 1시간 전과 똑같았다. 잿빛 머리칼과 아름다운 달을 등진 최초의 마녀. 그리고 그 앞에 선 재능없는 제자.



 하지만 모든 게 다르게 느껴졌다. 눈앞의 마녀는 위대한 마녀였다. 세상의 일부를 왜곡시킬 정도로 강대했으며 심연만큼이나 속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알던 자애로운 스승의 모습이기도 했으며, 수면에 떠오른 보름달처럼 덧없어보이기도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경외심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아나페를 어떻게 하신겁니까?"

 "잠시 재운거에요. 우리가 대화를 끝낼 때까지만."

 "아나페 말이... 사실인가요? 교수님이 저에게 매혹 마법을 걸었다는게?"



 내 질문에 미리안은 아주 조금 입꼬리를 올렸다.

 


 "때로는 많은 것을 아는 게 좋지 않을 수도 있어요, 히안. 그녀는 너무 많은 걸 알고 너무 많은 걸 말했죠. 하지만 걱정 말아요. 이제 다 고쳐질테니."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모든 게 문제 없을 것만 같은 안도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교수님,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히안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다고."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바닥에 핀 엉겅퀴 꽃을 어루만졌다.



 "지긋지긋했어요. 내가 무슨 생각으로 마법을 만들어냈는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마법을 가르친다는게 얼마나 자괴감이 드는 일인지 히안은 상상도 못할 거에요.



 마법을 재능이라 착각하는 자들, 그걸 독점하여 권력으로 삼으려는 자들, 그런 사람들의 돈을 노리고 학교를 세운 자들까지... 그 누구도 마법에 대해 진정으로 알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지난 몇 세기동안 실망의 연속이었죠.



 매 학기, 매 첫 수업마다 난 항상 같은 질문을 해왔어요. <마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늘 같은 대답을 받았죠. 하지만 몇 세기만에, 정말 처음으로 다른 대답을 하는 사람이 나왔어요. 정확히 내가 바라던 대답을 하는 학생이 나타난 거에요. 놀라우리만큼 순수하고 맑은, 태양 같은 눈을 한 학생..."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그녀 눈 안에서 일렁거렸다. 너무나도 깊어서 빠져들 것만 같은 아름다운 눈이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스스로 답변을 찾아냈음에도 자기자신을 믿지 않았어요. 그 누구보다 위대한, 나와 함께 새로운 마법을 창조해낼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자기를 재능없다 칭하며 마음을 걸어잠갔죠. 네, 그래요. 매혹 마법이에요. 그렇지만 내가 건 매혹 마법은, 아주 약간 그 학생의 등을 밀어주는 정도의 마법이에요."

 "하지만, 그건... 교칙 위반이잖습니까... 교수가 학생에게 손을 대는거나, 동의 없이 마법을 거는 건..."

 "교칙?"



 미리안이 웃었다. 주변의 풀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따라 웃었다.



 "내가 곧 마법이에요, 히안. 이 학교도, 마법도, 내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들이죠. 그리고 난 드디어 찾은 내 소중한 제자를 놓아줄 생각도 없고요."

 


 소중하다, 라는 말이 이렇게나 벅차오르는 말이었던가. 마법의 어머니가 나를 제자로 여기신다. 그것보다 더한 영광이 있을까.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안도감이 나를 압도해왔다.



 "같잖은 오만함에 빠진 가엾은 아나페에게도 감사해야겠군요. 덕분에 이렇게 계획을 앞당기게 되었으니."



 그녀가 가녀린 손을 나에게 내민다. 그 끝에 아주 희미한 분홍빛 기운이 감도는게 보인다.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하나뿐인 나의 진정한 제자여, 만월의 하늘 아래에서 다시한번 묻노니,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엄숙한 맹세인지라. 진실로 말하기를 바라노라."



 최초의 마녀가 깨뜨릴 수 없는 약속을 외기 시작했다. 이에 응하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네가 받아왔던 모든 멸시와 자괴감을 벗어던지고, 나와 함께 평생토록 마법의 섭리에 대해 탐구하겠느냐?"



 지난 몇년 동안 겪은 일들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를 내려다보던 시선들, 고개를 젓던 교수들, 맥없이 흩어지는 나의 바람들...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단 하나 뿐이었다.



 "예."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 달이 땅에 떨어져 산산히 부서지는 날까지, 우리 둘의 운명은 영원히 묶여 서로를 탐하고 서로를 의지하는 반려가 될 것이다."



 차가운 입술의 감촉.



 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모든 게 괜찮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나는, 재능이 없는게 아니었어.



 단 한 사람만 그걸 알아준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내 모든 걸 바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