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제출된 과제들 수거해서 가져습니…으웩!"


대학 교수의 연구실을 드나들때 내뱉을만한 탄성은 아니지만, 

이 방의 상태는 예의범절을 고려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


응접 테이블에 쌓여있는 컵라면용기, 비닐봉지.

교수의 책상 위엔 수많은 서류더미.

옷장 문틈 너머로 삐져나온 옷가지들, 냄새들.

먼지가 잔뜩 낀, 쉰내나는 에어컨까지.

더러운 수준이 남다르다.


"어. 거기 앞에 놔둬"

그나마, 교수만큼은 사람의 꼬라지를 하고있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남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선

손짓으로 시늉만 한다.


여자는 화면 속 온갖 도면들과, 3D 모델링을 가지고 씨름을 한다.


인터넷에 나오는 천재들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과학고에 들어가서, 당연하다는 듯 월반을 하고,

유명 대학을 입학해서, 학부시절에 연구실을 들어가고,

당시 지도교수 논문을 도우면서

자신의 논문도 준비하고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남들보다 몇 년 씩이나 빨리 끝낼 수 있었던 사람.


회사에 다녔다면, 신입사원 티를 막 벗어난

서른이란 나이에

대학에서 전임교원 제안을 받고.

조교수 직함으로 연구실을 배정받고서

매 년, 연구실을 유지하고도 남을 논문들을 쏟아내는 사람이

이 방의 주인인 여자다.



"저… 앞에 어디에…"

발 디딜 곳만 겨우겨우 남은 연구실에서

학부생인 남자가 한아름 들고 있는 이 서류를

어디에 두라는 것일까?


"아니다. 이리 줘."

교수가 손을 뻗는다

남자는 쓰레기더미 사이를 헤집고

한걸음, 한걸음, 교수에게 다가간다.


"여기. 있습니다."

교수에게 과제뭉치를 건넨다.

교수는 이미 높이 쌓여있는 서류의 산 위에

남자가 건네준 서류뭉치를 올려쌓는다.


남자는 인사를 건네고

다시 이 쓰레기방을 한걸음씩 나아간다.


교수는 연구실을 유지하기 위해

대학에서 지정해준, 최소한의 교양강의를 한다.


관련 전공학과에 다니는 남자는

꽁으로 학점을 따기 위해, 교양수업을 신청했다.


수업소개시간에, 수업조교를 뽑는다는 교수의 말에 냉큼 지원했다.


하루에 10분정도 고생을 하고, A+를 받는 건 남는 장사다.


교수가 수업도 대충대충, 신경쓰지 않는건 알았지만.

교수실까지 이 모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남자의 조심스런 발걸음에도

작은  진동이 매질인 공기를 타고 나비효과마냥 퍼져나간다.


바닥에 내딛은 발소리가

공기중으로 퍼져나가

책상과, 그 위의 서류뭉치를 때린다.


[와르르]

과제더미와 연구자료들이

바닥에 널부러진 쓰레기더미 위로 널브러진다.


“아. 이런”

책상에 앉아 모니터 화면과 씨름을 하던 여자가

무미건조한 탄성을 내뱉는다.


느릿느릿, 뒷머리를 긁고선 천천히, 종이더미를 향해 다가간다.


“죄. 죄송합니다!”

남자가 부리나케, 먼저 움직인 여자보다 빨리 과제뭉치를 정리한다.


“아냐, 네 잘못도 아닌데.”


여자는 쭈그려 앉아, 어질러진 서류더미를 차례로 줍는다.

남자는 눈을 둘 곳이 마땅찮다.

옷이 헐겁다.

아니, 교수답게 단정한 옷가지를 입고있지만

신경쓰지 않는건지, 옷매무새가 헐렁하다.


서류의 앞뒤좌우도 구분하지 않고선

되는데로 주워다 여자에게 건넨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 잠깐만. 역시…안되려나?”


여자가 나가려는 남자를 붙잡는다.


뭐가 안된다는거지?

자신의 불순한 시선과 눈길이 교수님에게 보이기라도 했나?

아무리 그래도, 서류를 좀 정돈해서 드릴 걸 그랬나?


“네..네?”


“너, 수업조교 말고, 연구실 조교 할래?”

여자는 대학원생도 아닌 학부생에게

연구실에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다.


—---


여자는 간단하게 몇가지 사안을 제안한다.


-8시 출근, 5시 퇴근,

-수업시간 및 점심시간 보장

-수업시간 포함 시급 1만원, 

-연구실 소속이기 때문에, 4대보험 공제 없음

-업무 : 정리, 정돈, 연구보조

-특혜 1. 향후 취업시 추천서작성

-특혜 2. 연구실 연구 참여 및 교육



“어…정말요?”

남자는 너무나 좋은 제안에 오히려 의심이 들 정도다

연구실 소속 조교들의 급여는, 보통 최저시급에 한참 못미친다.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학위 하나만 바라보면서 노예생활을 감내한다.


헌데, 업무도 잡무 수준에

최저시급보다 높으면서

수업을 듣느라 자리를 비워도 돈이 나오고

저녁시간도 자유롭고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할 내용들이

줄줄이 소세지마냥 딸려나온다고?


“관심없으면, 말고”


교수는 고개를 돌려서, 다시 모니터의 도면들과 씨름을 한다.


“아..아뇨! 할게요”

“그래, 그럼, 여기 정리좀 해줄래?”


교수는 손가락으로 연구실 군데군데를 가리키며

연구신 조교에게  첫 지시를 내린다.


"커피도 한 잔만, 부탁해"

두번 째 지시도, 바로 딸려나온다



업무 자체는 간단하다.


머그컵이나 접시를 닦고

쓰레기를 버리고

서류를 분류해서, 박스 안에 집어넣는다.

중간중간. 믹스커피를 여자에게 가져다준다.


헌데, 그 일이 끝나지 않는다.


첫 날인 어제도 3시간을 넘게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왔는데

아침에 출근해보니 다시 모든게 원상태다.


“하하…”

문을 연 남자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왔어? 정리좀 부탁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교수가

어제와 비슷한 자세로, 모니터의 도면들을 바라보면서

남자에게 지시를 내린다.


“안녕하세요”

오전 8시.

남자는 가방을 내려놓고 팔을 걷어올린다.

오늘 수업은. 오후 3시부터다.


어제 저 교수는 집으로 돌아가긴 한건지…


여자가 작업을 하는 동안

남자는 50L짜리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한 묶음 구매해온다.

어차피 필요한 물건들은 책장 안에 있거나,

여자가 책상 위에 두고선 작업중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닥이나, 응접테이블에 올려진 물건들을 버린다.


쓰지 않는 종이 박스에

누렇게 변색된 종이들을 담고


알 수 없는 플라스틱 사출 성형물들

무거운 철제 금형

그리고 그 금형에서 찍혀 나온 듯한 시험품들

포장지, 뽁뽁이, 비닐까지 쑤셔담는다.

50L짜리 쓰레기봉투 한 롤을 모두 사용한다.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학교와 계약한 세스코의 위력에 감탄한다.


수시로 땀을 닦아내고.

어질러진 물건들을 모두 들어낸 뒤에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연다.


“....추워”

남자가 하는 일에 신경도 쓰지 않던 여자가

바람이 불자 그제서야 반응을 보인다.


“조금만 참으세요. 청소하라고 지시하셨잖아요”

남자는 어이가 없다.

이렇게까지 생활능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나이에 대학교수를 단 것일까?

30대 초반이면, 자신과 나이가 얼마 차이나지 않는다.


남자는 구석에서 발견한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창틀이나 수납장에 쌓인 먼지를 닦아낸다.


시계는 12시를 넘어가기 시작한다.


아직 에어컨도 닦지 못했고

여자가 앉아있는 책상은 건드리지도 못했으며

꿉꿉한 냄새의 원흉인 저 옷장은 열어보지도 않았다.


분명, 굳게 닫힌 책장들에도, 버릴 것들이 산더미일 것이다.


그리 넒은 연구실도 아닌데.

어제도 오늘 종일 버리고 닦는데도 시간이 모자라다.


“하아… 식사, 하실까요?”

남자는 밥을 먹고, 수업시간 전까지 무엇을 먼저 건드려야 하나 고민한다.


“먹고 와, 난 컵라면이나 먹을래”


“...그 유통기한 다 지난 컵라면이요?”

남자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왜?”


“하아... 그거 다 버렸어요”


“멀쩡한걸 다 버리면 어떡해!”


“멀쩡하긴요! 그런거 먹으면 탈나요!”


“괜찮았어!....어제까지는”


“...교수님, 학식이라도 드시러 가시죠”

남자는 자신의 고용주인 교수를

안쓰러운 눈빛과 경멸을 섞어 바라본다.


“...”

마지못해,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


“그럼, 평소엔 뭘 드십니까?”

남자는 학식의 인기메뉴인 치즈돈가스를 자른다.



“음…컵라면이나…배달 음식이나. 뭐. 그런 것들”

여자는, 육개장을 시켜서, 공깃밥을 만다.


한 트럭은 내다버린 플라스틱 용기들의 출처를 드디어 이해한다.


“계속?”

설마 싶어, 남자는 무례한 질문을 건넨다.


“....왜? 문제 있어?”


“저, 고등학고 때 생물시간에, 야맹증이나 괴혈병 같은거 배웠어요”

편중된 식단은, 필시 몸에 무리를 가져온다.

높은 나트륨 함량은 고혈압을

단백질이나 탄수화물에 치중된 식사는 지방간이나 신장에 무리를 주고.

신선한 채소가 없다면 비타민부족에 시달린다.


“괜찮아, 먹고있거든, 종합비타민제”


“...그것도 다 버렸어요”


“왜! 멀쩡한건데”


“유통기한 다 지난데다가, 손 댄 흔적도 안보이던걸요”


“알약도, 유통기한이…있어?”


“당연하죠”


뉴스에서 몇 번 보긴 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

예를들어 재벌일가나 고위 공무원들이

은행에서 자기 계좌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핸드폰 개통도 못한다고.

하다못해 편의점에서 물건 하나도 사는걸 힘겨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서나 집사처럼 생활편의를 봐주는 사람들이

일거수 일투족을 챙겨주기 때문에

일반 사회 상식이 모자르고, 생활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비슷한 이야기 인 듯 하지만, 정도가 심하고 괴리도 크다.

도대체 어느 재벌이 컵라면으로 끼니나 때우면서 일을 할까?

유통기한이 다 지난 비타민제를 먹어서 건강해진다고 생각할까?


“뭐…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었으니까.괜찮아”

여자는 오랜만에 먹는 쌀밥에 좀 더 정신을 집중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하나 고민한다.



“커피, 가져왔습니다.”

남자가 연구실 소속이 된지 두달여가 지나간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청소가 한달여만에 끝이 났다.


책장 내부에 있던 수많은 자료들, 성형물들, 금형들을 모두 꺼내서 

귀찮아 하는 여자를 부여잡고 하나하나,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버리고 버리고 버려도,

하루이틀이면 다시 어질러지고, 쓸데없는 종이들이 생겨나고, 샘플용 금형이나 사출물이 계속해서 불어난다.


"고마워, 여기. 이것좀 봐줄래?"


문제가 생기면 치우고 덮기만 할것이 아니라.

근본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한다.


자연스럽게, 남자는 여자의 연구에 참여한다.


학부생 수준의 CAD 해석능력으로 도면을 수정하진 않는다.


하나밖에 없던 모니터를 두 개, 세 개로 늘린다.

무조건 인쇄를 하기보단. 태블릿에 자료를 옮기고 확인한다.


얼핏 들었던 3D 프린터나, 금형 단조 시뮬레이션 이야기를 해보지만.

공차나 오류때문에 교수가 단칼에 거절한다.


남자가 하는 잡무가 늘어난다.

여자가 생산해내는 도면들에 이력번호를 매기고, 주문한 금형과 같이 관리한다.


"뭐 필요하세요?"


"이거 도면, 이전 버전하고, 금형좀 찾아줘. 이력번호가…"


여자가 화면 하단에 깨알만하게 적힌 이력번호를 찾는다. 아직 노안이 올 만한 나이도 아닌데, 안경을 벗고 얼굴에 화면을 가져다댄다.


"아. 뭔지 알아요. 금방 찾아올게요"


남자가 모니터를 확인하더니. 이력번호에 맞는 금형을 찾는다. 


새로 들여놓은 철제선반에 놓인 물건들을 확인한다.

가장 위편에 놓인 금형과, 해당하는 도면을 꺼내기 위해 까치발을 든다. 손을 뻗는다.


상의가 들춰지고 속살이 노출된다.

팔을 뻗은 전완근이나 삼두근이 유난히 도드라진다.

여자는 잠시, 딸깍거리던 마우스를 멈춘다.


금새, 남자가 물건을 꺼내온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향해 미소짓는다.


"금형, 공작실 단조기에 물려만 놔."


여자가 급하게 고개를 돌린다.

남자가 무거운 금형을 대차에 실어서, 연구실을 나간다.


솔직히, 별 기대도 안했다.

너무나 바쁜데, 수업 까지 떠밀려 과제를 채점해야 한다.

별 수 없이, 학점을 빌미로 수업조교를 뽑았고,

그 학생에게 돈과 취업을 빌미로 잡무를 시켰다.


헌데, 기대 이상이다.

업무 효율은 물론이거니와, 생활이 훨씬 윤택해졌다. 

물의 온도도, 브랜드도 같은데, 남자가 타다주는 믹스커피는 유난히 고소하고 맛있다.

그 남자가 들어오기만 해도, 연구실에 달큰한 향기가 나는 듯 하다.


그래… 남자가 환기를 잘 시켜서 꿉꿉한 냄새가 빠진 것 일 수도 있다.

교수씩이나 되서 학생한테 응큼한 생각을 품는게 잘못되었다는 걸 머릿속으론 알고 있다.


애들도 아니고, 꼴랑 두달여 본 이성을 의식하는게 젊은애들이 말하던 금사빠란 생각도 든다.


 돌이켜봐도, 이성과 접점은 무슨, 제대로 된 사회생활이라곤 없었다.


 여자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자녀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여자는 부모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


초등학교때 미적분을 깨우치고,

중학교 부터 수능을 준비하고,

과학고에 입학해 월반을 하고

남들보다 몇 년 일찍 치룬 수학능력검정시험에서 상위 소수점자리대를 기록했다.


여자의 부모는 내심 서울에 위치한 의과대학에 진학하길 바랬다.

하지만 여자는, 의사로서의 기본 소양인 사회성이 모자르다. 

사람과 대화를 힘들어하고, 대신 종이 위에 쓰여진 문제를 푸는걸 선호했다.


여자의 바램에 따라, 대전에 위치한 과학기술원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흥미와 적성에 맞는걸 찾아냈다.


공작기계들은, 사람과 달랐다.

투입물을 넣고, 수치를 입력하면, 그대로 출력물을 뱉어낸다.

오차나 불량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예상한 범위 이내다. 

어쩌다 예상치 못한 크랙이 발생해도, 해결하는 즐거움이 있다.

 

여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은 공대에, 기계공학과에서 여자는 두각을 나타냈다.


학부생활 내내 CNC 앞에서 물건을 깎아내고 도면을 만지작거렸다. 

 

정밀가공과 자동화를 연구하는 연구실에 들어가,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았다.


박사 논문을 낼 쯤엔, 여자 명의로 된 특허가 나왔다.

당시 지도교수는, 별다른 첨삭없이 여자의 논문을 통과시켰다.


 남들은 대학에 졸업하고 첫 직장을 구할 나이에

 한 대학에서 전용 연구실과 전임교원 자리를 제안했다.


여자는 첫 직장으로 대학 교수의 직함을 달았다.


세간의 평가는 어땠을까?

남의 논문을 배껴쓰는 이름만 천재소년이 아닌

진짜 숨은 천재?

재야의 고수?


아니.


'미친 년'


이다.


여자가 박사논문이 통과될 때 까지

제대로 된 논문도 제출하지 못한 연구실 선배들은


여자를 미친 년이라 불렀다.


카이스트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들도, 천재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는데,


여자는 그들과 궤를 달리하는 진짜 천재였다.

부러움과 멸시와 경멸을 모두 담아서, 여자를 미친 년이라 수근거린다.


여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차를 예상할 수 도 없고

오류를 수정할 수 도 없는

사람과 상대하는 일 따윈

하찮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사람을 상대하는 일 따윈

하찮은 것이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여자는 혼잣말을 하며, 남은 커피를 들이마신다.


도면이 담긴 태블릿을 챙기고

공작실로 향한다.


—-


"야, 또 노가다 뛰냐?"


"노가다가 아니거든? 이것도 엄연한 연구라고"


남자가, 대차를 끌고 공작실로 향하다 친구들과 마주친다.


"기름 범벅으로 쇠나 깎는게 연구면

 공단 근로자들도 다 연구원이겠다 야"


친구들이, 취업을 빌미로 연구실에 붙잡혀버린 불쌍한 남자를 놀린다.


"뭐래, 그런 일이랑 차원이 다르거든?"


"나는 사무직 체질이라서 잘 모르겠다. 

너도 나랑 취업스터디 하자니까?"


티격태격 친구들과 입씨름을 한다.

확실히, 남자의 일은 대학의 연구실에서 할 법한 모양새는 아니다.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정리하고, 버리고

공작실에서 단조기나 절삭기계를 준비한다.

공고를 나온 고졸 근로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단순 노무다.

 

커피나 타는 것이, 남자의 특별한 업무다.


"아직, 금형 삽입 안됐나?"

불쑥, 여자가 남자와 친구들 뒤편에 나타난다.



"아…안녕하세요.."

남자의 친구들이,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멀어져간다.

혹여나 자신들이 하던 뒷담화가, 여자에게 들렸을까 황급히 도망간다.


"아직이요, 얼른 가서 할게요"

남자가 대차를 끌고 공작실로 뛰어가려 한다.


"괜찮아. 괜찮아. 같이가"

여자가 남자의 옷깃 끝자락을 부여잡는다.


"네"


"학생, 지금 몇 학년이지?"


"4학년입니다. 1학기"


"학부 졸업하면, 바로 취업할건가?"


"그…렇죠?"

이야기가, 트위터에서 볼법한 순서를 밟는다.

분명 추천서와 취업을 약속한건, 교수가 먼저다.


"요즘에, 취업난이 심하다고 하던데"


"아..아뇨 괜찮습니다. 잘 되겠죠 뭐."


"어디 가고 싶은 회사라도 있나?”


"글쎄요… 야근 적고, 돈 잘주는 회사죠"


"내가, 학생 잘되라고 하는 소린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네…에?"


"석사과정, 한 번 해보는게 어때?

 2년정도만 들이면, 석사까진 쉽게 수료할 수 있어,


경력을 인정받기도 하고.

남들보다 좋은 학력으로,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지.

 

 지도교수인 내가 전담으로 잘 봐줄테니까. 어때?"


 여자가, 평생에 걸쳐서 가장 긴 어절을 내뱉는다.


 "그…. 생각 좀 해볼게요"

남자가 도망치듯, 부리나케 공작실을 열고, 프레스 머신에 금형을 설치한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교수님, 저번에 그 기업에서 또 의뢰 들어왔습니다."


 "바쁘니까, 좀 기다리라 그래, 아니면 네가 해볼래?"


 "아뇨… 저도 지금 논문 써야하고, 저번에 주신 실험도 해봐야 합니다"


 3년 뒤,  남자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남자의 주변엔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도 있지만.

 여러번 미끄러지고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며 노량진으로 도망간 친구도 있다.


남자도 석사 과정 대신, 두 세군데 이력서를 제출해 보았지만, 보기좋게 떨어졌다.


취준생이라면 이력서를 수십장 쓰는 건 기본이지만,

남들과 달리 남자에겐 안정된 도피처가 있었다.


남자는 4학년 2학기가 끝나기 전에

여자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업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학부생때 하던 잡무들에, 추가로 여자의 연구에 직접 참여한다.


이따금씩, 연구실 유지비를 벌기 위해 여자가 따오는 의뢰들을 해결한다.


트위터에서 보던 대학원생 드립들이 이해가 갈 정도로, 바쁜 삶을 보낸다.


연구실의 청소를 하고

도면과 금형과 사출물들을 정리하고

기업에서 들어온 의뢰와 연구들을 정리하고

스케줄을 확인한다.


여자가 책상에서 도면과 씨름을 하고 있으면

옆에서 비슷한 모양새로 남자도 도면과 눈싸움을 벌인다.


“교수님, 저희도 조교 새로 뽑으면 안되나요?”

남자가, 교수에게 제안을 건넨다.


“저번에 뽑았잖아”

남자가 타온 커피를 마시며, 여자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저번 주에 도망갔잖아요. 교수님이 괴롭혀서”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나 연구생 시절엔 더 심했거든”


남자의 일이, 줄어들지 않는다.

남자의 제안대로, 대학원생을 몇명 모집해 보았다.


과 후배들 중 몇명이, 타 연구소보다 월등히 좋은 조건에 이끌려

남자의 밑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채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간다.


일이 힘들어서?

어차피 다른 연구실도, 일이 힘든건 매한가지다.

근로 시간이 길어서 그렇지, 출퇴근시간이 딱 정해져 있는 여자의 연구실은

오히려 생활여건상 좋은 축에 속한다.


지도교수인 여자가 갑질을 부려서?

어차피, 연구실 청소부터 여자의 커피심부름은 남자가 전담한다.

어느 서류가 어디에 들어가야하는지

어느 금형이 어느 기업의 의뢰물인지 아는 건 남자뿐이다

지도교수가 대학원생과 맞부딫치는건, 연구 이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급여가 적어서?

최저시급의 절반도 못미치고

국가연구지원금을 교수가 착복하는 타 대학원에 비하면

여자의 연구실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비전이 보이지 않아서?

허구헌날 산학협력단을 통해 밀려드는 기업의 의뢰를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오기나 할까?


일이

지도교수인 여자와,

유일한 연구 조교인 남자가 하는 일이


너무나도 볼품없다.

모양새가 떨어진다.


 교수 나이보다 오래된 CNC 앞에서

보안경과 안전화를 신고

작업공구를 뺐다 넣었다 한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귀마개가 필수인 프레스 머신 앞에서

십몇키로나 나가는 금형을 결착했다 풀었다 반복한다.


플라스틱 사출물엔 이형제를 뿌리고

금속 사출물엔 녹이 슬지 않도록 방청유를 뿌린다.


흰색 가운을 입고, 컴퓨터나 원심분리기 앞에서 

데이터와 씨름하는 우아한 대학원생이 아니라.


공장 근로자가 남부럽지 않도록

작업복과 보안경을 항상 끼고

손톱 밑에 검은 기름때가 빠지지 않는다.


‘이런 일따윈 굴러다니는 중소기업에만 들어가도 할 수 있다’


며 대학원생들이 도망간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남자도 자신이 작업자인지 연구원인지 헷갈릴때가 많다.



“하아… 교수님, 저 박사 논문은 어떻게 합니까?”


“어…. 나중에 봐줄께 나중에…”


“그 대사, 저번주에도 하셨거든요?”


“아 주제 많잖아, CNC 컨트롤러 하던가”


“제가 그걸 어떻게 혼자 합니까?, 그거 할 줄 알면 차라리 회사를 차렸지”


“나 때는 그런거 다 혼자서…”


“또또또 그말씀 하신다.”


“아 몰라, 투입/사출 자동화의 최적화 하던가, 

 AI랑 접목을 시키던가 

 니 알아서 해와”  


서로 모니터에 눈을 떼지 않으며 티격태격한다.

남자는 왜 자신이 박사논문을 고민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석사 수료를 마치고, 취업시장에 다시 도전했지만

4~5번째 이력서도 여지없이 낙방한다.


으례 그렇듯

취준생이면 수십장의 이력서를 써보기도 하지만


남자에겐, 바로 옆에 간편하고 안정적인 도피처가 있는 것이 문제다.

여자는, 진로를 고민하는 남자에게 달콤한 제안을 한다.


‘박사학위, 준비해볼래? 

 혹시 알아?  대기업 부설 연구소에서 입사제의가 들어올지”


정밀가공분야는 일본의 화낙이 제일로 친다.

그 뒤를 독일의 지멘스나, 미국의 하스가 뒤따른다.


여기서 생산하는 대부분의 정밀가공기계는,

스마트폰으로 유명한 애플이 압도적인 자금력을 내세워 전량 쓸어간다.


하지만, 자동차, 선박, 컴퓨터, 군수품 등등등, 정밀가공이 필요한 분야는 차고 넘친다.

그래서 각 국가마다. CNC 컨트롤러를 자체생산 하기 위해 노력한다.


대한민국에선 그런 기업이 현대위아, S&T 중공업이다.


굳이 지멘스나 화낙의 한국지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정도 대기업의 연구원으로 입사하면

억대 연봉을 초봉으로 받으며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다.


아무리 4차산업혁명이 다가온다 한들

대한민국엔, 산업의 70%가 제조업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찾아볼게요”


박사과정은, 짧아야 4~5년이다.

이제 1년차가 갓 넘은 남자가 벌써부터 박사논문을 걱정하긴 이르다.


지금은 공부를…

아니, 밀려드는 연구 업무를 처리 할 때다.


“아…교수님?”


“왜 또 불러? 바빠 죽겠는데”


여자가, 짜증을 내는 와중에도

남자가 타온 커피를 홀짝인다.



“조금 있다가 기업 미팅 있는데요?”

남자의 컴퓨터 오른쪽 하단 알림창이, 붉은색으로 깜빡거린다.


“몰라몰라. 나 안가, 알아서 하라 그래”


“당일날 약속을 취소하면 어떡합니까?”


“아 모른다구. 그러면 네가 가던가. 

 난 절대 안 갈 거야”


여자가 리클라이닝 의자를 한껏 뒤로 젖혀서

기지개를 쭉 편다.

여자도 겨우 삼십대 중반에 들어섰다.

햇빛을 보지 않아서 피부가 하얗기만 하다.

쭉 편 가슴에 튀어나온 두 봉우리가 남자의 동공에 지진을 일으킨다.


“저… 그럼. 제가 갑니다?”

남자는 눈길을 돌린다.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래, 가서 원하는게 뭔지 적어오기만 해.

 사출물 무게가 kg 이상이면, 돌려보내고.

 무거운거 들기 싫어”

여자는 다시 새우등을 만들고, 모니터를 바라본다.


“어차피 제가 들잖아요”


“보기만 해도 무겁고 답답하단 말야”

 

“에휴, 갔다 올게요. 머그잔은 싱크대에만 넣어주세요. 어지르지 마시구요”


남자는 가방을 매고, 연구실을 나선다.

여자가 모니터 너머로, 남자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


“저…박교수님은…?”


“오늘 갑작스런 일정이 있으셔서, 피치 못하게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지긋한 나이의 남성이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교수님에게 제자가 있는줄은 몰랐는데….이거 원.”

중소기업의 공장장을 맡고 있는 남성이 고개를 흔든다.


“연구실 소속 대학원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교수님께 말좀 잘 전해주게나.”

공장장은 남자가 영 못마땅한듯, 믿지 않는다.


가지고온 자료를 남자앞에서 펼치고

하나씩,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으이? 자네가 직접 선반도 조작하나?”

공장장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본다.

못믿겠다는 듯, 질문을 건넨다.


“그럼요. 시제품 찍어보려면 직접 해야죠”

폼으로 금형을 나르고, CNC를 다루는게 아니다.


“생산라인 구성하고, 최적화도 할 줄 알고?”


“완벽하진 않지만, 교수님이 하시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방금까지 하다 온 연구가,  한정된 공장부지에 자동화 생산라인을 구성하는 것이다.

로봇과 로더를 사용해 공작물을 투입시키고

컨베이어 벨트로 각 기계를 잇는다.


“그러면…생산도면도 그릴 줄 알고?”

하나의 최종 생산품이 나오기 위해선

여러 공정을 거친다.


그리고 각 공정마다, 가공 목표가 되는 도면이 따로따로 존재한다.

그것이 생산도면이다.


“알…죠?. 그걸 해야 라인을 짜니까요”


“허허.. 이거 참”


CNC 선반, 정밀기계를 조작하는건, 전담 조작원이 따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조작원이 가공을 할 수 있도록 도면을 만드는건, 설계부서가 한다.

그리고 설계부서가 만든 도면대로 생산할 수 있도록

공장 전체의 생산 계획을 수립하고, 컨베이어 벨트의 라인을 구성하는걸 전담하는,

별도의 부서가 기업마다 여러 이름으로 존재한다.


애초에, 이런 ‘솔루션’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도 있다.

여자가 연구비를 벌기 위해 하는 일도, 이러한 기업 솔루션이다.


헌데

앞에 있는 이십대 후반즈음 되보이는 이 남자가


혼자서 선반 조작도 할 줄 알고

혼자서 공정별 도면도 그릴 줄 알고

혼자서 라인도 구성할 줄 알고

그리고 ‘그 교수’ 밑에서 일하느라 연줄도 있다?


공장장이, 흐르는 침을 꿀꺽 삼킨다.


아무리 자동화네 뭐네 떠들어대도

결국 기계는 사람이 있어야 돌아간다.


나이키의 수 만평 부지 신발공장이 단 한명의 사람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한 명의 사람이 없인, 거대한 공장은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


뻥좀 보태서, 기계만 몇대 붙여준다면, 이 남자는 걸어다니는 공장이 된다.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기업이 원하는 물건을

알아서 쑥쑥 뽑아내 줄 것이다.


“자네, 혹시 대학 교수를 하고싶나?”


“아뇨, 저도 언젠가 어디 취직해서 일해야죠.

 취업하기가 영 힘들다보니… 어쩌다 박사과정도 밟고 있네요”


“혹시, 우리랑 같이 일해 볼 생각 없나?”


“네?”


“우리도 요즘 영 일손이 딸려서 말이지. 젊은 녀석들은 중소기업이라고 올 생각을 안해.

 설령 채용한다 해도 금방 도망가기 바쁘지”


“저희도 그렇게 그만둔 대학원생이 있긴 합니다만…”

남자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자네가, 우리 회사에 딱 필요한 인재라서 그러네

 연봉은… 그래, 8천이면 되겠나? 경력이 있으니 직함은 과장으로 달아줌세”


“네에?!”

남자가, 연봉을 듣고서 깜짝 놀란다.

취업한지 2~3년차가 되어가는 친구들의 연봉이 채 4천만원을 넘지 못한다.


꼴랑 석사를 마친 척척석사에게 

과장 직함을 달아주고, 연 8천만원씩 통장에 꽂아준다?

이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쉽게 있을 리 없다.


“부족하면 말 하게, 내가 대표하고 담판을 짓고 와서라도 챙겨주도록 하지”

공장장이, 남자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넨다.

명함 좌측 하단엔, 1공장, 2공장, 3공장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말이 중소기업이지, 규모가 거대하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남자는 자료와 명함을 챙긴다.

어안이 벙벙하다.



—-----


“다녀왔습니다.”


“뭐래? 어디가 또 잘못이래?

 맨날 자기들이 틀려놓고선 왜 우리한테 난리야 정말”


아직,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지레짐작 여자가 짜증부터 낸다.

남자를 향해, 비어버린 커피 머그잔을 흔든다.


“저… 취업 제안 받았습니다.”

남자가 평소처럼 커피잔을 가져가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회사가? 웃겨 정말. 안그래도 사람 부족하다 그러더니, 너한테까지 그러니?”

여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모니터를 보며 손사래를 친다.



“허튼소리 하지 말고, 빨리 와서 남은 작업이나 해”

“저, 그 회사 들어가 보려구요”


남자와 여자의 대사가 겹친다.



“....뭐?”

드디어 모니터에서, 여자가 시선을 뗀다.

안경을 벗고, 남자를 바라본다.


“한 번, 면접이라도 봐보려구요”


“야. 석사씩이나 되서, 무슨 그런 쪼그만 회사를 들어가.

 부끄럽지도 않아?”


“경력직으로 채용한다네요. 과장으로”


“하. 중소기업이라고 직급체계가 엉망이구나,

 신입사원을 과장으로 앉히는데가 어디있어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 빨리 이리와서 앉아”


“연봉이… 8천이랍니다.”


“야. 박사님 소리 한번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척척석사로 끝낼꺼야?


뭐하러 그런 공장에, 기름냄새 맡아가며 고생하려고.

대기업 연구실에서 에어컨 바람 쐬면서, 흰색 가운도 입어봐야지

사원증도 목에 한번 매 보고.


나중에 내가 다 알아봐 준다니까?


 아직은 넌 부족해, 좀 더 공부해야지.”


“저… 교수님, 

 박사과정 마치면 제 나이 서른 다섯은 될겁니다.

 

걸어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그때 가서 억대 연봉을 받는다 한들… 지금이랑 크게 차이나지 않을 겁니다.

회사도 그만하면 건실하고.

하는 일도 지금이랑 크게 차이가 없고. 


이정도면 충분합니다.”


“내..내가 지금까지 너를 얼마나 챙겨줬는데….”


“....네?”

남자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내가! 얼마나 너한테 잘해줬는데, 지도교수를 이렇게 배신해?”


“교수님.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챙겨드리는건 제가 챙겨드렸죠


석사 논문도 제가 알아서 쓰고

첨삭은 하지도 않고 서명만 하지 않으셨습니까?


허구헌날 저보고 커피나 타와라

자료 정리해라

뭐 가져와라

뭐좀  깎아와라

가서 금형 날라라


학부생때 친구들이 저보고 그게 대학원이 맞냐고 놀립니다.

신입 연구원들 도망가는거 보고 뭐 느끼는거 없으십니까?


다른 연구실은 찾아보니

박사과정때 지도교수가 연구주제나 방향성정도는 같이 고민은 해준답니다.


제가 오늘도 여쭤봤잖습니까?

그 질문을 제가 오늘만 했습니까?


돌아온 대답이 뭡니까?

기업 미팅이나 대신 가라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교수님 말씀대로

제가 알아서 제 밥벌이 하겠다는 겁니다.


척척석사요?

네, 척척석사 하겠습니다.


세상에 척척석사보고 연봉 8천이나 꼽아준다는데, 누가 안갑니까?”


남자가, 참지 못하고 평소의 울분을 있는데로 토해낸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여자는 남자에게 매우 잘해준 편에 속했다.

타 연구실처럼 갑질도 없었고

가져온 논문에 온갖 트집을 잡아가며 미끄러뜨리지도 않았고

연구수당도 부족하지 않게 넉넉히 챙겨주었다.


하지만, 편해진 생활에 익숙해진건지.

남자가 옆에 있는게 너무나 당연해 진건지

여자는, 남자의 미래나 장래에 너무나 무관심했다.


“...”

여자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볼이,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린다.

눈물이 차오르는걸, 어금니를 깨물어 꾹 참아낸다.


교수 씩이나 되서, 제자의 폭언에 눈물이나 흘리는 머저리가 되긴 싫다.


“맡은 연구는, 메일로 송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남자가, 자신의 책상에 있는 컴퓨터를 째로 들어올린다.

전선과 데이터 케이블을 호기롭게 뽑아내고

본체 그대로 챙겨든다.


“거기서 한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평생 후회하게 해줄거야.”

결국, 여자의 볼에 눈물이 한방울 흘러내린다.


“...”

이번엔 남자가, 아무 말 없이 여자를 바라본다.


“지금 그대로 돌아와서, 하던 일 시작하면

그냥 넘어가 줄게.


8천만원? 하, 내가 받는 의뢰수당이나 연구비가 얼만지 알기나 해?

챙겨줄게. 네가 제안받은 연봉들, 내가 다 맞춰서 챙겨줄게.


하던 의뢰들 끝나는 대로

네 박사 논문부터 같이 생각해보자.


네가 쓴 석사논문이야, 당연히 읽어봤지

너무나 완벽해서, 맘에 들어서 서명한거야.


나 못믿어?

내가 일부러 말은 안했지만,

여기 최연소 전임교수야.

이 연구실하고, 다 낡아빠진 CNC가 있는 공작실도

나 혼자만을 위해 이 대학에서 제공해준거라고.


내가 대기업들 소개시켜준다는거, 허세고 거짓말인거 같아?

그 새끼들, 내 말 한마디면 벌벌 기어다녀.

작년 추석때 봤잖아, 여기저기서 선물세트 한아름 온거.


그거 다 네가 정리하느라 힘들었지?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봐.


앞으론 네 의견 최대한 반영해줄게

연구실 조교도 새로 뽑고,

네 장래에 대해서도 찬찬히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지금 그 본체 당장 내려놓고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흘러내리는 눈물이 한방울에서 두방울

두방울에서 네방울이 되고

이젠 끊임없이 줄줄 흘러내린다.


“...말씀은, 다 끝나셨습니까?”


남자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연구실의 문을 닫는다.



—----


남자가 여자의 곁에서 사라진지도,

남자가 여자의 곁에 있던 시간 만큼이나 흘렀다.


남자가 없어진 연구실은

다시 예전처럼 엉망이 되었을까?


남자가 없어져버린 여자도

다시 예전처럼 엉망인 생활을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남자가 있던 때 처럼

연구실은 언제나 깔끔하다


철제 수납장엔 새로 들어온 금형과 도면들이 일련번호를 따라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싱크대는 언제나 반짝반짝하고

서류더미들은 책장속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여자는 더이상 배달음식을 시켜먹지 않는다.

출근 전에 준비한 샐러드로 아침 식사를 하고

교내 식당에서 영양사가 준비한 식단을 점심으로 먹는다.


매일 아침, 5분의 시간을 할애해서

남자가 타던 브랜드로, 

믹스커피를 한 잔 만들어 마시는것이 습관이다.


그리고 언제나,

커피의 쓴맛에인상을 찌푸린다.


처음엔, 오기였다.

그깟 어린애, 연구실 조교 없어졌다고

질질짜는 모지리 교수가 되기 싫었다.


남자가 없어진 바로 그날, 

다 마셔버린 머그컵을 바로 정리하는 것 부터 시작했다.


청소도, 요리도, 세탁도,

정리도, 일정 조율도,


남자가 하던 일들은 여자가 직접 하나씩 해나간다.


남자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대학원생은 무슨, 조교도 하나 없는 연구실이지만

실적만큼은 교내 최상을 달린다.


산학협력단의 기업 미팅도, 미루지 않고 여자가 직접 나간다.


이번에도, 여자의 솔루션을 받은 기업에서 

접대차 식당을 예약했다고 한다.


시내에 위치한 파인다이닝…

한 끼에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레스토랑 개별실에

여자가 먼저 자리에 앉는다.


웨이터가, 여자가 홀로 앉은 식탁에 식사를  준비한다.


수프가 먼저 깔리고

전채요리가 뒤이어 나온다.


요리사가 무어라 설명을 하고.

추천하는 소스에 찍어, 음식을 하나씩 먹어본다.


메인디쉬가 나오기 직전,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던 기업의 직원들이

부리나케 달려온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탁하신 일을 준비하느라..”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앉으시죠”

여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맞은 편 자리로 그들을 안내한다.



“그.. 아닙니다. 부탁하신 물건이 바로 온다고 합니다.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머나, 벌써 끝내신 거에요?”


“교수님께서 부탁하신 일이니, 

만사를 제치고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부디. 이번에 잘 부탁드립니다.”

대기업의 로고가 박힌 사원증을 목에 맨 직원들이

연신 여자에게 굽신거린다.



“알겠습니다. 특허는 제가 잘 조정해드릴게요”


“그럼…들어가 보겠습니다.”


여자의 명의로 된 특허가 몇가지 존재한다.

여자는, 기업에 특허료를 받는 대신, 


한가지. 부탁을 했었다.


직원들이 떠나가고

메인디쉬가 주방장의 손에 들려 나온다.


고기의 원산지와

소스의 재료를 설명하고

먹는 방법에 대해서 요리사가 상세히 설명한다.


요리사의 안내에 따라 나이프로 고기를 자르고

포크로 집어 입으로 넣으려는 순간.


“교수님.”

4년만에 나타난 남자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다. 


“손님, 저희 식당은 사전에 예약된 손님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나가주시겠습…”

주방장이 다가오는 남자를 제지하려는데


“괜찮아요. 제 일행이에요.” 

 여자가, 그런 주방장을 뒤로 물린다.



“죄송합니다. 즐거운 식사 되십시요”

멋쩍은 주방장이, 남자의 요리를 챙기기 위해 주방으로 돌아간다.


여자는, 4년만에 나타난 남자에게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다.

천천히, 고급 식당의 정찬을 음미한다.


남자가 여자의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


“교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들어갔던 그 자그마한 기업은, 2년만에 부도가 났습니다.

약속했던 연봉은, 제대로 받지도 못했습니다.


교수님 말씀이 틀린 것 하나 없었습니다.


다시 다른곳에 취직하려 해도

이력서조차 받아주지 않습니다.


나이는 들어가는데, 석사 학력만 가지곤 어디도 절 채용해주지 않습니다.


작년에, 모은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와서 노가다도 못합니다. 요즘 인력시장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 할줄 아는 거, 이것 밖에 없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우물우물, 한우 스테이크를 입으로 밀어넣고 맛을 즐긴다.


“네가 말하는 그 자존심,

난 4년 전에, 네 앞에서 내려놨었어


내가, 평생 후회할거라고 말 했지?”


이내 여자는 전화기를 들어서

전화를 건다.


“아, 변리사님. 잘 지내셨어요?

저번에 제가 가진 그 특허로, 조막만한 공장 하나 박살내느라 고생하셨어요.


부탁하나만 더 드리려구요.


저번에 말했던 그 학생 있죠?

앞으로, 그 학생을 채용하는 기업은, 특허료를 3배로 받겠다고 해주세요.


아니다, 그 학생이 이력서만 내도, 특허료를 3배로 받는다고.


국내에 있는 모든 제조업체에다가. 전부 뿌려주세요.”


어쩌면, 허세가 가득한 대사이지만

기업들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다. 


여자가 가지고 있는, 박사학위보다 먼저 취득한 그 특허는,

CNC 컨트롤러의 국산화에 필요한 핵심 기술이다.

정부에서 직접 나서서,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한 특허다.


당시 여자의 지도교수는, 

기업들의 압박에 못이겨, 여자의 박사학위를 바로 통과시켜야 했다.


수많은 제조업체들이 

여자의 특허를 사용하기위해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모든 기업이 일본 화낙의 수십억짜리 정밀가공장비를 

애플마냥 사제낄 수 있는게 아니다.


귀찮은 일이 질색인 여자는 변리사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대신, 자신의 흥미에 맞는 기술 개발이나, 공정 최적화를 하기 위해서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그 모습이, 8년 전, 엉망의 연구실에서 도면과 씨름하던 여자의 모습이다.


가끔, 여자의 기술을 활용한 가공장비를 사용하는 기업들이

여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의뢰를 받은 여자는 기업에 솔루션을 제공한다.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싸구려 장비를 최대한 활용해서. 

원하는 사출물이 나올 수 있도록

공정을 짜고, 도면을 그리고, 금형을 설계해준다.


굳이 몇십억짜리 일본제, 독일제 5축 CNC, MCT를 들이지 않고도

가지고 있는 저렴한 장비를 얼기설기 이어서 제품을 양산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러면 기업들은, 여자에게 수천만원의 수수료를 건네준다.

기업의 입장에선 충분히 남는 장사다.

솔루션을 받는 기업의 입장에선 여자는 하나님이자 신이나 다름 없다.


남자가 사라진 4년동안

여자는 그간 건들지 않았던 수많은 특허를 추가로 등록시켰다.


자동화, 밀링머신, 컨트롤러, 오차보정, 투입과 사출, 공정 최적화 등등등.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제,

물건을 만들기 위해선 가장 먼저 여자의 변리사를 만나야 한다.


농기구인 수제 호미를 미국으로 수출하는 영주대장간이나

여자와 상관없이 장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다니던 중소기업이

어떻게 부도가 나게 되었는지 이제서야 알게 된다.


“그 공장장님, 자녀 학비를 벌기 위해서… 일용직 다닙니다.”


“어머? 잘됐네, 그 잘난 공장장님한테 일좀 소개시켜달라고 해봐, 그 때처럼”


여자는 자신의 앞에서 무릎꿇은 남자에게 절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남자가 다니던 중소기업엔

한 집안의 가장도 있었고

군대간 아들의 어머니도

갓난쟁이 딸아이의 아버지도

결혼한지 얼마 안된 새신랑도

곧 출산휴가를 사용할 임산부도

치매가 든 연로한 노인을 돌보는 자녀도 일을 하고 있었다.


모두, 3년전에 생으로 길바닥에 나앉았다.


“...제발….제가 잘못했습니다.

시키시는건 뭐든지 할게요.

먹고 살 방법이 없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4년 전 여자처럼

눈물을 뚝뚝 흘린다.


“정말이지?”

그제서야 여자가, 포크를 내려놓고 남자를 바라본다.



“네..네! 저 박사학위 못따도 됩니다. 평생 연구실에서만 쳐박혀 있어도 괜찮습니다!”


남자가, 무릎으로 걸음을 걸으며 여자에게 다가간다.



여자는 잠시 골몰한다.


“그럼. 커피 좀 타와봐”


여자는, 턱을 괴고선 남자를 바라본다.



“...네?”


“커피좀 타와보라니까. 일 하기 싫어?”


“아..아닙니다!”


남자는 부리나케 가게 밖을 향해 달려나간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해 달려가서

맥심 한박스와 종이컵을 집어든다.


계산대에 물건을 던지고, 결제를 하기위해 카드를 내민다.


“손님, 잔액이… 부족한데요?”

편의점 직원의 카드를 돌려준다.

남자는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지갑을 보아도 현찰이 없다.


이내 남자는, 핸드폰과 지갑을 계산대에 올려둔채


“이걸로 대신할께요.”


“손….님? 야! 어디가!! 도둑이야!!”

커피믹스와 종이컵을 들고 가게를 달려나온다.


다시 식당으로 들어와서

종이컵을 뜯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담는다.


커피스틱을 뜯어서 가루를 모두 붓는다.

다른 커피스틱 하나를 더 뜯어, 프림과 설탕부분만 더 부어내는게

남자만의 레시피다.


커피스틱 봉지로 종이컵을 휘휘 젓고선

한달음에 여자에게 달려간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10분만에 돌아온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린다.

식당 입구에선 주방장과 편의점 직원이 실랑이를 벌인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여자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신다.


“음. 역시, 

커피는 네가 타준게 참 맛있단 말야.”


커피가 달콤한 이유는,

추가된 설탕이나 프림에만 있지 않다.


여자는 아수라장 속에서

찬찬히 커피를 음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