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가 있었다.

검 하나만으로 제국 군에 입성하고, 혁혁한 공을 세워 그 명성을 후세에까지 알릴 위인이 되겠다. 그래, 마치 마왕을 토벌한 ‘용사’와도 같은 검사가 되고 싶다는 치기 어린 목표가 있었다.


마왕을 토벌한 뒤 제국을 떠나, 홀연히 사라졌다는 그의 삶을 동경했다.


평출로는 정말 턱도 없는 꿈.

사실 꿈조차 아닌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나의 목표는 터무니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공상 같은 꿈에 단단히 휩쓸려버렸다.


검을 휘둘렀다.

노력뿐이었다. 검술 아카데미의 의무로 진학해야 하는 귀족도, 하물며 아카데미에 제 자식을 꽂아 넣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되는 상인의 아들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노력밖엔 없었다.


장학생이 되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을 위한 첫 번째 목표였다.


노력은 결과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수련의 성과인지 운이 좋았던 것인진 모르겠지만, 결국 제국 검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번 기수 선발 장학생 : ‘에반 크리브너스’]


입학시험에서 한 교수님이 이례 없는 인재라고 말하며 만점을 준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희극이었다.

더할 나위가 없을 만큼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언젠가 끝난다.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입학한 지 고작 며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씨발 버러지 같은 평민 새끼가, 지금 나한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있네. 그냥 장학생이라고 귀족이 만만하게 보이냐?”


현실은 용사가 등장하는 동화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에 깊게 뿌리 내려온 계급은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마음속 불타던 열정은 이미 식었고, 목표 따윈 망각한 채로 하루를 버티길 급급했다.


“오늘 모의전에서 자연스럽게 패배해라. 그렇게 안 하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아, 또 난 져야만 하는구나.

본 실력을 발휘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저놈에게. 단지, 상대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패배해야 하다니. 


불합리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무엇도 없다.


모의전에서 놈에게 패배한 척 무력하게 검을 떨어트린 나는 곧바로 누군가의 호출을 받고 교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입학시험 당시 나를 극찬한 ‘레이첼’ 교수가 무척이나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앉아있었다. 긴 붉은 머리에 고혹적인 새빨간 안광이 번뜩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곤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이야기했다.

그저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나를 신뢰하는 이를 배신했다는 그 사실이 괴로웠다. 


그러자, 그녀는 냉담한 말투로 입을 열곤 나를 응시했다.


“무엇이 죄송한지 말해보세요.”

“저를 믿고 장학생으로 뽑아주셨는데, 매번 패배하여 실망스러운 결과만 안겨드리게 되어 교수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하아….”


그러자 레이첼 교수는 앞머리를 반쯤 뒤로 넘기며 크게 한숨을 내쉬곤 턱을 괸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잘 알고 있네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화난 건 단지 ‘패배’해서가 아닌데요.”

“교수님 그럼 어떤….”

“에반, 왜 대전 상대에게 고의로 패배했죠?”


교수의 싸늘한 표정에 등골이 오싹하다.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기 위해 갖은 변명을 둘러대 보았지만, 그녀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탄식하며, 조금만 높은 벽이 있더라도 오르지 못한다고 합리화를 하는 인간들. 에반,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걸까요?”


날카로운 지적과 사실들의 나열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분했다. 위로가 아닌 비수를 던지는 교수님이, 아니 사실 모든 걸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했다.


한심한 나를 받아들이기 싫어 나온 객기였을까.


“저도 이기고 싶었어요. 교수님에게 떳떳하게 자랑하고 싶을 그런 경기를 만들고 싶었다고요. 그런데요. 이 계급 때문에 도저히 안되네요? 말해주세요. 레이첼 교수님 평민인 제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냐구요.”


속에 담겨있는 울분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그러자, 레이첼 교수는 울먹이는 나의 얼굴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것도 잠시.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함에 절로 긴장이 풀렸다.


“나는 에반 군이 행복했으면 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레이첼 교수님.”

“걱정 말아요. 다 제가 해결할 테니까. 에반 군은 금일 수업은 조퇴하고 기숙사에서 쉬다 오도록 하세요.”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기숙사 방으로 돌아간 뒤 침대에 누웠다. 아직 잘 시간은 한참 남았을 텐데도, 이상하리만치 두 눈꺼풀이 무거웠다.


기묘한 노곤함이 몰려옴과 동시에 나는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다음날이 되어있었다.

또다시 지독한 날들이 시작되겠지. 처진 기분으로 돌아온 아카데미는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지, 지금까지 일들을 모두 사과할게!”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더 이상 안건들일 테니까. 제발 나하고 관여하지 말아줘…. 부탁이니까….”


매일같이 날 경멸하고 깔보던 귀족 자제들이 하나같이 겁에 질린 채 나를 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그것이 곧 레이첼 교수가 나를 위해 손을 써줬다는 것임을 깨닫곤 안심할 수 있었다. 다시금 생에 활기가 돌아왔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나는 마침내 제 실력을 펼칠 수 있었고, 지속된 패배로 아카데미 하위권에 머물렀던 랭킹도 단숨에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왔다.


“저기, 이번 휴일에 시간 되면 나랑….”


시리던 겨울이 지나 자연스럽게 봄이 찾아왔고, 항상 어두울 것만 같았던 아카데미 생활 역시 밝아졌다.


모든 것은 레이첼 교수님의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레이첼 교수님. 제가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괜찮아요. 전 제가 한 번 마음에 들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거든요. 에반 군.”

“덕분에 성적도 상위권이고, 그…. 부끄럽지만, 연인도 생겼습니다. 모두 교수님 덕분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교수님의 집무실로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한 그 순간.


교수님의 얼굴이 잠시 차갑게 굳은 듯 보였다.


“교수님 혹시 제가 실례되는 행동이라도…?”

“…아니에요. 다 에반 군이 노력한 결과입니다. 전 그저 방해되는 요소를 치운 것뿐이니까요.”

“다시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교수님.”

“그래요. 아직 졸업까지 2년이나 남았으니 더 증진할 수 있도록 해요.”


모든 게 잘 풀리는 듯 보였다.


“미, 미안해! 나 도저히 널 만날 자신이 없어! …더 이상 찾지 말아 줘….”


여자친구가 그런 말을 남긴 직후 퇴학해 버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실연에 큰 충격을 받은 나는 한참을 헤어 나오지 못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러는 것일까. 


자책과 침통함이 몰려들었다.


문득, 그녀의 반응을 되뇌다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래, 반년 전 나를 괴롭히던 그 귀족 자제들과 동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나같이 겁에 질려 동공까지 떨려오는 이들.


참을 수 없는 기분에 그중 한 명에게 찾아가 빌었다.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고. 욕하고 때려도 좋으니 부디 사실을 이야기해 달라고.


그렇게 나의 귀로 들어온 얘기는 충격이라는 표현으로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사실이었다.


‘아닐 거야. 분명 저 미친놈의 착각이겠지.’라고 속으로 넘기는 것도, 극도로 내몰린 정신으론 버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르자, 결국 나는 레이첼 교수를 다시 찾았다.


“교수님….”

“에반 군! 어쩐 일인가요? 그렇게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선….”

“실례되는 말인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도저히 제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제 곁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좋은 의도이던, 나쁜 의도이건 간에 내 곁으로 다가오는 이들은 항상 겁에 질린 채 사라졌다. 두려웠다. 아무런 진상도 알지 못한 채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이.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지만, 내게 은사와도 같은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무척 쓰렸다.


“…역시 눈치챘군요.”


옅은 미소를 띠며 안경을 벗어 내려놓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맞아요. 에반 군. 제가 했습니다. 오히려 잘 된 일 아닌가요? 에반 군의 앞날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대신 치워준 것인데.”

“……그렇다면, 귀족 자제들에게 저를 차별하고 고립시키라 명한 것은 대체 뭘 위해서입니까.”

“에반 군은 총명하지만, 이런 부분에선 백치나 다름없군요.”


곧이어 레이첼 교수가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제가 전에 말했죠. 난 한 번 마음에 든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고작 그런 이유였습니까. 작은 당근을 줬다 더 거대한 채찍으로 절 아프게 한 이유가. 고작 제자에게 연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이성을 잃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것에서 비롯된 분노가 몸을 장악했다.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해서는 안 될 망언까지 그녀에게 고함치고 말았다.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마운 스승. 성심성의껏 존경해야 마땅할 스승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사심 따위 전혀 없었단 말입니다!”

“…에반 군.”

“그리고 그 생각은 변함없을 거고요. 전 퇴학하겠습니다. 꿈을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당신 같은 무서운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이 너무 역해서 참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뒤돌아서는 나의 몸이 마비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자기 할 말만 해버리고 가네. 분명 난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을 텐데.”


곧바로 해독 마법을 사용해 봤지만, 나로서는 범접할 수도 없이 고차원의 술식에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내가 비밀 하나 이야기해 줄까?”

“…….”

“전에 네가 그랬지. 넌 용사를 동경해 이 아카데미에 진학했다고.”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그녀는 셔츠를 걷어올려 자신의 팔 한쪽을 내비쳤다.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오직 용사에게만 나타난다는 용사의 각인. 그동안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은 책을 통해 읽어왔기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입학시험에서 용사를 동경해 그의 자취를 따라가고 싶다는 네게 흥미를 느꼈어.”


순간 입술에 따스한 감촉이 전해졌다.

억지로 혀가 밀려들어오는 느낌이 들며 정신이 아득해지길 잠시, 레이첼이 입술을 떼자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고작해야 평화의 지루함을 달래보고자 위장전입한 이곳에서 나는 너를 만나고 만 거야. 아주 철없고 치기만 가득 찬 애송이 하나를.”


그녀는 광기의 찬 눈빛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재능이 어느 정도 있는 아이를 키워보자는 느낌이었는데, 갈수록 뭔가 이상하더라고. 널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기묘한 감정이 생기는 게.”


레이첼은 나의 목을 끌어안으며 귀를 살짝 깨물었다. 그에 살짝 신음이 흘러나오자, 그녀는 “후훗.” 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이야기했다.


“평생을 마족과의 전투에만 바친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관심이 생겼단 말야. 너도 나를 동경하고 있었잖아. 그럼 피차 좋은 게 아니냐고.”


순간적인 정보들이 흘러들자 두려움에 가슴이 뛰었다.

내가 그토록 동경하고 꿈꾸던 용사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 여기서 네가 결정해. 나를 계속 따를지 여기서 나갈지.”


레이첼이 검 하나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여기서 그녀에게 검을 들이밀며 덤벼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검을 들지 않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벗어날 수 없다.


떨리는 손으로 쥐어잡은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항할 수 없다. 

일생을 존경하던 이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짓 따위는 내겐 힘겨움을 넘어서 불가능했다. 그만큼 용사란 인물은 내게 있어서 커다란 존재였다.


“그럴 줄 알았어. 나의 에반. 넌 영원히 내 곁에 있어야 해. 오직 나만이 네 꿈을 이뤄줄 수 있으니까.”


레이첼이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더 이상의 자의적인 판단 따위 무의미한 것을 알기에. 나는 그저 그녀에게 서서히 얽매이고 있었다.


결과는 과정과 원인이 필요하지만, 그 공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랑이 존재한다.


어떠한 사랑에는 과정은 모조리 생략한 채.


오롯이 그 원인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랑 또한 존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