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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되죠."



찰싹-!


여자가 제 뺨을 스스로 쳤다.


여자는 꼴에 지식인이었다.


치미는 분노를 속으로 삼켰다.



"제가 오해한 걸지도 모르니까요.
김 조교가 그럴 사람도 아니고."



여자의 추측은 옳았다.


두 건에 있어서 모두, 남자는 억울하였다.


결단코 바람 일체의 행위는 아니였다.


그럼에도 때로, 타자의 눈에 비치는 정경은 왜곡되곤 한다.


세상의 이치였다.


이미 의심과 시기심이 크게 싹을 틔운 채로, 여자가 물었다.



"전부 제 오해고 망상이에요. 그렇죠?"



물론, 폭면 중인 남자는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창으로 밤바람이 들었다.


차가운 바람에, 창가에 놔둔 화분의 꽃잎이 흔들렸다.



"그렇죠?"



연인의 마음은 위태로이 요동쳤다.


동요가 심해진 건 다시 며칠 뒤였다.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을 거 같아요 누나." 라며 남자가 말을 꺼냈다.



"외식을 하자고요?"



남자의 피와 살이 되는 음식은 손수 만들어나간다는, 이해불가능한 자부심이 여자에겐 있었다.


비위에 거슬려 되물었던 여자의 질문.


남자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여자의 빈정을 상하게 했다.



"아뇨, 약속이 있어요.

오늘은 따로따로 먹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약속이요?"


"식사 약속이요."



어질어질하여 여자가 물었다.



"여자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누나."


"여자에요?"


"그러니까, 조별 과제가 있는데-."


"여자에요?"


"누나도 대학 때 많이 해봤을 거 아니에요."


"여자군요?"



김 조교의 기분탓이었을까?


얀 교수의 상큼한 초목색 눈이 일순 다른 색으로 비쳐졌다.


곰팡이가 핀, 시들거리는 식물의 색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여자의 녹안은 그대로였다.


김 조교는 진실을 계속 하소연하였다.



"정말이라니까요."


"일전에 통화하던 그 여자에요?

'수아' 라는?"


"맞긴 한데-."



그날의 대화는 불만족스러운 형태로 막을 내렸다.



"누나 저 못 믿어요?"



남자의 윽박을, 여자는 뚫을 재주가 없었다.



"... 믿어요."



여자는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다.


그후로도 종종 두 남녀가 동일한 건으로 다툼을 벌였으나 결과는 같았다.



"꽤 예쁘던 걸요, 그 수아란 아이."


"그걸 누나가 어떻게 알아요?"


"그건 별로 안 중요해요.

왜 처음에 수아한테 이러쿵 저러쿵 잡담거리를 던진 거에요?

날씨가 어떻다는 둥."


"막 왔는데 어떻게 바로 일 얘기를 해요."


"일 아니잖아요."


"그 비슷한 거잖아요!

그리고, 그걸 누나가 어떻게 아냐니까요."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는데 들렸어요."


"절 따라온 거에요?

누나, 저 못 믿어요?"



남자가 곰곰이 돌이켜보니 옆자리에 앉았던 이는 얀 교수가 아녔다.



"심지어 지금 생각해보면 옆자리에 누나 아니었잖아요. 뭔 배불뚝이 아저씨였는데.

설마 마법으로 변장까지 한 거에요?"



상위 흑마법 중에선 타인의 모습을 흉내내는 마법이 있었다.


당연히 대학 교수인 얀 교수는 쓸 수 있는 마법이었다.


얀 교수는 시치미를 뗐다.



"잘못 기억하는 거겠죠. 그런 적 없어요."


"그럼 그렇다치더라도! 그 시간, 그 카페,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다고요?"


"네. 우연히요.

이제 다시 제 물음에 대답하세요.

왜 그 애한테 사준 거에요? 각자 계산 안하고?"


"누나 저 못 믿어요?!"


"아니, 못 믿는 건 아니... 지만요."


"믿으면 왜 그래요?

왜 따라오고 왜 엿듣고 왜 추궁하는 거에요.

자꾸 이럴 거에요?"


"...."



이런 식이었다.


입으론 더 뱉지 못해도 속으론 쌓이게 마련이었다.


과제를 위한 조가 해산하기까지 한동안, 식탁에는 여자의 불만이 오르곤 했다.


가령 음식의 간이 극단적이라던가.


조가 해산한 이후에도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얀 교수의 마음 한구석에서 불쾌한 곰팡이가 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수아' 와는 마주치지 않게 됐지만 세상의 절반은 여자였다.


협업을 한다치면 50%의 확률로 여자와 협업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 모든 때마다 언쟁이 있었다.


그리고 '리사' 에게서 문자가 왔다.



"누나, 저 천조국 가보려고 해요."


"천조국? 미국?"



'가보려고' 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말이었다.


해외로 나가본다는 건 더욱 큰 위협이었다.


여자는 위협에 떨었다.



"미국을 왜요?"



경위를 물으니 입을 닫았다.


깨작깨작.


남자가 밥알만 셌다.



"미국을 왜요?"



재차 물어도 똑같았다.



"저한테 질린 거에요?"



말싸움을 주고받았지만 아직 사랑이 식을 정도는 아니였다.


여자는 그리 판단하고 있었다.


그 점은 남자도 동감이었다.



"아니에요 그런 건."


"그럼 왜요."



다시 묵묵부답.


답답하여 여자가 캐물었다.



"미국 어디요? 언제 가요?

언제 돌아오는 건데요?"



침묵.


여자는 남자의 침묵이 미워졌다.



"왜 말을 안 해요."


"일전에 논문을 하나 읽었어요."


"논문을 읽어서 미국으로 갔단 거에요?"


"흑마법으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더라고요.

빛이나 신성 마법 같은."



여자는 여전히 매섭게 남자를 째려보았다.


가만,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얘기가 아니던가?



"그걸 보고 제 경험을 짧게 피력해서 보냈어요.

가능은 하겠지만 효율을 고려하면 실용성은 없을 거라고."


"그래서요."


"가능하면 자기 밑에서 공부해볼 생각이 없냐더군요.

자세히 얘기도 듣고 싶다고 하고."


"그래서 간단 거에요?

공부하러?"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누구에요? 당신을 꼬신 그 교수."


"꼬신 거 아니에요."


"비슷한 거잖아요. 누구에요."


"모르실 수도 있는데요."


"일단 이름이나 말해보세요."


"리사 바버. 사우스 플로리다 교수랬어요."


"그 젖 큰 년?!"



여자가 비명 질렀다.


여자답지 않은 상스러운 문장이었다.



"그 여자가 이젠 내 남자까지 빼앗아간다고요?

아직 학부도 안 마친 사람을?"


"아는 사이에요?"


"잘 알죠. 제가 그 여자 때문에 속이 얼마나 썩었는데.... 그 여자한테 간다고요?"



*



그후로 여자는 한바탕 바가지를 긁었다.


남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누나 몸 낫고 싶다면서요.

그 몸 싫다면서요.

그걸 바꾸려면 새로운 마법을 만들 수 밖에 없잖아요.

흑마법 계열로!

리사 교수한테 가서 배우게 해줘요."



이 언저리가 남자의 주된 주장이었다.


여자는 양보 없이 성낼 뿐이었다.



"전 제 소원보다 당신하고 함께 있는 게 더 중요해요.

우리끼리만 있고, 우리끼리만 밥 먹고, 우리끼리만 자고!

그 여자한테 갈 생각일랑은 꿈도 꾸지 마요."



그렇게 단호하던 얀 교수의 태도가 누그러든 건 출국 직전이 되어서였다.



"받으세요."



평소 술을 꺼리던 얀 교수가 답지않게 와인을 땄다.


술을 좋아하는 남자는 반겼다.



"웬일이에요? 누나."


"내일이 출국이잖아요."



얀 교수는 이래저래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잠시 동안이나마 헤어지는 마당이니 송별회를 해주는 거구나' 하고 남자는 생각했다.



"맛이 어때요?"


"맛있어요 누나. 오래 묵힌 술인가보죠?"


"이상한 맛은 안 느껴지죠?"


"왜요, 약이라도 탔어요?"



남자가 농담을 던졌다.


잔을 가볍게 흔들어보니 그런 느낌은 없었다.


맛도 딱 와인의 맛이지, 약을 탄 기운은 없었다.


얀 교수가 우습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럴 리가요."


"아무튼 맛있네요. 아무리 먹어도 안 질리겠는데요."


"정말이에요?"



얀 교수가 술병을 기울였다.


잔이 아니라, 자신의 몸 쪽으로.


벌건 와인이 얀 교수의 보들보들한 젊은 피부로 착륙하였다.


남자 이륙은 내일인데 벌써부터 착륙이 있었다.


얀 교수의 흰 살갗의 요철을 따라, 와인이 이리저리 고혹적인 지형을 형성하였다.


여자가 팔을 벌려 남자를 유혹했다.



"이래도? 안 질리겠어요?"


"... 네."



다소 놀란 기색은 있었지만 어쨌건 남자도 받아들였다.


그날 얀 교수의 몸에선 20대 초반 같은 젊음과 숙성된 와인의 향기가 잘 아우러졌다.



"저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혓바닥을 놀리며 남자가 투덜거렸다.


얀 교수는 후후 웃을 뿐이었다.


남자는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기상하였다.


남자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숙면 중인 여자를 빤히 보았다.


당분간은 이 얼굴을 보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리고 이변을 깨달았다.



"아, 아으윽...."



남자가 대문을 나서려 하자 손에 통증이 엄습해왔다.


황급히 문고리를 놓고 살펴보니 손가락이 썩어있었다.


눈꼽만큼 열린 대문이 끼이익- 하는 불협화음을 낸다.



"설마 20년 전 마법의 부작용이...."



흑마법에 부작용은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스무 해나 지나서야 부작용이 온다는 건 넌센스였다.


누군가가 남자의 답안을 점수 매겼다.



"그건 아닐 거에요."



돌아보니 방금까지 잠을 자던 여자였다.



"그게 아니면 어떤-."


"제가 그랬으니까요."



이번 고지는 남자의 예상 밖이었다.


남자가 "네? 누나가?" 하며 되물었다.



"못 믿겠으면 문 밖으로 나가봐요."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남자가 발을 내밀었다.


신중히 내민 발은 신발 끝부터 부패해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재빨리 뒤로 빠졌지만 이미 발가락 일부가 썩어버린 상태였다.


남자의 낯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봤죠?"


"그러면 이게, 이걸, 누나가...."


"죽을 때까지 집 밖으로 못 나갈 거에요."



흑마법에 의한 저주였다.


'죽을 때까지'.


남자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면 리사 교수가 말했던 건은요.

오늘 이륙해야 하는데!"


"이륙하지 말라고 건 저주에요."


"대체 왜 그러는 거에요 누나!

요즘 이상해요, 알아요?"


"맞아요. 저 요즘 이상해요."



"근데요." 하며 얀 교수가 말을 덧붙였다.



"왜 이상한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이이익...!"



남자가 품에서 펜을 꺼냈다.


펜 끝을 교수에게 겨눴다.


하나 교수가 더 빨랐다.



"로 세귀레 이데센."



서걱하는 소리가 집안을 스쳤다.


남자의 펜이 두동강 나 바닥을 뒹굴었다.


남자의 팔에 핏방울이 맺혔다.



"펜 없인 마법 못 쓰는 거 알아요."



부채질하는 여자를, 남자가 노려보았다.



"제가 많이 참았잖아요.

다른 여자랑 같이 살았다고 했을 때도 참았어요.

다른 여자랑 같이 밥을 먹었다고 했을 때도 참았어요.

제가 충분히 사랑해주고 충분히 이해해주잖아요.

그런데 다른 여자한테 가겠다고요?"


"그렇게 곡해하지 마요."


"그냥 슬슬 받아들이면 안 돼요?

당신은 김 조교에요. 김 조교.

나만의 김 조교."



그 말에 남자가 주먹을 쥐고 떨었다.



"마법사한테 맨손으로 덤비시려고요?"



남자의 주먹에는 분노도 섞여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불안도 내제되어 있었다.


어딘가 일이 위험해지고 있다는 불안.


어딘지 모를 나락에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불안.


남자의 육감엔 잘못된 구석이 있었다.


남자는 위험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다.



"덤비는 건 좋지만 잘 생각해봐요, 자기.

내가 토라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



얀 교수의 충고에 불복하여, 김 조교는 이틀밤낮 동안 덤볐다.


덤비고, 덤빈 후에야, 비로소 복종하였다.



"이제 포기하는 건가요? 다행이네요.

거꾸로 매달아놓는 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얀 교수가 김 조교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공중에 두둥실 떠있던 김 조교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목재 바닥에선 먼지의 씁쓸한 맛과 김 조교 자신의 피맛이 났다.


김 조교는 그렇게, 쓰고 아픈 착륙을 하였다.



"더는 안 도망갈 거죠?"

"리사 교수한텐... 가지 않을게요."



허기와 통증과, 피로와 절망에 굴종한 김 조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히, 빠른 속도로.



"그 정도론 부족해요.
세상엔 우리를 떼어놓을 게 너무 많다고요.
아무 곳도 가지 말고 여기만 있어요."

"예...."


지치고 메마른 목소리를 쥐어짜 김 조교가 답했다.


"하긴, 갈래도 못 가겠죠.

잘 됐어요. 저랑 우리 집에서 계속 사는 거에요.

제가 해준 밥 먹고, 저랑 같은 침대에서 자고, 저랑 같이 씻고.

단 둘이서. 우리끼리만."


"네... 누나."



돌파 불가능의 시련을 앞에 두고 김 조교의 눈은 기어이 투지를 꺾었다.


생기를 잃은, 말라죽은 꽃 같은 을씨년스러운 눈.


살아있는 망자는 돌연 떠오른 바가 있어 창가를 보았다.


창가에는 김 조교가 선물했던 화분이 있었다.


화분의 꽃은, 한창 때의 젊은 활기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꽃에게 남은 것은 곰팡이가 펴서 죽어가는 모습 뿐이었다.


자랑스럽던 녹색은, 퀴퀴한 미생물의 색으로 변질된지 오래였다.


"닮았네.... 닮았어."

"뭐라고 했어요?"

"사랑, 한다고요."

"아이, 좋아라! 오늘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아무거나...."


여자는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를 열었다.

잊을 뻔 했다는 듯, 쭈글쭈글하게 말라버린 입술로 김 조교가 덧붙였다.


 "초록색... 풀떼기만 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