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은 허상으로 여길 때 비로소 허상이 된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은사님께 항상 들었던 이야기이다.

자, 한번 생각을 해보자.
네 등 뒤에 귀신이나 살인마 혹은 그것보다 더욱 두렵고 끔찍한 무언가가 있다고.
만약 네 등 뒤의 무엇인가를 실제로 인지하거나 믿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갑자기 등이 오싹해지고 몸이 굳을 것이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겁에 질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 주저앉는 이들도 있겠지.
진실하게 믿는다면, 비명조차 지르지도 못할 정도로 겁에 질리거나 이성을 놓아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 수준까지 가버리면 더 이상 그것이 허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이미 그 현상을 통해 강하게 현실에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스케일이 커서 와닿지 않는다면 밤에 어두운 골목길을 걷던 경험을 생각해 보면 된다.
꼭두새벽, 가로등도 없는 어둠 속을 걷다 보면 괜히 뒤를 쳐다보게 되고 누군가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실제로는 그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이처럼 인지와 믿음을 통해 허상이라고 해도 현실 세계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니 너는 최대한 상황을 단순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대강 이런 이야기였다고 생각을 한다.

나는 여기서 가설 하나를 세웠다.
허가 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실도 허에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실제로 수많은 자연법칙들이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의 형식을 띄므로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되었다.

인지와 믿음을 통한 허상의 실체화.

초등학교 시절 나는 은사님의 말 너머 그 가능성을 엿보았다.

중학교 시절 나는 그 가능성을 더 이상 가능성으로 두지 않았다.

허虛란 무엇인가? 실체와 허상의 개념을 구분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지한다는 것과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 이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가 어떻게 이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인가?
인지의 과정은? 완전하게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계획은 쉽게 만들어졌고 나는 홀린듯이 다가갔다

다행히도 나의 세계는 나를 환영해주었다.

이윽고 나는 부모님에게 내 등에 솟아난 작은 날개를 자랑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날개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첫 번째 문을 보여준 것이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특수한 정신병원 같은 곳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저 가벼운 치료라고 금방 끝날 것이라고 부모님은 말했지만 느낌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일까?

나는 모두가 비워둔 도화지의 위에 최초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잡은 금빛 연필의 촉감은 포근하고 따듯했다. 어떤 때에는 젤리처럼 부드러운, 어떤 때에는 포도처럼 달콤한, 어떤 때에는 망치만큼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즐거웠다. 모든 게 지루하고 허무할 정도로 잔혹하고 야만적인 현실보다 더욱이.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

하얀 종이 위에 나만의 색깔이 떨어져 점차 형태를 갖춘다. 이 종이는 무한해서 아무리 그려도 그려도 흰 곳이 남아있다

주변에는 점차 친구가 많아졌다.
잘 때마다 내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친구부터, 항상 나를 바라봐 주는 친구. 기분이 나쁜 날마다 찾아와 기분을 풀어주는 친구까지.
친구들은 너무나도 많아져서 내가 어디를 가던 어떤 상황이건 나와 동행했다.가끔은 나를 짓누르는 우울감에 정신이 몽롱해지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종이 위의 신이자 조물주였으니까.
어디선가 나를 짓누르는듯한 마치 거대한 수조 속으로 침잠하는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더욱 미친 듯이 도화지를 바라보았다.

고등학생이 되던 때 즈음이었나.
무한해 보이던 흰 도화지도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듯한, 내가 만들어낸 친구들의 따스한 눈빛이 아닌 다른 이질적인 시선이.

나는 마침내 그림을 거의 다 그려냈다.
도화지에는 정말 조금 하얀 순백의 영역이 남아있었다.
이 도화지의 최후를 장식할 그림으로 나는 나의 전담 치료사인 의사선생님을 그리기로 했다.

그녀는 항상 친절하고 상냥했으며, 조금이나마 나와 같은 것을 볼 줄 아는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와 말을 할 때면 정말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었고 그녀가 하는 말들은 세모나 네모가 아닌 동그라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볼이 붉어졌다.
가끔 외롭다고 느껴질 때면 그녀의 생각이 나기도 하고, 가끔은 이 도화지에 그녀가 그리는 그림을 보고 싶기도 하였다.

시설은 한없이 조용하고, 친구들도 이해할 수 없는 재미없는 아이들이었지만, 선생님은 다른 존재였다.
그녀는 교통사고로 죽었으니 더 이상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온기를 기억하고 있디.

그녀의 손끝부터 얼굴, 다리, 발까지 모든 것을 내 기억과 이상에 맞추어 그려냈다.

이윽고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나의 날개는 마침내 완전히 돋아났다.
남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온 세상이 나의 비행을 알리고 있었다. 나의 비행은 썩 유쾌한 것이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린 세계는 완벽하기 그지없었기에 그저 바라만 보아도 즐거웠다. 이것이 나의 이상..... 나의 인생, 나의 정신, 나의 영혼.

잠에서 깨어난 나는 창문을 열었다. 밤이었다. 달빛이 환하게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때, 남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지금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밟아본 난간의 쇠는 차갑고 또 자극적이었다.

나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누볐다. 우는 이들에게는 웃음을, 웃는 이들에게는 행복을, 누운 자들에게는 건강을, 일어선 자들에게는 활력을.
참으로 유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로 인해 이상과 현실이 뒤섞이고 있었다.

나는 성공한 것이다. 인지와 믿음을 통한 이상의 실체화를.

전율감이 뿜어져 나오며 온몸을 지배했다.
나는 온 세계의 조율자요 신이자, 파괴자이며 만민의 왕이 되었으니 다들 바삐 나와 노래를 부르며 찬양하고 기뻐하라.

온 거리에서는 환호성과 기쁨의 비명이 찬송과 경배가 가득했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내 뇌를 가득 감싸 안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의 몸은 바다 밑바닥까지 빠르게 처박혔다. 어떠한 손이 나를 잡아당긴 탓이었다.





ㅡ어젯밤 12층에서 한 남성이 뛰어내렸습니다. 다행히도 경미한 부상만 입은 체 지금은 병원에 이송되어.

ㅡ급증하는 청소년 자살, 대책은?

ㅡ어젯밤 창고에서 화재 발생 20명이 사망해... 원인은 담뱃재

ㅡ연예인 그룹 불법 집단과의 연결점 확인되어...

ㅡ전쟁난민의 수용에 대한 찬반 여부가 갈려, 협의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



병실 한구석에 비치되어 있는 tv를 통해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소리들,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의 날개는 흉측한 몰골로 부러지고 꺾여 흉측한 괴물로 변해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졌구나... 사실 정말 멍청한 건 나였던 걸까."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 선생님?"

"무슨 소리야, 선생님이라니. 나는 너의... 여자친구잖아 기억 안 나?"

"이게 대체 무슨... 기억에 없는데."

그녀가 내게 와락 안겼다. 코끝이 살짝 찡해질 정도로 달콤하고 알싸한 향기가 난다. 뭔가 취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한 포도향...

"같이 살던 집으로 가자 응?"

"... 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애초에 난 중학교 때 이후로 딱히 집에서 살았던가? 난 분명 기관에서 치료를 받지 않았나?
그것도 여자친구와 동거를? 알싸한 포도향기가 더욱 강해진다.
머리가 아프다... 무언가 뇌를 주물 거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언가 정신을... 흐트러트리고 있는 건가?'

무언가 정신을 갉아먹고있다, 하지만 폭력적이거나 고통스럽다기보다는 무언가 따듯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이들어 저항하기가 힘들다.
아.....

"아, 그랬었지 나는 이른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너랑 같이 살다가 왠지는 몰라도 갑자기 12층에 올라가서 뛰어내렸지... 뭔가 이상한데."

"왜 기억이...뭔가 이상한데? 이게 무슨..."

"외상으로 인한 기억장애라고 하더라고. 혼란스럽지?"

"괜찮아, 내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기억을 잃어버렸더라도... 천천히 다시 새기는 거야, 우리의 추억을. 다시 집으로 가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렇게 그녀와 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으....술취한체로 쓴거라 재밌었는지 자류 모르겠다
근데 죄다 빌드업밖에 없어서 별로 재밌ㅂㅅ었을드ㅛ..미안...

.암튼 다음에 또 취하면 한편 더 써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