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롭고 평화로운 보랑고 마을.

로안은 모험가 길드 1층 테이블에서 몸을 누이고 있었다. 

 

“하아아아암. 졸려라. 피곤해라.”

“어이 로안.”

 

험상궃은 얼굴로 2층에서 내려온 길드지부장 한스는 로안에게 다가갔다.

 

‘은퇴한 지 십 년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저 우락부락한 근육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되네.’

“무슨 일인가요? 한스 씨.”

“언제까지 이곳 시골 마을에 죽치고 앉아 있을 거냐? 본부에서 지금 널 찾는다고…”

 

로안은 말을 끊었다.

 

“한스 씨. 여긴 제 고향이예요. 고향에서 제가 쉬겠다는데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요.”

 

한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모발이 없는 그의 머리에 핏줄이 드러났다.

 

“…네 편의를 봐주는 것도 벌써 반 년이 지났다. 붉은색 휘장을 단 A급 모험가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 있는 거다.”

“할당량을 채우란 애기죠?”

“그래. 지금도 아슬아슬해. 만약 석 달이 지나 해가 넘어가면 네 등급도…”

“강등 당하죠. 뭐.”

 

로안은 의자에 몸을 젖히며 무심히 말했다.

한스의 눈이 커졌다.

 

“뭐, 뭐라고…?”

“B급도 상관 없어요. 아니, 이참에 뭐 관둬버리죠.”

 

한스는 로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얼굴엔 거짓이 없었다.

한스는 인상을 풀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이곳에 오기 전에 <광동의 던전>에 갔다고 들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한스의 말에 로안은 한 여자를 떠올렸다.

대륙에서도 극소수밖에 존재하지 않는 다이아몬드 휘장 S급 모험가를 거기서 처음 만났다.

 

명월의 검사 이리나.

 

이리나는 로안이 목숨을 다해 사투를 벌이던 던전의 보스. 거대 거미 <트레아르아> 단 일합에 처치했다.

그 검격을 로안은 너무 빨라 볼 수 없었다.

단지 <명월의 검사>란 소문처럼 일렁이는 파란색 잔상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A급 모험가로 승급하여 기세가 등등했던 로안에게 충격과 공포, 좌절감을 안겼다.

 

‘나도 재능있다고 자부했지만… 그놈들은 격이 달라. 괴물이야. 완전히….’

 

로안은 자신과 눈을 마주친 이리나의 차가운 눈빛을 생각하면 무력감이 들었다.

도저히… 오를 수 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한스는 로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자 탁자에 의뢰서를 내려놨다.

 

“네 결정이 그렇다면 말리진 않으마. 하지만 적어도 이 의뢰만은 해다오.”

 

로안은 의뢰서를 쳐다봤다.

 

<지하 노예시장 구출 의뢰>

 

한스는 로안이 관심을 갖자 이를 놓칠세라 말했다.

 

“보랑고 근처 산악지대에 인신매매가 발견됐다는 의뢰다. 원래라면 국가가 나서서 해야하지만 수지타산도 안맞고 들이닥쳐도 바로 내뺄테니… 무슨 말인지 알지?”

“…….”

 

한스는 로안이 침묵하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품속에 고이 품어놨던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내려놨다.

로안의 눈이 커졌다.

 

“…이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낡은 실버 휘장.

B급 모험가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난 평생을 B급에서 전전했다. 나 같은 놈의 눈에는 붉은색 휘장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어. 로안.”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리나와 만난 걸 말하지 않았는데….

로안은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묻는다는 건 멍청한 행동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의뢰서를 손에 쥐었다.

한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보랑고에서 작은 산 세 개를 넘으면 큰 산이 하나 나온다.

한때 여기에 큰 규모의 산적들이 있었지만 한 모험가에게 토벌됐고 이제는 파괴된 흔적만이 남았다.

로안은 덥수룩한 가짜수염과 긴 장발의 가발. 그리고 양 얼굴의 탈을 썼다.

옷은 고급스러운 턱시도와 바지, 검은 구두를 신었다.

고귀한 귀족 에디사 네스가 된 로안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곧이어 마차가 멈춰섰다.

마부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에디사님 홀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로안은 창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로안이 내리자 마차는 서서히 사라졌다.

 

“설마 여기에 지하실이 있었다니.”

 

산적 167명의 수급을 따고 두목을 죽여 토벌했다.

거주지는 모두 불태웠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숨겨진 땅굴을 발견해 이곳에 노예시장을 차렸다.

로안은 천천히 산을 올랐다.

 

의뢰 내용은 아이들의 구출이 최우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인간암시장을 연 주모자를 밝히는 것과 죽이는 것이다.

 

‘두,세 번째는 신경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곁다리니깐.’

 

차라리 적을 죽이는 게 편하다.

사람을 구출한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복잡하다.

 

“멈추십시오. 신원을 밝히십시오.”

 

거대 철문을 양 옆에서 지키던 창을 든 경비병이 로안에게 말했다.

 

“에디사 네스.”

 

그리고 품에서 분홍색 VIP 출입증을 꺼내 내밀었다.

경비병이 출입증을 확인하고 서둘러 돌려줬다.

 

“어서 오십시오. 에디사 네스님.”

“흥. 건방진 놈.”

 

거대 철문이 열리자 그 앞에는 돼지 탈을 쓴 시종복 남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로안은 시간을 떠올리고 말했다.

 

“내가 마지막인가? 늦었군.”

“아닙니다. 딱 맞춰 오셨습니다. 곧 축제가 시작되니 절 따라오십시오. 에디사님.”

 

로안은 돼지 탈의 남자를 따라가면서 주위를 곁눈질했다.

 

‘몰라보게 변했군. 이 시골 마을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을 줄이야.’

 

자신을 숨겨준 한스에 대한 보답과 마지막 일이란 심정으로 의뢰를 수락했다.

하지만 허술할 걸로 예상됐던 노예시장은 생각외로 삼엄했고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벌써 눈으로 스쳐본 이 주위 경비병만 18명이 넘었다.

 

“전 하인이라 불러주십시오.”

“그러지.”

“오랜만에 방문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

 

로안은 구태여 책 잡힐 말은 하지 않았다.

실제 에디사 네스는 비밀리에 구금되었고 이 출입증은 의뢰를 수락한 로안에게 흘러들어왔다.

기본적인 신상정보만 알 뿐 자세히는 몰랐다.

로안이 침묵하자 하인이 말했다.

 

“제가 말이 길었군요. 죄송합니다.”

 

하인은 걸어가다가 멈춰섰다.

그리고 지반을 세 번 발로 두드렸다.

쿵. 쿵. 쿵.

철 소리가 나더니 딱딱한 땅바닥이 갈라지며 지하 계단이 보였다.

하인은 로안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바깥은 이음새 없이 마법으로 감쪽같이 가려놨습니다. 하하. 역시 안 놀라시군요.”

‘역시 안 놀란다? 원래는 없었다는 건가.’

“이런 마법이 뭐가 대단하다고. 잔말이 많군.”

“아, 제가 또 실수했군요. 죄송합니다.”

 

하인과 로안은 계단을 내려갔다.

반영구적인 값비싼 빛광석이 주위를 밝히고 있어 어둡지 않았다.

하인은 걸어내려가다가 문득 멈춰섰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돌려 로안을 바라봤다.

 

“역시 에디사님도 그 엘프를 노리시는 겁니까?”

‘이 하인은 뭔가 알고 있군. 정보를 캐낼 좋은 기회다.’

 

의뢰서에는 아이들이 누구인지, 몇 명이나 있는지 정확히 써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중에 엘프가 하나 껴있는 모양이다.

 

“그렇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이 귀한 발걸음을 할 리 없지 않나?”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에디사님도 인간 아이는 질리신 모양이군요.”

 

로안은 속이 메스꺼웠지만 참았다.

 

“아니. 인간 아이도 몇 명 사갈 거다. 오늘은 몇 명이나 준비돼 있지?”

“15명, 아니 16명입니다.”

‘한 곳에 몰아져 있으면 경비병만 제압하면 되니 일은 쉬워진다. 하지만 각각 분리돼있다면….’

 

로안이 궁리하고 있을 때 하인이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인간 아이의 경매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어제 이곳으로 오는 도중 사고가 나서 모두 죽었다고 하더군요.”

“….”

 

로안이 침묵하자 하인이 말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엘프 소녀는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어서 건강합니다! 인간 아이야 금방 충원되지 않습니까? 하하.”

“…알았다.”

 

로안은 이 구역질 나는 이곳의 인간들을 모두 베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의뢰의 목표는 분명하다.

단지 그것이 엘프 소녀 한 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몬스터보다 이런 인간들이 더 역겹고 괴물 같군.’

 

계단을 다 내려온 하인이 굳게 닫힌 문을 열어줬다.

로안은 안으로 들어가자 고약한 냄새를 맡았다.

지하 특유의 습한 냄새, 고급스러운 향수가 공기에 뒤섞여 싸구려 향수보다 못한 냄새, 더러운 인간들이 내뿜는 불쾌한 냄새들이 말이다.

회장 안은 적어도 30명 이상의 손님들이 고급스러운 옷과 우스꽝스러운 동물 탈을 썼으며 그 옆에는 시종복을 입은 돼지탈 하인이 각각 있었다.

로안은 고민했다.

 

‘어쩐다? 구출할 대상이 하나라면 엘프만 구한 다음 여기 있는 녀석들을 싹 다 베어버리고 싶은데.’

 

로안의 품에 검은 없다.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검을 든 경비병 20명이 회장 안을 지키고 있었다.

 

‘좀 더 지켜봐야겠군. 바깥에 있는 경비병보다 수준도 높다. 무기를 뺏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기선제압의 묘를 놓치고 시작한다.’

 

그리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리나처럼 강했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겠지. 후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있는지 하인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잠시 후 중앙 홀에 가려진 붉은 커튼이 걷어지자 경매의 진행자가 나타났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곳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번 사고에도 불구하고 한 분도 돌아가시지 않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 그럼!”

 

진행자가 팔을 벌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며 희귀한 종족! 엘프 노예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회장은 열광적인 함성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그 함성은 곧이어 더 큰 괴성으로 변모했다.

 

터벅터벅.

 

쇠사슬에 사지가 봉쇄된 금발의 어린 엘프가 천천히 쇠사슬을 끌며 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무런 희망도 느낄 수 없는 듯 표정도, 몸짓도 어느 하나 기운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기품과 고귀함,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로안은 저 엘프 소녀에게 저열한 감정을 드러내는 손님들을 차갑게 쳐다봤다. 

하인이 이상하게 조용한 로안에게 물었다.

 

“손님께선 저 엘프 노예가 탐나지 않으신 겁니까?”

 

로안이 말했다.

 

“무슨 소리냐? 이 회장에 있는 누구보다 탐이 난다.”

 

로안은 허리춤에서 큼지막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하인이 힐끗 보자 그 안에는 무수한 다이아몬드가 겹겹이 쌓여있었다.

하인이 놀라자 로안이 말했다.

 

“넌 계속 손을 들고 있기만 하면 된다. 알았느냐?”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경매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