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예 시장의 주모자이자 ‘만물상단’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하인을 보며 로안이 말했다.

 

“그 스카웃에 대답하기 전에 궁금한 것이 있다.”

 

하인은 로안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안은 그가 자신의 상태를 짐작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로안의 낯빛이 더 차가워졌다.

 

“네가 날 지켜봤다는 건 알겠다. 날 마음에 들어한 것도. 하지만 왜 엘프까지 공격한 거지? 상품 가치만 따지면 나보다 엘프가 월등히 더 높을 텐데…?”

 

로안을 덮쳐오는 적들은 엘프 소녀의 목숨따위 상관하지 않는 듯 무차별적으로 덮쳐왔다.

로안은 그것을 방어해내며 적을 쓰러뜨리면서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인이 돼지 탈을 고쳐쓰고 말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손님. 저 엘프는 어차피 죽일 운명이었으니깐요.”

“…죽인다?”

“그렇습니다. 돈을 받고 죽이건 손님을 테스트하며 죽이건 어차피 죽을 운명이란 것이죠.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로안은 뒤의 실비아를 돌아봤다.

로안이 앞을 지켜준 덕분인지 실비아의 상태는 아까보다 안정돼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하인의 대답으로 상황은 정해졌다.

실비아를 죽일 목적이라면 로안의 입장과 배치된다.

이미 반드시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상태다.

로안은 검을 빼들고 하인에게 겨눴다.

하인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겁니까? 긍지와 목숨을 동일하게 여기다니… 참 어리석으면서도 아깝습니다. 로안 씨.”

“….”

 

로안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껴놨던 비기를 펼치기로 결심했다.

빅터르에게 처음 근접할 때 벤 것은 그가 아니라 그림자였다.

적의 그림자를 베면 잠시동안 상대의 그림자는 로안의 안식처가 된다.

그렇기에 순식간에 몸을 이동시켜 후방에서 빅터르를 급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를 벤다면?

본래 그림자는 베어도 이동되지 않고 양산된다.

분신으로 말이다.

 

로안이 자신의 그림자에 108번을 베자 분신 108명이 순식간에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적은 명백하다.

맹렬한 적의로 가득찬 시선들이 하나에 닿자 하인은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늘 침착함을 유지했던 하인은 이번만은 참을 수 없는 듯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과연! 이게 진정한 환영 검객이군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분신을 만들다니… 참 탐나는 [소울]이군요.”

“….”

 

로안은 눈을 감고 108개의 손가락을 연주하듯 분신을 움직였다.

20명은 하인의 앞에 순식간에 당도해 검을 내지른다.

하인은 그 모든 것을 피하며 외쳤다.

 

“본체에 비해 능력은 70% 정도 약화되는 건가요. 그 힘은.”

 

하인이 검을 꺼내 일합을 내지르자 분신 20명이 즉사하며 사라졌다.

그러자 분신 40명이 각각 좌우로 나눠 하인을 덮쳤다.

20명은 벽을 타 뒤에 있는 퇴로를 막았고 나머지 28명은 비워진 전열을 채웠다.

 그 공격을 모두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로안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콰콰콰콰콰콰콰!

순간 하인의 주변에서 엄청난 전류가 터졌다.

그 막대한 마력에 의해 로안의 분신들은 속수무책으로 불타올라 타버리고 사라졌다.

로안은 그 힘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방금까지 빅터르가 펼치던 ‘전류’의 이능이었기 때문이다.

하인이 로안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런. 로안 씨에게 들켰군요. 제 힘을.”

“…….”

 

로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퉁.

로안은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분신이 사라지면 그 고통은 그대로 본체에 전달된다.

108명 분신의 고통이 로안에게 전달됐으니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로안…! 로안…!”

 

실비아는 쓰러진 로안의 얼굴을 감싸며 부르짖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숨 쉬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숨은 얕고 얕았다.

이미 한계에 도달해도 진작에 도달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싸우고 또 싸우고 마지막까지 싸웠다.

자신을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위해 정말로 목숨을 바친 것이다.

 

“…대체 왜…, 약속이 뭐라고 이렇게……. 흑흑.”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로안의 얼굴로 계속해서 떨어졌다.

하인은 답답한 지 돼지 탈을 벗어 던지며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맨얼굴을 드러낸 그는 말끔한 청년이었다.

 

“실비아 씨. 이만 여기서 죽으셔야겠습니다.”

“…….”

“당신은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마력 폭주]의 이능은 고문서의 말처럼 정말 제어하기 어렵군요. 당신 때문에 정예병 300명을 잃었습니다.”

“…….”

“말이 길었군요. 죄송합니다. 이만 당신을 아껴주는 로안 씨와 함께 사라지세요.”

 

하인은 자신에게 압도적인 상황에 심취한 나머지 중요한 두 가지 단서를 놓치고 말았다.

첫째는 실비아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잃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마력을 제어시키는 검은색 가죽 목줄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끊어졌다는 점이다.

 

고오오오오오오-

그 강력한 [마력 폭주]에 의해 지반은 흔들리고 동굴은 기울었다.

하인의 안색이 변하며 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하얀 배리어에 막혀 검이 두동강났다.

 

“!”

“죽여버리겠어.”

 

실비아의 몸에서 하얀 광채가 뿜어져나왔다.

그리고 하인에게 손을 뻗자 거대한 광선이 하인에게 향했다.

 

“!”

 

하인이 [방패]의 이능과 모든 힘을 끌어올리며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얀 광선은 하인을 매섭게 덮쳤고 그 탓에 동굴은 굉음을 내며 점점 무너져내렸다.

우르르르르.

 

“컥, 켁,켁… 이런 미친 경우가… 제기랄.”

 

하인은 피를 토하고 실비아를 쳐다봤다.

그때와 똑같았다.

실비아의 부모를 죽이고 납치하려던 순간. 그녀는 [마력 폭주]를 일으키며 무차별적으로 마력을 개방하고 난사했다.

더 놀라운 것은 저게 마법을 모두 배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어만 된다면 정말 탐나는 이능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잠깐만?’

 

우르르르르르.

무차별적인 광선에 동굴이 무너져내리는 걸 보면서 하인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때와 모든 것이 흡사했지만 단 한 가지.

로안이 있는 쪽으로는 광선을 쏘기는커녕 배리어가 하나 쳐져 있는 게 아닌가?

덕분에 천장에서 암석이 떨어져도 배리어에 막혀 로안은 무사했다.

하인은 현 상황에 대해 냉정히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로안을 피하고 보호하는 건가? [마력 폭주] 상황에서도? 재밌군. 정말 재밌어.’

 

하인은 몸을 일으켜 말했다.

 

“실비아!…”

 

목소리를 내기 무섭게 광선이 하인을 향해 무섭게 날라왔다.

하인은 광선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미리 준비했기 때문에 망정이지 이번마저 맞았으면 죽었을 것이라고 하인은 생각했다.

 

“날 죽이면 로안도 죽는다. 로안을 살리고 싶지 않은 거냐?”

“….”

 

반응이 있다!

실비아는 팔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로안을 살려라. 안 그러면 죽이겠다.”

‘제어가 된다! 가능성이 있다! 저 남자에게!’

 

하인은 쓰러진 로안을 보며 마음 속 깊이 흥분이 솟구쳤다.

그리고 품에서 <엘릭서>를 꺼냈다.

손 하나 크기 만한 파란색 물약의 엘릭서는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입수 난이도 보여주는 듯 그 강력한 공격에도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건 엘릭서다. 이걸 로안에게 먹이면 로안은 살아난다.”

“널 죽이고 그걸 얻겠다.”

“!”

 

쾅!

하인은 옆을 구르고 광선을 겨우 피했다.

우르르르르르. 쾅! 쾅!

동굴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무너져내렸다.

하인은 급하게 일어나 말했다.

 

“더 이상 공격하지 마라! 엘릭서가 깨지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다!”

 

거짓말이다.

고대의 보물인 엘릭서는 어떤 공격에도 꺠지지 않는다.

하지만 ‘로안’이란 키워드가 얽혀있기 때문에 실비아는 더 이상 폭주하지 않고 하인의 말을 들었다.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어떻게 한담…?’

 

하인은 실비아에게 걸어가며 조용히 생각했다.

다가가서 급습한다? 본능만 남은 그녀에게 이것은 하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것보다 저 이능이 탐났다.

만약 [마력 폭주]가 완전히 제어가 된다면…

그것을 자신이 손에 넣는다면….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그러기 위해선 로안과 실비아를 묶어놔야 한다.’

 

하인의 품속엔 노예 계약의 목걸이와 주인의 반지가 있다.

로안이 가짜 다이아몬드, 가짜 골드를 준 터라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하인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엘릭서를 주기 전에 나도 받을 것이 있다. 실비아.”

“….”

 

실비아가 말없이 팔을 치켜들자 하인은 서둘러 엘릭서를 치켜들었다.

다행히 광선은 나오지 않았다.

 

“내놔라. 그것을.”

“물론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로안과 노예 계약을 맺어라. 그렇지 않으면 엘릭서를 모두 버릴 것이다.”

“….”

 

실비아가 아무런 말이 없자 하인은 포션의 뚜껑을 따 바닥에 부었다.

영롱한 빛의 파란색 포션이 바닥에 닿자 포션은 빛을 잃었다.

순식간에 반절이 사라졌다. 실비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이 개새끼가…!”

 

하인은 조용히 웃었다.

실비아를 더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버리는 걸 멈췄다.

 

“아직 반절이나 남았다. 내가 던진 목걸이에 로안과 너의 피를 묻혀 네 목에 착용해라. 반지도 똑같이 하여 로안의 오른쪽 약지에 착용해라.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하인은 노예의 목걸이와 주인의 반지를 실비아 앞에 던졌다.

실비아는 분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순순히 주웠다.

하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놀랍다. 힘이 개방된 상태에서 이성을 잃지 않고 대화가 되다니…. 이 모든 게 로안과 연관돼있는 게 확실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널 반드시…”

 

실비아는 여전히 하인을 의심하고 있다.

하인이 말했다.

 

“의심해도 어쩔 수 없지만, 솔직히 말해 이제 널 죽일 이유가 사라졌다.”

“…?”

 

우르르르르. 쾅. 쾅. 쾅.

거대한 암석들이 천장에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떨어졌다.

동굴이 무너지는 것도 이제 시간 문제다.

실비아는 어쩔 수 없이 로안에게 다가갔다.

숨소리는 이제 믿을 수 없을 만큼 얕아졌다.

실비아의 눈에서 자연스레 눈물이 다시 떨어졌다.

 

“미안하다. 로안. 나 때문에… 날 구해주느라 너가 많이 아팠구나….”

 

로안의 몸엔 이렇게나 피가 흘러나오는데 자신은 멀쩡하다.

실비아는 로안의 검을 치켜들고 자신의 팔을 거세게 그었다.

피가 꿀럭꿀럭 넘쳐흘렀다.

 

“이정도론 부족하지만… 로안, 시간이 없으니….”

 

실비아는 갈색 목줄에 로안의 피와 자신의 피를 묻혀 목에 착용했다.

반지도 똑같이 하여 로안의 오른손 약지에 착용했다.

그 순간.

영혼이 결박되는 강렬한 감촉이 목줄에서 느껴졌다.

실비아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읏….”

 

하인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실비아를 부르고 엘릭서를 높이 던졌다.

실비아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엘릭서를 안전하게 잡았다.

실비아가 엘릭서에 온신경이 가 있는 사이 하인은 몸을 내빼고 사라졌다.

 

하지만 상관 없다.

이 엘릭서가 가짜가 아니길….

로안의 모든 상처와 고통을 완전히 치료해주길…

 

실비아는 간절히 기도하며 로안의 입에 엘릭서를 부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동굴은 완전히 무너졌다.




노예 시장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