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 안 입을거야!"

초연이 옷을 집어 던지면서 소리쳤다.


"공주님...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중요한 날이고..."

"당장 나가!! 난 안 간다고 그래!"

씩씩거리면서 검을 휘둘러 시녀들을 다 쫒아낸 초연은 문을 걸어 잠그고 엉엉 울었다.


'저래서는 누가 데려가려는지... 쯧쯧"

'남자로 태어날 것을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지.'

'사내처럼 무기를 잘 다루면 뭐해. 어짜피 여인의 몸인걸.'


항상 초연을 둘러싼 말들이었다.

초연은 여성으로 태어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난 남자한테 묶인 삶은 싫어... 더구나 이 궁에서 태어난 것도 다 싫어. 

아바마마는 나만 보면 지 어미 잡아먹은 자식이라고 하잖아.

이제는 날 다른 나라 인질로 보내려는 거야?'


초연을 낳고 사랑하던 왕비가 사망한 이후 염나라 왕은 초연을 볼 때마다 폭언을 쏟아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왕비를 맞이 한 후 거의 초연을 남의 자식 보듯 하는 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한 근위대와 시녀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강제로 옷을 갈아입히고는 거의 끌고

나가다시피 연회 자리로 인도했다.


"초나라 공자,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감사합니다. 전하."


초나라 공자 규는 무표정인 채로 대답했다.


"여기는 초연이라 합니다. 제 여식이지요. 하하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좋은 아버지를 연기하는 염나라 왕을 보는 초연은 혐오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사람취급도 안하면서'

"전하. 저는 혼담이야기로 온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이어진 규의 이야기에 연회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최근 북방의 이민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저희 정탐병에 따르면 곧 수달 내로 병력을 규합하여 공격을 할

예정이라 합니다."


듣기 싫다는 듯 염나라왕이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이미 자네 부친과 이야기 끝난 일이네. 그쪽에서는 그저 단순한 내부 집안 정리라고 하는데"

"전하. 가볍게 볼 사안이..."

"듣기 싫다! 오늘은 그냥 물러나라."


".....물러나겠습니다."


돌아가는 규의 뒤에다 대고 염나라 왕은 비웃으며 말했다.

"계승권 밀려난 서자 따위가 신경 쓸 사안이 아니야. 주제 넘은 이야기군."

그 말을 들은 규가 잠깐 움찔 하다가 그대로 사신관으로 돌아갔다.




밤에 몰래 빠져나와 칼을 찬 채로 궁 밖을 잠깐 나온 초연은 마찬가지로 밖에 나와 혼자 있는 규를 발견했다.

"당신은..."

"초연 공주...인가요"

둘은 한동안 말없이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검을 차고 계시는군요."

한참을 걷던 도중 규가 초연에게 물었다.


"왜요? 당신도 내가 이상한가요? 여자가 칼을 들고 다녀서?"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초연이 대답했다.


"아니요. 오히려 멋있네요. 이런 난세에는 여성도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저의 모친께서 이야기 하셨거든요."

규는 오히려 웃으면서 대답했다.


"......"

의외에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 초연은 그저 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궁금했습니다. 염국의 공주는 사내 못지않게 검을 잘 다룬다던데."

규가 말했다.

"저도 공자이기 전에 무인에 더 가까워서 말이죠. 뭐 왕위 계승권도 없는 서자따위가 칼을 잡으면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뚜둑하고 몸을 풀던 규는 초연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저랑 검을 한번 맞대보시렵니까?"


그 말에 얼굴이 환하게 핀 초연은 그러겠노라 대답하였다.


밤하늘 아래에서 목검을 부딪히는 두 남녀의 모습은 누군가 봤더라면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엄청난 기세로 목검을 휘두르며, 환하게 웃는 초연의 모습을 보면서 규가 말했다.


"크윽!! 엄청난 힘이군요. 저도 검술로는 누구한테 안 지는데 말입니다."

"공자께서도 대단한 실력자시군요. 지금까지 저랑 대등하게 맞붙는 상대는 없었으니까요!"


결국 승부를 내지 못하고 둘은 대자로 바닥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규가 말했다.

"아깝군요..아까워..."

"무슨 의미이죠?"

초연이 물었다.


"우리 둘 다 궁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

"그대는 궁의 예법에 얽메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고, 

저는 무예를 익혀서 장군이나 되면 그만이었을 텐데.

둘 다 묶여서 썩고 있지 않습니까."


슬픈 얼굴로 규가 이어서 말했다.

"그대나 저나 각 나라에 버림받은 신세인 거 압니다. 하지만 전 원망하지 않습니다."

"공자님..."


자리에 벌떡 일어난 규가 초연을 바라보며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전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니 그대가 열어갈 길을 응원하겠습니다."

초연은 규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몇달 뒤


"제길 초나라 서자 놈의 말이 맞다니... 오랑캐 놈들이 벌써 국경에 도달했다고?"

"저..전하.. 그것이 방금 전령의 말에 따르면 국경선이 뚫렸...다고"

"뭐..뭣이? 국경수비대는 뭐하고 있던거냐?"

"항...항복했다고 하옵니다."

"뭐라고! 제장들은 뭐하는가! 누가 나서서 저들을 막겠느냐?"

"......"

국왕이 다급히 장군들을 찾았으나 그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사내라는 것들이 한심하군요."

초연이 완전 무장한 모습을 한 채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계집이 낄 자리가 아니다! 썩 물러나라!"

"그러면 이중에서 군을 이끌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서 나오시지요."

"......"

"아버지께서 어짜피 저를 내다 버릴 패로 쓰실 셈 아니셨습니까? 

그러면 소녀에게 적하고 싸우다 죽을 기회 정도는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제 말이 틀립니까?"

염나라 국왕은 어쩔 도리가 없이 그녀에게 군권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에 나선 초연은 그야말로 전장의 귀신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로 앞장서서 적을 베어넘겼으며

자신을 여인이라고 비웃는 이민족들의 뼈와 살을 분리해버렸다.


처음에는 자신을 의심하던 병사들도 곧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으며

곧 그녀의 압도적인 군재와 통솔력에 모두 그녀 수족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사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시녀 하나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 너 꼴이 왜 그래! 무슨 일이 난 거냐?"

"공주님... 제 말 잘 들으세요."

시녀가 전해준 말은 곧 초연을 분노하게 했다.


염나라 왕은 오늘 내일하는 상태이며, 현 왕비가 자신의 어린 아들을 내새워 곧 아들을 왕으로 앉히고 자신은 돌아오면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짠 상태로, 그 첫 단추로 지금 궁에 공주의 시녀와 환관들은 모두 주살되고, 

자신만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내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지...."

"어쩌실 생각인가요?"

"......제장들을 모두 불러오라."

모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왕비의 행태에 분노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공주님을 따른 저희들도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게 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지켰는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저희는 공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소서."


한참을 눈을 감고 생각하던 공주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 여인이라고 왕이 못되겠는가!"


그 명령에 모두가 호응했고 궁에 몇 안되는 호위병 마저 항복해버리니 왕비와 그의 아들은 곧 병사들에게 끌려나와

공주 앞에 내쳐졌다.


"공주! 오해입니다! 살려주세요!"

"누님 살려주세요! 궁을 나가서 조용히 살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초연이 무표정으로, 그러나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도 살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뽑았다.

"하지만 죽어버린 제 시종들과 환관들, 그리고 지나간 날들이 용서하지 말라더군요."

말을 마친 후 왕비와 동생을 죽인 초연은 곧 왕좌로 다가갔다.


"네...네 이년!!! 무슨 짓을 벌인지 알기나 한 것이냐! 이건 반역이야!"

"......"

초연은 차가운 눈으로 염나라 국왕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리고는 왕좌에 앉아 옥새를 들고서는 말했다.


"어떤가요? 제법 어울리지 않나요?"

왕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대답을 안해주시니.... 여봐라 상왕을 방으로 모시거라."

그렇게 염나라 국왕은 방에 유폐되어 죽을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곧 초나라에도 이 소식이 알려졌다.

"여자가 왕이 되었다라.... 하! 웃기는군."

초나라왕이 그녀를 비웃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약소국을 정리하고 점점 국경에 다가오는 염나라 군대를 본 초왕은

이내 근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우리나라도 공격을 받게 생겼다. 경들은 어떻게 대비하면 좋겠는가?"


"전하, 염국의 기세가 강렬하니 그들에게 전쟁의 명분을 주었다가는 사달이 날 수도 있습니다."

"무슨소리요! 그럼 우리 초나라가 그들에게 굴종하라는 뜻입니까?"

"어허! 이사람이! 그럼 우리나라를 전쟁의 참화로 이끌 샘입니까?"

신하들이 다투는 사이 염의 최후통첩이 도착했다.


"초왕은 듣거라. 우리나라에게 왕세자를 볼모로 보내면 전쟁의 참화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거절한다면 그대의 국가를 풀한포기 남기지 않고 파괴하겠다."


염국의 최후통첩에 분노한 초나라였으나 곧 그들과 누가 싸울것인지 논하는 자리에서는 다들 조용해질 뿐이었다.

이때 공자 규가 나섰다.

"제가 군을 이끌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윤허하여 주소서."

그러자 신하들이 반대했다.

"염나라의 사례가 있습니다. 함부로 군을 주었다가 공자가 반란을 일으키면 어쩝니까?"


규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경들 중 아무나 나서면 될 일 아닙니까? 경들은 입만 살아있습니까? 어서 나오시지요!"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자 규가 다시 초왕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제가 역심을 품을까 두려우시다면, 전하의 충성스러운 신하 한명을 붙이면 될 일 아닙니까?

절 감시할 인원이 있다면 될 일 입니다."


그리하여 규와 대장군 성신이 군을 이끌고 염과 대치를 하게 되었다.


막사에서 규는 성신에 대해 생각하며 근심했다.

'대장군 성신은 사실 군에 대해서는 무능한 자가 아닌가! 그자의 집안이 대대로 무신이긴 해도

전과는 커녕 패배가 더 많은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자를....'


초의 장군 성신은 탐욕스럽고, 아첨하는 자로 대대로 대장군을 역임한 집안의 자손이나 뛰어난 군인이던

조상과 부친과는 달리 본인의 영욕에만 몰두하는 한심한 작자였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처세술과 연줄로

수차례의 수치스러운 패배에도 대장군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규가 근심할 수밖에 없었다.


작전 회의에서부터 그 둘은 부딪히기 시작했다.

"공자! 그렇게 계집애같이 수비만 하실 거요? 적이 대놓고 약점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장군,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함정인 것 같습니다."

"아니 공자는 보시오. 지금 전군을 끌고 기습하면 손쉽게 이길 것을 왜 이렇게 시간을 끄십니까?"


결국 참다못한 규는 성신에게 한마디 했다.

"지난번 전투에서 척후를 보내지 않고 그렇게 공격하다 전군을 몰살시켜놓고 배운 게 없소?"

그 말에 모욕을 당한 성신은 분노하여 막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둘은 각기 다른 곳에 진을 치게 되고, 군대가 두 조각이 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얼마 뒤 성신 쪽에서 급하게 전령이 왔다.


"공자께서는 속히 대장군을 구원하소서! 포위되었습니다!"

이 말에 한탄을 하던 규는 군을 이끌고 이동하였다.


한참 근심하던 규에게 한가지 희망이 있었다.

'지금 적은 무리하게 대장군을 쫒다가 보급선이 길어져 있다. 그렇다면!'


규는 기병 수백기를 선별해 보급을 기습하게 하고 본군을 이끌어 대장군에게 향했다.



한편...


"대장군! 우리는 끝입니다! 막다른 길입니다!"

"이...이런!! 안돼!! 난 죽고 싶지 않아!!"

삼면이 막힌 협곡에 갖힌 성신은 이제 공황 상태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염나라 장군이 투항을 권유했다.

"대장군 성신은 들어라! 우리 군이 입구를 막고 있으니 너희는 이제 끝이다 항복해라!"

그리고는 협곡 안으로 병사들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하...항..."

"대장군! 저들의 뒤를 보십시오! 우리 군입니다!"


그때 나타난 규의 군사가 협곡 입구를 막아버리게 되자 오히려 앞뒤로 포위된 꼴이 된 염나라 병사들은

이내 상황 파악 후 사기가 떨어져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좋...좋아! 공격!! 총공격!!!"


"젠장!! 너무 깊이 들어간 건가!! 퇴각!!! 길을 뚫어라!!!"

그러나 좁은 협곡 입구에 길게 늘어져버린 염나라 군은 결국 앞뒤로의 공격에 그대로 박살나버렸고

반대로 염나라 장군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초연은 화를 냈다.

"멍청한 놈!! 협곡 안에 군대를 집어넣어? 싸우지 않고 입구 쪽만 막아도 알아서 말라 죽을 것인데!

초나라 대장군이 그런 전술을 썼을 리가 없어... 그렇게 똑똑한 놈이 아니였거든."

"공자 규의 기병대가 보급대를 기습해서 지원군이 그쪽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그 말에 초연이 전령에게 다시 물었다.

"적장이 누구라고?"

"공자 규입니다. 이번에 성신과 함께 군을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


"공자......"

한참을 멍하니 있던 초연은 이내 자리를 일어나 제장들에게 명했다.

"내가 직접 친정하겠다. 공자하고는 할 말이 있어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