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절로 나오는 혼잣말에 모든 심정이 녹아있다. 그리하여 내쉬는 숨결은 수십 년 묵은 골초들의 그것보다 더 매캐하다.



"이게 말이 되냐고, 진짜."



수십 개가 넘는 매칭 앱이 폰에 깔려있건만, 그중 반응이 오는 놈은 단 한 개도 없다. 


이쯤 되면 매칭 앱 회사들이 작정하고 날 콕 찝어서 따돌리는 게 아닌가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넘은 확신마저 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기에 속은 제곱으로 더 시커멓게 썩어들어간다.


이 타들어가는 속을 조금이라도 꺼뜨리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원망과 울분을 내 앞에 없는 상대에게 토해내게 된다.



"상황이 이런데 짝은 무슨 얼어죽을 짝이냐고, 그 웃기지도 않은 선무당 년이...."



앞서 말한 매칭 앱은 물론이오, 클럽도 가보고, 맞선도 봤다. 결혼 정보 회사를 이용한 것도 굳이 말하기도 귀찮을 정도다.


그런데도 내 나이 벌써 서른 넷, 지금까지 여자랑 사귀기는 커녕, 여자 사람 친구조차 없다.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기대본 민간 신앙, 그러니끼 며칠 전에 찾아갔던 용하기로 소문난 무당은 날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미 제 짝에게 꽉 붙잡혀서는 지금까지 숨은 어떻게 쉬고 살았나 신기할 지경이구만, 뭣하러 그 고생을 해가며 내게 연애 운을 봐달라고 찾아왔는감?]



무당하면 흔히 떠오르는 고정 관념을 명쾌히 처부수려는 듯, 아주 젊고 세련된 미녀였던 무당은 꼭 조부모의 영혼이 깃들기라도 한 것 같은 구수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그리 말했다.


내가 입 한 번 뻥끗하기도 전에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정확히 짚어낸 건 과연 그 명성에 걸맞는 실력이긴 했다만, 안타깝게도 그 상황에서 무당이 했던 말은 내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아주 심각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다.



[짝이라뇨? 지금까지 여자랑 사귀기는 커녕, 분위기도 못 타본 저한테 대체 무슨 짝이 있다는 겁니까?]


[.....?]



내 말에 이럴 리가 없다는 식으로 크게 당황하던 무당의 모습은 확실히 귀여웠다. 과연 얼굴이 받쳐주니 그런 걸까, 아무튼 내 발언으로 인해 헛다리를 장대하게 짚었던 그녀는 이윽고 진심을 내겠다는 식으로 제대로 점을 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생긴 것도 나쁘지 않고, 능력은 대단하고, 게다가 성격도 좋아....그런데 아직까지 여자랑 못 사귀었다고?]



그렇게 되물으며 부적을 꺼내들던 무당은 매우 묘한 눈빛으로 날 슬그머니 살펴보기 시작했다. 눈빛이 꽤 끈적했던 걸 생각하면 분명 내게 관심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 되버렸지만.



[좋아! 어찌 된 일이건, 이제부터 똑똑히 알아보면 되겄지! 혹시 또 모르잖아?


어쩌면 오늘이 자네가 자네 임자를 제대로 만나는 날일지.....도.]



갑작스럽게 무당의 말이 뚝 끊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굴 앞에 데려와도 전혀 기 죽지 않고 제 할 말을 다 할 것 같던 그런 인상의 소유자인 무당은 찰나의 순간 만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기가 확 죽어서는, 식은 땀마저 삐질삐질 흘려가며 덜덜 떠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갑자기....왜 그러세요?]


[자네...대체 뭐에 붙잡힌 겐가...?]


[붙잡히다뇨?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전 진짜 누구한테도....]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지....이게 정녕...정녕 산 사람의 기운이라고....그그그그그그, 복채는 필요없네! 미안하지만 얼른 나가주게!


당장!]


[아니, 그렇게 불안한 꼬투리를 남기고는 다짜고짜 내쫓으면 나는 어찌 하라는 겁....!]


[뭉치야! 덩치야! 얼른 손님 배웅해드려라! 빨리! 절대로, 절대로 터럭 하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아니, 잠깐! 웃기지 마요! 그런 불안한 말만 잔뜩 해놓고는 이대로 내쫓는다고?! 지금 장난해요?!


이봐요! 야! 야!]



그리하여 소문만 대단하신 선무당한테서 쫓겨난 뒤로 오늘까지 이 모양이다.


짝은 개뿔, 여자 손이나 한 번 잡아볼 수 있으면 다행이지.


이렇게 생각하며 자꾸만 떠오르는 쓸쓸하고 외로운 미래를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얀붕 교수님, 김 조교입니다."


"아, 김 조교? 무슨 일인가요?"


"그, 수업 시간 다 됐습니다. 기다려도 안 오셔서 찾아왔습니다."


"어, 시간이....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변명은 필요없었다. 시계를 보니 깜빡했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넘긴 뒤였다. 그나마 오늘이 학기 첫 강의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나중에 강의 평가에 크게 악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아니, 이미 줬을지도. 아무튼 부랴부랴 채비를 해서 강의실로 황급히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학생 여러분. 제가 좀 늦었습니다."



머리를 꾸벅 숙여가며 학생들에게 사과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들이 대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어지는 고요함이 날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되뇌이고는 최대한 정중한 느낌으로 화이트 보드 중앙에 멈춰섰다.


그리고 매직을 집어 내 이름 석 자와 연락처, 그리고 과목명을 적고 다시 학생들 쪽으로 돌아본다.



"올 한 해 동안 여러분과 함께 본 과목을 진행하게 된 김 얀붕 교수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쏟아지는 박수 소리, 아니면 힘찬 대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교수인 날 앞에 두고 학생 모두가 다른 곳에 관심을 둔다는 건, 그것도 그저 관심이 기울어진 정도가 아예 다 쏠려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아무리 대학생이라지만 이렇게 학생들로부터 대놓고 무시당하는 상황에 대해 나는 적잖게 괘씸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이렇게 날 무시당하게 한 원인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그래서  학생들의 시선을 쫓아 그 원인을 눈에 담으니 나 도한 지금 이 현상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김 얀순, 굴지의 대기업인 얀국 그룹의 영애인 미녀.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버지인 얀국 그룹 회장의 곁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미디어에 수없이 노출되어 엄청난 영향력과 유명세를 떨치게 된, 말 그대로  현대 사회의 완벽한 공주님이시다.


내가 비록 서른도 안 되서 대학 교수를, 그것도 어중간한 곳이 아니라 손에 꼽힐 정도인 상위권 대학에서 전공 교수로 임명되긴 했지만, 이러한 업적조차도 저 갓 성인이 된 공주님의 것이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한 사실에 나도 모르게 열등감과 질투심마저 느낀다.


그래서 그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을 얼른 떨쳐내려고 수업을 진행시키고자 심호흡을 하고 막 입을 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먼저 선수를 쳤다.


선수친 이는 다름아닌 화제의 대상인 얀순 양이었다.



"반갑습니다, 김 얀붕 교수님."



내 이름 석 자를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흠 잡을 데 없이 정확한 발음으로 부르며 꾸벅 머리를 숙이기까지 한다. 


정말로 별 거 아닌 행동이지만,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의 이름 값이 너무 컸다.


그래서 나도 놀라고, 학생들도 놀랐다. 그리고 놀란 학생들  중 몇몇, 그러니까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까, 교활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행동이 빠른 몇몇 학생은 뒤늦게 얀순 양이 한 것처럼 날 향하여 아주 깎듯이 인사를 해왔다.



"반갑습니다, 얀붕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얀붕 교수님."


"잘 부탁드립니다, 얀붕 교수님."



순식간에 물 밀듯이 밀려오는 인삿말에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의 발단이 된 얀순 양을 무의식적으로 살펴보니, 그녀는 학생들이 처음에 내게 무관심했던 것 만큼이나 다른 학생들에게 무관심한 채로 오직 나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함이 느껴지는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 나는 얼른 수업을 진행시켰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내용, 과정, 순서, 최종적으로 학습하게 될 지향점과 의의, 늘 해왔던 일, 늘 해왔던 말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나는 시험받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얀순 양,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훨씬 뛰어난 그녀의 앞에서 나는 내가 그녀를 가르치게 된 교수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해야 했다.


정신없이 쫓기듯, 허겁지겁 도망치듯,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안날 정도로 바쁘게 목소리를 쏟아낸 끝에 마침내 첫 수업을 끝낼 수 있을 때가 되었다.



"......이상으로 첫 수업에서 하려던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진도를 나갈 터이니, 학생 여러분께서는 다들 준비를 잘 해오셔서 수업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별다른 질문이 없으시면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질문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 뻔했다. 첫 수업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말로만 받는 척을 하면서 미련없이 등을 돌려 강의실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교수님."



하지만 내 믿음을 보기 좋게 깨뜨리는 목소리가 날아든다. 다름아닌 얀순 양의 것이었다. 그 말이 족쇄가 되어 내 발에 채워지듯,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예, 예에....질문 있습니까?"


"네, 다만 시간이 다소 걸릴 것이라 생각되서 따로 면담을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가능하신지요?"



얀순 양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교수라서, 그녀가 학생이라서, 재벌가의 영애라서 같은 지극히 당연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날 요구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네,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