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외모, 뛰어난 능력.

그리고 칼같은 일처리와 차가운 태도로

회사에서 얼음 여왕이라는 평가를 받는 얀순이는


부쩍 한 신입이 신경쓰였어.


신입 환영 파티에서

모두가 얀순이를 헤벌레 하고 바라볼때

얀붕이도 같이 얀순이를 바라보았는데



얀붕이의 시선은 다른 사람과 뭔가가 좀 달랐거든.

다른 사람은 우와 하는 느낌이었는데

혼자 막 우물쭈물 하는 느낌이었거든



미묘한 시선의 차이가 조금 신경쓰였고

얀순이는 은근 슬쩍 얀붕이 곁으로 가서 물었어.


이 사람도 보통 사람이랑 같으면 혼쭐이나 내 줘야지, 괜히 남들하고 다른 척 내 관심이나 끌고... 라는 생각으로.


"제게 볼 일 있어요?"


그러자 얀붕이는 수줍게 말했어.


"혹시 회식 직전에 사셨던 레고 세트. 그거 직접 모으시는 거에요? 아니면 선물용이에요?"



얀붕이는 레고를 사 모으는 덕후였던 거야.



얀순이는 처음엔 어이가 없어서


"지인에게 선물해줄 거라서 아무거나 골랐어요. 잘 몰라요."


라고 칼같이 끊어버렸고

얀붕이는 풀이 죽어서


"아 네..."


하곤, 이내 얀순이에게 관심을 끊고, 옆 동료와 대화 잠깐 하는 거 외엔 핸드폰으로 레고 사진만 찾고 있었어.



'뭐야, 이 남자.'


아직도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데


이 미친 덕후는

자기가 기껏 신경을 써 줬는데도 레고 사진만 찾아보고 있는 거야.



"그 레고 세트가 왜요?"


"네? 아, 아... 그, 제가 원래 구하려던 거랑 같은 거라서, 혹시 싸게 구할 수 있나 해서요..."


다시 한 번 얀붕이를 쓱 훑어보면


물려받은 듯, 미묘하게 낡고 사이즈가 조금 안 맞는 양복

앞 코가 조금 해진 구두

노인학대죄로 신고당할 듯한 핸드폰


"어... 왜 그렇게 훑어보세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얘를 훑어보았다는 것에 소름이 끼친 얀순이는


"아뇨, 아무것도."


대화를 끝내고, 2차는 빠졌어.



그 뒤, 신입들이 차차 회사에서 적응해나가면서

얀붕이에 대한 소문도 돌았어.


집이 워낙 가난하다.

아버지는 술먹고 어머니와 얀붕이를 학대했다더라

어머니가 애를 버리고 도망갔었다더라

어머니는 도망가기 전 날, 마지막으로 사 줬던 선물이 레고라더라

그러고 나서, 아버지도 술병으로 죽었다더라



그래서 친구도 뭣도 없이

그냥 할머니 병간호 하고 남는 돈으로 레고나 사 모으고 있다더라



술자리에서 얼핏얼핏 들린 소문에

얀순이는 순간 동정심이 들었어.


반쯤 충동적으로

동정심 반 호기심 반으로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사귀자고 했고


둘다 첫 연애라서 이거 어쩌지 저거 어쩌지 하다가

결국 결혼까지 3개월 만에 골인했어.



결혼하고 처음은 좋았어.


얀붕이는 다른 여자에게도 돈 안 쓰고

그냥 대부분의 생활비는 아내에게 맡기고

용돈 타서 할머니한테 주스 같은거 사들고 가거나

아니면 레고 좀 사거나


그런데

점점 얀순이는 얀붕이가 마음에 안 들었어.



누구네 남편은 아내와 같이 해외여행을 간다던데

누구네 남편은 외모가 진짜 끝내준다던데

누구네 남편은 돈 진짜 잘 벌어온다던데


자기는 그 '누구네'들보다 더 잘났는데

남편은 그냥 화려하지도 않고 남들에게 내세울 것도 없고 하는 것도 그놈의 장난감 조립이잖아.



점점, 얀순이는 바깥으로 돌았어.

호스트 바에서, '아니 뭐, 술자리에서 남자들도 여자 끼고 먹던데, 나도 바람도 아니고 좀 끼고 먹을 수 있지' 하면서 술을 먹는다던가

남편에게 주는 용돈을 줄이면서 '어차피 장난감 쪼가리나 살 거, 내가 좀 더 가치있게 쓰는 게 낫지' 한다던가

남편의 애정 표현도 거부하면서 '내가 남편보다 몇 배 잘났는데 당연히 나에게 그 정도 빌어야지' 한다던가


어느덧

부부관계도 한 달에 한 번도 안 되고

점점 사이가 소원해지게 되었어.



그러던 어느 날

그 날 따라 호스트 바에서 술을 진탕 먹은 얀순이가


아내에게 불만도 안 말하고

묵묵히 집 청소를 하는 남편을 보고 화가 치밀었어.


내가 그 같잖은 동정심과 알량한 호기심 때문에 저딴 남자에게 묶여서 사는구나


"야, 이 씨발, 넌 대체 하는 게 뭐냐?"


"... 미안해."


늘 평소와 같은 대화였어.

돈도 얀순이가 훨 많이 버니까 집안일은 늘 남편이 했어. 어차피 밖으로 나가지도 않잖아.

화도 얀순이가 훨 많이 내니까 욕은 늘 남편이 먹었어. 어차피 얀붕이는 무능력하잖아.


그런데

그 날은 좀 달랐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좀 달라지려고 노력할게."


평소보다 더

얀붕이는 풀이 죽은 채로 사과하고 있었고


얀순이는 얀붕이가 평소보다 더 숙이니까 '이딴 초라한 남자'에게 반한 자신도 엿같고

평소보다 더 많이 먹은 술 때문에 속도 점점 뒤집어지고

이 젊은 나이에 미혼인 애들은 자유롭게 놀고 기혼인 애들은 남편이 진짜 잘났는데 자기 인생은 꼬였고


"야, 꺼져. 오늘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오늘 내 눈에 띄지 마."


라고 하면서

5만원권 몇 장을 남편 얼굴에 던져버렸어.



얀붕이는 그 날따라 조금 더 우물쭈물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알았어..."


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어.



그리고 얀순이는

얀붕이가 나간 사이

얀붕이가 모아 온 레고를 홧김에 다 처분해버렸어.


자주 술 먹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걔네 아들에게 선물로 줘 버리고

몇 개는 지인을 불러다가 중고 장난감 매매시장에 처분하라고 줘 버리고

흔해서 상품성이 없는 건 다 가져다 버렸어.



다음 날

간신히 속을 진정시키고 출근하고

평소처럼 남편보다 한참 늦게 퇴근한 얀순이는


먼저 퇴근하고 집에서 우두커니, 멍하니 서있는 얀붕이를 봤어.


"뭐하냐?"


"... 내... 레고... 어디 갔어?"


"다 버렸는데? 다 큰 새끼가 장난감 가지고 노는 게 말이 돼? 허이구, 피터팬 증후군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순간

얀붕이의 눈에선 그나마 있던 생기가 사라졌어.


얀순이는 순간 오싹했지만

뭐, 저딴 병신이 뭘 할 수 있겠어.


그 날은 그냥 기분이 영 아니어서

술 한 잔 들이키고 잤어.


다음 날 아침

집에 얀붕이의 흔적이 없었어.


얀붕이의 옷도, 소지품도 다 없었고

종이가방 몇개도 없었어.


책상 위에는 '미안해. 나 이렇게는 못 살 거 같아.' 라고 적힌 쪽지만 남아있었고.



"병신, 알아서 뒤지던가."


툭 내뱉고 얀순이는 평소처럼 출근을 했고

회사에서 수근수근 대는 소리가 들렸어.


얀붕이가 그만뒀대.

뭐, 잘 됐지. 그 인간 꼴도 보기 싫었는데.


이혼을 해서 화려한 돌싱 생활을 즐길까

아니면 이혼을 좀 미루고 '나 유부녀인데 꼴리냐?' 이런 식으로 몇몇 남자를 가지고 놀까


그런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다가와서

자기 뺨을 때렸어.


"이 미친 년아, 내 남편이랑 뭔 관계야!"


얼떨떨해 있는 얀순이와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모르는 회사 사람들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여자를 말리려고 수위가 들어와 끌고 나가려는데

그 여자가 사진을 뿌렸어.


"내 남편이랑 뭐 한 거야, 이 씨발년아!"


그 사진엔

호스트바에서 남자랑 시시덕거리는 얀순이가 찍혀 있었어.



뭐 안 했어.

술 먹고 농담하고 바래다주고

입담이 좋으니까 명품 넥타이나 그런거 좀 선물 해줬었지.


몸은 안 줬어.

외모는 잘 생겼어도, 그럴 가치까진 안 보였었거든.

그냥 좀 가지고 노는 재미가 있는 남자여서 그랬어.


순간

얀순이도 화가 나서 맞서 소리쳤지.


"이 미친년아! 니 남편 간수나 똑바로 하던가! 난 씨발 그새끼가 유부남인 줄도 몰랐지! 남편 호빠에서 번 돈으로 지도 먹고 산 주제에 존나 깝치네, 씨발련이!"




그리고 또 며칠 뒤

이번엔 친구가 술 먹고 얀순이 앞에서 펑펑 울었어.


"씨발새끼... 잘 생겨서 좋다고 결혼했는데... 섹스도 잘 해서 결혼했는데... 씨발... 그렇게 많은 여자랑 하니까 당연히 잘 했겠지 개새끼..."


언제나 남편 외모를 자랑하던 얀순이 친구가

이혼 준비를 한다면서 펑펑 우는거야.



잘 생긴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사는 친구도 있었어.

술 먹으러 돌아다니면서도 남편과 행복하게 사는 친구도 있었어.


근데

자꾸 주변에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슬슬 자기도 불안한거야


그리고 마침 식당 TV에선

독신으로 지내다가 급사한 사람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고.



그 날 따라

집은 텅 비어 보였어.


방에는 먼지덩어리가 굴러다니고

쓰레기통엔 컵라면과 술병만 가득.


"하... 이러다 진짜 나도 급사하는 거 아냐?"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얀붕이가 떠올랐어.


집안일은 참 잘 했는데

그러고보니까 그 장난감 빼면 다른 불건전한 취미도 없었지

돈관리도 자기에게 맡겼고 허튼 데 돈도 안 쓰고


그냥 그럼

걔 다시 불러다가 살아야겠다.


인생이 중간만 가는게 좋다던데 나도 너무 화려하게 가려고 했나.



얀붕이의 행적은 찾기 쉬웠어.


걔네 할머니가 어디 입원했는지는 알고 있거든.

결혼하고 처음에 사이 좋을 땐 몇 번 갔었거든.


한 두달 하고 말았지만.



그 할머니는 아직 입원해있었어. 상황이 좀 심각해졌지만.

전에는 대화도 했었는데, 지금은 산소호흡기를 단 상태로 일어나지도 못 하고 있었어.


얀순이는 속으로 안심했어.


어차피 대화 하기도 어색하고

거기다가 지금 꼴 보니까 수술비 엄청 들어갈 거 같은데

얀붕이에겐 그럴 돈이 없거든.


돈으로 좀 꼬시면 넘어오겠네 싶었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눈을 떴어.


당황하는 얀순이에게

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말했어.


"아이고, 우리 손주며느리 왔구나..."


그리고 다시 잠들었어.



가슴이 아파왔어.

이제까지 내가 뭘 한 거지?


얀붕이가 나에게 잘못한 게 있었나?

얘네 가족이 날 못살게 굴었나?

아무 이유 없이 난 걜 괴롭혔는데.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생각도 못 하는데


마침 할머니를 병문안 오던 얀붕이와 마주쳤어.



"... 뭐 하고 지냈어?"


바깥에서, 자판기 커피를 두 잔 뽑고 하나는 얀붕이에게 건네면서 얀순이가 물었어.


"일 하고, 할머니 간호하고. 늘 그렇지."


가만 보면

옷에는 굳은 시멘트 자국

신발은 낡은 갈색 작업화


"노가다 뛰고 있었어?"


"나에게 언제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얀순이를 보면서

아니, 정확히는 얼굴은 얀순이를 향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한 공허한 눈으로

얀붕이가 물었어.


"이혼하려고 온 거 아니야?"


"아니, 다시 합치자고..."


메마른 얀붕이의 말에

얀순이는 다급히 본론을 꺼냈어.


"있잖아, 나 많이 반성했는데..."


"나도 반성 많이 했어. 다신 장난감 같은것도 안 가지고 놀 거고, 다신 네 눈에 안 띄도록 노력 할 거고. 앞으로 병신같은 내 인생에 너 안 끼우겠다고 많이 반성했어."


힐난하는 건지, 자책하는 건지 모를 얀붕이의 말에

얀순이는 순간 말을 잃었어.


다 마신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얀붕이는 물었어.


"용건은 끝난 거지?"


"왜, 할머니에겐 너랑 나 사이 파탄난 거 얘기 안 했어?"


지금 끝나면 진짜 끝날 거 같아서

실마리라도 잡으려고 얀순이가 물었어.


"걱정하시게 괜히 그런 거 왜 말해."


"그럼, 내가 수술비 다 댈 테니까, 다시 집에 들어와. 응? 내가 돈 다 낼게. 몸만 와. 할머니도 둘이 같이 오면 좋아하실 거잖아..."


순간 멈칫한 얀붕이에게

얀순이는 다시 확고히 말했어.


"몸만 와. 나머진 내가 다 할게. 잘 할게..."



그렇게 얀붕이는 다시 얀순이의 집으로 돌아왔어.

집에서 나갈 땐 자기 거 엄청 들고 나간 것 같았는데

들어올 때 보니까 속옷 세네 벌, 양복 하나, 구두 하나, 슬리퍼 하나.


이 집에

얀붕이의 것은 저렇게나 없었구나


그냥 얀붕이가 없어서 그렇게 공허하게 느껴졌구나.



샤워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거실에 이불을 펴고 있는 얀붕이가 보였어.


"... 침실... 안 올 거야?"


"난 거실에서 잘 건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얀붕이가 말했어.


"왜, 나 이불 쓰면 안 돼?"


그러면서 이불을 다시 개려는 얀붕이를 얀순이가 말렸어.


"아니, 같이 자면 좋겠..."


"싫어. 너도 나 싫어하잖아. 나도 포기했어."


얀붕이는

정말 아무런 감정 없이

화도 내지 않고 힐난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책을 읽듯 얀순이를 거부하고 그냥 누웠어.



얀붕이는 정말 몸만 왔어.

마음은 어디 버려둔 건지 모르고

그저 몸만 왔어.


얀순이는 애가 탔지.


결혼 초기 때는 서로 원했고

그 다음엔 얀붕이가 정말 애타게 구애해도 모른 척 하거나, 싫다고 거부하거나 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이렇게 구애해도 얀붕이에겐 아무런 자극이 가지 않았어.


그 때 얀붕이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고 후회하면서

얀순이는 정말 이것저것 다 해봤어.


향수도 뿌려 봤어

야한 속옷도 입어봤어


하지만 얀붕이가 자신을 보는 시선은

그냥 길가의 가로등 보듯 무심 그 자체일 뿐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는 길에


한 아이가 엄마한테 떼를 쓰고 있는 걸 봤어.


"나 레고 사줘... 레고오오오오!"


"안 돼. 너 저번에도 장난감 사달라고 졸라놓고 얼마 안 있다가 질린다고 했잖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순간

첫 만남때가 떠올랐어.


그거 만원 좀 넘는 레고를 조금이라도 싼 값에 사고 싶어서 자기에게 묻던 얀붕이가 생각났어.

돈이 얼마나 없었으면 그랬을까

얼마나 가지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초면인 자기에게, 남들 다 경원시하던 자신에게 물어볼 정도로 얼마나 소중한 취미였을까


충동적으로

이번 달 신규 출시 된 레고 세트 하나를 사들고 집에 들어갔어.



"여보, 이거 선물이야."


애써 미소를 지으며

얀순이는 레고 세트를 식탁 위에 두었어.


얀붕이는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고

다시 청소에 집중했고.



늘 이런 식이었어.

다시 재결합한 후엔

얀붕이는 청소, 빨래 등 집안일만 하고

자신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거실 구석에 이불을 펴놓고 눕고.


그래도 과거 취미를 되살리면

그러면 다시 자기를 봐 줄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레고 세트는 그냥 거기 있었어.


"저, 여보. 저거 선물... 안 조립해?"


"또 버릴 거잖아."


또 그 눈이었어.

자기를 향한 얼굴

그리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 공허한 눈.


"아니 이젠 안 그럴게..."


"필요 없어."



얀붕이가 다시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얀붕이의 물건은 더 늘어나지 않았어.

옷 몇 벌과 구두 한 켤레와 슬리퍼 한 켤레.


낡으면 낡은 대로 그냥 입었고

뭐 더 살 필요도 없이


그저 가끔 할머니 뵈러 가는 것 이외에는

집안일, 잠이 끝이었어.



얀순이는 서서히 미쳐가기 시작했어.

죄책감이 고개를 짓쳐들어갔고

공허함이 남편에 이어 자기까지 좀먹어갔어.


"우리 애 가지자. 응? 자기 할머니도 아이 보고 싶다고 했잖아."


다급하게

이대로 살면 진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

얀순이가 얀붕이에게 물었어.


"싫다며? 거짓말 안 해도 돼. 약속대로, 난 이 집에 그냥 있을게. 날 더 붙잡으려고 안 해도 돼."


"그냥 집에 있기만 하는 거잖아!"


무감정한 얀붕이에게

얀순이는 결국 다시 화를 폭발시켰어.


"부부잖아! 적어도, 가족이면 가족답게 같이 행동하고! 그런 거잖아!"


"그래서 그 때 내게 그랬어?"


평소의 표정, 평소의 어조로 얀붕이는 담담히 말했어.


"하긴, 늘 그랬지. 네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야 했지. 그래서 맞춰주잖아. 나 꼴 보기 싫다고 해서 거실 가서 잤고, 내 물건만 봐도 구역질난대서 내 옷도 세탁기 따로 돌려서 구석에 박아놓잖아. 왜, 얼마나 더 맞춰줘야 해?"


"그건 과거잖아!"


"나에겐 현재야. 얘기 끝났지?"


그러고선 얀붕이는

다시 거실에 이불을 펴고 누웠어.


멍하니 바라보는 얀순이 앞에서

얀붕이는 다시 잠에 들었어.

아까 싸운 게 거짓말처럼

그 어떤 감정도 없이.



얀순이는

얀붕이가 할머니 병문안을 간 사이

이제 광적으로 얀붕이의 소지품을 뒤졌어.


뭐, 뒤져봤다고 하기에도 뭐할만큼 적은 소지품이었지만.


속옷을 찾아서

'정자 냄새'가 나나 냄새를 맡았어.


자위는 안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니 그래서 몽정은 했을 수도 있으니까.

뭐 호르몬 같은거 맞는 게 아니면 기능이 죽진 않았을 거니까.


그리고 흔적을 발견하고

다시 미소를 지었어.



그날 밤

냉장고에 있던 생수에 수면제를 탔고


얀붕이가 일어나지 못하는 사이

얀순이는 얀붕이를 범했어.



한번만으로는 임신이 안 될 거라서

여러번 반복했어.


얀붕이는 자신이 뭘 하던 애초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채로 그렇게 계속.


눈이 점점 피로에 물들어가도

얀붕이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어.


얀순이는 그렇게 아이가 생길 때까지

생리가 멈출 때까지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뜰 때까지 그렇게 몇 번이고 얀붕이를 범했어.



몇주 뒤 드디어 임테기에 두 줄이 떴어.


얀순이는 환하게 웃으며

청소를 하던 얀붕이에게 말했어.


"여보. 나 아이 생겼어."


"..."


얀순이는 처음엔

남의 애라고 의심해줄까

그렇게 화를 내면서 감정을 다시 가지게 될까 기대했지만


얀붕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


"우리 애야."


무슨 소리냐고 따져 줄까

무슨 개소리냐고 외칠까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얀붕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


"당신이 잘 때, 당신과 관계를 가져서 얻은 애야."


소리쳐주길 바랐어.

역겹다고 외치길 바랐어.

그냥 자신에게 감정을 부딫혀주길 바랐어.


얀붕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


"기쁘지 않아?"


"..."


"무슨 말이라도 해봐..."


"..."


얀붕이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그저 하던 청소를 다시 재개할 뿐이었어.


"우리 애야... 아이라고... 무슨 반응 정도는 보여줘..."


"늘 그랬지. 내 의사는 늘 상관 없잖아. 이제 와서 뭘 바라는 거야?"


담담히 고하는 얀붕이에게

얀순이는 억지로 입을 맞추고 밀어붙였어.


"나 여보 사랑해. 응?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우리 아이도 키우고, 다시 알콩달콩 살자. 응? 제발..."


"우린 다정했던적이 없던 거 같은데."


담담히 고하는 얀붕이 앞에서

얀순이는 옷을 서서히 벗었어.


그리고 무릎을 꿇고 말했어.


"이렇게 빌게. 응?"


"빌어도 소용 없다고 그랬던 게 누구더라."



억지로 남편에게 애정 공세를 가하고

남편에게 성욕이건, 분노건, 어떤 감정이건 끌어내려고 했지만


그래도 남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어.


아직도 회사에선 남들이 자신을 보면서 군침을 흘리는 몸매야

성격에 대한 뒷담이 있었어도, 외모만큼은 뛰어나다고 뒷소문까지 들던 얼굴이야


그런데 그런 자신을 두고도

얀붕이는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았어.



얀순이는 점점 더 강하게 나갔어.


얀붕이가 밥을 먹을 때면 남편의 입에 고기나 그런 걸 집어줬어.

얀붕이가 목욕을 할 때면 같이 들어갔어.

얀붕이가 거실에 누우면 자기는 벗은 채로 옆에 누웠어.

그리고 얀붕이 가슴팍에 안긴 채로, 얀붕이를 올려다봤어.


얀붕이는

그저 무기물을 보는 태도로 얀순이를 바라보았지만


얀순이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어.


억지로 범하려고 한 날도 있었어. 얀붕이의 물건이 반응을 하지 않아서 실패했지만.



점점 배가 불러오고

얀순이는 집착적으로 레고 세트를 이것저것 사 모았어.


그래도 남편이 다시 취미를 되살려줬으면 좋겠어서.

전처럼 남편이 다시 감정을 되살려줬으면 좋겠어서.



그러던 어느 날

얀붕이의 할머니가 결국 눈을 감았어.


배가 불러온 얀순이는

그래도 얀붕이가 할머니의 죽음으로 어떤 감정이 되살아날 거라고 일말의 희망을 가졌고


얀순이가 출근 한 사이

얀붕이는 수면제를 수십 알 한번에 들이켰어.


퇴근하고 나서

비어버린 수면제 통과 숨이 멎어버린 얀붕이를 보면서

얀순이는 결국 미쳐버렸어.



경찰에 신고가 들어왔어.


"우리 딸 얀순이가 몇 달째 연락도 안 되고 출근도 안 하는데, 혹시 알아봐 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얀순이의 집 문을 뜯고 강제로 들어갔고

거기엔 썩은 시체 냄새와, 부패해 구더기가 생긴 시신 하나와, 그 시체를 알몸으로 껴안고 사랑한다고 반복하는 얀순이와

뜯지 않은 레고 세트가 수십가지 쌓여 있었어.





얀돌이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어.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갔고, 아버지는 죽었대.

그냥, 어머니가 자기 태어나기 전부터 사 뒀다는 레고 세트만 가지고 놀았어.


얀돌이에겐 외할머니와 레고 세트가 전부였어.


외할머니는 노환이 와서 점점 거동이 불편해졌고

얀돌이에겐 할머니 병간호와 레고 조립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마스에, 한 여자가 조카 병문안 선물이라고 레고를 사 왔어


못 보던 레고 세트에 순간 혹한 얀돌이는 그 여자를 뚫어져라 바라봤고

차가운 인상을 가진 그 여자는 물었어.


"제게 볼 일 있어요?"


"아니, 그 레고 세트 혹시 어디서 샀어요...?"




p.s. 일본 2ch 스레였나 거기서 남편 철도모형 버린 아내 이야기랑 레고갤 개념글이었나 그거 읽다가 생각나서 씀.

술먹고 정신 놓고 쓰다 보니까 ㅈㄴ 길어지네. 분량 조절 실패해서 미안.


소재 제공 및 과거글 모음 : https://arca.live/b/yandere/8328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