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yandere/9066283 전편링크


눈바람이 불어닥치는 야심한 겨울밤, 원래라면 저택의 모두가 잠들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저택을 박차고 나갈 듯이 두꺼운 옷을 껴입은 상태였다.


"챙길건 다 챙겼네. 조부님, 제멋대로인 손자라서 죄송합니다."


조부님과의 의견 갈등으로 소모적인 시간만 보낸지 수 개월이 지났다. 그 때만 해도 쌀쌀해지던 가을이었건만, 지금은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이 된 지 오래이다. 더 이상 대화로만은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직감한 나는 지금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른 도시로 야반도주할 계획을 세웠다. 이 집을 나갈 준비를 끝낸 나는, 우편함에 조부님께 남길 편지를 넣고 나면 이 곳을 완전히 떠날 것이다.


"조부님과 저택의 모두, 정말 감사했습니다."

딱히 듣는 사람은 없겠지만 머리를 깊게 숙이고 저택을 향해 인사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키워준 조부님과 저택의 고용인들에게는 얼마나 고개를 숙여도 모자라다. 이런 형태로 떠나게 되어 미안할 뿐이다. 특히 동생은 정말 걱정이다… 전에 내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서는 훌쩍거리며 안겨오던 아이였는데. 내가 사라지면 어쩌려나.


우편함에 편지를 넣고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쌓인 눈에 발자국이 생기며 뽀득뽀득 소리가 난다. 이 집에 남기는 마지막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모르게 애수의 감정이 느껴진다.  


"감사 인사는 얼굴을 보시고 하셔야지요. 작은도련님."


"윽, 아저씨?"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실내복 위에 두꺼운 겉옷을 대충 걸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가 이 집에 계실 때부터 일하던, 조부님의 수족 같은 사람이다. 물론 나와 동생도 어릴 적부터 돌봐 주었기에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라왔다… 


"오라버니… 어디 가?"


"너까지… 분명 자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왔는데…"


"자고 있는데 오라버니가 없어지는 꿈을 꿔서… 오라버니랑 같이 자려고 오라버니 방엘 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나, 펑펑 울어 버려서…"


"그래서 아저씨까지 깨운 거야?"


"저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작은 도련님, 그렇게 짐을 많이 드시고 어딜 가실 생각입니까?"


"…저는 여길 나갈 거예요."


"안돼. 절대 안돼. 오라버니는 여기서 나랑 평생 있어야… 된단 말야…"


"아저씨. 저는 조부님의 회사를 맡을만한 사람이 아니예요. 전 그저 음악만 할 수 있으면 만족하는 그릇 작은 인간입니다. 저보다 훨씬 똑똑한 동생이 회사를 더 잘 이끌 거예요."


몰래 나갈 작정이었는데. 이렇게 짐을 바리바리 싸든 상태로는 도망갈 수도 없다. 아저씨는 언제나 나와 동생의 말을 경청해 주었으니 대화로 이 상환을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정말 작은 도련님이 원하시는 겁니까?"


"저에겐 음악만 있으면 됩니다."


"오라버니!! 난 오라버니 말고는 다 필요없어! 그런데 오라버니는 나보다 소중한 게 생겨버린 거야!?"


몰래 나갈 계획을 세운 건 물론 이렇게 걸려서 다시 끌려들어가지 않기를 위해서였지만, 동생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아직도 내게 의존하는 동생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니 말이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내게 복받치는 듯이 애원하는 동생을 보니 착잡할 따름이다.


"동생아… 미안해. 이게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도, 네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일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난 가야겠어."


"각오를 굳히신 모양이군요, 도련님이 작은 도련님 나이셨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걸 받으십시오. 떠나는 길에 읽어보시길…"


"편지? 조부님의 필체잖아…"


"오라버니, 안돼, 가지 마. 지금 떠나면 나아… 오라버니 미워할 거야. 제발 나랑 같이 있어줘, 응?"


"가족은 언젠가 따로 살아야 하는 날이 온단다. 너도 나도 각자의 삶이 있잖니."


"싫어, 각자의 삶 같은 거 필요없어. 난 오라버니가 너무 좋아서 영원히 같이 있고 싶은데 그게 왜 안돼는 거야!?"


"아기씨,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기씨도 작은 도련님도 각자의 가족을 만드셔야 하니까요. 작은 도련님, 이제 가십시오. 회장님께선 말은 안 하셨지만 누구보다도 작은도련님을 사랑하셨다는 걸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저씨. 동생아, 난 이만 가보마. 내가 없어도 넌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오라버니, 안ㄷ… 아저씨!? 이거 놔요!!"


뒤돌아 떠나는 날 붙잡으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달려나오는 동생...을 아저씨가 붙들어 멈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붙든 팔을 풀어보려 하지만 연약한 동생에게는 무리였다.


"타지에서 몸 안녕하시기를… 안녕히 가십시오."


"오라버니이!! 싫어어!! 나가기만 해 봐! 영원히 미워할 거야!! 오라버니이이이이!!!"


"미안… 잘 있거라."


"아아아아아아아!!!"

눈 내리는 겨울밤, 그 어느때보다 고요해야 할 밤하늘은 동생의 눈물섞인 비명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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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님의 편지에는 아버지가 학생 시절에 어땠는지, 그리고 내가 그분을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해 빽빽히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조부님과 뜻이 달라 기업 승계를 거부하고 신학대를 가 성직의 길을 걸었다. 조부님이 주선하신 정략결혼도 파해 버리고 평범한 여성, 즉 우리 어머니와 결혼해 나와 여동생을 낳았다. 그렇지만 나와 동생을 조부님께 남겨두고 해외선교를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객지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을 마감하셨다. 당시 나와 여동생은 6살,5살이었다.

가묘에 마련된 당신의 자리 바로 밑에 아버님을 묻는 조부님의 얼굴엔 깊은 회한의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집을 떠나는 걸 필사적으로 반대했던 거다. 아들에 이어 너마저 잃으면 내 가슴이 어찌 될 지는 나조차 상상할 수가 없구나. 하지만 너도 네 아버지와 내 피를 이은 사내구나.

나도 젊을 적엔 집의 소를 몰래 팔아서 상경했었지.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편지와 함께 말이다. 너와 네 아비의 편력은 어쩔 수 없는 집안 내력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나도 더 이상 네 꿈을 막지 않으마. 하지만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다.


부디, 제발. 몸조심 하거라.'


"조부님…"

심야 버스에 몸을 싣고 조부님의 편지를 읽어내린 나는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캄캄한 하늘에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내 귀엔 아직도 여동생의 필사적인 애원이 들려오는 듯 했다.


동생에겐 몹쓸 짓을 했다. 동생의 의존을 알면서도 나는 내 꿈을 위해 하나뿐인 동생을 내치고 떠나 버렸다. '나보다 동생이 유능하니 동생이 회사를 이끌어야 한다'라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날 위한 형편좋은 변명이었던 것 뿐이다.


"미안하다, 동생아."

동생의 마지막 표정을 회상하며 눈내리는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기적인 오빠라 미안.




늦어서 지송..

어떨 땐 하루종일 생각해도 안써지고 어떨땐 1시간만에 써지고 글쓸때 영감이라는게 참 중요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