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시끌한 시내 바(Bar)


4인석에 앉은 사람들

연인과 온 사람들

미팅을 하는 사람들

모임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왁자지껄 떠들며 이야기를 나눈다.


제각기 다른 칵테일을 마셔본다.

누군가는 도수가 높은 갓파더를

누군가는 상큼하지만 취하는줄 모르는 스크류 드라이버를

누군가는 달달한 깔루아밀크를

누군가는 색깔이 화사한 블루하와이를 마신다.


서로가 시킨 술의 맛을 궁금해하고

나눠먹어보기도 한다.


매일 보는 사람들은 하루 있었던 일들을

한 달만에 보는 사람들은 한달동안 있었던 일들을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은 그 오랜 기간동안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고 웃고 울고 떠든다.


그리고, 바의 어원이 되는 Bar 형식의 테이블에서

여자가 위스키 한 잔을 홀짝인다.


글렌피딕 12년.

얼음 없이 스트레이트로.


둥그런 글라스잔에 담겨진 주황빛 위스키를

어두운 조명에 비추어보며 색깔을 살핀다.


달콤한 과일 향과 참나무통에서 숙성된 씁쓸한 향을 동시에 느낀다.

한 모금도 되지 않는, 반의 반모금을 홀짝인다.


40도의 높은 도수의 술인데도

처음엔 느껴지는건 향과 비슷한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다.

그리고 찾아오는 알콜의 쓴 맛과

그것을 상쇄시켜주는 숙성된 참나무 진액의 감칠맛이 뒤이어 찾아온다.


목으로 넘기면 식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타들어간다.

잔에서 입을 떼고, 숨을 한번 내쉬면

방금 자신이 들이킨 술의 향이 다시 느껴진다.


바텐더가 준비해준 기본 안주인 팝콘을 집어먹는다.


스마트폰으로 유희거리를 찾아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뒷 테이블에서 시킨 소세지 안주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술잔에 조명을 반사시키며 바라보기도 한다.


불타는 금요일을 

여자는 나름의 방법으로 불태운다.


혼자서 양주를 즐기기에 바는 그리 좋지 않다..

싱글몰트 위스키, 그것도 12년 짜리는 한 잔에 만원을 넘기기도 한다.

주변 주류상가에서 병 째로 구매한다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선택지도 많아진다.

아무리 밀봉을 잘 한다 한들, 뚜껑을 따버린 위스키는 맛이 변질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하나의 바에서 준비한 위스키는 그 가짓수가 적다.


헌데, 위스키의 본고장인 영국의 스코틀랜드만 해도

읍면단위 지역마다 위스키 양조장이 하나씩 있다.


하나의 양조장에서, 보리 한 가지 곡물로 증류해내고, 다른 원액과 일절 섞지않은 위스키가 

싱글몰트


개성이 뛰어나고 장단점이 명확한 싱글몰트를 섞어, 맛을 균일화시키고 단점을 상쇄시킨 블랜디드 몰트


보리 대신 다른 곡물로 만들어진 그레인 위스키를 섞어서

블렌디드.


그리고 숙성된 기간마다 달라지는 상품가치.


하나의 양조장에서 생산해 낼 수 있는 위스키가 십수가지고

그 양조장이 스코틀랜드에만 백개가 넘게 있으며

스코틀랜드만이 아니라 아일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모두 양조장이 있다.


심지어

영국과 연관이 있는 캐나다에도

영국인들이 넘어가서 세운 미국에도

영국인들이 침략했던 인도에도

영국인들과 친하게 지내던 일본에도

심지어 영국과 역사적으로 큰 접점이 없는 대한민국에도

술을 참나무 통에 담아 숙성시키는 양조장이 있다.


하루에 한 잔씩 서로 다른 위스키를 마신다 그래도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도 짧다.


여자에겐 위스키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물론 고를때 만큼은 신중하게 선택한다.

최근에 먹어보지 않았고

테이스팅 노트에 쓰여진 문구가 자신의 취향과 맞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도전을 즐길 수 있어야하며

변변찮은 호주머니 사정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대부분은 숙성년수가 표기조차 안된 염가의 위스키나

12년 정도의 위스키를 마신다.


달력에 표시할 만한 특별한 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기분이 특별해지는 날엔 용감하게 15년 위스키를 주문하기도 한다.


가끔 보리맛이 질릴때면

포도주나 사과주를 증류시킨 브랜디를 시키기도 하고


기분이 강렬해지는 날엔

해적들이 마시던 럼을 시키기도 하고


제임스 본드마냥 기분이 차분해지는 날엔

진을 시키기도 하고


그 날 따라 바에서 신나는 노래가 나오면

데킬라를 한 잔 시키기도 하고


미쳐버린 화가들마냥 모든게 짜증이날 땐

그시절 화가들이 먹던 것과 완전히 달라져버린

가짜 압생트를 한 잔 시켜보기도 한다.


그래도 돌고 돌고 돌아 위스키다.

여자는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외로움을 곱씹는다.


페르소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심리학적 이론.


사람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쓴다.


부모와 있을땐 자녀라는 가면을

자녀의 앞에선 부모라는 가면을

일터에 나가면 근로자라는 가면을

친구들 사이에선 친구라는 가면을

사람들과 사람사이에서, 모든 이들은 그 상황에 걸맞는 적절한 가면을 착용한다.


가면의 이름이 같은 것을 사회적 지위라 하고

같은 이름의 가면도 모양이 다른 것을 개성이라고 한다.


그러면, 지금 여자처럼 혼자서 있는 경우엔 어떠할까?

아무런 가면도 쓰지않은, 완벽한 민낮을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 마저도 하나의 가면이다.


남들에게 보이건, 보이지 않건, 아니면 자신 스스로를 마주보면서

‘혼자’라는 모습의 가면을 쓴다.


인간은 혼자서 가만히 있더라도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 시끄러운 바에서

여자는 혼자라는 이름의 페르소나를 쓰고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주변사람들이 자신을 관찰하는걸 관찰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멍하니 생각을 비우기도 한다.


위스키는 이 가면의 모습을 가꾸는 수단이다.


여자의 입맛에 위스키가 좀 더 알맞고

위스키의 사회적 인식이나 비싼 가격이 좋다.

때로는 위스키가 아닌

브랜디나 럼이나 진이나 압생트를 즐기기도 한다.


술의 쓴 맛은, 자신이 즐기는 고독에 감미료 같은 것이다.


이 분위기가 좋다.

모든걸 불태우고 주중을 지내고 나서, 회복기간인 주말이 오기 전

주중도 주말도 아닌 이 금요일 저녁이 좋다.


남들은 동료들과 연인들과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에서

혼자서 혼자임을 곱씹으면서 

그래, 우스갯 소리로 고상하고 우아한 척 티내는 게 좋다.


주중에 많은 사람들과 부딪혀 왔고

주말엔 혼자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티빙이든 넷플릭스든 돌려보니까

주중과 주말의 사이인 금요일 저녁엔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을 즐긴다.


그리고, 아무도 앉지 않는 여자의 옆 자리에

얼굴이 반쯤 상기된 남자가 앉는다.


이미 술을 한 잔 걸친 모양새다.

남자의 땀내음과 섞인 알콜향이 여자의 코를 찌른다.

여자가 눈살을 찌푸린다.


“하아… 여기요. 혹시 소주도 있나요?”


그리고 남자는, 바텐더에게 소주를 찾는다.


여자의 즐거운 주말 저녁 분위기가

옆 자리에 앉은 남자 덕분에 산산조각이 난다.


칵테일도 아니고

위스키도 아니고

브랜디나 럼이나 데킬라나 진이나 압생트도 아니고

하다못해 콜라나 사이다나 오렌지주스도 아니고

하다하다못해 레옹이 마시던 우유 한 잔도 아니고


바에서 소주를 찾는 남자라니!


여자는 남은 위스키를 들이키는 척

힐끗힐끗 남자의 용태를 살핀다.


자유로운 근로환경의 직장인인가?

후드티 정도까지 후줄근 하지는 않지만

캐주얼한 옷차림이다.


신발도 로퍼를 신었고, 재질도 가죽이 아니다.

일반적인 손목시계가 아니라 스마트 워치를 차고

귓구녕을 막고 있던 무선 이어폰을 그제서야 가방속에 집어넣는다.


동료들과 헤어지고 아쉬운 마음에 혼자 술을 먹을만한 바를 찾은 것일까?

거리가 먼 지역에 살아서, 막차를 놓쳐 아침끼지 시간을 보내려는걸까?

소주를 찾는거 보니, 이런 바는 처음인걸까?

방금까지 자욱한 연기가 가득한 곱창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을까?


여자는 남자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남자가 보여준 파멸적인 페르소나의 단면을 보며

보이지 않는 가면의 다른 쪽 모습을 상상한다.

 

“여기, 메뉴판에서 골라주세요”

바텐더는 능숙하게 접객을 한다.


물론 이 바에는 소주가 구비되어 있다.

누구나 양주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4명 5명이 있다면 한 명 쯤은 소주를 마시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주의 종류도 위스키만큼이나 다양하기에

이런 바에도 취급할 만한 증류식 소주도 있기 마련이다.


주세가 높지 않아서 여자가 홀짝이는 위스키만큼 비싸진 않지만

대신, 잔 단위로 판매하지 않는다. 

최소 375ml 에서 500ml 짜리 한 병을 모두 구매해야한다.


꼴랑 소주 한병에 5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남자는 메뉴판을 앞뒤로 넘기며 고민을 한다.

앞장에 즐비한 칵테일 이름은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다.

어쩌다 이름을 들어본 것들도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고

1oz밖에 안하는 위스키에 만원에서 이만원씩이나 들이붓기도 싫다.


여자는 고민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는다.

자신의 소박한 불금을 깨뜨린 남자가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이런데서 소주나 찾는 멍청한 아저씨같으니라고


고민을 거듭하던 남자가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양이 많아서 그러는데, 나눠 먹지 않을래요? 제가 살게요”


“네..? 무엇을?


“소주요”


이 남자는 기어코, 여자가 쓰고있던 혼자라는 페르소나마저 망가뜨린다.

즐겁고 즐겁던 여자의 금요일이 망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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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더가 투명한 소주병과 함께

소주잔을 남자와 여자에게 하나씩 준비해준다.


남자가 소주병을 열고, 여자에게 한 잔 따라서 건네준다.

그나마 병을 흔들며 회오리를 만들지 않는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 지랄을 눈 앞에서 보았으면, 그 병째로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칠지도 모른다.


역시 안주가 있어야 된다며

남자는 뒷 자리에서 사람들이 나눠먹던 소세지볶음까지 주문한다.

볶아진 토마토 캐쳡 향이

지금까지 마셔왔던 감미로운 위스키의 향기를 덮어버린다.


진절머리가 난다.

분노를 꾸욱 꾸욱 눌러담는다.


“마시던 술은 어떤건가요?”


남자는 자신의 소주를 단번에 들이키고서

옆자리의 여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글렌피딕 12년이요”

여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친절하게 위스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양주라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것 같은 남자에게

굳이 모를만한 상표명과 숙성년수까지 읊어준다.


“하하. 역시 잘 모르겠네요. 어떤 술인가요?”


남자는 끈덕지게 대화를 이어간다.


“위스키, 어디까지 아시나요?”


이 술이 위스키라고 대답해주는게 아니다.

이곳까지 와서 소주나 마시는 니까짓게 알아봤자

유서깊은 이 맥아 증류주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비꼬며 물어보는 것이다.


“아 위스키구나. 아는거라.. 발렌타인? 시바스리갈?”

 

남자는 자신이 아는 단편적인 지식을 말한다.

흔히들 말하는 3대 블렌디드 위스키 

발렌타인 

로얄 살루트, 혹은 시바스리갈

그리고 조니워커


선물용으로도 제격이고, 실제로 인기도 많다.


“그런 위스키는, 여러가지 원액을 섞어만드는데

 이 글렌피딕 12년은, 그 원액에 해당하는 술이에요.

 그래서 싱글몰트라 말하죠”


여자는 자신이 알고있는 지식을 뽐낸다.

당당한 자신의 취미중 하나다.

술이란건, 만드는 국가와 만들어진 역사와 브랜드 가치

향과 맛 색깔과 사회적 인식 그 모두를 같이 소비하는 것이다.


비록 한 잔에 십만원이 넘어가는 18년, 21년 등급을 먹어보진 못하지만

가장 낮은 12년 짜리라도, 그곳에 들어간 역사와 전통을 이해한다면

훌륭한 명주다.


그래서 한 잔에 만원이 넘어간다.

의료용 알콜처럼 만들어진, 당대 최고의 여자 가수들이나 선전하는

싸구려 소주가 아니다.


“아. 그럼 글렌피딕? 그것과 다른걸 섞어서 발렌타인을 만드나 보군요”

남자는 여자가 알려준 단편적인 지식을 조합해

결과를 도출해낸다.


당연히 틀리다.

발렌타인을 제조하는 회사와

글렌피딕을 제조하는 회사는 전혀 다르다.


원액을 회사끼리 공유하고, 여러 회사에 원액을 공급하는 중소 증류소도 있지만

적어도 발렌타인엔 글렌피딕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아… 아뇨. 다른 술에 들어가요. 그란츠에 들어가겠죠”

여자는 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에서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를 떠올려본다.


블렌디드 위스키 답게 저렴한 가격이라 몇 번 마셔본 기억이 있다.

글렌피딕이 들어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맛과 향이 비슷하고, 지향하는 바가 비슷하고, 회사도 같으니 어림짐작을 할 뿐이다.


“하하. 위스키를 만드는 회사도 여러 곳이 있나보군요”


“그럼요! 소주처럼 세네군데 회사에서 대량생산하는게 아니라구요.”


“뭐. 그렇게 생각할 만 하죠”


남자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한다.


“뭐에요. 내 말에 트집을 잡는 건가요?”


“아뇨아뇨, 그냥. 소주 만드는 회사도 여러 곳이 있으니까요”


남자는 소세지를 하나 집어먹는다.

뒤이어 소주를 들이키곤, 쓴 맛에 얼굴을 찌푸린다.

입가에 미소를 짓는 저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 소주회사가 여러개라도 있는건가요?”


“그럼요. 지금까지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해봤자.. 하이트 진로랑, 롯데랑, 부산에 뭐시기 하나랑… 아! 제주도에서 만드는 한라산!

 이정도 뿐이잖아요”


여자는 방금 남자처럼, 자신이 아는 얄팍한 지식을 읊는다.


여자가 말한 기업들에서…

하아…물론 지자체인 제주직할시에서 술을 빚어 팔지도 않고 

한라산은 상표명이지 기업명이 아니지만 


그런건 제쳐두고


여자가 말한 기업들만 합해서 ‘소주’ 시장의 판매량 90%를 차지할테지만

그 남은 부분을 가지고 수십 수백개의 기업과 상품들이 피터지게 싸우는게

‘소주’시장이다.


“하하, 뭐. 거의 그런 셈이죠”


반대로 말하면, 소주 시장의 90%는 희석식 소주 3~4개 상표가 차지하고 있다.

참이슬 단 하나가 50%에 육박한다. 

여자의 말이 틀리다고 잡아떼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뭐에요. 내말이 맞다는 거예요 틀리다는 거예요”


“솔직히, 저도 잘 몰라요”


남자도 아직 먹어보지 못한 소주가 많다.


“자, 봐봐요. 이것도 진로에서 만든거잖아”


여자는 아직 자신이 마시지 않은 소주의 병을 가리킨다.

병 한가운데 상표명이 떡하니 붙어있다.


일 품 진 로.


이런 바에서 들여놓는 증류식 소주야, 거기서 거기다.


“맞아요, 이것도 참이슬을 만드는 하이트진로에서 만든 술이죠”


“쓰기만 한 그런걸 왜 마시나 몰라요”


“그래도, 달달하잖아요”


“감미료를 들이 부었으니까 그렇죠.

 그러고도 대부분은 쓴 맛인걸요”


인생이 쓰면 소주가 달다 그러던가.

소주에는 대부분 합성감미료인 아스파탐을 넣는다.


위스키나 브랜디도 ‘가당’, 설탕을 타기도 한다.

하지만 품질을 균일화하기 위해서 제한적으로 사용하지

소주처럼 설탕의 수백배의 단 맛을 내는 합성감미료를

들이 붓다 싶이 해서 만들어내진 않는다.


“이거, 틀린 말이 하나도 없으니 뭐라 반박을 하지 못하겠네요”


“내말이 맞죠?”


“그래요. 한 잔 하실래요?”


남자는 여자에게 소주잔을 내민다.

한 잔에 여자가 시켜놓은 위스키 가격에 1/10도 안하는 소주에

자신의 글라스잔을 부딫혀주긴 죽어도 싫다.


남자가 예의상 따라놓은 소주잔을 들어

남자와 건배를 한다.

여자도 남자도, 소주를 목에 털어넣는다.


“크으….”


“아우 써.”

참이슬보다 나을 뿐, 일품진로의 맛도 달고 쓰기만 하다.


“여기 소세지라도 한 점 드세요”


“고맙네요”


안주도 나눠먹는다.


이런 적이 없었다.

혼자서 고독을 즐기며 주말을 맞이하는게 1년동안 52번 맞이하는 여자의 습관인데

52번 중 1번을 다른 남자와 수다를 떨면서 보내고 있다.


자연스럽게 자신과 말을 나눈다.

여자가 하는 말을 반박하거나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주거니 받거니,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오히려 남자를 가르치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게 여자다.

뭐, 그 사실이 여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1년에 52번씩 최소 208번을 행해왔던 자신의 습관이

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니까.


“우리, 내기라도 한 번 할까요?”


남자가 여자에게 승부의 제안을 한다.


“싫네요. 오늘 처음 보는 사람하고 무슨 그런걸 해요”


“에이, 그러지말고. 소주. 맛 없죠?”


“당연하죠”


“입맛에 맞는 맛있는 소주가 있다면, 어때요?”


“그럴리가요, 참이슬, 처음처럼, 한라산, 그 부산에 출장갔을때 먹은 뭐시기랑 이것까지 하면 5개는 마셔봤는데 전~부 최악이에요”


“제가, 다음 주 이 시간에 ‘맛있는 소주’를 대접할게요. 입맛에 맞으면 내 승리

 그러고도 맛없으면 당신의 승리”


“지금, 날 꼬시는건가요?”


“뭐, 남자가 여자한테 다음 번 술 약속을 잡는게 꼬시는거라면 그렇죠.”


“내기의 상품은?”


“당신이 이긴다면, 원하는 위스키 한 병”


“푸하하하. 위스키 한 병에 얼마까지 하는지 알고는 그래요?”


“아우.. 적당한 선에서 골라주세요”


“당신이 이긴다면?”


“제가 원하는 소주 한 병”


“그정도면 남는 장사네요. 좋아요. 큰~거 한장 준비해 놓으세요”


“0이 6개는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자연스럽게, 다음 주 약속이 남자와 여자사이에 잡힌다.


10만원 짜리 위스키라

여자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먹어보고 싶던

수십가지 블렌디드와 싱글몰트 위스키가 스쳐지나간다.



“뭔데 저녁까지 굶고 오라 그래요”


“안주도 같이 먹어야죠. 술만 먹으면 속 버려요”


“흐음. 위스키는 깔끔해서 그정도는 아니라구요”


여자의 위스키 사랑이란.

그래, 영화에서 보듯이

아무런 안주도 없이 얼음만 동동 띄워서 

창 밖을 바라보며 우수에 잠긴 채 고민과 함께 털어넣는게 위스키다.


“내기, 기억하죠?”


“그럼요. 내가 이기면 위스키 한 병~”


여자는 여유로운 듯 자신의 승리를 예견한다.

심지어 심판이 자신이다.


천에 하나 여자의 입맛에 맛있는 소주가 있다 한들

맛없다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이미 남자가 가져올 만한 소주 리스트는 확인했다.

참내… 소주를 참나무통에 폭 빠뜨리기만 하면 다인가?


비싼 소주 리스트중에

오크통에 재워서 판매하는 소주가 있다.

가격도 어마무시하게 비싸다.

이정도면 차라리 21년 짜리 로얄 살루트를 사고도 남을 가격이다.

숙성년수가 높은 달모어도 노릴 만 하다.


다들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나?

아니면 상품기획자들이 위스키시장의 강세를 보고

꿈에 부풀어 올랐나?


미쳤다고 그런걸 사먹느니, 마트에서 만원짜리 벨즈 위스키라도 먹고 말겠다.

그래, 만원만 더 보태면 유명한 아이리쉬 위스키인 제임슨도 있지

그것 참 좋다.


“오늘 갈 가게는 소주 바 입니다.”


“푸훕, 소주도 전문으로 하는 바가 있어요?”


“그럼요, 물론 소주만 다루지는 않지만요

 막걸리, 약주같은 것도 같이 팔아요”


“아저씨들이나 갈거 같아”


“아저씨들도 오고, 젊은이들도 오고 그러죠”



남자는 시내에서 유명한 소주 바에 여자를 입성시킨다.


내부는 깔끔하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났던 바보다 훨씬 단정하다.


“어… 비싼데 아니에요?”


“저번에 만난 바처럼 미친 가격은 아니에요”


세상에 일품진로를 그딴가격에 팔다니, 남자는 몸서리를 친다.


“뭐. 대접해주시는 거니 감사히 먹도록 하죠”


“잊지 말아요, 소주 한 병”


남자는 여자에게 내기를 상기시킨다.


“네네. 위스키 한 병이겠죠”


여자는 건성건성 대답을 한다.




“어서오세요~”


“두명이요”


“2인석으로 안내해드릴까요?”


“아뇨, 바 쪽으로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테이블에 앉자, 바텐더….그러니까 접객원이 메뉴판을 내민다.


“고르시면 말씀해주세요”


여자는 메뉴판들 펼친다.

수많은 술들이 여자의 눈에 사진과 함께 비춰진다.



“어…이게 다 뭐에요?”


“소주죠”


“정말요? 이게 다?”


여자가 보는 페이지에 종류가 수십가지다.

이게 다 소주리니, 참이슬과 처음처럼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도 보지도 못한 이름의 술들이 많다.


“아니에요, 보는 페이지만 소주고, 다음 장엔 막걸리, 그 다음장엔 약주랑…”


페이지를 넘기자 전국의 지도와 함께, 막걸리 메뉴판이 보여진다.

막걸리야 종류가 많은걸 알고는 있었다.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이 열렸다느니

각 지역별 막걸리가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느니

뉴스에서 말하는걸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 장엔 아저씨들이나 먹을 것 같은 복분자주, 인삼주, 

생소한 사과술 등등등 


왕주는 또 뭐야?


“제가 골라드릴까요?”


“그래야죠. 당신이 날 만족시키는게 이번 내기라구요”


여자는 펼치던 메뉴판을 팍 덮는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서 안쪽을 살핀다.


“여기요. 문배주 40도짜리 하나랑, 삼해소주 45도 주세요. 식사도 2인이요”


“뭐야. 안주는요? 저녁 먹고오지 말라면서요”


“메뉴판 안보셨어요?”


여자는 메뉴판을 가장 뒤편까지 념겨본다.

수많은 소주의 목록과 달리, 

식사란엔 단 한줄만 적혀있다.


점장추천, 기본 식사비 인당 15,000원, 추가금 별도

지금 장난치는건가?


그리고 그 점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주방에서 나와 테이블에 두 남녀를 맞이한다.


“어서오세요~. 또 오셨네~. 이번엔 여성분이랑 같이도 오셧네~”


점장은 남자를 보고 아는체를 한다.

여자를 데려온 남자를 보고 놀리는 시늉을 한다.


“어쩌다 알게된 분인데, 소주 처음드신데요. 

단 거 싫어한데서 삼해소주 시켰는데 괜찮겠죠?”


“좋지, 맛있지. 남자 손님은 뭐드시나?”


“저는 문배주 마시려구요”


“이야, 한 병씩 그걸 다마시면 오늘 집에 걸어는 갈려나”


“하하… 조그만 용량으로 부탁드려요”


“소주 처음먹는거 아니거든요!”


여자는 자신의 앞에서 앞담을 나누는 점장과 남자에게 항의를 한다.


“아휴. 그럼요. 안주는…어디보자

 여자손님은 매운탕은 드시나?”


아까부터 이 점장, 재수없게 반말하고 존댓말을 섞어서 쓴다.

거기다가, 이런 분위기에, 이런 바에서 매운탕?


한국말이니까 알아는 듣겠는데,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저…먹기는 하는데 쫌…”


“그럼, 족발하고 김치에 밥먹으면 되겠네. 괜찮죠?”


“네…네. 그렇게 주세요”


살다살다 바에 앉아서 족발을 뜯는 날이 올 줄이야.

가격을 보아하니 냉동족발이나 뎁혀서 나올것 같은데

냄새나 안나면 다행이다.


“우리 남자손님은, 뭐먹을래? 파전?”


“파전 좋죠. 부탁드려요”


“주문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방장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이런 곳은 처음이죠?”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네요”


오마카세면 오마카세지

이정도면 주인장 팔고싶은 안주를 내는 것이나 다름 없다.


밥집인지 술집인지 바인지 뭐시긴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

삼해소주니 문배주니 잘 알지도 못하는 술이다.

도수를 찝어 말하는거 보니, 여러 도수가 있나?

40도 언저리인걸 보면 위스키를 벤치마킹했나?


“한 주 동안은 어떠셨어요?”


“똑같죠. 일하고 일하고, 혼나고, 일하고”


식사가 준비 될 때 까지

남녀는 적당한 주제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정갈한 소반에 식사와 술 잔이 나온다.


여자의 소반엔 김치와 나물과 족발, 쌈장, 쌈채소, 그리고 술 잔이 하나

남자의 소반엔 파전과 김치와 나물류와 술 잔이 하나

메인요리만 다르고, 나머지는 이곳 점장이 직접 조리한 밑반찬인 듯 하다.


냉동을 뎁힌 족발이라 그래도

다른 음식과 잘 갖춰서 나오니 그럴 듯 하다.


그리고 바텐…접객원이 술을 한 병씩 옆에다 놓아준다.


“한 잔 하실까요? 따라드릴게요”


남자가 여자의 삼해소주를 열어서, 술잔에 따라준다.


“주세요. 저도 따라드릴게요.”


여자도 남자의 문배주를 열어서, 술잔에 따라준다.



“그럼 건배.”


“건배~”


마주앉지도 않고, 나란히 앉은 두 남녀가 몸을 틀어서 어색한 건배를 한다.


남자도 여자도, 각자의 소주를 입에 털어넣는다.


“크으..좋다.”

아저씨 같은 남자의 추임새


“...음”

여자도, 작은 추임새를 내뱉는다.


소주 하면 무슨 인상이 떠오르는가?

강렬한 알콜의 냄새, 쓴맛, 그리고 뒤에 찾아오는 아스파탐의 단맛

그리고도 덮어낼 수 없는 쓴 맛의 향연


헌데 이 술은 다르다. 

이것도 소주인가? 싶을 정도로 알콜의 쓴 맛이 나지 않는다.

위스키를 마실 때 처럼, 알콜 본연의 맛이야 당연히 난다.

하지만 싸구려 술을 먹을 때 느끼는, 그 기분나쁜 쓴 맛이 없다.


그리고 휘몰아치는 잔잔한 단맛.

아스파탐처럼 쓴 맛을 덮어내기 위한 강렬한 단 맛이 아니라

은은한 단맛이


그래. 단맛과 감칠맛이 어우러져서 입안을 휘몰아친다.

코로 느껴지는 꿈꿈한 향기도 나쁘지 않다.

누룩의 향이 살며시 펼쳐진다.


“뭐. 괜찮네요. 나쁘지 않아요”


한 병에 마트에서 천오백원짜리 소주와 비교하면

너무나 실례일 정도로 이 소주는 괜찮다.


이것과 그것이 같은 소주라면

캡틴큐와 멕켈란도 같은 위스키라는 소리다.

말도 안 된다.


그래도,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하다.

좀… 심심하다고 해야 할까?


단맛, 감칠맛이 잘 어우러지긴 하지만 거기까지다.


위스키나 브랜디의 테이스팅 노트에 적힌 것 처럼

수많은 향과 맛이 복합적으로 느껴지거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나눌만한 무언가도 없다.


이 술을 서양식 테이스팅 노트로 적으면

단맛, 감칠맛, 누룩향

이렇게 끝날 것이다.


그래. 맛이 단조롭다. 깊이는 있지만 다양하지 못하다.


“식사도 안하셨으니까, 밥도 드시면서 마시자구요”


남자는 자신의 앞에 놓인 파전을 찢는다.


기존에 먹어봤던 소주에 비해서 정말 맛있긴 하지만

자신이 즐겨먹는 양주와 비교하면 단조롭다.


이걸 맛있다고 해줘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든다.


여자도 잘 썰린 족발을 집어든다.

입에 집어넣고 밥과 함께 씹는다.

탱글탱글하고 간장양념의 맛이 느껴지긴 하지만

역시, 시판품을 데운 게 맞다.


같이 내온 김치에 기대를 걸고 한 입.

썩 괜찮다. 종갓집 김치를 사온 것일까? 직접 담근걸까?


배가 고픈김에 밥을 한 입 더 하고


“자. 짠 하실까요?”


남자가 술 병을 내민다.


“네. 좋죠”

여자가 술 잔을 받고, 남자에게도 남자의 술을 따라준다.


다시 한 번 짠.

입에다 털어넣고

맛을 느낀다. 음. 맛잇긴 하지만…


술잔을 내려놓고 밥을 먹는다.


옆에 있는 나물을 한 입

냉동 족발이라도 참 괜찮네

배고팠나?



—------------


“나 하나도 안취했다니까!

 매 주말마다 40도 짜리 위스키 먹는 사람이야!.

 꼬올랑 소주따위에 취할 꺼 가타?!”


여자가 남자에게 부축을 받아 시내 거리를 돌아다닌다.


“어휴 알았어요. 소리지르지 말고. 말고”


“딱 준비해놔여. 다음주에, 트레이더스 가숴, 위스키 한 병 살꺼니까”


여자는 술에 잔뜩 꼴아가지곤

자신이 이겼다며 위스키를 사달라 조른다.


남자가 온갖 상표명을 대며, 잊어먹지 말라고 한다.


“그래요 그래요. 내가 졌어. 사줄테니까. 집이 어디세요”


“뭘 집으로가, 한 잔 더 해야지!”


이 고주망태가 지금 뭐라고 하는걸까?

자신이 술에 취할리도 없다고 생각하고

취했다는 자각도 없는걸까?


“한 잔 더 하실 수 있겠어요?”


“그뤄엄~. 나 술 잘마신다니까”


남자는 머리가 아프다.

이길 작전이야 충실히 다 세워놨다.

바에서 단아하게 위스키를 홀짝이던 여자를 꼬시려는 마음도 있었고

자신이 마시는 소주에 고나리질을 하는 여자의 콧대를 눌러줄 생각도 있었다.


서양과 동양의 주류문화는 크게 다르다.


서양의 주류문화는 ‘술’ 만 먹는다.

와인이나 브랜디나 위스키같은 오크통에 침출시켜 만드는 술들은

그 하나로 완벽한 음식이다.


이런 술을 마실때 서양 코쟁이들은 안주를 먹지 않는다.

먹더라도 핑거푸드라 불리는 간단한 음식들을 먹는다.


카나페

치즈

나쵸

육포

감자튀김

햄이나 소시지를 자른 조각들을 말이다.


하나같이 술에서 복합적인 여러 맛이 느껴진다.

한 모금 마시면, 풍성한 맛이 휘몰아친다.

체계화도 잘 되어 있고, 숙성년수도 칼같이 나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만 하고, 

소비자들은 비싼 가격을 지불해서도

그 역사와 전통, 스코틀랜드, 양조장과 브랜드의 가치

그리고 위스키까지

모두를 즐기며 마신다.


반대로

동양의 주류문화는 ‘반주’가 기본이다.

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신다.


의사선생님들은 끼니에 술을 마신다 그러면 알콜중독이라 진단을 내리지만

동양의 주류문화는 안주와 술이 같이 묶여다닌다.


건강에 안좋으니 반주 하지 말라고 하는 의사도

집에 가서 저녁식사와 함께 소주를 마시는게 대한민국이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그렇다.

심지어 대한민국은 기름지고, 맵고, 국물이 많고, 짜고, 맛이 강렬한 음식들을 보면

술이 땡긴다고 말한다.


서양에서 정립된 현대의학을 기준으로하면

국가 째로 알콜중독이다.

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판단이다.


솔직히, 그 소주바는 안주가 변변찮다.

메뉴 하나하나는 냉동이나 뎁혀온 것이다

점장이 직접 조리한다 그래도, 전문점에 비하면 모자라다.


하지만, 그 점장이 전통주나 소주 만큼은 진심이다.

고객이 술을 시키면, 그 자리에서 술에 어울리는 안주를 만들어준다.

주방 안에서 만들어지는 안주의 종류가

밑반찬까지 합하면 백가지는 될 지 모른다.


달고 감칠맛이 넘치는 심심한 소주를 한 입.

그리고 밥과 함께 짜고, 맵고, 기름진 반찬을 한 입


소주를 다시 입에 털어넣으면, 달달한 맛에 입안이 개운해진다.


동양의 주류들이 ‘단 맛’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의 백주도 향도 좋지만 단 맛이 강렬하고

일본의 사케도 심심한듯 하면서 감칠맛과 단 맛이 중점이다.

심지어 서양에서 식사와 함께 먹는 샴페인이나 스파클링 와인도 톡쏘는 맛에 달달하다.


모두 ‘식사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 기본이라 그렇다.


기름기가 가득한 삼겹살에 쌈장까지 찍어먹을땐

맛대가리 없는 싸구려 소주가 가장 어울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두 음식은 궁합이 너무나 완벽하다.


대한민국에선 삼겹살을 사랑하는 만큼 소주가 잘 팔린다.


그리고, 그렇게 멋도 모르고 마시다보면…


“2차가자고 2차~”


저렇게 지가 취한줄도 모르는 술주정뱅이가 된다.

그 안주가 애매모호한 소주바가

소주를 즐기기엔 아주 좋다.


“맥주나 한 캔 할까요?”


“조오오치!”


남자는 여자를 이끌고 힘겹게 편의점을 간다.

땅콩과 육포를 사고, 맥주를 한 ㅋ…..


“어어어 넘어지지 말고, 꽉 잡아요 좀”


이대로 집까지 잘 갈수 있을까?



—-----


젠장, 낯선 천장이다.


토요일 아침


여자가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뜬다.

익숙치 않은 차렵이불

자신은 극세사 이불을 쓰는데

필시 자신의 집이 아니다.


좌우를 살펴보니 혼자서 침대에 누워있다.

침대를 슬쩍 들춰보니, 자신의 옷이 아니지만

이상한 프린트의 상하의를 챙겨입고 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디서부터 기억이 안나는거지…


분명 그 안주가 맛없는 가게에서

족발을 시켜먹고

소주를 마셨다.


밥을 다 먹고나니 심심해서 추가 안주를 시키고

남자의 파전을 좀 뺏어먹고

소주를 마셨다.


점장이 어묵탕을 내오고

소주를 마시고….


기억이 없다.


여자가 시킨 술이 45도 짜리였는데

한 병의 용량이 400ml는 되었다.


위스키보다 강한 술을 

위스키 반 병 보다 많게

단시간에 들이부었다.


참이슬을 기준으로 하면 알콜 함량이 세병은 된다.

필름이 끊길 만 했다.


여자가 금요일 저녁에 마시는 보통의 주량은

꼴랑 위스키 한 잔에서 두잔이다.


“일어났어요?”


침대 옆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던 남자가

여자를 바라본다.


“....여기가 어디죠”


“기억은 나요?”


“파전 뺏어먹던 것 까지”


“하아… 거기서부터 끊긴 거예요?”


“... 여기는…”


“저희 집이요”


“제가 여기는 어쩌다가..”


“술 더 마셔야겠다고 온갖 진상은 다 부려서요”


“어…그게…죄송합니다.”


“뭐. 됐어요. 해장이나 할까요?”


남자는 편의점에서 집어온 컵라면을 흔들어보인다.


“....네”

여자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해장 술 할래요?”


컵라면을 기다리는 3분동안 남자가 따지도 않은 맥주를 흔들어보인다.


“아…뇨”


“푸하하하. 어제랑 너무 다른거 아니에요?”


“저…그게…”


“아휴. 사람 무안하게 안그래도 돼요. 화 안났으니까”


남자는 기분이 좋다.

여자와의 내기에서 완벽하게 이겼다.


이 상황에서 저 여자가


‘소주는 맛없는 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남자와 여자는 컵라면을 들이킨다.


여자의 뒷 목에서 짜릿짜릿한 느낌이 올라온다.

위 벽에 붙어있는 잔여 알콜이 씻어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자, 그러면 내기 말인데요”


남자가 드디어 본론을 꺼낸다.

승패가 결정난지 장장 10시간이 지난 뒤에 

심판에게 결과를 묻는다.


“그게. 저. 맛이 어땠냐면…”


“왜요? 맛 없었나요?”


“맛…있었어요”


“야호! 저 이거 사줘요”


남자는 스마트폰을 내밀어 술 한병을 보여준다.


감홍로 40도 700ml

잔 2개 추가 구성 세트

인터넷 판매가  85,000원


“인터넷으로도 술을 팔아요?”


“전통주만 특별히 됩니다”


“소주…맞죠? 은근히 가격이 나가네요”


“그럼 막걸리로 할까요?”


남자는 옆으로 페이지를 넘겨 B안을 보여준다.


해창막걸리 18도, 900ml

한정수량 판매

인터넷 판매가 135,000원


“헐 뭐야, 막걸리가 무슨 10만원이 넘어요”


“더 비싼 것도 있어요”


남자는 꼴랑 500ml에 20만원 가까이하는

서울 양조장 골드막걸리를 떠올린다.


그 해 수확한 삼광쌀을 사용해서 만들기 때문에

원재료값만 싸구려 막걸리의 열 배는 된다.

 

“...아까 그 소주 사드릴게요”


“대신”


“대…신?”


“다음에 그 위스키 한 잔 사주세요. 나도 먹어보고 싶네”


남자는 조선 3대 명주로 꼽히는 

대한민국 식품 명인이 빚어낸 감홍로를 포기하고

여자와 위스키 한 잔을 고른다.


“지금 절 꼬시는건가요?”


“내기에서 이겼는데 고급 명주도 포기하고

 술에 꼴아가지고 바닥을 쓸고다니는 사람을

 챙기고 재우고 먹이고 술 한잔 사달라 말하는게 꼬시는거라면

 꼬시는거죠”


남자는 여자의 약점을 교묘히 헤집어 들어간다.


“하아… 그만. 한 잔 살게요.

 먹어보고 싶은 위스키 있어요?”


“맛있는 거”


세상에, 맛있는 위스키는 지천에 널렸다.

그 중에서 자신의 입맛과 호주머니 사정까지 고려해서 선택하는게 어려운 일이다.


“그니까…쫌. 좋아하는 맛이라도 있을거 아니에요”


“음…단거?”


“이게 무슨 소주도 아니고!”


여자는 탄닌 향이 강하게 베인 피트 위스키를 먹여버릴까 생각한다.

싸구려 스모키 스콧부터, 

피트의 시작이자 정점이자 끝인 탈리스커 10년도 좋다.

자신도 비싸서 먹어보지 못한 라가불린을 사줄까보냐.

 

그래도, 목넘김이 부드럽고, 단맛과 과일의 향미도 풍부하고

선물용으로도 입문용으로도 제격인 블렌디드 위스키

발렌타인 17년을 떠올린다.


아니면 브랜디는 어떠할까?

위스키에 비해 훨씬 달콤하고 향미도 풍부하다.

이름있는 레미마틴도 VSOP 정도로 끝낸다면 가격에 큰 부담도 없다.

까뮤 같은 중저가 브랜드는 눈 딱 감고 최고 등급인 X.O 도 노릴 만 하다.

싸구려 랑디는 X.O라도 부담이 없다.

랑디를 구할수만 있다면 말이지….



하아… 이번 달 지갑이 위험한데.



“손에 든 건 뭐에요?”


“당신 먹일 위스키요”


“술집에 술을 가지고 들어가도 돼요?”


“콜키지 요금만 좀 낸다면요. 차라리 이게 싸게 먹혀요”


한 주 뒤 금요일 저녁,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난 바 앞에서 인사를 나눈다.


큰 맘 먹고 하나 질렀다.


독재자의 술.

영국 왕실의 행사를 위한 술

고급 양주의 대명사

가격은 동급의 숙성년수를 가진 발렌타인이나 조니워커에 비해 조금 낮지만

이 술이 가진 위상과 품격은 꼴랑 값어치로만 나타낼 수 없다.


로얄살루트 21년.
시바스 브라더스에서 제조한 최고급 위스키.


7080세대에겐 뇌물로 통용될 정도로 그 값어치가 높았다.

지금은 한물 간 오래된 고급 양주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이미지가 전통과 역사에 기댄 권위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오, 딱 보기에도 비싸보이네요. 

근데.. 색이 좀 바랜 것 같네요”


“크흠. 올드 바틀이에요. 귀한거죠”


여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도 병입된 기간이 숙성년수에 가까울 정도로 오래된 올드바틀이다.

그리고 이런 것만 사 모으고 마시는 마니아들도 있다.

그래서 귀하다.


하지만 귀한게 꼭 가격이 높은 건 아니다.


서울의 남대문시장, 부산의 깡통시장 같은 곳에서

중고 위스키를 사고 파는 업자로부터 구매했다.


백화점이나 주류매장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최소 2/3은 저렴하다.

밀봉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품질에도 문제가 없고

오히려 과거에 만들어진 블렌디드 레시피가 훨씬 맛이 좋기도 하다.


그래도, 아무리 미사여구를 붙여모아도

유통경로가 불건전하다. 조세포탈이다.

싸면 다 이유가 있다.


주택이나 아파트단지에서 가끔씩 돌아다니는

양주매입업자의 트럭들.

현금이 급하거나, 선물론 받았는데 양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장식장에 보관중이던 뜯지 않은 양주를

이런 트럭에 내다 판다.

그러면 시장가의 절반이 안되게 판매할 수 있다.


그 양주들을 모아서

리쿼샵이라 이름 붙이기도 부끄러운

시장 상인들이 마진을 붙여 내다 판다.


매입가도 저렴하고, 주세나 개별소비세도 붙지 않고

현금으로 구매하면 부가가치세도 없다.


누군가에게 추석 선물 즈음으로 보내졌을 고급 위스키가

돌고 돌아서 다시 여자의 손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귀한 양주를 품에 꼭 안아든다.


콜키지 요금 3만원을 내고

가게에 입장한다.


바텐더가 오래된 코르크 마개가 부러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연다.


“잔은 온더락으로 드릴까요?”


바텐더가 두 남녀에게 술 잔의 방식을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위스키에 얼음을 섞어 차게 먹는다.

쓰디쓴 알콜 맛도 줄이고

익숙치 않은 피트향도 줄일 수 있다.

얼음이 녹아 도수도 낮춘다.


하지만 차가운 온도와 물 때문에 맛과 향이 너무 죽어버린다.


대신, 일본의 미즈와리 처럼 적당량 실온의 물을 섞어 마시면

향미를 크게 망치지 않고 알콜 도수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21년씩이나 숙성한 술에 물이나 타서 마시는게

여자의 머릿속으로 용납이 되지 않는다.


이게 얼마짜린데!


“노징글라스에 스트레이트로 주세요.”


바텐더는 입구가 좁고 바닥면이 넒은 둥그런 잔을 꺼낸다.


노징글라스

잔의 입구 쪽이 좁게 만들어져

술의 향을 모으고, 마실 때 더 잘 느끼도록 만들어진 잔.


위스키를 즐기는 가장 기본적인 잔이지만

바텐더들은 닦기 힘들어서 싫어한다.


바텐더는 노징글라스를 꺼낸다.

1oz 분량의 로얄살루트를 각각의 잔에 따라서

컵 받침과 함께 손님들에게 내어준다.


“양 적다고 소주처럼 한 번에 털어넣지 말고

 아주 조금씩, 나누어서 마셔요”


여자는 남자를 붙잡고 

향을 맡아보라느니, 조명에 비추어 색깔을 보라느니

구차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나눠 마시라고만 말 해주면, 저 입구가 좁은 노징글라스가 알아서 해준다.


남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영화에서 보던 것 처럼 잔에 들은 위스키를 흔들어본다.


여자의 조언대로, 반의 반모금, 입에 머금는다.


처음 느껴지는건 노징 글라스 입구에 모아진 위스키의 향이다.

고도수의 알콜향이 느껴지고, 그 뒤로 참나무 진액이나, 포도주에서 느낄 것 같은

화사한 향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찾아오는 알콜의 쓴맛,

그걸 덮어버리는 참나무 진액의 감칠맛과 약간의 단맛

탄닌 성분이 내는 쌉싸름한 맛이 난다.


쓰디쓴 카카오 가루에 가당을 해서 먹으면

아이들이 환장하는 초콜릿 과자가 되듯


쓴맛과 감칠맛과 단 맛이 어우러져

복합적이고 화려한 맛을 뽐낸다.


그래! 이 술은 맛있다.


“양주라곤 캡틴큐나 패스포트처럼 쓰다고만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네요”


“헐. 패스포트는 알면서 이 술이 뭔지는 몰라요?”


“이게 뭔데요?”


“이게 로얄 살루트에요. 저번에 당신이 말했던 시바스리갈을 만드는 회사에서 만들죠”


시바스 브라더스에선 대표적으로 3가지 위스키를 제조한다.

보급형으로는 패스포트

중급형으로는 시바스리갈

고급형이 로얄살루트


캡틴큐 같은 가짜 양주에 패스포트를 비교하는 것 부터가 실례다.

엄연한 스코틀랜드산 진짜배기 위스키다.


적당히 물에 타서 먹거나, 노징글라스를 사용해 찬찬히 음미한다면, 저렴한 가격에 좋은 맛을 즐길 수 있다.


하다못해 탄산수와 섞어 하이볼로 마셔도 좋은데.

폭탄주를 만든다며 맥주와 섞어서

죽어라 부어라 쳐마시니 그딴 쓴맛밖에 못느끼지.


맥주도 탄산이니 어쨋든 하이볼이라는 주장을

여자는 어이없는 개소리로 치부한다.


“확실히, 안주없이 먹는게 오히려 좋겠군요”


남자는 고정관념을 내려두고, 

현재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 평가를 내린다.


맞는 이야기다.

이미 강렬한 맛의 양주를

음식과 함께 먹는다면, 서로의 맛이 서로를 해친다.


딱 영화에서 보던대로,

창밖을 바라보며 우수에 잠긴 채

아무것도 없이 즐기는 한 잔.


그것이 가장 맛을 즐길 수 있는 취식법이다.


“하아. 좋네요”


여자는 주중에 쌓인 피로를

로얄살루트에 녹여내 홀짝 마셔버린다.


기대를 했다.

남자와 마시는 술자리에 기대를 했다.


그래서 다짜고짜 비싼 로얄살루트부터 질렀다.

주책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1년동안 52번씩 즐기던 혼자라는 가면의 페르소나도 즐거웠지만.


친구도 연인도 단순히 아는사람도 아닌

남자와의 관계도 재미있다.


이 남자 앞에서 쓰게 되는 페르소나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썸이라 말하기엔 낮간지럽고

술친구라 말하기엔 아저씨같다.


그리고 이놈의 회사는 여자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띠리리리링]


“하아… 이시간에 날 왜 찾는거야!”


여자는 울리는 핸드폰을 붙잡고

바에 얼굴을 들이박는다.


울리는 전화가 끊길 때 까지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기도를 올린다.


별 일이 아니라면, 부재중 전화 기록만 남는다.

월요일에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


‘호호호. 술 마시느라 잘 몰랏어요’


라고.


그리고 디오니소스도 무심하게

끊겼던 전화가 다시 울린다.


계속해서 울리는거면 필시 급박한 일이 생긴거다.

당직자도 똥줄이 타니 전화기를 붙잡고 있겠지.


“전화 받고 오셔요. 급한 일인거 같은데”


“그래서 싫네요…하아. 죄송해요

 금방 다시 올게요”


여자는 핸드폰을 들고 잠시 가게 밖으로 향한다.



“진짜. 전산망 문제를 왜 나한테 묻는거야

 전산실 직원들은 놀아?”


왜 네트웍 장비의 문제를 전혀 관련도 없는 여자에게 묻는 것일까?


사내 서버가 뻗었으니 급하긴 급한 일이지만.

적어도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당황하는 당직자에게 전산실을 친절히 안내해준뒤. 가게로 향한다.


들어가기 전에, 핸드폰을 거울 삼아서 머리를 매만진다.


웃는 표정을 한 번 지어보고.


“좋아. 오늘도 예뻐”


자기최면을 건다.


문을 살며시 열고서 가게에 들어간다.

코너를 돌아서 앉아있던 긴 테이블 끝자락을 향하는데.


남자가 자리에 없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가게 밖에서 서성이던 여자와 마주친 적이 없다.


“오빠 고마워~”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4인석 테이블 쪽에서

남자가 기어나온다.


여자만 3명이 앉아있는 테이블. 여자의 나이또래거나, 어린 것 같기도 하다.


“아 오셨어요?”


“아시는… 분들이세요?”


오빠는 뭐고 고맙다는 뭔소리인가.


“그게, 사업때문에 잠시…”


“아. 사업…”


하하. 

연애사업도 사업인가?

이 남자는 지금, 자신과 술 마시는 와중에도

다른 여자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 자리를 비운건가?


그래, 여자도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당직자인 다른 남자와 전화를 했다.


남자도, 사업 때문에 여성만 3명인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여자는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를 쭉 들이킨다.


"바텐더, 여기 바카디 151 있나요?"


"아뇨. 단종된지가 언젠데요"


"그럼 론디아노는?"


"있습니다."


"좋아요 여기 그로그 2잔, 찐하게!"


그로그도 영국에서 전래된 칵테일이다.

레시피는 간단하다.


설탕

물 적당량.


용량도 비율도 마음대로다.


영국 해군 선원들이

장기간 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물에 럼을 타 마시던게 이 그로그의 시작이다.


술탄 물인지

물탄 술인지

이걸 하루쥉일 마시고

술에 취에서 비틀거리던 걸 그로기라 말한다.


복싱같은 격투기에서

타격을 받아 비틀거리는 상태를 뜻하는 그로기의 어원이다.


영국 해군도 마시고

다른 나라의 해군도 마시고

그리고 럼이다 보니 해적들도 마신다.


그래

여자는 지금 강렬한 기분이 든다.


소말리아 앞바다에서

잭 스패로우처럼 행동하고 싶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의 머리통에 후장식 권총을 쏴갈기고

휘파람을 불며 부둣가를 돌아다니고 싶다.


플라잉 더치맨의 데비존스처럼

인정머리없고 포악한 선장이되어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에게 포탄세례를 선물하고 싶다.


지금 당장 로얄살루트의 병을 들어서

남자의 머리통에 내려친다 해도

경찰부터 검판사까지 여자의 편을 들 것이고

어쩔수 없이 집행 유예나 내릴 테지만


여자는 이 강렬한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그로그를 먼저 주문한다.


“그로그? 칵테일 인가요?”

영문을 모르는 남자가 여자에게 질문한다.


바텐더가 순식간에 내온 그로그 2잔.

손님들 사이의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게

바텐더의 철칙.


“네~ 한 번 쭈욱 들이켜봐요.

 뱃사람들의 술이죠”


여자도 남자도, 잔을 들고 그로그를 입에 넣는다.


달고 쓰고 고도수의 알콜향이 온몸을 감싼다.


“으웩. 엄청 쓰네요. 이거 몇도야?”

남자가 삼키다 말고 잔을 내려놓는다.


“There once was a ship that put to sea The name of the ship was the Billy O' Tea~”


여자는 꿀떡꿀떡, 70도의 그로기를 삼키고선

선장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손가락으로 권총을 만들어 장전하는 시늉을 하고. 발사되지 않은 총구에다 후~ 불어보기도 한다.


“괜찮아요?”


“그럼요. 이게 75도짜리 럼이에요 그래서 151이죠. 론디아노 151. 151프루프.

반으로 나눠서 75.5도”


“와. 엄청 높네요. 으 써라.”


“왜요? 좋지않아요? 달고. 쓰고.

 딱 소주같잖아요.


 이것도 그래요, 선원들이 먹던 싸구려 술에서 시작된게 럼이고 그로그에요. 하하”


“....네?”


여자의 말에 가시가 있다.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며 반문한다.


“왜 모르는 척 하세요. 제가 못본거 같아요?

 여자랑 술 마시러와선

상대방이 잠깐 자리비운 사이에

 다른 여자한테 찝쩍대는건 어디 술주정인지 참.”


“아닙니다. 오해가 있으신..”


“이야. 오해?

그럼 저 자리에 그로그같은 싸구려 소주가 놓여있는 것도 오해겠네요.

당신이 그 소주를 하나 건네준것도 오해고


 내가 멍청했지. 뭐 좋다고 이 비싼걸 사와선.”


“스읍…하아. 사장님? 아까 그 소주 하나만 더 주시겠어요?”


남자는 집중포화를 내뱉는 여자를 뒤로하고

바텐더에게 소주를 하나 주문한다.


여자는 헛웃음을 내뱉는다.

첫 날처럼. 이 남자 지금 기싸움을 하자는건가?


바텐더가 꺼내온 소주병을 남자가 받아든다.

투명한 병의 생소한 증류식 소주가 한 병

남자는 병을 뒤집어 들고, 식품위생법에 의한 한글표시를 보여준다.


“자. 이것좀 보세요”


남자가 내미는 표시를 인상을 찡그리며 바라본다.


원재료는 쌀과 밀로 만든 누룩. 정제수가 전부다. 

고급 소주의 기준처럼 감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 아래로 제조사의 상호와 주소가 나란히 나온다.

남자의 이름과 같은 상호의 주조장. 

주소는 충청남도 합덕읍 우강면…


“이…이건.”


여자에게 좋지않은 상상이 스쳐지나간다.


“이거, 우리 아버지가 만드신 소주에요.

 저쪽 테이블에서 저희 집안에서 만든 술을 드시길래, 서비스차 한 병 더 사드렸죠.


그래요. 우리집 한 60년 전부터 술 빚어다 팔아요. 

이웃 주민들이 생산하고 농협이 수매한 쌀,

남아돈다길래 품종 가리지 않고 사들여서 빚어다 팔던게 시작이래요.


그래요. 싸구려 소주죠. 

다른 술들에 비하면 역사도 짦고, 상품성도 떨어지고, 유통경로도 얼마 없어요.


시내까지 나와서 공급처좀 늘려보겠다고

한달짜리 월셋방 구해다 매일같이 술집들을 돌아다녔죠.


그래요. 당신이 평소에 먹는 술 한 두잔이면

우리 아버지가 빚은 술을 말통으로 살 수 있을지 몰라요.


오해할 만 했고. 제가 오해하게 행동했으니까.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그래도 소주를 파는 집안인지라

싸구려 취급은 참기는 힘드네요.”


남자는 여자에게 소주를 쥐어주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자신과 여자가 마신 그로그 2잔과

여자에게 쥐어준 소주 한 병을 결제하고나서

술집을 떠나간다.


여자는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다.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저…바텐더?”


처음으로, 이 바에서 바텐더에게 말을 건넨다.


“네. 손님”


“어떻게… 해야하죠?”


여자는 손에 들린 소주를 들고, 어찌 할 바를 모른다.


“술집 사장으로서 말씀드리면, 저 청년 아주 괜찮습니다.

 저 집 술도 판매량은 낮지만, 재구매율이 높고

 덕분에 안주 매출도 쏠쏠하게 올라가죠.


 배달도 저 주조장에서 직접 해주니까 중간 유통상이 마진도 안떼먹고

 가져다 달라면 당일날 바로 옵니다.


 글쎄요. 이 상황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지금 여기서 저한테 말을 걸게 아니라

 당장 나가는 남자를 쫒아갔어야죠.

 붙잡아서 싹싹 빌던가. 용서를 구하던가.

 어떻게든 다시 이 자리로 데려와서, 

 손에 들고있는 그 소주를 나눠 마셨어야 합니다.


 바텐더로서 말하자면.

 이미 열차는 떠나갔고, 막차시간도 놓쳐서 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손님이 하실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으니

 이 바에서, 맛있는 그 소주나 한 잔 드시지요.

 안주는 제가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손님을 위해

바텐더가 직접 소주병을 열어준다.


이런 바에는 어울리지 않는 동양식 도자기 술잔을 꺼내

여자를 위해 한 잔 따라준다.


여자는 방금까지 싸구려라 욕하던 소주를 단숨에 들이킨다.


“...크으….”


인생이 쓰면 소주가 달다 그러던가.

젠장. 소주가 참 달고 맛있다.



“아들. 공급처는 좀 알아봤나?”


“뭐…그럭저럭요”


남자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신규 고객 목록을 정리한다.


들어온 주문을 확인하고, 재고와 생산계획을 확인한다.


가업인 주조장을 잇겠다는 생각이 아니다.

가업이란건 하겠다 말겠다로 결정되는게 아니다.


어릴 때부터 이 주조장의 일을 도우며 자라왔다.

주조장이 집 창고에 놓인 증류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규모가 어느정도 커진 지금도 주조장 가장 구석엔 남자와 부모님이 생활하는 가정집이 있다.


가업은 일상이고 생활이다.

이 사업이 망하면 가족 모두가 길바닥에 나앉는거다.


가족기업답게 온 가족이 나서서 운영한다.


쌀을 끓이고 누룩을 찌고 술을 빚고

증류기를 돌리는 아버지


출하와 납품을 다니고, 원재료인 쌀을 구매하고, 생산계획을 세우는 어머니.


시대가 지나 HACCP부터 품질관리, 위생관리가 필요해지자

남자는 자연스럽게 식품위생과에 진학하고

각종 신고와 허가, 등록을 알아본게 남자다.


아버지의 일을 돕고, 어머니의 상하차를 돕는

외국인 근로자만 겨우 하나 고용하고 있다.


그래도 가세가 기울어서

남자가 신규 판로를 알아보러 시내 술집을 들쑤시고 다녔다.


요즘 어떤 술들이 많이 팔리고

젊은이들은 어떤걸 좋아하고

어째서 우리 집 술이 팔리지 않는지

시장조사를 다니고

고깃집과 술집 사장들에게 영업을 다녔다.


“거 너무 신경쓰지 마라. 니도 여따 목매지 말고

니 살길 알아봐야지.”


“아빠도 참. 안드리 형 듣겠어요”


남자는 사무실 바깥에서 쌀포대를 정리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바라본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족과 함께 넘어온

한 아이의 아버지.


체류기간이 끝나가는걸 남자가 나서서 비자를 연장해 주었다.


안드리 저 형이 없으면 주조장이 굴러가지 않는다.


남자는 배합기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쌀과 누룩과 물의 배합비율을 배운 것도 형이고

재고의 관리와 선입선출을 하는 것도 저 형이다.


“내랑 안드리랑만 해도 이 주조장 굴리는데

큰 문제 없다! 언제까지 이 촌구석에 있을래.


시내 나가서 여자도 만나고 그래야지”


남자의 아버지는 주조장보다 남자의 미래가 걱정이다.


남자보다 나이가 꼴랑 2살 많은 안드리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데…


시내에 나가서 일한다길래 

옳타쿠나 월셋방까지 구해다 주었는데.

나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도로내아들이다.


“여자는…뭐. 만나긴 했는데.”


“누고. 언년이고?”


도대체 충청도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유는 뭘까?


“아니에요. 그냥… 술 친구…”


“왜. 이야기 해봐라. 뭐 마셨는데.”


“몰라요. 위스키… 그 여자가 사줬는데.

 로얄…살…뭐시기”


남자도 여자에게 뭐 하나 잘한게 없다.

술 빚는 주조장집 아들이 뭐가 자랑이라고

있는 생색은 다 내고선 이 자리에 돌아왔다.


그 뒤로 여자에게 면이 서지 않아서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다.


“뭐시라꼬? 로얄살루트를 사줘따꼬?”


“맞아요. 그 이름이었어요. 좋은 술 이라고 하던데”


“니 시내 나가서 뭔 짓을 한기가?”


“왜요. 그게 뭔데 그래요”


“니니니. 그 여자 꼭 붙잡그래이”


“아니. 왜 그러시는데요”


“하모.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남자한테 로얄쌀루트를 사다주는 여자가

 세상 천지에 어디 이따꼬?

 

 니 어매 봐라. 니 아부지가 양주라도 하나 살라 그러면, 눈에 쌍심지를 키고 달려들잖냐.


 니 아배는 썸씽스페샬도 한 병 제대로 몬사묵는다.”


 소주 담그는 사람이 양주가 좋다고 하면 당연히 판촉에 좋지 않다.

 남자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마 없는 취미생활을 제한한다.


“도대체 그게 뭔데 그러세요”


“로오얄 살루트다 로오얄 살루트

 요 읍내 술가게에선 팔지도 않는다.

 그거 하나 살라믄 돈을 30만원은 줘야할끼다.”


“네에? 삼십만원이요?”


해봣자 십만원 할거라 생각했더니

두세배 되는 가격을 아버지가 부른다.


“그래. 그래서. 그 아는 지금 어디있는데.

 뭐하는 아고?”


“저…그게. 술먹고 싸우고 헤어졌어요”


“뭐라꼬?”


“그게… 아빠 만드는 소주가…싸구려라고 그래서… 홧김에…”


“마. 30만원짜리 술 사주는 아한테

 우리 쏘주가 눈까리에 들겄나?


 그 성질머리 한 번을 몬참아 가지고는.

 누굴 닮아서 그래?”


“아, 아빠 아들이잖아요”


남자와 남자의 아버지는 티격태격 싸운다.


안드리는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너, 왔다. 손님. 나와보세요”

안드리가 남자를 부르며 바깥을 가리킨다.

발음은 완벽한데, 아직 한국어 어순과 어미가 어지럽다.


“어… 저요? 누군데요?”


“모른다. 여자. 나와보세요”


여자? 설마…


“갸가? 갼가보다. 퍼뜩 나가본나”


“아 아빠는 쫌! 가만히 있어요.”


아버지의 등쌀에 떠밀려

남자가 사무실 바깥으로 향한다.


그리고 주조장 정문 입구에

저번에 싸우고 헤어진 여자가 서있다.



여자는 그 바에서 소주를 모두 마셔버렸다.

터덜터덜. 빈 소주병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의 면전에 대고 남자의 가족을 모욕했다.

술버릇이 고약하다 그래도 할 말이 없다.


주말동안 이불 구석에 틀어박혀서 티빙과 넷플릭스를 시청한다.


회사에 출근을 하고

멍하니 앉아서 화면만을 바라본다.


일은 하지도 않고, 

남자의 이름을 가진 주조장을 찾아본다.


전통주인지 온라인에서 판매를 한다.

상품 설명을 찾아본다.

주안상에 차려진 소주병이 보이고

주조장의 전면 사진도 보인다.


남자와 꼭 닮은 중년의 남자도 보이고

충남 지역 쌀로 만들어진 명품 소주란 광고문구도 보인다.


가격은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355ml 단일 규격

23도 짜리는 병당 5천원

40도 짜리는 병당 1만 8천원

52도 짜리는 3만원


다른 전통주에 비해 후기 글이 좀 적다.

대부분 별점 5개와 함께 맛있다는 후기가 많다.


여자는 계속해서 스크롤을 내린다.

그리고, 드문드문 별 3개나 1개짜리 후기가 보인다.


[이 돈이면 양주를 사먹지]


[소주 치고 비싸다. 뭐하러 전통주 사나]


[위스키보다 맛없음. 비추]


부끄럽다.

남자 앞에서 온갖 허세를 다 부리던 자신의 모습이

이 댓글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위스키에 취한게 아니라

위스키를 마시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서

앞뒤를 살피고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다.


너무나 부끄럽다.


소주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3병이면 무료배송이라 3병을 담는다.


결제버튼을 누르려다가. 이내 포기한다.

떡하니 주문자명에 여자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남자가 알아볼지도 모른다.

이제와서 온라인으로 소주를 시키는 꼴을 보면

남자가 뭐라고 생각할까?


음험하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사과를 하고싶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다.


계속해서 판매 페이지의 스크롤을 내린다.


3가지 밖에 없는 원재료가 나열된다.

쌀, 누룩, 정제수

그리고 상호가 나오고. 주조장의 주소가 나온다.

교환, 환불은 2주 이내로.


찾아가볼까?

직접 얼굴을 보고 사과를 해야할까

고민이 된다.


사죄를 해야겠다 생각하는건지

남자를 만나보고 싶은건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설령 찾아간다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

남자를 불러내면 나오기나 할까?

하염없이 주조장 바깥에서 남자를 기다려야 하나?

애초에 남자가 저기에 있긴 할까?

다른 지역에서, 다른 술집을 돌아다니며

어쩌다 만난 다른 여자와 술을 마시는게 아닐까?


왜 자신은 꼴랑 세 번밖에 만나보지 않은 남자에게 이리 신경을 쓰는 걸까?

찾아간다면 맨손으로 갈 수는 없는데 무엇을 사야하는가?

양주를 사가자니 면이 서지 않고

소주를 사가자니, 소주 주조장에 다른 회사에 소주를 들고가는 것 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맥주나 와인도 웃기는 일이긴 매한가지다.


제발 술 생각에서 벗어좀 나라 이 미친년아.

술 때문에 온갖 사고는 다 쳐놓고선

다시 술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는 자신이 웃기다.


판매페이지를 계속해서 내린다.

판매자가 적은 맛에 대한 간략한 평가와 함께

추천 안주가 나열된다.


여자는, 페이지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바라본다.



“여긴 어떻게?,

 하아. 아닙니다.

 저희 집 주소야 사방팔방 술병에 적어서 팔리고있긴 하죠.”


“안녕…하세요”


여자가 큼지막한 쇼핑백을 들고

남자에게 꿈뻑 인사를 한다.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주말이 되자 마자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나 다름없다.


계획도 없고, 할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고싶은 말이야 많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여자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용건을 묻는다.


남자도 불편하긴 매한가지다.


“저..저기… 그게”


여자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 손에 든 쇼핑백만 끌어안는다.



“대장, 뭐냐? 저거.”

사무실 안쪽에서 안드리가 남자의 아버지에게 묻는다. 


한국어 발음은 완벽한데 어순과 단어선택이 영 적절치 못하다.

남자의 아버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라게, 뭐시다냐. 여자를 데리고 왔으면

퍼뜩 소개라도 시키주던가. 안으로 안내를 하던가


사내새끼가 되가지고 뭐하는 짓이다냐”


자신은 아들내미를 저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항상 여성에게 친절하고, 신사답게…

말 했었나?


“동생, 결혼해?”


안드리도 뜬구름 잡는 소릴 하긴 매한가지다.

본국에선 연애결혼이 흔치 않기도 하고.

자신의 아내도 부모가 점찍어준 약혼녀였다.


여자가 홀로 남자를 찾아온다는건

안드리 입장에선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고

기껏 찾아온 손님을 멀뚱멀뚱 세워놓기만 하는 것도 안드리의 종교관에선 굉장한 실례다.


당장 실내로 모셔와 상석에 앉히고

따뜻한 차와 식사를 대접부터 해야한다.




“이거… 드시라고, 가져왔는데.”


여자는 품에 안은 쇼핑백을 내밀지도 않으면서

남자에게 가져온 선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뭔데요?”

남자도 퉁명스럽게 이야기한다.

짜증도 나고, 이해도 가지 않고,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빨리 보내버리고, 들어온 주문을 정리해서

박스포장을 해야 안드리 형이 상차하고, 어머니가 배달을 간다.


주말에도 지역 중소 주조장은 바쁘다.


“음식을 해왔는데.

 입맛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했거든요.


 드시면서… 그게…”


그제서야 남자에게 쇼핑백을 건넨다.

쇼핑백 안에는 코스모스에서 만든

보온 도시락이 담겨있다.


“이게 뭐죠?”

남자는 여자에게 이 음식의 의도를 묻는다.

이걸 왜 가져온건지.

이걸로 자신에게 무슨 말이 하고싶은건지 묻는다.



여자가 지천에 떨어진 남자를 찾아와서

직접 준비한 음식을 내미는 상황이

어떠한 일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현실을 쫒아가기엔 여자의 행동이 뜬금없다.


“닭가슴살 구이랑.

 계란말이랑.

 그…부대찌개랑

 연근볶음하고. 김치하고…

 싸왔어요”


익숙한 메뉴들.

분명히 온라인 판매 페이지에 올려놓았던 남자네 주조장 추천 안주들.


저 음식들이 골라진 건 별 뜻이 있는게 아니다.

부대찌개는 안드리 형이 좋아하는 음식.

닭가슴살 구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계란말이도 아버지가 좋아하고

연근볶음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여자가 무엇을 보고 찾아오고

어디까지 살펴보았고

어떤 생각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지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하아… 잠시만요.”


남자는 내미는 쇼핑백도 받아들지 않고.

성큼성큼 주조장 안쪽으로 향한다.


여자는 오도카니 혼자 남아 

저번처럼 떠나가는 남자를 바라본다.

씁쓸하다. 그 때 처럼 버려진걸까?


“아빠. 나 잠깐만 나갔다올게”


“어? 어어. 갔다 온나.”


“좀 늦을지도 몰라”


“개안타. 내일 와도 개안타”


“쫌. 그리고. 안드리 형, 술 한…두병만”


“몇 도? 필요하나”


“어…40도짜리”


“좌측 파레트 안에 있다. 위에 박스”


“고마워”


남자는 사무실 문을 닫고.

주조장 출하대기품에서 술 두병을 꺼내고

다시 여자에게 다가간다.


“차, 가져왔어요?”


“아뇨. 저…버스타고 왔어요”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알콜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이런 모습인가?

여자의 실제 모습은 이것과 가깝나?


자신의 월셋방에서 재우고 난 다음에도

이런 모습이긴 했는데.


“술 한 잔 할까요?

 경치 좋은데 알고 있는데”


남자는 쇼핑백을 받아들고

여자를 데리고 농지 주변 정자로 향한다.


정자 위에 돗자리를 하나 더 깔고.

여자가 준비해온 음식을 펼쳐놓고.

종이컵에 남자가 가져온 술을 따른다.


시내에 있던 바는 아니지만

바에 있던 사람들 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매일 보는 사람들은 하루 있었던 일들을

한 달만에 보는 사람들은 한달동안 있었던 일들을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은 그 오랜 기간동안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고 웃고 울고 떠들듯.


여자와 남자도 그간 있었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한다.




“형. 나 왜 안 말렸어”

남자는 납품용 트럭의 운전석에서

조수석에 앉은 안드리에게 하소연을 한다.


“말렸다. 분명. 그리고 중요한 손님이다. 

 불평하지마라. 애송이”


안드리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남자에게 받아친다.


“아니, 언제 말했어.”


“듣지 않은건 동생이다. 

안드리 형은 말했다. 결혼, 무덤, 남자.”


어순과 어미가 엉망진창이라도

안드리의 말은 일목요연하고 알아듣기 쉽다.


“하아… 운전이라도 대신 해주면 안돼?

 나 어제도 야간에 납품다녀왔단말야”


“안된다. 나, 사장. 형. 

 너보다 직급도 나이도 많다.”


수 년간 안드리를 꼬시던 아버지가

결국엔 안드리에게 사장 직함을 물려주었다.


안드리가 입고 있는 작업복 상의엔 


[사장 안드리]

라는 자수가 새겨져 있다.


아들을 내버려두고 사장 직함을 외노자에게 물려주는게 말이 되냐고?


당연히 된다. 이 주조장에서 사장이란 직함은

반짝반짝거리는 쇠사슬에 지나지 않는다.


경상도에서 태어난 아버지가

머나먼 충청남도에 무슨 연이 있어서

사장이 되었겠는가.


이 주조장의 시작은

정확힌 남자의 외할아버지가 시작하셨다.


외할아버지의 주조장이 세가 커지고

그곳에 직원으로 들어온 것이 남자의 아버지.


돈을 벌기 위해 경남 산자락을 떠나

충청남도 평야까지 일자리를 찾아온 아버지와

결혼한게 남자의 어머니.


외할아버지에게 배합비율을 배우고

증류기 조작법을 배우고

쌀포대를 나르다 보니 

사장의 직함을 달게 되었다.


물론 아무런 권한도 없다.

원재료의 수급도

판매처와 고객 명단 관리도

자금의 관리도

전반적인 생산계획도

다 어머니가 짠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지시하는데로 술을 빚는다.

주조장의 사업자등록증엔

대표자로 남자의 아버지가 올라와 있지만

등기부 등본과 주주명부엔

어머니의 명의만 올라와 있다.


바지사장? 월급사장?

그것이 얼마 전 까지 남자의 아버지의 위치였다.


이제는 장성한 자식이 결혼도 했겠다.

주조장의 [사장]직함을 하나뿐인 직원에게 물려주었다.


자식인 남자는 어머니와 달리

주식도 가지고 있지 않고, 직함이 있지도 않다.

생산계획도, 출하관리도, 원재료 수급마저

남자가 죄다 관리하는데


유교국가의 후예도 아닌 인도네시아 출신인

안드리가 나이와 직함을 들먹이며

남자에게 권위를 내세운다.


“아 진짜. 형 두고봐. 

 내가 등기이사 되면 확그냥”


“잘라라, 안드리 하나도 안두렵다.”


안드리는 창문을 내리고 딴청을 피운다.

안드리도 주조장이 아니면

이정도 급여를 받으며 일 할 곳이 없지만


남자의 주조장도 안드리가 없으면

증류기에 원액을 넣고 돌릴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식품위생과에 나온 남자는

이런 일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



하나뿐인 사장과

하나뿐인 사무직 관리자가 

술을 한가득 싣고 향하는 곳은


한 회사의 야유회.


남자의 아내인 여자가 다니는 회사에서

임직원 야유회에 남자네 소주를 한가득 주문했다.


남자의 주조장은 매상을 올려서 좋고

여자의 회사는 도매가로 질 좋은 소주를 한가득 살 수 있어서 좋다.


회사 자금을 개인 직원의 사적인 용도로 돌리는게 아니냐 이야기하는 감사들에게

주조장의 40도 짜리 소주를 입에다 물려주니

대번에 조용해진다.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이면

여자의 회사 이메일로 소주를 구매하고 싶다는 회사 동료들의 주문이 폭발한다.


“하아… 황금같은 주말에도 이게 뭔지.”


왜 총각때 좀 더 놀러다니지 않았을까.

왜 자유로울 땐 자유가 좋은지 몰랐을까.


왜 그날, 찾아온 여자와 함께

안드리가 챙겨준 40도 소주를 2병이나 들고 나갔을까.


남자는 한참을 투덜대며 목적지에 차를 주차한다.


[나 왔어]


문자를 여자에게 송신한다.


대번에 전화가 울린다.


“여기야! 여기!”


여자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든다.

여자의 뒤쪽으로 젊은 직원들이 달려온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척척척 트럭에서 소주 박스를 내려다 나른다.


“이번에도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하는 시늉을 한다.


“뭐래 정말. 당신도 와서 한 점 먹고가.

 수육 시켜놨어”


“아냐, 돌아가 봐야지. 술도 마시면 운전은 누가하라고.”


소주가 지천에 널렸는데, 

수육만 먹고 돌아가는건  한식 문화에 대한 실례다.


“뭐 어때. 차는 놔두고 가면 되지.

 안드리씨는 벌써 먹고 있으신데?”


“아 형. 거기서 뭐해!”


안드리가 야유회 자리에 앉아

직원들과 술잔을 나누고 수육을 집어먹는다.

젓가락질도 능숙히 잘한다.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하는건 실례다. 불신자.”


저 나이롱 신자가 뭐라고 떠드는걸까.

돼지고기와 술은 이슬람에서 금기시 되는게 아닌가?


“당신도 한 입 하고가.

 뭐 어때. 내일 납품 있는것도 아니잖아.”


“뭐…그렇긴 한데”


여자의 손에 이끌려서

야유회 한 자리에 앉는다.


결혼식 하객으로 왔던

여자의 직장동료들과 인사를 나눈다.


돼지고기 수육을 한 입.

기름지고 탱탱한 식감이 입안을 감싼다.


여자와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따르고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짠!


달달하고 깊은 감칠맛의 소주가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낸다.


뭐. 나쁘지 않다.

소주도, 결혼생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