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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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처음 만난 날이 오늘이었죠? 그럼 오늘은 저희의 기념일이네요. 혹시 아저씨 오늘 시간 있어요? 있다면 저랑 같이-."


 나보다 한참 어리면서, 나보다도 훨씬 어른스럽고 차분하게 말하는 네 모습에.
나는 어른한테 장난치는거 아니라며 네 머리를 딱,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약하게 때렸다.

지금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어른이 나니까 날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거지, 정말로 근사한 어른을 만나면 금방 바뀔 마음이 아닌가.


"누구 경찰서 잡혀갈 일 있냐?"


 아무리 어른스럽다고 해도, 이제 겨우 고등학생밖에 안 된 여자애를 건드려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게다가, 저만한 일등 신붓감을 도대체 어떤 사람이 변변찮은 직장인에게 시집보내려 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현실을 직시하게 해 주어야겠단 생각으로 엊그제 맞선을 보고 왔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후우... 그리고, 내 나이가 낼 모레면 벌써 30이다 30. 이제 슬슬 진지하게 결혼 상대도 찾아보고 그래야지. 안 그래도 엊그제..."

"그만, 그만하세요."


 내 말에,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내 말을 가로막는 모습에. 무슨 일 있냐며 다가가려 하자-


"결혼이 하고 싶으시면 저랑 하면 되잖아요. 저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데요? 공부도 잘해, 얼굴도 예뻐. 최근에는 투자한 주식도 올라서 아저씨한테 선물도 해 드릴만큼 돈도 벌었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에, 어른으로써 따끔하게 한 마디 해줘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입을 열려 한 그 순간.

갑자기 피식 웃으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져 눈살을 찌푸리며 집에 돌아갔다.

나 원... 검은 머리 짐승은 도와주는 게 아니라더니, 

그동안 칭찬해주고, 슬퍼하면 위로해주고 했더니 버릇없이 구는 모습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에휴... 생각해서 뭐 하겠냐, 잠이나 자자..."


 냉장고에 있던 어제 먹다 남은 소주를 마시고 뜨끈한 바닥에 이불을 깔고 드러누웠다.

술기운 탓인지 몽롱하여,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잠이 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커어어..."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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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저는요, 아저씨가 절 구원해준 그 순간부터 늘 아저씨밖에 없었어요."


 술을 마시기라도 한 것인지, 술냄새를 풍기며 자고있는 아저씨의 옆에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이대로 있다간 죽겠다 싶어 근처 건물의 계단에 앉아 떨던 내게 다가와 준 것이 바로 아저씨였다.

남들은 그저 동정의 눈빛으로 힐끗힐끗 쳐다만 보던 내게 다가와, 멍자국을 보곤 경찰에 신고해주고 친척집에 맡겨질 때까지 

돌봐준 것이 바로 아저씨였다.


"그런 아저씨가 날 버리려고 하면, 나는 참을 수가 없잖아."


 이불을 걷어내곤, 잠든 아저씨의 위에 올라타. 아저씨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애초에,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걸. '기정사실'만 만든다면... 

아저씨가 얼마나 저항하든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게 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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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떴을 때에는, 옷을 벗고 내 옆에 행복하게 누워있는 너와 저 멀리 벗겨져 날아가있는 내 속옷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에, 언제 일어난건지 날 보며 밝은 미소를 짓는 너.

내 인생이 아주 단단히 꼬여버리고 말았음을, 나는 곧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하룻밤의 관계만으로 임신이 될 리는 없었지만.

자신과 결혼해주지 않으면 날 성폭행범으로 신고해 버리겠다는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성인이 되자마자 너와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네가 성인이 된 해의 마지막 날.

순백의 드레스를 차려입고 내 앞에 수줍게 선 너는, 내게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아저씨. 정말, 한 해의 마지막이 저희의 기념일이 되었네요."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 그리고, 너와 나의 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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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회 글 보고 12월 31일에 맞춰서 부랴부랴 쓰려니까 이렇게 됐네... 

얀붕이들 모두 2023년 수고했고, 2024년도 행복하게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