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있었다. 톱밥 냄새, 어디선가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 뭔가를 이리저리 깎아내는 소리, 그리고 큰 창으로 내비쳐 오는 햇빛까지.

 눈을 끔뻑거리던 나는, 곧 내가 낯선 곳에 있다는 상황을 인지하고 당혹스러워졌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어 입을 뻐끔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뭔가를 깎아내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온몸이 땀 범벅에, 팔에는 나무에서 나온 톱밥과 가루로 범벅이 된 볼품 없는 꼴을 한 사내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어났구나! 아침에 누가 널 공방 앞에 두고 갔더라고. 누가 널 치료해 주길 바란 것 같아. 정말이지, 이런 식의 의뢰는 전혀 반갑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지. 난 제페토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이런 말들을 했다. 나는 무엇인가 대답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곧바로 당황했다.


"목소리상자를 안넣었구나! 기다려 봐, 바로 넣어줄게! 목, 목 좀 보여줄래?"


남자는 불쑥 몸을 내밀어 나의 목을 만졌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나의 몸을 아직 붙이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그러니까 내 머리만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으니 말이다. 혹시 목소리상자라는 걸 넣으려고 분리해 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햇살이 더욱 강하게 비쳐와 그와 나를 덮쳤다. 그는 창을 등지고 있었기에 빛을 느끼지 못했지만, 나는 눈이 부셔 한쪽 눈을 감아야만 했다. 그 때, 남자의 머리가 노란 금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머리는 강한 햇빛과 만나 더욱 빛나고 뜨거운 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마치....


"....옥수수죽. 멋지네요, 그 머리. 옥수수죽 같아요."

"뭐? 하하하하! 네 이름을 말해주려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내 머리털을 놀리다니, 이거 상상도 못했는걸. HU_M0R 모델인가?"

남자는 내 머리통을 든 체로 신나게 웃어댔다. 그 성격이 너무 좋아 보여서, 나도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리고 이 말 역시 새어나오고 말았다.

"이름 같은건 없어요.."

"이름이 없다고? 그럼 내가 지어줄게! 네 이름은 피노야. 이 이름은 내가 처음으로 인간형 꼭두각시 모델을 만들면 붙여주려고 했는데.. 네가 어쨌거나 내 손을 탄 첫번째 인간형 꼭두각시니까 뭐. 피노, 좋지?"

"그래요. 내 이름은 피노. 고마워요."

나의 이런 말도 그는 스스럼없이 넘기고 만다. 그런데 또다시, 햇빛이 강하게 비쳐온다. 그렇지만 그 때 남자도 뒤를 돌아본 탓에 그도 눈부셔 하게 되었다.

그는 햇빛이 너무 강해서 눈물을 한 방울, 뚝하고 흘렸고 나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남자는 내가 웃는 것을 보고 따라 웃었다. 그 빛은 석양의 해에서 흘러 나왔으리라.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그렇게 웃어댔으니까.


피노에게 점심을 줬어야 했는데, 잊어버린 채로 일을 하고 있었다.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가 버너에 올라간 냄비를 열어 보았다. 냄비에는 오늘 점심에 먹었던 토마토 스튜가 약간 차갑게 식은 상태로 담겨져 있었다. 나는 아무 수저나 잡아 스튜를 담고 허겁지겁 피노가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피노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천천히 앉아있던 의자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녀는 의자를 아주 힘들게 돌렸다. 팔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의자에 항상 구부정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펼 허리라는 것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버려졌을 때부터 허리 위 상반신만, 그것도 팔 양쪽이 모두 절단된 체로 버려졌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머리를 고치고 난 뒤 그녀의 상반신 남은 부분을 붙여줄 때 왜 다른 부분은 붙여주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었고, 그녀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거기서는 성욕 처리용 걸레였는데요 뭘.'


그녀는 자신이 '업소용'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그 중에서도 특이취향, 굳이 말하자면 '장애자'를 성애하는 인간들을 위한 꼭두각시였다고 한다. 그녀는 듣는 사람이 메스꺼워지는 그런 역겨운 경험을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목수라면 다 안다. 아니, 인간이라면 다 안다. 인간이든 꼭두각시든, 두려울 땐 몸을 떨며 눈이 흔들린다. 아주 미세하지만, 그녀도 그 때 그랬다. 내가 그녀를 죽을 때까지 보살피기로 결정한 것도 그 때였다.

 그녀에게 새로운 몸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꽤 옛날 모델이라 맞는 부품이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몸은 부품을 모두 구하면 만들어 주기로 했지만, 부품을 아직도 다 구하지 못한 지금은 한숨이나 쉬며 그저 바라볼 꿈이다.


"제페토, 또 까먹었나 보네요. 괜찮아요. 나도 당신을 잊고 있었거든요. 저기 창밖을 보세요. 해가 말이죠, 저기 계속.."

"미안해! 오늘은 정말 시간이 없거든. 이 토마토 스튜, 얼른 먹어주라. 마무리해야 할 작업이 산더미야.

내일은 주말이니까 오래 있어줄게."

"그래요. 제페토, 어쨌거나 난 당신의 꼭두각시니까요. 하지만 난 당신을 항상 기다리고 있어요. 저 해도, 항상 우릴 기다리고 있진 않거든요."

"피노, 역시 넌 예술가 꼭두각시라니까. 가만 보면 네가 나보다 더 꼭두각시를 잘 만들지 않을까 싶어. 일단은 아, 입 벌려봐... 그래."

피노는 스튜를 천천히 다 비웠다. 그릇을 가지고 일어나자, 그녀는 다시 창가로 몸을 돌리려 했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손을 대자 얼른 가서 일하고 돌아오라며 웃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서 떨어져,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난 그녀의 의자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역시 후회했다.


 밤이 되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오늘은 그녀와 닮은 여성형 꼭두각시를 둘이나 완성했기 때문에 특히나 더 그랬다. 일을 마치고 간단한 저녁식사나 만들어서 그녀의 방에 가보니, 그녀는 아직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하루 종일. 내가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내자, 그녀는 천천히 돌아 나를 바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언제나 아주 조금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의 얼굴은 조금의 미소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 때 피노가 이렇게 말했다.


"제페토, 오늘, 그거, 만들었던데. 내가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당장, 팔아버려요 그거. 보기 싫어요."

"피노, 미안하지만 누군가 사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만 해. 그러기 위해선 전시해 둘 수 밖에 없겠지. 그런데 피노는 눈치가 빠른건가 아님 눈이라도 다른데 더 달린건가, 그런 것도 금방 알아채는구나."

"항상, 날 사랑해주겠다고 했잖아요. 꽤 자주 당신은 내게 약속을 지켜왔다는 인상을 줘요. 하지만, 그거, 당신은 그걸 사랑하지 않을거죠...? 약속을 지켜요."

"내가 만든 꼭두각시를 사랑하지 말라니, 너무하네.

물론 내가 널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그 꼭두각시들도 내 딸같은 존재들이야. 그러니..."

그 때, 그녀가 의자에서 픽, 하고 고꾸라졌다.

나는 급하게 그녀를 받으러 달려나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천천히 껌뻑이면서 속삭였다.

"그것들도 사랑한다고, 하려 했다는거 알아요. 그런데 제페토, 말하지 마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건 나잖아요. 나한테 다른 것도 나같이 대해 준다는 말 하지 마요...아니, 역시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안쓰러울 정도로 떨려온다. 나는 그녀가 역시 겁먹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의자로 돌려놓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주었다. 그녀는 한동안 애처롭게 몸을 떨었지만, 저녁식사(옥수수죽)를 먹고 이야기할 때 조금 나아졌다.


"제페토. 있잖아요, 당신은 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누굴 말하는 거야?"

"업소 사람들이요.. 꼭두각시를 사랑하는 인간들. 어떻게 생각해요?"

" 사랑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들에게는 조금 많이 역겹지만, 정말로 꼭두각시를  사랑한다면 상관 없다고 생각해. 성욕.. 그건 동시에 수반되는 문제지만, 현제의 꼭두각시는 해결 불가한 문제는 아니지. 결국 의식의 문제니까, 난 꼭두각시와  사랑할 수는 있다고 보는데."

여기까지 말하곤 그녀의 눈을 쳐다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은 단색으로 이루어진 시체같은 눈의 구형 부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면 제페토, 날  사랑해줘요. 당신도 날  사랑한다고 했죠? 그건 단지 동정같은 기분 나쁜 위선이 아닐 거에요. 그러니 괜찮지 않아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순간, 어쩌면 실수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나를 연인으로써 생각했을 지도 몰랐다. 나와 그녀가 생각했던  사랑은 많이 달랐다. 그녀의 연산 장치는, 그 단어를 훨씬 심각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워진 나는, 피노에게서 떨어져서 설거지를 하러 가겠다고 말하곤 그 방을 나와버렸다. 그 방이 순식간에 깜깜하게 느껴졌다.

피노는, 내 최초의 꼭두각시는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기로 학생 시절때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내 손으로 그녀를 망가뜨렸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내 가족이라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신경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마치 귀한 수집품처럼 전시해 둔 꼴이었다. 후회스러움이 밀려왔다. 내게만 의지하고 있는 그녀를 배신하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잠에 들었다.


"피노, 할 말이 있어."

"아침식사는 잊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에요?"

"널  사랑해. 하지만 난 널 딸처럼 생각하고 있어. 결혼을 하진 않겠지만, 난 널 너처럼  사랑하진 않을거야. 하지만 널 계속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건 변하지 않아. 우선은 이제부터 난 여기서 일을 할거야. 항상 같은 방에서 지내는거지. 잠도, 식사도 여기서..."

"제페토."

"응?"

"왜죠? 혹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었나요? 솔직히, 당신이.. 당신이, 나를, 왜  사랑하지 못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당신은 날 사용했던 다른 쓰레기들이 했던, 그 말조차 해주질 않아요. 왜죠?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왜죠? 왜죠? 왜...?"

피노가 미친듯이 '왜'라는 말만을 반복하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고 중얼거리곤 고꾸라졌다. 이번엔 내가 붙잡지 못할 속도로. 역시 나는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선은 그녀를 의자에 다시 눕혀 놓았다. 날이 밝았으니, 일을 해야만 했다.

 사각사각, 나무를 깎는 소리야 항상 편안하다. 어렸을 때부터 이 소리를 좋아했다. 부모님은 연필 깎는 소리는 왜 좋아하지 않느냐며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목수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기계 공학 지식이 깨나 필요한 공학자가 되었다. 덕분에 공부 역시 많이 했었다. 그러고보니, 피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를 이렇게 두고 작업을 했었는데.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옥수수죽. 당신은 옥수수죽이에요. 그런데 멋지지 않아요. 제페토, 이것만 대답해 줘요. 온 몸이 있는 나는 더 아름답겠죠? 더  사랑스럽겠죠?"

그래, 옥수수죽이라고 말했지. 피노가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어지러운지 눈을 감은 채로 이렇게 말했다.

"..옥수수죽은 피노가 몸이 없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네가 완전하다면 다른 사람들 모두가 널 사랑하겠지. 넌 정말 예쁜 꼭두각시니까."

"고마워요. 그러면, 만약에.... 아니에요. 어쨌든 간에 난 당신을  사랑해요. 우리 '업소용'들은 항상 이 말을 하도록 장치되어 있지만, 하지만, 당신은 정말 달라요. 당신은 내가 동경해 왔었던 진짜 '사랑'이에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천천히 의자를 돌려 창가를 바라 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거기서 해를 관찰하는 것이 그녀의 하루 일관듯 했다. 나도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쓰지 않고 일을 다시 했다. 속으론 그녀의 말이 조금 걸렸지만.

 그 날 저녁은 평범했다. 그녀는 오후 내내 창가를 바라보다가 가끔 몸을 돌려 내가 꼭두각시를 만드는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고, 나는 뭔가 신이 나서 팔은 어떻게 만드는지, 몸통 내 장치는 어떻게 구성하는지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날이었다. 지난 번 만들었던 꼭두각시들을 팔기 위해 장에 나간 날, 집에 돌아오니 피노가 사라져 있었다. 공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녀는 2층 방에서 문까지 기어서 나간 것이다. 도대체 그녀가 그렇게까지 해서 나간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도대체 왜? 그 생각만이 그녀를 찾는 내내 머릿속에 울렸다.

 그녀를 찾은 곳은 의외의 곳이었다. 그녀는 '여우와 고양이의 벌목장'이라는 지저분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곳은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여우'와 '고양이'라는 사내들이 운영하는 벌목장이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온 몸이 성한 채로 발견되었다. 여우는 낄낄거리며 말했다.

"히히히, 이 년이 기어서 왔을 때는 정말로 놀랐습죠. 그런데 자신의 몸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겠습니까? 우연찮게 벌목장에 같은 모델의 꼭두각시 쓰레기가 있어서 저희가 엉성하게나마 만들어 봤는데, 아이고, 역시 장인 님의 마음에는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뭐? 이 개..."

그 때 피노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놈들과 몸싸움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제페토, 그만해요. 난 괜찮아요. 내가 부탁한 것 맞아요. 원래 몸이 조금은 멀쩡했을 때가 그리웠거든요. 진짜로 괜찮으니까, 저 사람들이랑은 싸우지 말아요."

"힉힉, 창년이 말은 똑부러지게 잘하네. 선생님, 비용은 어떻게 청구할깝쇼? 지금 지불해 주시면은.."

"지금 현금으로 지불할거야. 이 더러운 새끼들, 앞으로 피노를 그딴식으로 부르면 정말 네 놈들의 가죽을 벗겨 팔아버릴거다."

.

.

.

"피노, 정말 왜 그런거야? 이렇게 나란히 걷는 걸 그렇게까지 바랬던 거야? 도대체 왜 그렇게 나가서 이렇게까지 한거야? 정말 모르겠어."

"제페토, 당신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네요. 이젠 상관없지만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기억하나요?"

"...무슨 날인데?"

"음, 역시. 오히려 기억했으면 놀랐을 거 같아요. 제페토, 오늘은 옛날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공방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새삼 그녀를 다시 보니, 그녀는 몸이 생긴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듯 했다.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러울까.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것같구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불렀다. 어느새 공방에 도착해 있었다.

"문이 열려 있네요. 문 잠그는 것도 잊고 날 찾으러 다닌건가요?"

"그렇지. 아, 그것보다, 피노 너 오늘 일 진짜 어떻게 된거야? 내가 몸은 틀림없이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쉿, 제페토. 내 이야기 먼저. 나는 말이에요,  사랑이란 단어를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했어요. 이유는 몰라요. 연산장치 내의 오류라고 모두들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 탓이었을 수도 있죠.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어요. 그것때문에 정말 많이 맞았던 것 같아요. 우리 업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랬는데, 난 그 말을 하지 못했거든요."

"뭐? 피노,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 애초에, 왜 이제야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공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고, 밖이 아직 밝았음에도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피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벽난로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불은 밝고 따뜻하죠. 정말  사랑스러워요. 사실 난 그 단어를 처리하지 못했던 게 아니에요. 어쩌면 처리하길 거부했던 걸수도 있어요. 난, 아름다운 걸  사랑해주고 싶었거든요. 따뜻한 것, 밝은 것, 예쁜 것, 부드러운 것들.. 꼭 당신처럼요, 제페토. 지금까지, 당신을 왜  사랑하게 됐는지 생각해 봤어요. 처음엔 당신의 머리가 아름다웠기에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은 생생하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아닌거 같아요. 도대체 뭐죠? 알 것 같기도 한데...."

그 말을 끝으로 피노는 벽난로에 몸을 던졌다. 나는 소리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이번에는 후회할 일 없이, 그녀를 붙잡았다. 다만 그녀의 오른팔이 조금, 불에 타고 말았다.

"피노!!! 무슨 짓이야! 도대체 오늘 왜이러는 거야?!"

"하하...하하, 제페토. 당신을 내가 왜,  사랑, 하는지 알아버린 것 같아요. 당신은 아름다워요. 만신창이인 나를 구해준 것도, 애써 망가진 나를 애정해 주는 것도. 하아아....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단색 눈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색들로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벽난로의 불이 반사되어 보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놓지 마요. 제페토, 이 손 놓지 마요. 난 안 놓을거 에요."

그리고 그 순간, 배가 미친듯이 쑤셔왔다. 아니, 한 곳. 단 한 곳이 마치 바람이라도 새는 것마냥 뜨거운 것이 꿀렁거리며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배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무조각이에요.. 제페토, 방금 나무조각이었다고요. 아팠나요? 아, 피가 너무 흘러나오네요. 죽지 않아요. 내가 그 곳에서 도망쳤을 때, 한 번 먼저 '연습' 해봤거든요. 당신은 날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날 떠나려고 했어요. 당신은 항상 날 더 잘 돌보지 않았다고 자책했지만, 난 그런 거 싫어요. 피노는, 당신이 사랑하는 나는 후회하지 않을거에요."

그녀는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몸에 힘이 빠져가는 나를 껴안아 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물었죠. 바로 1년 전에, 당신이 나를 구해준 날이에요. 제페토, 이제 내가 당신을 고치게 되었네요. 망가진.. 당신을. 분명히 이제 당신은 날  사랑하게 될 거에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창가에 빛이라도, 어떤 빛이라도 새어 들어왔더라면. 그렇다면 어떠한 말이라도 해주었을 텐데. 

그러나 그 방에는 한 줌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 방에서는 외롭게 타오르는 벽난로와 미친 듯이 내 귀에 뭔가를 속삭이는 아름다운 꼭두각시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한다고, 나는 그렇게 들었다.

---

음, 글을 못쓰는 건 알았지만 이 소재를 도저히 드랍할 수가 없었다.

기념일은 그들이 처음 만난 날, 흔히 말하는 사귄지 n일이런거고.

떡밥 회수하려고 스토리 전개를 너무 빨리 박아서 얀붕이 제페토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피노는 내가 요즘 빛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던 내용이 있어서 날 투영하려 했는데 쓰다보니 잘 안된다. 암튼 재밌게 읽어라. 부족한 글이라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