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yandere/97029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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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얀붕이에게 반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를 고릴라라고 놀리는 애들에게 대신 화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얼굴이 취향이기도 했고.

 

 약한 주제에 내 앞에서 남자인 척 구는 것도 귀여운 포인트다. 흐, 흐흫......

 

 “회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음. 잠시 행사 일정에 대해서.”

 

 그만 그만.

 

 얀붕이의 좋은 점을 나열하자면 하루 종일도 모자랄 테니까 이쯤에서 끊어야 한다.

 

 회장으로서, 그리고 연상으로서 위엄 있고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친구처럼 친근한 선배가 되거나.

 

 둘 다 마음처럼 잘 안 되지만 말이다.

 

 [2]

 둘만의 공간이 좋아서 학생회의 기존 멤버들은 모조리 쫓아냈다.

 

 그 아이들에겐 미안하게 됐다. 그래도, 대화 도중에 옆에서 자꾸 끼어드는걸.

 

 특히 얀붕이가 모처럼 살갑게 말을 걸어주는데, 무례하다느니 어쩌니 할 때는 나도 모르게 호통을 내지를 뻔했다.

 

 참아야 한다. 자중해야 한다.

 

 스스로의 성질은 어려서부터 잘 아는 바였다.

 

 함부로 속에 든 것을 내보였다간 미움받을지도 몰라.

 

 그러니 늘 참아야 한다...

 

 얀붕이의 얼굴을 보는 대신 사진으로 참자.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녹음으로 참자.

 

 전화는 안 돼. 아직 얀붕이가 가르쳐준 적이 없으니까, 기다려야 한다.

 

 “회장님, 하이파이브! ...안 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아싸, 제가 이겼으니까 음료수 쏘셔야 해요?”

 

 “오, 회장님. 오늘 학교 끝나고 어디 가세요? 왜 이렇게 꾸미고 나오셨대? 평소랑 똑같다고요? 엥, 거짓말!”

 

 “회장님 잠시만요. 머리카락에 뭐가... 짠, 콧수염!”

 

 얀붕이가 자꾸 귀여운 짓을 할 때도,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자기 자신을 다독이고 때론 닦달했다.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는 심정으로. 

 

 [3]

 기회가 찾아온 것은 4월 1일 만우절 날.

 

 그래, 기회는 마치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우, 우리 얀붕이, 배고프진 않니? 누나랑 맘마 먹을까요?”

 

 “까까 아까 먹어서 배 안 고파!”

 

 능력을 베끼는 아티팩트라니, 처음엔 정말로 혹했지만, 카메라 렌즈를 발견해서 늦게나마 눈치챘다.

 

 이건 아마 조금 질 나쁜 만우절 장난.

 

 어쩌면 여기가 분기점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예 기정사실을 만든다면.

 

 얀붕이가 다른 여자들하고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며 마음 졸일 필요가 사라지는 것 아닐까.

 

 지금은 단지 같은 학생회 소속이지만, 만약에 내가 얀붕이의 것이 되고, 얀붕이가 나의 것이 된다면.

 

 조금은 집착해도, 억지를 부려도 이해받을 수 있는 거니까...

 

 “자, 잠깐만 기다려 봐? 누나가 우유 줄게?”

 

 그것보다는 솔직히 어린애인 척하는 얀붕이의 모습에 눈이 돌아갔다.

 

 얀붕이 네가 잘못한 거야.

 

 이렇게 먹어달라고 대놓고 유혹하다니.

 

 “흣, 흐히힛.”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전부 네가 잘못한 거니까...!

 

 [4]

 “회, 회장님!”

 

 그 호칭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얀붕이와, 앞섶을 풀어헤치고 가슴을 드러낸 나.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아무리 급했어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자길 강간한 여자를 좋게 보는 남자가 어딨다고 그랬을까.

 

 어떡하지.

 

 당황스러워.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당황스러워서 눈물이 나오려는 건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당황스러운지가 헷갈린다.

 

 엉킨 실타래처럼 생각이 꼬이고,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이래서 참아야 한다고, 참아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한 건데.

 

 “죄송해요 회장님, 장난이 지나쳤어요.”

 

 얀붕이는 사과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노라고.

 

 오늘 본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둘만의 비밀로 가져가자고 말했다.

 

 “...회장님? 뭐 하시는 거에요?”

 

 하지만 나는 이미 능력을 발동시켰다.

 

 이 뒤의 일은 얀붕이의 선택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능력을 쓰고 나면 나는 백치 상태가 된다. 기억도 잃을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얀붕이가 내 곁에 있다면, 도박은 성공.

 

 만약 그 반대라면......

 

 ‘이미 엎질러진 물. 생각은 이제 됐어.’

 

 넌 언제나 나보고 똑똑하다고 말해주지만, 욕심쟁이에 멍청한 나로선 이런 방법밖에 떠올리지 못해.

 

 다치지 않게 최대한 힘 조절은 하겠지만, 너에게나 나에게나 최악의 첫경험이 될 거야.

 

 그러니까 미안.

 

 “미안해 얀붕아, 조금만 참아줘.”

 

 “어, 어어...?”

 

 나는 얀붕이를 그대로 들어서...

 

 ─우지끈!

 

 책상 위에 힘껏 엎어트렸다.

 

 [5]

 정신이 들었을 때, 저물어가는 주황색 햇빛이 실내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얀붕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구나.

 

 가버렸구나.

 

 바닥엔 찢겨서 넝마가 된 옷조각이 널브러졌다.

 

 그제야 내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걸 깨닫는다.

 

 알몸으로 맞는 공기가 유독 차갑다.

 

 ...

 

 시간이 늦었다. 이제 하교해야지.

 

 얀붕이에 관한 건 집에 돌아가서 처리해도 늦지 않아.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줬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회장님!”

 

 “...얀붕아?”

 

 “몸 가릴 것 가져왔어요.”

 

 얀붕이였다.

 

 얀붕이가 내게 와서 체육복을 걸쳐주었다.

 

 “내가 밉지 않은 거야...?”

 

 “소리 지르면 죽인다 어쩐다 할 땐 좀 무서웠는데요. 그래도 밉진 않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나에게, 얀붕이는 뒷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밉진 않아요.

 

 그 말에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너는 모를 거야.

 

 “흡...! 회장?”

 

 나도 모르게 얀붕이를 끌어안았다.

 

 밤마다 대신으로 삼던 곰인형보다 실물은 훨씬 더 따뜻했다.

 

 “켁... 저 숨 막히는데요... 회장님... 회장님...? 켁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