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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시작은 2024년의 어느 자취방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쇼타 지휘관을 WA2000이 한밤중에 혼자 내려다보는 걸로 시작하는 거임


2024년, 그러니까 현실에서의 2024년. 자신은 게임 속 캐릭터이지만, 눈앞의 지휘관은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랑스러운 남자아이고.


그리고 그때 WA2000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리고, WA2000은 품속에서 과하게 미래적으로 생긴 통신용 단말기 하나를 꺼내드는거지.


[스프링필드: 지휘관과 얘기해보셨나요?]


뭐 이런 내용으로.




그리고 시간을 돌려서 2주 전, 아니 시간이 지나서 수십 년 뒤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아는 그 주인공 부대인 S09 지휘부를 이끄는 여리여리하고 말랑말랑한 쇼타지휘관… 여기에는 뭐 주인공 소대인 AR소대도 있고 404소대도 있고 리벨리온도 있고 또 이 이야기의 주인공 WA2000도 있겠지.


WA2000의 성격 정도야 우리도 다 알잖아? 수줍음 많이 타고, 하지만 자존심은 세서 지거나 밀리는 거 싫어하고,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전형적인 츤데레 아니야. 스스로 엘리트를 칭하고 그럴 만한 능력은 있으니 언제나 지휘부 주력 인형이고 지휘관에게 많이 배려도 받지만 언제나 그런 고마운 감정을 표현할 줄 몰라서 "차, 착각하지 마! 제가 고마워서 도와주는 게 아니니까!" 라든지 "부관 일 따위 내가 다 해치워줄 테니까, 감사하라고!" 같은 거의 클리셰에 가까운 츤츤 대사를 하겠지.


부대를 이끌기에는 충분한 나이지만 여성의 내면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의 지휘관. 그렇게 츤츤대는 WA2000이라도 그녀가 없으면 작전이 안 돌아가서인지 그저 순진한 마음에 싫은 티 팍팍 내는 그녀를 더 신경쓰고픈 마음인건지 아니면 마음 속에 남자아이의 연정이 숨어있는건지 지휘관은 WA2000에게 언제나 친절한 말투를 쓰며 여러모로 챙겨주었지. 신형 탄약이 필요하다고 하면 구해 주고, 초코 아이스크림을 구해다 FNC랑 WA2000에게 선물하고… 다른 인형에게 모두 친절하고 따스한 지휘관이었지만 아무래도 WA2000같이 감정에 서투른 전술인형 입장에서는 착각하기 좋은 환경이잖아.


어느새부터인가 WA2000이 부관을 맡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하던,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WA2000이 "하여튼 저 꼬맹이는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같은 말로 괜히 자신의 그 낯선 감정을 자존심으로 치환하던 그 시기.


어느날 뭔가 근심어린 표정을 한 지휘관을 마주하는 거지.

그날도 지휘관의 부관으로서 지휘관이 퇴근하기 전까지 집무실에서 같이 업무를 도와주던 WA2000에게 애가 물어보는거야.


"WA 씨."

"만약에 그리폰에서 나오게 되면… 뭐 할지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얘는 씨, 지금 장비 점검 내역서 싸그리 모아서 본부에 보내야 되는데 뭔 감성에 젖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만약에… 뭐 전쟁이 끝났다든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퇴사를 한다든지 해서 말예요. 그런 생각 같은 거 해보셨나요?"


"뭐야, 설마 지금 나보고 지휘부를 떠나라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에요."


평소 같으면 "아, 아니에요!" 하면서 당황했겠지만, 이상하리만치 대답이 평온한 지휘관.


"흥,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잖아. 난 죽이기만을 위해 만들어졌어. 다른 것따위 생각도 안 해봤다고. 그리폰이 아니더라도, 다른 PMC에서 똑같이 저격 요원으로 일하고 있겠지."


"그러면… 만약 총을 쓸 일이 사라진다고 한다면요?"


"그럴 일이 어딨다고. 왜 갑자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거야 너?"


"........."


지휘관과 이렇게 업무가 아닌 사적인 주제로 이야기하는 게 싫지 않았지만, 그런 기회를 맞아서도 이렇게 츤츤대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걸까.


"자꾸 그런 비현실적인 망상이나 하지 말고, 빨리 아까 말한 내역서나 찾아보란 말야. 망상이건 뭐건 맡은 일부터 잘 처리하고서 해!"


그리고 이렇게 쏘아붙이는 WA2000의 본심을 지휘관이 알기는 할까.


하지만 지휘관은 그런 매도에 가까운 말에도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며 "그래요." 하고 짧게 답할 뿐…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이 되자 지휘관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거임


지휘관 집무실에도, 기지 내 지휘관용 기숙사에도, 지휘관이 잠깐 바깥 공기를 쐬러 갈 때마다 들르던 정원에도, 얘가 보이지를 않는 거야.

물론 하루 정도 안 온 걸 가지고 지휘부 전체가 난리가 나고 그러지는 않았어. 사실 말도 안 하고 하루이틀쯤 자리 비우는 일은 드물게 있어왔으니까.


"이 꼬맹이가 진짜, 자꾸 이렇게 말도 안 하고 사라져버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죽었어!"


하고 지휘관 없는 집무실에서 짜증을 내는 WA2000.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돌아오지 않는 날이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을 넘길 줄은 몰랐겠지.


처음에는 단단히 교육을 시켜야겠다느니 과자 엄청 사올거라느니 아무리 지휘관이라지만 이래도 되냐느니 애정 섞인 짜증을 내던 전술인형들도 평소보다도 더 길게 지휘관의 부재가 계속되자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어.

결국 WA2000과 M4A1이 본사로 가서 지휘관의 행방을 물어봤어. 하지만 본사에서도 S09 지휘관은 휴가를 떠났고 언제 돌아오는지는 모른다는 대답뿐… M4A1은 적어도 자신들을 완전히 떠난 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WA2000은 아직도 의문이 전혀 풀리지 않는 표정이었지.


지휘관들에 대한 인사권은 모두 본사 인사과에서 담당할 텐데, 이 사람들이 휴가를 결재해 놓고서 정작 언제 돌아오는지는 모른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부관 경력이 길어서 행정 업무에 대해서도 빠삭한 WA2000 같은 인형들이 해볼 수 있는 추리였지.

하지만 그렇다고 상관의 상관인 헬리안투스 부사장 앞에서 성질을 부릴 수도 없는 거고… 일단은 그 대답만을 가지고 S09 지휘부로 돌아오는 둘.


그러나 '휴가를 가신 것뿐이니 곧 돌아오실 거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간은 지나고 지나 이제 한달이 되어버렸어.

이제 지휘부는 씹창이 나 있겠지. 자신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주던 지휘관이 없어지니 갈수록 인형들도 피폐해지기 시작할 거고.


"아침 식사를 준비 중입니다…"라면서 비어있는 냄비를 혼자서 달그락거리는 G36.

라디오를 듣지도 않으면서 숙소에 틀어박혀 불면증에 시달리는 AA-12.

지휘관이 없으니 의뢰가 들어갔을 리도 없는데 지들 마음대로 지휘부에 들어와 말없이 집무실 안에 앉아있다가 떠나버리는 404 소대.

이제 훈련장이나 집무실이 아닌 정원에 매일 들러 반쯤 죽은 눈으로 멍하니 꽃들을 쳐다보다 돌아가는 M4A1.


이런 마당에 그나마 제정신 붙들고 있는 전술인형이 몇이나 될까.

WA2000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지휘관이 떠나기 전 마지막 부관이었고, 지휘관이 없을 때 기지 내의 일상을 책임져야 하는 인형이었으니 그 의무감 덕분에 아직까지도 집무실에 출근해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겠지.

그리고 그 의무 덕분에 매일매일 피폐해져가는 전술인형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거고.


그나마 그녀가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는 평소에 비해 미소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차분함을 잃지 않은 지휘부 카페의 스프링필드 정도일까.

카페에 들어와 그녀가 만들어준 커피를 마시며 지휘관이 돌아오면 가만 안 둘 거라느니 평소와 같은 츤데레스러운 말들을 읊으며 자신만큼은 무너지지 않았다는 표시를 하고 싶겠지만, 그 본심을 스프링필드가 모를까.


버릇없는 꼬맹이 운운하며 억지로 짜증난 척 하는 WA2000에게, 스프링필드는 조금 웃으며 "지휘관은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걱정 말아요."라는 말을 해 주겠지. 마치 힘들어하는 그 속마음 안다는 것처럼.

그러나 WA2000은 그 말뜻을 읽었는지 또 이렇게 말하는 거야.


"...만약 안 돌아오면?"


"그럴 리는 없어요. 휴가라고 했잖아요? 퇴사가 아니라."


"휴가가 아니라면 어떡해?"


"네?"


"만약에… 헬리안이 우리한테 그냥 둘러댄 거면? 사실 지휘관이 몰래 도망가 놓고… 우리한테는 휴가 간 거라고 속여달라고 말한 거면? 그러면 우린… 그러면 나는 어떡하냐고."


순간 나타나는, 지휘관에 대한 WA2000의 본심.

스프링필드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카페에서 나와, 발걸음 닿는 대로 혼자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어느새 불 꺼진 지휘관 집무실.

술 취한 것도 아니면서, 생각없이 걸으면 자기가 가장 가고픈 곳으로 가게 되는 걸까.


아무도 없는 그 집무실 안에서, WA2000은 괜한 짜증에 평소 지휘관이 싫어할 만한 일들을 해봤어. 지휘관 자리에 앉아 다리를 책상에 뻗어 보고, 결재되지 않은 문서 바구니에 쌓인 문서의 순서들을 마구 바꿔보고…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답도, 반응도 아닌 고요한 적막 뿐.


뭔가 더 욱한 마음이 솟아오르는 WA2000. 이미 한번 금기를 깬 거,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아예 옷걸이로 향했어.

겨울이 된 탓에 이제는 입지 않는 가을용 지휘관 코트… 쇼타 지휘관의 체형에 맞는 그 작은 코트를 집어들고 그 녀석의 남아있는 흔적을 찾아보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그런 게 남아있을 리가 없었지.


짜증이 사라진 그 다음 WA2000의 마음을 덮치는 건 바로 자신의 탓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

지휘관이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아마도 자신일 거고,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은…


'망상이건 뭐건 맡은 일부터 잘 처리하고서 해!'


…평소랑 똑같은 츤데레식 매도였잖아.


지휘관이 떠난 것도… 자신의 그 무뚝뚝하고 정떨어지는 말투 때문이었을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겨우 그런 말 한두 마디 때문에 지휘관을 그만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러면 예전부터 지금까지 엘리트 운운하며 귀찮은 임무를 시키려 하면 "나 같은 고급 인력한테 이런 시시껄렁한 일을 맡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고 짜증을 부렸던 것들 때문일까?

하지만… 그런 말, 최근에는 한 적 없는데. 지금 떠나는 건 뭔가 갑작스럽고…


분명 머리로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납득하고 있지만 자꾸만 마인드맵 어딘가에서 '네 탓이야.' '맨날 못 살게 굴던 네가 떠나보낸 거야.' 같은 작은 바늘과도 같은 말들이 툭툭 가슴속을 찔러오기 시작하지.

그리고 본사에 들렀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꾸만 머릿속을 잠식하는 그놈의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자신의 짜증나는 태도 때문에, 지휘관이 영원히 떠난 거라면?'



정말로 가정에 가정에 가정을 더한 말이었지만 사실이든 아니든 WA2000의 가슴팍을 짓눌러버리기에는 충분한 말이잖아.


자신이 그 아이를 '바보 꼬맹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다른 전술인형들처럼 부드럽게 대해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자신에게 어떤 임무가 내려와도, 다른 전술인형들처럼 "맡겨줘!" 하고 쾌활하게 처리하고 왔다면 지금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까.


그 적막한 집무실 안에서, 자기도 모르게 WA2000은 지휘관의 그 가을용 코트를 양손에 꽉 쥐고 있었어.

그리고 그 코트 위에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내가 잘못했어. 지휘관…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는 꼬맹이라고 안 놀릴 테니까, 무슨 임무를 줘도 불평 안 할 테니까… 제발 돌아와. 다시 돌아오란 말야, 이 바보야…"


생각해보면 이 집무실 안에서, WA2000이 그런 진심어린 말을 한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애절한 말을 하늘이 들어줬는지,

집무실 한 구석에서 빛이 한 줄기 새어나오는 거임.


설마 지휘관이 두고 간 통신 단말기? 뭔진 모르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 그 빛을 따라 책장을 뒤지는 WA2000.


책장 안에 들어있는 것은 작은 바구니 하나.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서약반지용 상자에서 새어나오는 빛이었지.

WA2000도 분명히 기억하는 물건이야. 본사에서 받아는 왔지만 누구한테 쓸지는 고민해보겠다며 그냥 묻어두고 있던 그 서약반지였단 말야.

언젠가 지휘관이 자신에게 끼워주는 꿈을 꿨다가 "내, 내가 미쳤지!! 그런 꼬맹이랑 서약을… 내가 왜…" 하면서 하루종일 볼이 붉어진 채로 있어야 했던 바로 그 반지.


이런 미친, 뭔 드라마 고백부부도 아니고 반지? 왜 시발 아예 지휘부로 트럭이 쳐들어와서 시간회귀한다고 하지 그러냐? 근데 어차피 게임 소설이고 플롯상 어떻게든 얘를 현실 이동은 시켜줘야 하니까 불신의 유예를 좀 적용해서 자비롭게 이해해주라.


빛을 내는 물건은 바로 상자 안에 든 그 서약반지. 이 반지에 손을 대자마자 WA2000은 정신을 잃는 거임



다시 눈을 뜨자 주변에 보이는 건 평범한 방 한가운데. 자신의 기숙사는 분명 아니고, 지휘관 기숙사라기에는… 인테리어가 수십 년은 낡아 보여. 넓이는 가족이 같이 살기에는 좁지만 한두 명이 살기에는 충분해 보이는 정도?

그리고 그 어두운 방에서 홀로 전자기기 하나가 빛을 내고 있겠지.


소녀전선 게임이 틀어져 있는 휴대폰 하나가 말야.


작은 전자기기 하나에 자신이 있던 지휘부가 보이자 이건 설마 CCTV 화면인가? 하면서 살펴보는 WA2000. 당연히 지금 상황이 어떤 건지 전혀 이해할 리가 없지. 설마 그 반지가 사실은 지휘관이 도망칠 때 쓴 텔레포트 장치인가? 근데 여긴 어디고? 지휘관 설마 납치된 거야?

뭐 이런 별의별 생각이 다 들 때 WA2000이 가지고 있던 통신용 단말기가 울리는 거지


[스프링필드: WA 씨, 잘 들어가셨나요?]


이거를 잘 들어갔다고 말을 해야 돼 좃됐다고 말을 해야 돼? 일단 지금 상황을 스프링필드에게 통신으로 전해주려는 그 순간


문이 확 열리면서 방 안에 불이 딱 켜지는 거지.

그리고 WA2000의 눈앞에 보이는 건…



"..........WA…… 2000…?"



앳된 얼굴의 지휘관?



"........어떻게… 여기에…?"


"............"



자, 잠깐 상황을 정리해 보자.


어느날 갑자기 지휘관이 지휘부에서 사라졌고, 한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지휘부는 씹창이 났는데,

WA2000이 밝게 빛나는 서약반지를 만져 보니까, 지휘관이 사는 현실세계로 텔레포트되었다?


지휘관이든 WA2000이든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지.


물론 정보의 차이를 감안했을 때 지휘관은 어느 정도 감이 잡힐 수는 있겠지만 말야.


아무튼 이런 상황인데,

지휘관은 대략 도대체 게임 캐릭터인 WA2000이 어떻게 내 눈앞에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일 거고,

WA2000은…


글쎄. 일단 눈물부터 나오지 않을까?


"흐익?!"


순간 서러움과 죄책감이 뒤섞여 울먹거리더니, 그대로 지휘관에게 달려들어 그 작은 몸뚱이를 껴안는 WA2000. 뭐 체격 차이가 있다 보니 껴안는다기보다는 지휘관을 자기 품 속에 안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지만.


".........멍청이…"


"...?"


"멍청이, 바보, 이 이기적인 꼬맹아…!! 왜,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건데!!"


그간의 서러움에 북받쳐 울음이 터져버릴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잖아. 그간 다른 인형들이 피폐해지는 걸 지켜보는 동안 WA2000은 안 그러고 싶었겠냐고.

하지만 자신은 부관이니 어떻게든 지휘관 대신 여길 이끌어야 한다 하며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책임을 계속 지고 있었으니…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건 당연한 얘기일지도.


"한 달이나…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도대체 어딨었어? 어디서 뭐 하고 있었냐고…!!!!"


거의 악에 받친 울음에 가까워진 WA2000의 목소리. 이런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항상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약한 모습은 절대로 보여주지 않으려던 그녀답지 않았지.


지휘관도 그렇게 큰 울음소리에 당황했지만 조용하라는 말 대신 천천히 등을 쓸어내려주며,


"미안해요, 다 말해드릴게요. 일단 지금은… 편해지실 때까지 안고 계셔도 되니까…"

"괜찮아요, 저 여깄어요. 어디 안 갈게요…"


하고 최대한 부드러운 말로 진정시켜주고 있으니, 평소의 그 순둥이 그대로였지.



그렇게 어찌저찌 WA2000이 진정되고 냉장고에서 음료수 하나 꺼내 건네주며 같이 접이식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다 말해주겠다고는 했지만 자신의 사정보다도 WA2000의 진실까지 다 말을 해줘야 하나. 그러면 더 화를 내지는 않으려나…


하지만 이미 이렇게 벌어진 일이고 하니 일단 지휘관도 사실대로 다 털어놓기로 했지.


"그, 이런 말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지휘관, 아니 얀붕이는 WA2000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었어. 우선 WA2000은 사실 소녀전선이라는 게임 속 캐릭터고, 지금은 2024년의 현실 속이라는 것.

자신은 한달 전까지 게임을 하다가, 이제 고등학생이 되어서 학업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에 게임을 다 끊었고 그 중에는 소녀전선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방은 아예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서 학교와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잡아 자취하는 공간이라는 것까지.


당연히 WA2000이 쉽게 받아들일 만한 사실들은 아니겠지만, 자신이 봤던 휴대폰 속 게임 화면을 지휘관이 다시 보여주고, 또 지휘관의 모습이 자신이 알던 모습과 다르게 고생한 흔적 없이 피부도 하얀 데다가, 뉴스에는 자신이 역사책으로만 봤던 블라디미르 푸틴이나 조 바이든 같은 인물들이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으니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 있었지.

거기다가, 자신 때문에 지휘부를 떠난 게 아니라는 것까지 말해줬으니 얼마나 다행인 일이야.


"그런 사정이 있어서 끊은 거지만… 그렇다고 WA 씨나 다른 인형분들이 싫어진 건 아니에요. 그건 정말이에요."


"...알아. 안다고… 다른 애들이 다 우릴 버린 거라고 말해도, 난 믿고 있었어."


"다른 분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그 물음에 반대로 WA2000도 지휘부 소식을 전해주었지. 지휘관이 떠난 뒤로, 그 기약없는 기다림 때문에 전술인형들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이제는 WA2000이 가지고 있던 죄책감을 얀붕이가 돌려받은 셈이랄까.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흥,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하고 츤츤대지만 속으로는 죄책감도 덜고, 지휘관도 보게 되고, 앞으로 자신과 동료 전술인형들 모두 일상으로 돌아올 거라는 기대감에 너무도 행복한 WA2000.

그리고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얀붕이도 작게 웃었어. 평소와 같은 말투를 들어 기쁘다면서.


그래, 이제 이러면 된 거지. 지휘관에게 사정을 다 말했고, 지휘관도 미안하다고 했으니 이제 다시 모두가 해피해피 지휘부 라이프를 살아갈 수 있겠지?


근데 다시 어떻게 돌아가?

서약반지 만져서 여기로 왔는데, 현실에 서약반지가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WA2000도 솔직히 지금 얀붕이를 만나자마자 그냥 다시 돌아가는 건 뭔가 좀 아깝기도 하고.


일단 다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WA2000은 얀붕이랑 함께 지내기로 했어. 어차피 방도 두 명 살기에 충분하잖아? WA2000도 '나, 남녀가 같은 방을 쓰다니, 무슨 응큼한 생각을 하는 거야?!" 하고 츤츤댔지만 뭐 방법이 없는데 어떡해.


그날 이후로 학교 다니는 얀붕이를 대신해 집에서 뒷바라지 비스무리한 일을 해주는 WA2000. 뭐 지휘관 시절에도 자주 부관 노릇 했으니 그거랑 비슷하다 생각하면 편하지.

그리고 이상하게도 게임 속 지휘부와 연락이 되는 자신의 통신용 단말기를 통해 스프링필드에게 사정도 설명하고 말야. 물론 우리가 사실은 게임 속 캐릭터니 뭐 그런 말은 빼고 [지휘관 찾았어. 근데 지금 당장은 못 돌아갈 거 같아.] 같은 말로 바꿔서 전하겠지.


그렇게 지휘관과 같이 밥도 먹고, TV도 보고, WA2000이 입을 외출용 옷을 사러 데이트도 하고, 같이 서점도 가고, 카페도 가고… 불량배들에게 위협당하는 얀붕이를 압도적인 피지컬로 구해주기도 하고.


점점 둘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져 점점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만들어져가는 이 두 남녀. WA2000이야 원래 지휘부에서도 그랬듯 "차, 착각하지 마!!"라는 말을 달고 살겠지만 한 달 동안 지휘관이 사라졌을 때 보여줬듯 솔직히 지휘관 신경쓰고 있잖아. 이런 이상한 분위기가 솔직히 싫지는 않았단 말이지.


그리고 이 얀붕이가 자신이 알던 그 친절하고 따스한 지휘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다만 다른게 있다면… 그 고생하고 다니던 지휘관의 모습과 다르게 얀붕이는 그런 개고생 따위 할 일이 없으니 더 뽀얗고 말랑말랑하다는 거.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싶지만, WA2000으로서도 속으로는 불안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날 수밖에는 없겠지.

지금이야 이렇게 얀붕이랑 행복한 동거생활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떡할 거야?


가장 모범적인 시나리오는 자신은 그대로 게임 속으로 돌아가고, 지휘관이 예전처럼 지휘부로 돌아와 자신과 동료 전술인형 모두가 일상을 되찾는 거겠지.

근데 정말로 꼭 그래야 할까? 그 의문이 언제부터인가 WA2000의 마인드맵에서 자라나기 시작했지.


그냥 얀붕이랑 같이 게임 속으로 돌아가면 안 돼? 그래도 자기나 전술인형들은 행복하잖아.

아냐, 그러면 얀붕이는 현실 속 삶을 포기해야 하니… 얀붕이가 행복해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WA2000 혼자 게임 속으로 돌아간다면, 그 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현실 속 얀붕이와 이런 달콤한 생활을 하고 난 뒤에, WA2000은 얀붕이가 즐기는 게임 속 캐릭터로서의 위치로 만족할 수 있을까?


물론 이전처럼 그 귀여운 지휘관 옆에서 부관 일을 하고, 녀석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지휘관이 게임에 돌아온다면야 가능하겠지.

하지만 지금같은 동거 생활은? 데이트는? 이런 기회,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서도 누릴 수 있을까?

비교를 한번 해보라고. 주변에 여자라고는 새로운 학교에서 만날 낯선 여학생들뿐인 고1 얀붕이와, 주변에 아름다운 여자 전술인형들로 가득한 S09 지휘관 중 어떤 존재가 더 좋을 것 같냐 이 말이야.


지금 생활을 봐. 예전처럼 "주인님의 생활은 제가 책임집니다." 하며 지휘관 숙소에 출입하는 걸 금하는 G36도 없어. "후훗, 힘드시면 언제든 저에게 기대도 좋답니다?" 하며 자신은 절대 하지 못할 말로 지휘관을 유혹하는 스프링필드도 없어. 게다가 전술인형인 자신보다 힘센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으니 자연스레 얀붕이는 자신에게 자주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이거 완전 이세계 전생 거울 버전 아니야? 현실에서는 관심 못 받던 동료였던 내가 이세계에서는 얀붕이의 미래 와이프 막 이런 식으로?


이런 WA2000을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는 건 동료 전술인형들에 대한 의리 하나뿐이겠지.

한 달 동안 고생했던 그녀들도, 분명히 지휘관과 재회할 자격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WA2000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거네. 얀붕이를 포기하든, 자신의 동료들을 포기하든 말야.


그리고 그 고민을 담아 WA2000은 스프링필드에게 문자를 보냈어.


[WA2000: 스프링필드]

[WA2000: 만약에 말야]

[WA2000: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친한 친구들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면 어떡할 거야?]


하여튼 이 사회성 없는 서툰 츤데레, 자기 본심을 숨길 줄을 몰라요.

지휘관 찾았다 해놓고 몇 주 뒤에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 어쩌구 하는 문자를 보내면 그 머리좋은 스프링필드가 눈치 못 깔 거 같냐.


당연히 스프링필드는 뭔가 수상함을 알고 바로 문자를 보내겠지.


[스프링필드: 친구 사이에 사랑 때문에 싸우는 경우를 참 많이 봤어요. 하지만 그렇게 얻은 사랑은 대부분 좋게 끝나지 않더라고요. 정말로 모든 친구들을 잃어서까지 얻고 싶은 사랑인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한번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스프링필드: 지휘관과 같이 있다고 하셨으니, 한번 지휘관과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나이는 어리지만, 보기보다 현명한 분이잖아요.]


지휘관과 말해보라는 건 아무래도 마음씨 좋은 지휘관이라면 절대로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을 거야. 솔직히 지휘관이 아무리 그래도 WA2000을 막 사랑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 아냐? 만약 그렇게 되었다 쳐도, WA2000은 몰라도 지휘관이라면 절대 그녀 한 명 때문에 나머지 전술인형들을 포기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러나 지휘관에게 이야기하기도 전에, 어느날 밤 갑자기 때가 되어버리는 거야.


WA2000이 돌아갈 때가.


이걸 얘기를 해야 돼 말아야 돼 하며 WA2000이 고민하기 시작한 지 24시간도 안 되어 오밤중에 갑자기 얀붕이 방에서 빛이 하나 새어나오는 거지.

사실 돌아보면, WA2000은 자기가 집무실 안에 서약반지 만져서 여기 왔다는 얘길 안 했잖아? 그래서 지휘관이 자기 방에 비슷하게 생긴 반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 안 한 거야.


그리고 그 탓에 WA2000은 그 반지를 영롱한 빛이 새어나오는 이때가 되어서야 발견하게 된 거지.


아직 생각을 정리도 하지 않았지만, 때는 와버렸다 이건데, WA2000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갈 거 아냐.


그 반지 상자를 보다가, 잠든 지휘관을 다시 내려다보는 WA2000.

그리고 단말기에서 울리는 진동.


[스프링필드: 지휘관과 얘기해보셨나요?]


마치 그녀를 보채는 것만 같은 내용이었지.


그리고 침묵…



약 30초 정도의 침묵이 지나고, WA2000은 반지 상자를 닫았어.

그리고 단말기에 답장을 보냈지.


[WA2000: 미안해.]


자신의 눈앞에서 잠들어 있는 이 사랑스러운 남자아이.

이 아이를 볼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니까.


다른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싫어.


WA2000은 결심이 들었지.


단말기에 곧바로 진동이 울렸어. 보나마나 스프링필드의 답장이겠지만, WA2000은 사실 더 읽어볼 생각도 없었어.

단말기 전원이 그대로 꺼져버리고, 반지 상자도 닫힌 채 다시 서랍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빛이 완전히 덮여버렸지.


다시 어두워진 방 안. 그리고 WA2000의 붉은 눈은 조용히 다시 지휘관을 내려다보겠지.

츤데레 같은 부끄러움보다도, 모성애와 독점욕이 더 많이 섞인 낯선 눈빛이 되어 있겠지만.


이제 그 붉은 눈이 향하는 것은 지휘관의 휴대폰.

패턴 따위야 몇 주를 함께 뒹굴었으니 모를 리 없겠지.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들어오는 소녀전선 게임 앱…


게임 계정 자체를 지워버리면 그녀가 아는 전술인형들은 사라지겠지만... 이제 지휘관 곁에 남는 인형은 오직 그녀뿐이겠지?


그 생각에 죄책감이 아닌, 눈앞의 해방감과 행복감에 뒤틀려버린 웃음이 나오는 WA2000.

그러나 입으로는 그 츤데레 성격을 대변하듯이,


".......착각하지 마."


"네가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살아오던 그 망가진 세상이… 싫은 것뿐이니까."


그리고 휴대폰에서 소녀전선 앱을 터치하고는…

그 다음은 말 안 해도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