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영화들의 스토리로 써본 실지주 단편들

 

 

 

 



 


1관 - ㅌㅇㅋ

 

 

  

쾅!!

 

망설임 없이 문을 부수는 거친 소리.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임에도 침입자들에게 일말의 주저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겁에 질린 가쁜 호흡.

 

“놈들이 오고 있어... 아야노코지 군!”

 

“집중해. 호리키타.”

 

중요한 순간.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말 뿐이기에 단호한 어조로 그녀의 정신을 다잡는다. 

 

지금 호리키타가 패닉에 빠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영영 그녀를 보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놈들의 숫자는?”

 

“허억... 셋? 아니... 넷? 잘 모르겠어.”

 

“지금 네가 있는 장소는?”

 

“침입자들 건너편 층의 화장실에 있어.”

 

“지금 당장 가까운 침실로 가서 침대 밑에 숨어. 그리고 다 숨거든 다시 말해.”

 

일말의 주저함 없이 호리키타의 뛰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과 6~7초가량의 짧은 시간, 다행히 호리키타가 내가 말한 새로운 장소에 은폐하는데 성공한 듯 했다.

 

“... 숨었어.”

 

“그럼... 이제부터가 아주 중요해.”

 

호흡조차도 잊힌 한순간의 침묵. 

 

잠시의 고요함을 찢고 그녀에게 무정한 현실을 고한다.

 

“놈들이... 너를 잡아갈 거다, 호리키타.”

 

“흐윽..!”

 

비명, 내지는 흐느낌과도 같이 터져 나오는 짧은 탄식. 

 

하지만 그녀를 달래줄 시간 따윈 없다.

 

“호리키타. 집중해. 지금부터가 중요하니까.”

 

“... 듣고... 있어...”

 

“놈들이 널 납치하는 순간, 5~10초 정도는 틈이 생길 거다. 이때가 중요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놈들의 특징을 외치는 거야. 인상착의, 눈동자 색, 머리카락, 키, 흉터 뭐든 좋아. 알겠어?”

 

차마 대답할 순 없지만 제대로 듣고 있다는 듯 호리키타로부터 작은 호흡이 새어나온다.

 

비록 지금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저들이 노리고 온 것은 호리키타가 아닌 나였을 테니까. 

 

아무리 저들이라 한들, 이번 해외수학여행의 마지막 순간, 나와 호리키타가 우연히 일정과 숙소를 서로 바꾼 것 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동시에 그들의 배후가 누구일지도 짐작이 간다. 

 

아무리 그래도,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에 해당하는 자가 자신의 아들을 납치하라 시키는 일은 세상을 뒤져봐도 얼마 없는 일일 테지만.

 

그리고...

 

‘삐걱... 삐걱...’

 

바로 근처까지 놈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읍..!”

 

조용히 숨을 들이쉬는 호리키타의 소리.

 

‘왔나?’

 

나의 청각 또한 긴장감에 곤두서기 시작한다.

 

‘끼이익.... 저벅, 저벅, 저벅’

 

문을 열고 신발을 신은 채 호리키타가 숨은 방안에 들어오는 각기 다른 3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곧바로 들키는 건 아닐까 했지만... 다행히 침대 밑을 뒤질 생각은 바로 못한 듯 자기들끼리 뭐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리키타. 휴대전화를 좀 더 가까이 대줘.”

 

바로 옆의 사람조차 듣기 힘들만큼 작은 소리로 휴대전화에 속삭였다.

 

아무 말 없이 지시대로 따르는 호리키타의 쪽에서 조금 더 선명한 대화가 들려온다.

 

일본어는... 아니다. 상당한 수의 외국어를 익히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럼에도 익숙지 않은 언어. 

 

하지만 익숙하지 않다고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알바니아어... 인가?’

 

단편적으로나마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목표는 남자아이가 아니었냐는 질문. 제대로 알고 온 것이 맞느냐는 불만과, 어찌됐든 의뢰인의 요청대로 일단은 데려가야 한다는 답변. 

 

‘역시나 놈들의 배후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곧이어 다른 방을 찾아보자는 말과 함께 다시 방을 나서는 서로 다른 발자국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 발자국의 숫자는...

 

하나... 그리고 둘...

 

‘둘...?’

 

등골에 오싹한 땀이 흐른다.

 

‘설마?’

 

“됐어... 아야노코지 군. 아무래도 나를 못 보고 그냥...”

 

 

“안 돼 호리키타!”

 

 

쾅!!

 

“꺄아아아악!!”

 

거친 파열음과 함께 들려오는 사람이 끌려가는 끔찍한 소리.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참담함 너머로 나의 마지막 당부를 지키는 호리키타의 비명이 들려온다. 

 

“키 180! 턱수염에! 큭? 오른손 달과 별 문신!”

 

그런 외침의 너머로 거세게 저항하는 요란한 소리가 우당탕탕 들려온다.

 

상당한 수준의 무도를 익힌 호리키타였기에 그나마 그 정도의 틈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악!

 

틀림없이, 사람의 목을 내려쳐 기절시키는 소리.

 

나 또한 아주 잘 아는 그 소리의 너머로.

 

“아야노...코지..구..ㄴ...”

 

의식이 멀어져가는 호리키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방에서 떠나갔던 두 사람이 돌아와 무거운 무언가를 질질 끌고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동안의 정적. 하지만 나에게는 습격범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야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어린 시절 화이트 룸에서의 격투교육 당시, 4~5살에 불과하던 나를 거침없이 바닥에 몇 번이고 내리꽂던 '그 교관'의 손에 새겨진 문신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철커덕.’

 

호리키타의 휴대전화를 집어 드는 소리.

 

미세하게 들려오는 상대의 숨소리에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잠깐의 시간임을 직감했다.

 

 

태연하게 인사를 건넬 것인가?

 

이쪽의 정보를 감추기 위해 지금이라도 전화를 끊을 것인가?

 

 

찰나의 고민 후 내가 선택한 것은 그 어느 선택지도 아니었다.



 

"... I know who you are." 

(... 네가 누군지를 안다.)

 

"And I know what you want."

(그리고 뭘 원하는지도 알지.)

 

담담한 목소리의 영어가 내 입에서 흐르듯 나왔다. 

 

"You'd like me to go back to the White Room, but unfortunately the time I've been given here hasn't run out yet. There's no reason for me to go back there now"

(내가 화이트 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겠지만, 아쉽게도 아직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지를 않았다. 내게 지금은 그곳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어.)

 

여기서 어조를 살짝 바꿔 말을 이어나간다.

 

"But what I do have, are a very particular set of skills"

(다만, 내게 특별한 기술들은 있지.)

 

"The skills you had taught me very harshly and the skills you hadn't.

The skills that make me a nightmare for people like you who have taught me everything."

(당신들이 죽음의 문턱까지 데려가며 가르쳐온 기술들과, 당신들에게 배우지 않은 기술들.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온 당신들에게조차도 결코 잊지 못할 악몽 같은 경험을 하게 할 그런 기술들이지.)

 

침묵을 유지하는 상대에게 마지막 경고를 던진다.

 

"If you let Horikita Suzune go now, that'll be the end of it."

(지금 당장 호리키타를 놔줘라. 그렇게 하면 아무런 일도 없을 거다.)

 

"I will not hurt you. Above all, I will go back on my own after I finish my work at this school."

(너희를 해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이 학교에서의 볼일이 끝나면 내 발로 돌아갈 것이다.)

 

"... But if you don't,"

(... 하지만 그러지 않겠다면,)

 

"I will look for you."

(너희를 추격할 것이다.)

 

"I will find you..."

(너희를 찾아내서...)

 

이 이상 차가울 수도, 싸늘할 수도 없는 냉담한 말로 나의 의사를 맺었다.

 

"... and I'll bring pain to your soul."

(너희들의 영혼에 고통을 안겨주마.)

 

 

그저 그런 통보.

 

그런 나의 위협에 휴대전화 너머에서는 잠깐의 침묵 후 짧은 한마디만이 들려왔다.

 

"... Good luck."

(...잘해보라고.) 

 

무겁게 내리깔리는 목소리.

 

그리고는 잘그락! 퍽! 하는 휴대전화를 부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겼다.

 

'Good luck.'... 짧고도 짧은 말이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역시 내가 아는 인물임을 확신했다.

 

조용히 눈을 감자 나에게 여동생을 잘 부탁한다던 호리키타 마나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이윽고 신호가 끊겨버린 휴대전화를 조용히 응시하며 다짐했다.

 

나 자신을 대한 공격은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다. 이미 이 학교에 들어오며 각오한 바니까.

 

하지만, 내가 속세에까지 나와서 시도하려는 계획을 망치는 것은... 특히나 그 중심이 되는 호리키타를 건드는 것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고요하게 흘러넘치는 분노를 가슴속에 접어 넣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둠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을 향해.

 

 

 

- 실지주 X 테이큰 (2008. 피에르 모렐 作)

 

 

 

 

 

 


2관 - ㅋㅂ

 

 

 

“흐음... 이거 참, 곤란한 걸?”

 

“...”

 

“어, 어떻게... 그런...?”

 

너무나 어이없다는 듯 터져 나오는 실소와 고요한 침묵, 그리고 절망 섞인 비명. 

 

그런 각기 다른 반응이 시로와 나, 그리고 유키. 우리 세 명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이 평범한 6살짜리 아이들에게서 나올 반응인지는 알 수 없다. 

 

기억이 닿는 한 우리는 평생을 이 화이트 룸이라는 시설 밖으로 나가본 적도, 이 시설에 있는 아이들 외에 다른 아이들을 만나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진행 중인 ‘화이트 룸 커리큘럼 _ 프로젝트 2’의 중간시험이 우리 나이 대의 아이들의 수준에 비해 어느 정도의 객관적 난이도를 지니고 있는지 또한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단지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 또한 낙오자의 꼬리표를 단 채, 그동안 보아온 다른 화이트 룸 원생들처럼 퇴출되고 말 것이라는 것 뿐.

 

 

3인 1조로 진행되는 이번 시험의 진행방식은 단순했다.

 

벽에 걸린 거대한 전광판에 표시된 3d 모형의 지도. 

 

몇 개나 되는지 모를 무수한 정육면체의 방들끼리 서로 연결된 구조를 헤쳐 나가며 함정이 있는 방을 피해 탈출구로 향하라는... 그 외에는 어떤 설명도 없었던 테스트. 

 

물론 우리가 직접 발로 이동하는 시험은 아니었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패널에 현재의 방으로부터 전, 후, 좌, 우, 위, 아래. 6가지의 방 중 어느 방향으로 이동할지를 고르면 전광판에 표시된 우리의 위치가 바뀔 뿐이다. 

 

동시에 인접한 방 외에 우리가 지나쳐오거나 아직 가지 않은 방들은 어둠으로 가려지기에 전광판을 바라보아도 전체의 구조나, 우리가 전체 방들 중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이토록 당황한 이유는...

 

“그렇게나 돌고 돌아 다시 처음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건가?”

 

팔짱을 낀 채 시로가 중얼거렸다.

 

시험이 시작된 지 벌써 1시간 가량이 지났지만, 그동안의 노력을 비웃듯 전광판이 가리키는 우리의 현재 위치는 시험을 시작했던 최초의 방이었다.

 

“... 이곳이 처음 시작한 방인 건 맞는 거야?”

 

답을 알고 있음에도 다른 두 사람을 떠보았다.

 

“그야 당연하지. 키요타카 너도 보일 거 야냐? 방에 표시된 3개의 숫자가 우리가 출발했던 방과 동일한 숫자라고?” 

 

고개를 들어 전광판에 표시된 현재의 방에 (567. 898. 545)라는 숫자가 써져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모든 각 방마다 쓰여 있는 3자리의 숫자 3개. 

 

(566. 472. 737) (149. 419. 568) 등등... 그것이야말로 이 불친절한 시험에 주어진 유일한 단서였다. 

 

물론 처음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여러 차례 함정 방에 진입하며 시행착오를 거치고 알아낸 몇 가지 룰을 이정표 삼아 방들 사이를 헤쳐오기를 한 시간.

 

그런 고생 끝에 도달한 곳이 처음 출발지점이라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을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면 좋지... 키요타카, 시로?”

 

조금은 진정한 듯 유키가 시로와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타인과의 '소통' '협력' 등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는 나에겐 그 자체가 의미불명의 행동이지만... 애초에 3인1조로 진행되는 시험. 정보의 공유정도는 불가피하다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가 있다면 좋겠지만...

 

“2포인트... 남았나?”

 

나의 중얼거림에 시로와 유키의 시선이 전광판 아래에 남은 우리의 포인트로 향했다.

 

시작당시만 해도 10포인트로 표시되었던 우리의 점수는 어느덧 2포인트만이 남아있었다. 이 또한 별다른 설명이 없었지만 필시 우리의 탈락까지의 남은 잔여 포인트일 테지.

 

시험시간이 30분 지날 때마다 1포인트의 감점. 그리고 함정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또 1포인트 감점.

 

그렇게 알아낸 규칙에 따르면 현재는 시험 시작 후 1시간 이상이 경과했으며, 함정의 방에 들어선 것은 6번이라는 상황. 

 

그 결과 세이프티 라인도 이제 끝에 다다랐다. 

 

“역시 단서들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봐야할 거 같아.”

 

“단서들이라면 방마다 적힌 숫자들 말이지 시로?”

 

시로와 유키가 서로간의 의견을 주고받는다. 

 

그런 그들과 잠시 떨어져 나 또한 머릿속에서 나름대로의 답을 새롭게 도출해 보았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있잖아 키요타카.”

 

생각에 잠겨있자니 어느덧 내 앞에 유키가 와있었다.

 

“뭔가 알아낸 모양이네, 그렇지?”

 

그 말에 빤히 유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것은 유키를 떠보기 위해서가 아닌, 순수하게 궁금증에서 기인한 질문이었다.

 

그야 그럴게, 유키의 말대로 내 머릿속엔 이 시험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유키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표정에 드러난 건가?’

 

표정에 나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5살 때 이미 고쳤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내 표정에 무언가 속마음이 드러나고 있다면 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야 그럴게, 키요타카 왜인지 모르게 기뻐보였는걸?”

 

이건 전혀 예상 못한 대답. 

 

들고 있던 패널의 어두운 화면에 내 얼굴을 비춰보았지만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나 자신이 비칠 뿐이다.

 

‘그 전에... 기쁘다? 기쁘다는 게 뭐지?’

 

사전적인 정의야 알고 있다. 사람이 기쁠 때 미소, 웃음 등의 표정이란 것을 보인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유키가 나를 보고 발견했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근거는?”

 

어쩔 수 없이 유키에게 내가 눈치체지 못한 다른 근거가 있나 묻는다. 

 

“음... 말로 설명하긴 힘든데... 뭐랄까? 그냥 그렇게 느껴졌어. 왠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달까?”

 

“... 비논리적이군.” 

 

그 한마디로 일축되는 주장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것은 정답이니...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한 고민을 하는 나의 모습이 유키에게는 또 다른 단서가 된 걸까? 이번에는 확신을 갖고 나에게 도움을 청해온다.

 

“도와줘 키요타카! 분명 뭔가 알아낸 거지? 키요타카가 도와준다면 우린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야!” 

 

팔에 매달려오는 유키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잠시 생각에 잠긴다.

 

‘... 자, 그럼 어떻게 한다?’

 

‘힘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건 어리석은 자가 하는 짓이다.’ 

 

예전에 한 남자가 내게 했던 말이 문득 스쳐지나간다. 

 

‘만약 이대로 이곳에서 탈락한다면... 나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인가?’

 

아니 나만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한 ‘보험’은 들어놨으니까. 

 

하지만, 시로와 유키. 다른 원생들 중에서도 비교적 우수한 이 아이들이 앞으로 ‘실패를 겪을 기회’를 잃는 것은 결국 나 또한 바라는 일이 아니다. 

 

내가 6년가량을 살아오며 성장에 대해 느낀 것. 그것은 바로 실패로부터 학습하는 것만큼 값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내가 경험한 실패’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망한 타인의 실패경험을 접할 기회를 잃는 것은 나에게 있어 분명한 경험적 손실이니까. 

 

앞으로도 시로, 유키 너희들은 나에게 더 많은 실패의 경험을 보여줘야 하니까. 

 

‘할 수밖에 없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도 모르게 작게 한숨이 나왔다.

 

이 시험에서는 필기구가 제공되지 않았기에 옷에 달린 단추 하나를 떼어내 바닥의 얇은 강판에 긁어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시로와 유키가 둘러싸고 바라보며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왔다.

 

“우선 시로. 네가 생각해낸... 방의 3자리의 숫자들을 각 자리마다 더한 후 데카르트 좌표에 반영해 현 위치를 계산한다는 발상은 나의 생각과 일치해. 더할 나위 없는 정답일 거다.” 

 

단추로 세 개의 숫자들을 써내려 간다. 

 

“우리가 지나쳐온 (517,478,565)의 방의 예를 들자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5+1+7=13, 4+7+8=19, 5+6+5=16. 다시 말해 x축에서 13번째, y축에서 19번째, z축에서 16번째의 방이라는 뜻이지. 동시에...”

 

다음으로 하나의 숫자를 써넣는다. 바로 26이라는 두 자릿수 숫자 

 

“아까 전 유키가 알아낸 대로, 이 전광판 속 테스트 시설의 한 축은 모두 26개의 정육면체 방으로 이뤄져있다. 즉 이 테스트에 존재하는 방의 개수는 26x26x26. 총 17,576개의 방이 있는 셈이지.”

 

그 정도의 계산이야 다른 두 사람도 모두 암산으로 풀 테니 굳이 적지 않기로 한다.

 

“동시에 각 방에 적힐 수 있는 3자리 수 중 최대치는 999. 즉 9+9+9 = 27이라는 좌표가 이 방들 중에 적힐 수 있는 숫자의 최대치인거다.”

 

그쯤 말했으면 두 사람 다 위화감을 느꼈으리라. 조금 전에 말했듯 이 가상공간의 한 변의 최대치는 26이니까. 

 

“어...? 그럼 27이라는 좌표를 가리키는 방은....?”

 

“... 이 구조물의 바깥... 다시 말해 출입구, 혹은 출입구로 향하는 다리... 라는 뜻이지? 키요타카?”

 

“그래. 다시 말해 우리가 목표로 향할 방은 999. 그저 그 숫자가 적힌 방을 찾기만 하면 되는 거지.” 

 

“하지만 키요타카, 문제는...”

 

“탈출구의 위치와, 그 곳까지 이동하는 중간 도사리는 함정방의 위치지. 그것이야말로 사실상 이 시험의 모든 것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시험 초반 데이터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작위로 방에 들어갔다가 삐빅하는 소리와 함께 포인트가 차감되는 것을 영문도 모르고 지켜보았을 때와는 다르다. 

 

실제로 우리는 이미 30분 전에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함정방을 구분하는 규칙을 찾았으니까. 

 

아니... ‘찾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일단은, 다시 한 번 소수(Prime number)가 포함되어 있는 방만 피해서 진행해 볼래?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지만!” 

 

유키가 다급하게 외친다. 분명 초조함이라는 감정이겠지. 나에게는 역시 이론상으로밖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분명 소수가 없던 방에서도 포인트가 차감 되었는걸! 그때는 포인트가 자동으로 차감되는 시간도 아니었어.”

 

그것이야 말로 지금 우리의 발을 묶는 난제였다. 

 

약 30분전, 유키와 시로가 거의 동시에 ‘그거다!’ 하고 소리치며 찾아낸 귀납적 규칙. 

 

바로 3개의 3자리 숫자 중 1개라도 소수(Prime number)가 포함된 방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가령 (517, 478, 565)의 방. 세 숫자 모두 소수가 아니므로 해당 방은 포인트가 차감되지 않는 안전한 방이었다.

 

하지만 (566, 472, 737), (149, 419, 568)의 방. 737, 149, 419와 같은 숫자들은 소수이므로 해당 방은 함정의 방이라는 결론.

 

그리고 실제로 다음 방에서도, 또 다음 방에서도. 지도상에서 인접한 방의 숫자를 미리 확인하고 소수가 있는 방만을 피해가며 안전함을 확인하자 그 가정은 이윽고 확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 확신은 20분밖에 지속되질 않았다. 

 

분명 소수가 없는 방이었음에도 들어감과 동시에 함정방으로써 포인트가 차감된 것이 불과 10분전.

 

혹시나 전산상의 오류가 아닐까 했지만 감독관측으로부터의 개입은 없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추측이 틀렸거나... 무언가를 간과하고 있다는 뜻일 테지. 

 

잠자코 듣고 있던 시로가 끼어든다.

 

“소수... 이외의 다른 규칙이 있다는 거로구나 키요타카?” 

 

‘이제야 알아챘나?’ 아니... 시로라면 시간 문제였을 뿐, 늦든 빠르든 분명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 단순한 소수(Prime number)가 아니다.”

 

1+1은 2라는 것을 말하듯 아무런 감흥이 없다.

 

“거듭제곱 소수(Power prime number)... 그것이 우리가 간과한 또 하나의 함정방의 규칙이다.”

 

시로와 유키라면 그 정도만 말해줘도 충분할 것이다. 현명한 아이들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것만으로도 ‘과연!’ 하는 깨달음의 표정이 두 사람에게 스친다.

 

“그렇군... 그렇다면... 분명 841..! 소수가 아님에도 우리의 포인트가 깎여나간 방에 있던 숫자였지.”

 

시로의 기억력이 우리가 행한 오류를 반추하게 한다.

 

“841... 841... 그렇구나! 분명 소수인 29의 거듭제곱이야! 그 자체로 소수는 아니지만... 소수의 거듭제곱에 해당하는... 키요타카의 말대로 함정을 가리키는 숫자였어!”

 

머릿속으로 단시간에 소인수분해를 해내는 유키의 암산능력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분명 그렇다면... 처음으로 생각해낸 소수의 방을 피해가야 하는 규칙과도 접목할 수 있어. 이걸로 함정의 방을 피해갈 수 있을 거야. 응, 응! 굉장해... 굉장하다구! 키요타카!”

 

‘또... 인가?’

 

언젠가 유키에게서 보았던... 뺨의 표정근(表情筋), 눈가의 안륜근(眼輪筋), 그리고 눈썹 부근의 추미근(皺眉筋)이 만들어 내는 표정. 이른바 ‘미소’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유키가 지어 보인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홀로 따라해 보려고 해도 쉽사리 되지 않던 그 표정. 

 

커리큘럼 외적으로 나의 사적인 호기심영역에 들어가 있는 주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호기심보다도 눈앞의 시험을 해쳐나가는 게 우선이다.

 

이 시점에 이르러 남는 문제는 한 가지. 바로 17,576개의 방 가운데 출구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무작정 마구잡이식으로 모든 방을 지나쳐나간다면야 언젠가 찾을 수도 있겠지만, 17,576개라는 숫자 앞에서는 아무래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아직 우리가 어째서 처음의 위치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다만 키요타카?”

 

시로가 무덤덤하게 묻는다.

 

“이미 탈출구의 위치까지 예상하고 있는 거겠지?”

 

“어? 정말이야 키요타카?”

 

유키의 눈이 반짝 빛난다.

 

물론 우문일 뿐이다. 애초에 확신이 없다면 이야기를 꺼내지 조차 않았을 테니까.

 

짐작이지만, 사실 시로 또한 어느 정도는 나와 같은 답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자리를 돈 게 아니야.”

 

덤덤히 전광판을 가리키며 선언한다. 

 

“우리가 들어와 헤매고 있는 이 구조물 자체가 스스로 돌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 마치 하나의 거대한 정육면체 큐브퍼즐처럼 말이지...”




그리고... 그 이동규칙에 대해서도 3개의 숫자들이 또 다른 규칙에 의해 보여주고 있음을 나는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치환법’을 떠올렸다면 시로와 유키 또한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을 테지.

 

그리고 그 마지막 규칙이야말로 방들이 이동하기에 앞서, 우리가 찾아가야할 탈출구의 좌표를 정확하게 알려줄 것이다.

 

“아...!” 

 

그 순간 전광판을 보던 유키의 입에서 탄식이 터진다.

 

“포인트가...?” 

 

어느덧 다시 돌아온 30분. 남은 2포인트의 마지막 유예분인 1포인트가 차감되었다.

 

“... 이것으로 이제 한 번의 실수도 용납 받지 못하는 건가?”

 

시로의 중얼거림에 문득 감정과 관련해 생각나는 바가 있어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았다.

 

“두려운 거야 시로, 유키?”

 

“아아... 그래 조금은... 이런 불필요한 감정은 의미가 없는데 말이야.” 

 

“나도 그래... 키요타카. 하지만 왜일까? 조금이지만 심장박동이 빨라지는데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은걸?”

 

그들에게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들이 말하는 두려움의 감정이라는 게 어떤 건지... 모르겠다. 

 

고민해 봐도 알 수 없는 것인 만큼 지금은 그저 1초라도 더 시간을 아끼기로 한다.

 

“가자 시로, 유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설명할거다. 내가 알아낸 이 방들이 순환하는 규칙을 말해주마. 물론 너희들이 내 생각을 믿을 수 있다면 말이지.”

 

“... 믿어 키요타카. 나는 키요타카를 믿을래.”

 

아무런 근거도 없을 텐데, 그럼에도 나를 믿는다는 유키는 언제 봐도 이해하기 힘들다.

 

“흠... ‘숫자야말로 신이 남긴 친필에 가장 가까운 글자다.’ 프로젝트 2의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의 말이었지.” 

 

시로가 나도 기억하고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입을 땐다.

 

“나는 키요타카를 완전히 믿지는 못해.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하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할 테니, 그런 숫자에 대한 이야기라면 믿어보겠어.”

 

“... 얼마든지.”

 

“응. 좋아, 키요타카!”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벼랑 끝의 마지막 30분.

 

하지만 왜였을까?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분명 이 시험을 통과할고 말거라는 낙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감정을 조금 더 자세히 기억해둘 것 그랬다. 

 

왜냐하면 그것이 몇 년 후, 시로와 유키가 화이트 룸을 나가기 전에 그들에게서 마지막으로 느꼈던... 이른바 ‘동료의식’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도 육성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의 일이었으니까.

 

 

 

실지주 X 큐브 (1999. 빈센조 나탈리 作)

 

 

 

 

 

 


3관 - ㄹㅂㅇㅊㅇㄹ

 

 

 

온 세상이 하얀 날이었다.

 

소담스럽게 쌓인 눈들이 야경 빛에 반사되어 잔잔하게 반짝이는 겨울밤. 사람들이 말하길, 성탄의 축복이 함께하는 12월 24일, 통칭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한다.

 

내게 깃든 지식에 따르면 과거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하루의 경계는 일몰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성탄의 성스러움과 장엄함은 그 전날인 크리스마스이브부터 깃든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당일 못지않게, 오늘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테지. 

 

물론 오늘날, 그러한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날이라는 의미가 더 강해진 지금, 나 역시 학교 기숙사방에서 또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벽에 걸린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아담하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식탁에 놓인 앙증맞은 케이크와 먹다 남은 여러 음식들. 그리고...

 

쏴아아아...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옷은 가지고 들어갔어야지...’

 

남자친구의 방이라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케이는 오늘 저녁 입고 있던 산타걸 코스튬을 화장실 입구에 벗어둔 채 씻고 있었다.

 

물론 크리스마스이브에 맞춰 연인 둘만이 함께하는 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 또한 모르지는 않다. 

 

최근 나와 서먹했던 케이가 이 정도로나마 마음이 풀린다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것일 것이다.

 

내게는 아직, 카루이자와 케이라는 패의 활용가치가 남아있으니까 말이지.

 

시선을 돌리자, 책상위에 놓인 케이와 단둘이 찍었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제법 손때를 탄 듯 케이와 나 사이의 중앙에 갈라진 것처럼 무언가 거뭇한 얼룩이 묻은 것이 보였다. 

 

케이와의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나 역시 아직 장담은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연애교과서로서의 케이와의 진도는 거의 최종장에 접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은 건 차후 내 계획이 진행될 때까지 이 관계를 유지하며 관망하는 것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의자에 앉아 남은 음료를 들이키고 있을 때였다.

 

 

딩동~

 

 

고요했던 밤. 기숙사의 초인종이 방안에 맑게 울린다.

 

날짜상으로나, 시간상으로나 누군가 찾아오기엔 어색한 시간. 

 

그런 초인종 소리가 화장실에도 들린 건지 안쪽에서 케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왔어, 키요타카?”

 

“... 글쎄? 내가 나가볼게.”

 

풀어헤쳤던 셔츠를 여미며 현관으로 향했다.

 

외시경에 성에가 껴 밖이 보이지 않았기에 조용히 문 앞에서 누구인지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다만 그 순간. 미세한 문틈 사이로 약하디 약한 바람에 실려온 아주 익숙한... 시트러스 향이 느껴졌다.

 

‘... 설마...?!’

 

살짝 놀라서 조용히 문을 여니...




 

“...”

 

“...”

 

마주본 서로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눈에 보아도 크리스마스 파티를 가던 길인 듯 다소의 노출은 있었지만, 이치노세의 복장은 화려했다. 

 

반대로 이치노세의 눈에도 채 여미다 만 셔츠를 입은 내가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싱긋 웃는 이치노세에게 나 또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 그러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그 순간 화장실 안쪽에서 다시금 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요타카~ 누구야?”

 

그 목소리에 이치노세의 눈에 순간 쓸쓸한 빛이 어리는 것도 잠시, 조용히 검지를 들어 입술에 쉬잇 가져다대는 이치노세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스케치북 하나를 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캐럴을 들려주러 온 사람이라고 해 줘.]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무언의 자세와 글로 준비한 행동에서 케이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도 이치노세가 이곳에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캐럴을 불러주러 온 분이셔. 크리스마스잖아.”

 

“헤에? 학교에서 그런 것도 해주는 거야? 미안 키요타카, 난 아직 좀 걸릴 거 같아.”

 

“천천히 해.”

 

일단은 순순히 이치노세의 말... 아니 이치노세의 글을 따라 그렇게 둘러대자 이윽고 휴대전화를 꺼내 준비한 음악을 재생하는 이치노세였다.

 

음악 파일에 상당히 공을 들인 듯, 아니면 요즘 휴대전화의 질이 그만큼 좋아진 듯. 마치 사람이 라이브로 부르는 것 같은 잔잔한 캐럴이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Stille Nacht, heilige Nacht 인가...?’

 

우리말로 하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화이트 룸에서도 최소한의 사회적 교양을 익히기 위해 들어본 적 있는 노래였다.

 

복도에 따뜻한 음악이 퍼지기 시작하자 이치노세가 조용히 다음 페이지를 넘겨 내게 보여주었다. 

 

[만약 내게 행운이 따라준다면...]

 

내가 읽을 수 있도록 잠깐의 간격을 두고는 다음 페이지를 향해 찬찬히 종이를 넘긴다.

 

[언젠가는 이런 사람들과도 연애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페이지에는 나도 티비에서 본 적 있는 유명한 남자 연예인들의 사진 몇 장이 붙어있었다.

 

한 박자 늦게 가벼운 웃음을 위해 넣은 페이지임을 깨달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웃음 짓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이치노세가 캐럴의 템포를 맞춰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말하고 싶어.]

 

계속해서 페이지가 넘어간다.

 

[무엇하나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솔직한 나의 마음을...]

 

“이치ㄴ...”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낼 뻔한 걸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멈췄다. 

 

딱히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그 정도의 분위기를 읽을 눈치는 있으니까.

 

그런 나의 허둥대는 모습이 스케치북을 넘기던 이치노세에게 잠깐이나마 가벼운 미소를 실어준 듯, 옅은 미소와 함께 이어지는 다음 페이지.

 

[왜냐하면 이제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에는 모두 진실을 말하니까.] 

 

여기서부터는 나도 이치노세가 하려는 말이 짐작이 갔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없이 진지한 자세로 그녀의 소리 없는 고백을 경청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뒤 넘겨진 다음 페이지엔... 이치노세의 마음의 한 조각이 담겨있었다.

 

 

[나에게 아야노코지 키요타카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성탄의 성스러움 속에서 신에게 고해하듯, 경건한 어조와 한 획 한 획에 마음을 담은 듯한 글씨가 느껴진다. 

 

아련하게 퍼지는 캐럴 속에서 이치노세의 손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잠시 여운을 두려는 걸까, 아니면 차마 다음 페이지를 넘길 용기를 내지 못한 걸까.

 

가벼운 심호흡을 하고는 곧 다음 페이지를 내게 보이는 이치노세의 커다란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그런 눈물이 밤하늘을 가르는 별똥별과도 같이 다음 페이지를 가르며 그녀의 가슴속 깊은 진심을 전해온다.

 

 

[그런 당신을 나는 언제까지나 가슴에 묻고 사랑할 거예요.]

 

 

전해지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말 못할 여운을 남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치노세의 표정에서 ‘어...라? 웃으려고... 했는데 이상하네?’ 라는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그래서였을까?

 

애써 다시 웃음을 짓는 이치노세의 눈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눈물이 흘러버렸다. 

 

흩어진 눈물들이 흘러넘치고,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며 차례로 굴러 떨어졌다.

 

그럼에도 기어이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인사를 내게 전하고서야 눈가를 훔치는 이치노세의 얼굴은, 어느덧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 이치노세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듯하지만, 지금은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치노세 또한 못 다한 말이 있는 듯 무언가를 더 전하기 위해 살짝 입을 벌렸으나 이내 쓴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 후 살며시 내밀어 내게 전할 뿐. 

 

그리고는 이 이상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작게 손을 흔들고는 휴대전화와 스케치북을 챙겨 조용히 자리를 떠나갔다. 

 

 

 

복도 저편으로 이치노세가 사라져 갔지만 나는 현관문을 닫지 못했다. 

 

그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자니 조금 전 복도의 바닥에 떨어진 이치노세의 눈물 몇 방울이 얼어붙어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용기의 흔적이었다.

 

이치노세가 자신의 마음을 전해오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이 아니라고 해서 용기마저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닐 테니까.

 

오늘의 한 번의 기회를 위해 그녀가 어떠한 용기를 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의 너머에서 매우 드물게도 나 자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누군가에게 고백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 매일같이 괴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고. 그래도 고백할 수가 없고. 겨우 고백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에도 그토록 전하고 싶은 ‘좋아해’라는 단어는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런 거라고 난 생각해. 그렇게 필사적인 마음이니까, 고백 받는 쪽도 진심을 다해 대답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다름 아닌 내가... 

 

내가... 이치노세에게 했던 말이다.

 

그렇기에, 이치노세를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신발조차 신지 않은 채 차디찬 복도를 가로질러 이치노세를 쫒아가는 내가 있다.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나가자 공기 중에 남은 시트러스 향기가 사라진 주인에게로 나를 안내한다.

 

‘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만으로 검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엘리베이터 홀의 어둠속에 살짝 고개를 숙인 이치노세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맨발로 다가간 탓에 발소리도 나지 않아서일까. 내가 온 것조차 모르는 것 같다.

 

그런 이치노세의 바로 뒤까지 다가가서야 이치노세가 나의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본다.

 

“아...? 아야노...코ㅈ...”

 

하지만 이치노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양팔을 뻗어 나를 돌아보는 이치노세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녀의 차갑고 아름다운 입술을 내 입술로 막으며 훔친다.

 

“.....?!”

 

조금 전 이치노세가 말했듯, 아니... 글로 전했듯.

 

오늘 이 순간만큼은 마음을 전하는 진실됨이 허락된다면, 그에 대한 보답 또한 허락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나를 향한 이치노세의 마음에 대한 작은 답례일 뿐이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정적 속에, 검푸르스름한 어둠속 은은한 달빛아래, 그리고 차가운 공기 속에, 맞닿은 입술만이 서로에게 작디작은 온기를 전한다.

 

그런 길고도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서로의 얼굴이 떨어지자, 달콤한 꿈속을 헤매는 듯한 이치노세의 입에서 ‘아...’ 하는 작은 탄성이 나왔다.

 

“고마워 이치노세.”

 

그런 감사의 인사를 담아 고요하게 읊조리는 순간에 맞춰 띵! 하는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졌다.

 

후광과도 같은 그 빛 속에서 멍한 눈으로 살며시 입술을 매만지는 이치노세에게 다시 한 번 오늘의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메리 크리스마스.”

 

“... 메... 메리... 크리스마스...”

 

넋이 나간 듯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치노세가 뒷걸음쳐 들어가자 서서히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의 선만이 내 얼굴에 남은 찰나의 순간, 입술에 양손을 포갠 채 다리의 힘이 풀린 듯 주저앉는 이치노세가 얼핏 보인 듯 했다. 




 

그리고...

 

“하.... 하와와와와#@$×#/&$%....!!!!?” 

 

다른 층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의 안에서 그런 알 수 없는 소리가 메아리치며 멀어져갔다. 

 

 

 

잠시 후 다시 정적에 잠긴 어두운 홀.

 

맨발에 전해져오는 시림조차도 잊은 채 나는 잠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치노세에게 달렸다. 

 

이것은 그저 나 스스로도 설명 못할 변덕일 뿐이었으니까. 

 

기분 탓이겟지만... 유독 평상시보다도 하늘의 별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 같았다.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기적이라면... 기적이라는 것은 때론 참으로 잔혹하다고 느끼는, 나만의 비밀을 간직한 축복된 밤이었다.

 

 

 

- 실지주 X 러브 액츄얼리 (2003. 리처드 커티스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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