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대부분을 로비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카야나기와의 연락처가 없으니 만날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단순 무식하게 언제 나올지 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핸드폰도 없어서 심심할 수도 있다 느낄 수 있겠지만 때로는 무료한 시간을 의미없이 보내는 것 만으로도 나름대로 가치는 있었다.

 

항상 바쁜, 자신의 시간을 없이 보내야 하는 정계인의 삶과는 먼 여유로운 삶. 좋아하던 추리 소설을 읽기도 하며 커피의 맛을 음미하며 창 밖의 파도가 치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냈을까, 저 멀리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리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제의 복장과는 다른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편한 샌들의 패션을 한 사카야나기 아리스 그의 보호자, 사카야나기 이사장이 모습을 보였다.

 

과거 내가 화이트룸에서 벗어나 고도 육성 고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 분명 지금이 과거처럼 흘러간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겠지.

 

허나 내가 굳이 과거와 달리 사카야나기와의 접촉을 통해 입학을 도모하는 이유는 주어진 두 번째 생에는 분명히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해보고 싶은 것을 찾아보는 것, 장래 희망이라는 것을 정하기 위해서는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 동기 부여는 어렸을 때 우상으로부터 받기도 하며 한 순간의 감상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한다.

 

허나 어릴 때부터 감정이 제대로 학습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위인전을 읽어도 무언가 대단한 사람을 보아도 단지 분석이 이어질 뿐 그 사람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다.

 

요약하자면 무언가로부터 존경심등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어째서 그 위인이 그런 행동을 했는가를 분석하는 행위가 먼저 일어난다는 것이다. 

 

항상 효율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것, 그것이 승리주의의 기본 원칙. 보통 감정을 기본으로 행동이 일어난다고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애초에 감정이 아닌 목적을 보고 행동하기에 내가 꿈을 위한 동기부여를 받을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거꾸로 해보기로 했다. 감정을 통해 동기부여를 얻기보다는 행동을 통해 감정의 심화, 그리고 동기 부여를 얻어보기로.

 

남을 배려하고 비효율적이라도 인의에 맞게 행동한다. 결코 승리만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얕은 감정이 채워지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라. 

 

내가 적응하기로 한 삶의 방침. 

 

그 첫 단계로 나는 마츠오와 그의 가족의 비극을 막기로 했다.

 

Side 사카야나기 아리스

 

오랜만에 시간이 난 아버님과 함께 온 가족여행. 바다는 꽤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푸르른 파도와 화창한 햇살, 그리고 새하얀 백사장.

 

하얀색.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색인 검은색의 반대로서 알려진 순백색은 순결, 깨끗함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대중매체에서는 백을 선, 흑은 악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종교단체에서도 백색을 자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허나 저에게 있어서 하얀색은 그리 기분이 좋아지는 색상이 아닙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방문했던 순백생의 교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덩그러니 책상 하나만 놓인 그 하얀색 방에서 저는 그를 목격했습니다. 

 

어른들 조차도 몇 년은 공부해야 할 문제들을 대번에 풀어나가는 소년. 단순히 그의 천재성은 공부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운동과 각종 다방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그.

 

저의 주위의 연구원들은 모두 그를 보며 입을 모았습니다.

 

천재.

 

걸작.

 

다시는 없을 최고의 완성작.

 

그들은 그를 보며 경외감과 동시에 자신들의 업적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저는 다른 감정이 속을 채웠습니다.

 

태생부터 천재인 제가 만들어진 천재인 그를 이김으로써 태생에는 격차가 있다는 제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호승심. 리고 사람과의 교류없이 애정을 받지 못하며 감정이 없이 학대와도 가까운 커리쿨렴을 통해 천재로 성장해가는 그에 관한 동정과 연민.

 

저는 그 때 다짐했습니다. 그에게 언젠가 승리해 화이트룸, 새하얀 교실의 이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그렇기에 저는 백색을 보면 그렇게 마음의 한 켠이 불편해지고는 한 듯했습니다.

 

-휘익.

 

“앗…”

 

가라앉은 마음을 뒤로하고 백사장을 걷던 도중 바람이 불어왔고 제 머리에 쓰인 모자는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가려했습니다.

 

제 신체의 운신은 자유롭지 못하고 지팡이에 기대기에 저것을 주워오기란 힘든 상황. 아버님도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

 

그리고 그 때, 모자를 잡으며 저에게 돌려주는 한 소년과 마주했습니다. 

 

마치 한 로맨스 영화에 나올 법한 만남.

 

로맨스 영화에서의 운명적인 만남이란 서로의 눈이 우연치 않게 마주치고 그 시선이 눈동자를 타고 심장에 짜릿하게 닿는 것.

 

아아.

 

얼마나 지구란 작으며 그 속에 인연들은 복잡하게 얽혀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과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 그리고 서로를 응시하는 눈동자.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그곳에서 나온지 물어볼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머리를 채운 단 하나의 생각.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아야노코지, 키요타카 군.”

 

바보같이 당황한 표정. 보이고 싶지 않지만 그는 알아차렸을까요.

 

주변은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로 차 있지만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두근대는 자그마한 심장소리. 

 

제 생애 이렇게 바보같이 머리가 멍해졌던 순간이 또 있을까요?

 

==

 

Side 아야노코지.

 

“아야노코지, 키요타카 군.”

 

놀랍다.

 

나는 단순히 지금 시점에서는 나만이 그녀를 아는 상태일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완전히 예상에서 빗나간 점이라면 그녀가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과거에 말하길 어릴적에 나를 보았다고 했으니 지금의 나라면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 착오였던 듯했다.

 

긍정적인 부분인 것이 나를, 그리고 내 상태를 굳이 그녀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이야기.

 

부정적인 부분이라면 나는 그녀를 모른 척 대해야 한다는 것. 과거 고교 때 처럼 자유로이 대화를 시작하기란 힘든 상태라는 것이다.

 

“나를 알아?”

 

“모를리가요. 당신은 저를 모르겠지만. 저는 항상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런가.”

 

나는 손에 들린 모자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고 넓은 백사장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파라솔의 그늘 아래에 주저 앉았다.

 

“이야기, 할까?”

 

“후후, 모르는 사람이 당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전혀 제가 어색하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어떻게 당신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든가.”

 

“보통이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보통 사람이 아닐 것 같아서.”

 

“그럼 사양 안하겠습니다.”

 

사카야나기는 그 말과 함께 바다를 마주보고 옆에 앉았다.

 

“우선, 이야기의 규칙이라도 정해볼까요?”

 

“규칙?”

 

“네. 규칙. 누군가에게 불이익이 가거나 불편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단지 서로가 좀 더 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나씩 나열하며 입을 열었다.

 

“하나, 되도록 진실을 말하기. 둘, 질문은 서로 한 번씩 번갈아가며.”

 

“아무래도 좋아.”

 

“그럼 빠르게 진행하죠. 아야노코지 군 먼저 하시겠어요?”

 

“그럴까.”

 

사실 이 대화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많은 쪽은 월등히 사카야나기가 높다. 애초에 나는 그녀에 대해서 정보가 없다는 설정이므로 기초적인 것, 그러니까 이름이나 여러 정보에 질문을 소비해야 하는 반면 그녀는 여러가지를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간단한 것에 규칙을 정할 필요가 없지만 나에 대해서 승부욕을 가지고 있는 사카야나기의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을 듣고 싶어.”

 

“아리스, 사카야나기 아리스입니다. 나이는 아야노코지 군과 마찬가지로 15세랍니다.”

 

“사카야나기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물론입니다. 물론 아리스라고 불러도 상관없답니다?”

 

“알겠어, 아리스.”

 

“그럼요, 후후…. 아, 아리스라고 하셨나요?”

 

그녀가 이름까지 허락한 것은 진심이 아닌 단순히 자신이 이 정도로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서로의 대화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 

 

허나 갑작스레 든 생각은 어린아이 같은 생각. 놀려보고 싶다, 라는 생각. 

 

“‘아리스’라고 부른 게 맞아.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아리스.”

 

“아, 아직 저희는 제대로 무언가 해본 적도 없고…!”

 

사카야나기 아리스는 대화에 있어서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허나 그럼에도 간단한 호칭에 있어서 이렇게 당황하는 이유라면 우리가 처음 만난, 아니 다시금 재회라고 표현해도 좋은 상황에서 당황한 심정이 아직 진정되지 않아 지금 대화에서도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후, 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아야노코지 군을 키요타카라고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아.”

 

어떻게든 자신의 쿨한 페이스대로 돌려보려 하지만 이미 살짝 붉게 달아오른 피부. 아마 당황한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웠던 게 아닐까? ‘날씨가 덥네요’ 하면서 손으로 부채질을 해보지만 가뜩이나 하얀 피부기에 그녀의 홍조는 쉽게 지워질 리가 없었다.

 

“그럼 이번엔 제 차례인가요? 키요타카, 어떻게 화이트 룸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화이트 룸, 잘 아나보네.”

 

“그럼요. 실시간의 정보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곳인지와 그 곳에서 키요타카가 그 곳에서 어떤 존재인지도.”

 

나는 딱히 숨길 것이 없이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어차피 학교에 진학한다 하더라도 전과 같이 화이트 룸에서 견제는 들어올 것이고 초반부터 외부의 공격에 있어서 아리스의 도움을 얻는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역시 가동을 멈추지 않고서야.”

 

“맞아. 가동이 다시 정상화 되는대로 나는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그 말에 아리스는 작은 손을 꽉 쥐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키요타카는, 그런 곳으로 돌아가고 싶나요?”

 

“….”

 

“매일 같이 분, 아니 초 단위로 하루를 통제당하며 사람들의 온기도 느끼지 못하고, 애정도 받지 못한 채로 소중한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

 

“돌아가고 싶지 않아.”

 

숨기지 않는 진심. 더 이상 화이트 룸은 내게 무언가 지식을 줄 수 없기에,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에릭시톤, 기아의 신인 리모스에게 저주를 받아 항상 배고픔에 젖어 먹을 것을 찾아 헤매이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조차 잡아먹게 된 인간.

 

나는 그처럼 지식에 항상 굶주려 있다. 단순한 학문에서 벗어나 감정, 그리고 미래까지.

 

그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 비효율적인 행동들이란 사람을 우선시하는 것, 인의와 도덕 등의 것들이 있겠지.

 

나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아낼 것이다. 

 

“저 바다도, 백사장도, 그리고 너와 대화하는 것도. 전부 새로우니까.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니까. 나는 돌아가지 않아.”

 

그녀의 표정에 불안, 그리고 기쁨이 떠오른다. 

 

“많이 달라진 것 같네요.”

 

“…?”

 

“사람은 매 순간 감정을 서로 나누곤 하죠. 기뻐하고, 슬퍼하고, 웃다가 울다가. 하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키요타카는 그런게 없었어요. 단지 이겨야 하니까. 감정 따위는 배제했죠.”

 

“….”

 

“하지만 지금은 미약하지만 감정이 보여요. 즐겁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여러 기분과 감정들이 말이에요.”

 

아리스는 자그마한 손을 내 손에 얹으며 말했다.

 

“느껴지나요? 온기가.”

 

바람이 불어오지만 시원함보다는 따스함이 몰려온 듯했다.

 

“앞으로도 이 온기를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이 손의 느낌과 누가 당신 앞에 있는지를.”

 

-후후.

 

평소에 의례적으로 나오던 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한 아리스의 환한 미소. 그 미소는 내게 있어서 과거로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느낌을 미래에 줄 것 같다는 직감을 주었다.

 

이 온기를 언제나 느낄 수 있기를. 

 

그리고 나 자신이 온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나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명확한 직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