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차를 주문한 아사히나가 컵을 양손에 들고 입가로 가져갔다.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인데요. 나구모 선배에 대한 불만이나 반발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거죠?"



"응. 구체적으로 몇 명인지는 나도 몰라. 기본적으로 A반에 그런 정보는 들어오지 않고. 나는 모에카랑 사이가 좋았으니까 대충만 들었어. 아야노코지 군은 미야비가 3학년 전체와 맺은 계약에 대해선 잘 모르지?"



"학년 전체를 통제하기 위해 뭔가 방법을 쓰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럼 우선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네."



그러면서 아사히나는 잠깐 주위의 시선을 살피고,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자세하게 계약의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구모가 대다수의 3학년 학생들과 맺은 계약 내용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매 달 얻는 프라이빗 포인트의 75%를 나구모 개인에게 양도할 것.


나구모의 지시를 준수하고, 적대하는 행동을 보이지 말 것.


특정 금액의 포인트를 스스로 모아 인정받은 사람이 반 이동의 권리를 획득한다.


반 확정 전날에 모은 포인트를 전달할 것.


티켓 획득 후에도 나구모의 지시를 어긴다면 권리를 박탈당할 것.


이상의 5가지 조건을 지키는 학생은 2000만 포인트의 가치를 가진 포인트 쟁탈전의 참전권을 얻는다.



그리고 또 하나.



"미야비는 몇천만 포인트를 남겨뒀는데, 두 세장 쯤 되는 티켓을 걸어놓고는 계약한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제비뽑기를 시킬 생각인가 봐."



즉, 이 계약의 내용으로 티켓을 얻는 데에 실패하더라도 A반으로 가는 기회는 끝까지 있다는 것.


이 계약이 안전하게 성립되어온 이유는 나구모가 이끄는 A반 학생들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한 명의 개인으로서는 2000만 포인트를 모으기가, 즉 개인이 반 이동 티켓이 만들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차라리 그들 모두에게 흩뿌려진 소액의 프라이빗 포인트를 긁어모아 단 몇 장만의 반 이동 티켓으로 전환시킨다는 소리다.


B반 이하 학생들에게 A반으로 졸업할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깝지만, 부의 재분배를 실행함으로써 그 확률은 낮더라도 단 몇 퍼센트로 상승한다.


실제로 키리야마 등 일부 학생은 그 권리를 누리고 있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의 효과는 나타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75%의 착취율은 매우 가혹하지만, 이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학생들에게 티켓을 지급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는 데에 필수불가결하다.


또한 동시에 나구모에게 유리한 조건이기도 하다.


큰 금액의 포인트를 소비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반란의 싹이 트는 것을 조기에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걸 B반 이하의 반에 강요한 겁니까."



"응. 구체적으로 몇 명이 계약했는지는 미야비만이 알고 있어. 근데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이 여기에 따르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 A반도, 계약과는 상관없이 나구모에게 50%의 프라이빗 포인트를 넘겨주고 있어."



승리가 확정된 A반만이 매월 전액 자유롭게 프라이빗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다.


원래라면 당연하게 주어진 권리지만, 아랫 반에 소속된 학생들은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 부분을 나구모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서, 상황을 통제해올 수 있었던 거겠지.


3학년은 A반이 독주하고 있는 구조인만큼, 부담률이 50%라도 나머지 세 학급에서 모으는 75%의 액수보다 많을 것이다.


특별시험의 결과까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가진 나구모 입장에선, 모든 걸 장악하고 있는 왕좌에 앉은 셈이다.



"나는 우연히 미야비가 속한 B반에 배속됐어. 그 반을 미야비가 열심히 도맡아서 A반으로 올려줬고, 지금의 환경을 만들어준거야. 그런 덕을 입은 나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 쯤 물론 알고 있지만..."



입에 담기 꺼려지는 듯 했지만, 무거운 말을 목에서 꺼낸다.



"간접적으로라도 미야비가 만들어낸 환경 때문에 모에카는 퇴학당해버린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



그것이 아까 전 학교에서 보인 아사히나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이 쪽의 슈치라고 하는 선배와 키류인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방금 아사히나가 꺼낸 '간접적' 이라는 표현이 딱 이 쪽의 상황과 들어맞는다.



"아사히나 선배, 저를 조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돕는다고? 무슨 뜻이야?"



"3학년 D반의 야마나카 선배와 어떤 사이입니까?"



"야마나카 씨?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정도는 되지만, 특별히 사이가 좋은 건 아니야. 그래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은데..."



특별히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닌가.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오히려 이 쪽은 상황이 편리하다.



"아사히나 선배는 3학년이시니까, 야마나카 선배에 대해서 아사히나 선배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해주는 말이 더 의미가 있어요."



"그런 거야?"



나는 휴대폰을 꺼내 3학년 D반 야마나카 이쿠코의 OAA를 찾아보았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D반 타입의 학생으로, 모든 능력이 평균 이하. 


특기할 사항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교우 관계가 넓으신 선배인가요?"



"음, 글쎄. 같은 반 친구 여자애들과는 그럭저럭 사이가 좋겠지만, 발이 넓다거나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다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지."



아사히나 개인의 평가를 온전히 믿을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튼 OAA가 보여주는 능력 이상의 비범한 면모는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 같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오프 더 레코드로 부탁드릴게요."



"뭔가 재밌네, 서로 사정이 비슷하니까."



"그렇네요."



나는 아사히나에게 이번에 키류인이 도둑으로 몰릴 뻔한 일에 대해 전했다.


처음엔 놀라던 아사히나였지만, 곧 사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그래서 아야노코지 군이 3학년의 조사를 하기 위해 나한테 상담을 하러 온거고?"



"믿을 만한 선배라고는 아사히나 선배밖에 없습니다."



"뭔가 기쁘네. 나는 미야비의 곁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오히려 의심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데."



뭐, 평범하게 생각하면 나구모와 내통하는 쪽의 인간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사히나 선배 입장에선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 그렇네... 키류인 씨와는 솔직히 3년동안 대화해 본 적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마 아야노코지 군이 상상하는 그대로의 사람일거야."



"그렇겠죠."



"하지만 키류인 씨가 야마나카 씨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복수를 하겠답시고 도둑질을 덮어씌우는 건 별개지. 무엇보다 그런 걸 들켰다간 퇴학 당할지도 모르는데?"



"실제로 키류인 선배가 금방 눈치채서 야마나카 선배는 미수로 끝났으니까요. 바로 학교 측에 보고됐더라면 아사히나 선배의 말처럼 퇴학의 가능성도 0%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즉 이 사건은 처음부터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래도ㅡ 그렇네. 좀 납득이 갔을지도."



"납득이라면?"



"응. 아마 그 일이 있었던 직후가 아니었을까? 돌아가는 길에 무서운 얼굴로 남학생을 넘어뜨리고 짓밟고 있는 키류인 씨를 봤거든."



"넘어뜨리고 짓밟는다고요?"



평소에는 우아하다고나 할까, 적어도 침착한 이미지인 키류인. 


그다지 상상하기 쉬운 장면이 아니다.


 



"그 남학생은 키류인 씨가 야마나카 씨를 만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던 걸까, 야마나카를 당장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었어. 무슨 이유로 야마나카 씨를 지키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남자애가 안쓰러웠달까."



확실히 무시무시한 경험이었을 것 같다.



"참고로, 남학생의 이름은?"



"같은 D반인 아나자이 군이었나? 아마도."



이 시점에 새로운 이름이라.


야마나카를 뒤에서 조종하다 말고 키류인을 방해하러 나선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같은 반 친구를 보호하려는 마음이었을까?


아직 판단은 서지 않는다.



"야마나카 선배와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아사히나 선배가 불러주실 수 있나요?"



"어? 아, 응. 그건 어렵지 않지만..."



"그럼 부탁드립니다."



실제로 키류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던 야마나카를 직접 만나보지 않고는 얘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아사히나 선배가 채팅으로 연락하자 곧바로 야마나카는 읽은 듯 하다.



"지금 케야키 몰에 있는 것 같아. 아야노코지 군이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도 괜찮을까?"



문제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사히나는 그런 내용을 문자로 써서 보냈다.



"읽긴 했는데 답장이 안 오네, 잠깐만 기다려줄래?"



잠시 휴대폰과 눈싸움을 벌이던 아사히나 선배였지만, 몇 분 후 답신이 날아왔다.



"잠깐 기다려도 괜찮다면, 30분 후에 올 수 있대."



"상관 없어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이윽고 이 자리에 야마나카 선배가 오는 것으로 정해졌다.



"감사합니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야. 나도 진상이 궁금하고."



그 전까지 잠깐 시간이 생겨서, 나는 한동안 아사히나 선배와 그간의 학교생활, 특별시험 등의 일들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