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꿈을 꾸었다. 모든 오해가 풀리고 인간도 기계 기사도 기괴충도 그리고 다른 종족도 모두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꿈.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웃는, 너무나 다정한 꿈이었다.

 그래서 환한 빛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을때, 나는 다짐한 것이다.


 눈을 뜨자 처음 보인것은, 나를 노려보고 있는 임두크와 아우람의 얼굴이었다. 그 뒤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창 모양의 성유물-성창. 그리고 손에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묵직한 검의 감촉.

 기계 기사의 감옥에서 검은 리스에게 공격받은 이후의 기억은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만으로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브, 인거야...?"

 나를 노려보던 아우람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한다.

 "이브, 이브! 돌아왔구나, 이브!"
 "캥! 캥!"

 애처롭게 나를 찾는 아우람과 임두크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것 같다. 지금 당장이라도 옆에 달려가 둘을 꼭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아직 느껴지는 리스의 존재에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 순간은 틀림없이 단 한번뿐인, 신이 허락한 기적.

 나는 손에 든 검을 반대로 고쳐잡고 검끝을 배에 대었다.

 "이... 브?"

 아우람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끌면서 다가온다. 나를 위해 싸우고 상처입은 그에게, 나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려고 하고 있다. 이 검에 찔린 상처따위 그에 비하면 생체기에 불과하겠지. 그래도 지금 멈춰서는 안된다. 나는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고, 그대로 밀어넣었다.

 "안돼!!!"
 "컹!"

 '그만둬!!!!!!!!!!!!!'

 배에 따뜻함이 퍼져나간다. 성유물의 힘인지, 아니면 리스의 영향인지 고통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비통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아우람과 임두크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듯이 아파왔다.

 "이브! 이브! 어째서!"
 "끄으응..."

 망신창이인 몸을 끌고온 아우람이 내 몸을 껴안아주었다. 나도 안아주고 싶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것이 조금 분했다.

 "아우람, 임두크."
 "이브!"

 아우람의 따뜻한 눈물이 뺨에 떨어진다. 오랜만에 본 우는 얼굴은 역시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우람, 웃어줘."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웃어!"
 "그래도, 웃어줘."

 아우람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한손으로 눈물을 닦고 내게 웃어줬다. 눈은 빨갛게 부었고 입꼬리도 제대로 올라가지 않은 엉망인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우는 얼굴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응, 역시 아우람은 웃는 얼굴이 어울려."
 "얼마든지 보여줄게! 앞으로도 같이 여행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아우람은 웃는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아우람이니까, 나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럼 세가지만 약속해줄래?"
 "당연하지! 몇가지든 약속할게!"

 "그럼 첫번째, 내가 없어도 여행을 계속해줘."
 "네가 없어도라니 그런 말은..."
 "약속해줘."
 "...응."

 아우람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종족이나 가능하면 기괴충하고도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
 "...응."

 "...대답이 시원치 않네. 임두크, 아우람을 부탁해."
 "컹!"
 "응, 고마워..."

 임두크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우람하고 다르게 비장한 얼굴로 대답해줬다.

 "두번째는, 오빠를 부탁해... 내가 없으면 분명, 무모한 일을 벌일테니까..."
 "...응..."

 흐려진 시야속에서 저 멀리 달려오는 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가능하다면 마지막으로 오빠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지만, 너무 욕심 부리면 안되겠지.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나를..."
 "이브...?"

 말이, 목에서 막혀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우람이, 오빠가, 임두크가 제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이브? 이브?! 이브!"
 "캥! 캥! 캥!"
 "이브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아우람이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가... 미안해, 아우람, 임두크, 오빠...

 나와 함께 여행해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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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이 온통 새하얀 방에 그녀가 서있었다. 오빠보다 조금 작은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하늘색 머리를 가진 어른스러운 여성. 처음보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게 진짜 모습이야, 리스?"

 리스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분명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앞으로 한발짝, 한발짝만 더 갔으면 신의 힘이 손에 들어왔는데 잘도 망쳐줬어. 설마 별의 용사와 싸우기 위해 선택한 단순한 그릇에게 발목을 잡히다니."

 "신의 힘?"

 내 질문에 리스는 순간 놀랐고,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결정이 난듯 시원한 얼굴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래, 어차피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잠깐 이야기나 해보자."

 리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무것도 없던 방에 처음 보는 의자? 같은 물건이 두개 나타났다. 리스는 그 중 하나에 앉아 나도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처음보는 모양의 의자에 앉아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확인해봐야 할것이 하나 있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니, 무슨 뜻이야?"
 "킥킥킥."

 리스는 마치 함정을 파놓고 사람이 위를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네 오빠는 여동생이 죽을때 옆에 있지도 못한게 너무나도 분한 모양인지 용사님을 기절시키고 코어랑 시체까지 들고갔더라. 지금쯤 성유물의 힘으로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되살리려고 필사적일텐데, 이걸 어쩌나. 여동생의 영혼에는 원수의 영혼까지 함께 들어있었습니다~라는 거지."

 뺨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우람 앞에서도 괜찮았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 역시 그래야지. 네 희생도, 그 꼬마들의 노려도 모두 허사로... 너, 왜... 웃고 있어?"

 오빠는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또 혼자 싸우면서 상처입고 나쁜 일도 하겠지만, 그래도 오빠는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나도.

 "넌, 무섭지도 않아? 지금까지 너희들이 해온 일이,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데?"

 "무서워. 우리의 여행이 이렇게 끝나버린다고 생각하면, 무섭고 슬퍼서 견딜 수 없어."

 하지만, 약속했으니까.

 "아우람이 약속했으니까."

 나는 리스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대화를 하자, 리스."

 "그래, 좋아. 네 인생의 마지막 말동무정도는 되줄게."

 그리고 리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세는것조차 잊어버린, 별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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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을 수 없는 그 날 이후, 얼마나 지났을까.

 성잔의 여행이 한번 마침표를 찍었던 그곳에 한명의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이 된 용사와 그의 수호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오면 뭐라도 단서가 있을 줄 알았는데..."
 "크앙!"
 "그래, 그래. 안그래도 열심히 찾고 있어."

 이제는 닝기루스와 비슷할 정도로 자란 아브람과 성체가 된 임두크는 잭나이츠의 힘으로 강화한 금빛 갑옷을 입은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크롤러의 잔해를 뒤지고 있었다.

 성유물의 정체, 세계의 진실, 그리고 리스의 목적.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단서를 찾으려면 이곳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고철밖에 없네."
 "그르르르르르르."
 "그래, 너도 잘 찾... 뭐?"

 고철더미를 뒤지던 아브람은 임두크의 신호에 검을 빼어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간신히 들려오는 금속이 삐걱거리는 소리. 너무나 힘없고 약한 소리였지만, 아브람이 잘못 들을리 없는 소리였다.

 "기괴충!"

 아브람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아브람의 고동이 빨라졌다. 그 날의 기억이, 슬픔이 머리속을 채워갔다.

 '리스에게 속아 여행을 시작한 것도, 이브가 그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전부!!!'

 아브람이 검을 든 손에 힘을 쥐고 분노로 높이 들어올린 그때,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익, 끼-익...

 표면이 벗겨진 구체, 관절이 엇나갔는지 대각선으로 돌아가는 다리, 지금 당장이라도 꺼질듯한 빨간 빛. 어떻게 움직이는지 신기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마치 그날의 자신같은 크롤러. 분노로 가득했던 아브람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깃들었다.

 "삐비빅."

 "...약속, 했었지."

 아브람은 힘없이 검을 내렸다. 그러자 아브람에게 적의가 사라졌다고 깨달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크롤러가 아브람에게 다가왔다. 몸에 힘이 빠진 아브람은 크롤러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브람의 발밑까지 다가온 크롤러는 덜렁거리는 다리를 뻗어 아브람의 검을 만졌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창궁에게서 물려받은 무기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그 빛을 받은 크롤러의 동체에 이변이 일어났다. 주위에 떨어져있던 잔해들이 크롤러에게 모여 상처를 덮듯이 몸체를 수복해간다. 아브람은 처음에는 당황하여 전투자세를 취하려 했지만, 뒤를 따라온 임두크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칼에서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크롤러의 수복이 끝나자 아브람은 칼을 품에 집어넣었다.

 "가자. 임두크, 크롤러."

 아브람은 걸음을 내딛었다. 세계를 위해, 닝기루스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별의 용사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