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는 육화와 생아발론

원래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넣을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부족할 거 같아서 못 넣은게 아쉬움. 그래서 중간에 급전개라고 보여질 수 있다고 생각함 

과학적인 고증은 지적 마셈. 나도 이상하다는 거 암




1. 백설의 이야기

겨울에 쌓였던 눈이 햇빛에 씻겨 강으로 흘러갈 때 꽃은 핀다. 겨울의 흔적이 슬슬 사라져가고, 두툼하게 털이 부풀어올랐던 새들의 선율을 따라 피어날 준비를 하는 꽃봉오리를 훑는 봄바람을 따라 시클란과 프리무가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중간중간 계단도 만들어져 있을만큼 잘 정리되어있지만 아직은 미끄러운 산길 끝에는 뿌리가 튼실하고 줄기가 굳건하며 가지가 튼튼한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둘은 그 나무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어머니 나무 드리아스여. 올해도 봄의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왔습니다.”

말을 못하는 어머니 나무는 대신 가지와 잎사이로 햇빛을 그녀들에게 흘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따스함을 받은 그녀들은 고개를 들고는 프리무가 나무에게 바싹 다가갔다. 

거인의 배와 같이 굵은 줄기에 배꼽처럼 뚫려있는 구멍 하나. 딱따구리가 자신의 둥지로 쓰기위해 뚫었다기엔 너무 넓고 깊은 구멍이었다. 그 안에 있는 건 풀잎과 나뭇잎으로 엮은 작은 요람 하나. 그리고 그 작은 요람 안에는 갓난아이가 세상이 밝은 줄 모르고 잠자고 있었다. 프리무는 아기를 품에 안았다. 

나무 줄기 속에서 보이는 세상 밖에 몰랐던 아기는 몸이 흔들리자 눈꺼풀을 들어올렸고, 아마 태어나서 처음 봤을 사람의 얼굴을 눈에 새겼다. 아기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울지 앉았고, 자신을 안은 프리무의 가슴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젖이라도 달라는 걸까, 그냥 품의 따스함을 요구하는 걸까. 젖은 안나오지만 그 포근함은 요람에서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오기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다시 어머니 나무에게 예를 차리며 작별인사를 한 둘은 지나왔던 새의 선율을 따라, 꽃봉오리들을 따라 산길을 내려갔다. 

 

 

산을 내려오니 그들의 목적지까지 기다란 길이 이어졌다. 그 길은 어떤 때는 살얼음 사라진 냇물따라, 어떤 때는 나비의 날개짓을 따라 이어졌다. 미끄럽지는 않았지만 눈 녹은 길은 프리무랑 시클란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질척한 진흙이 신발 속을 젖게하고 하얀 양말을 더럽혔다. 

꽤 많은 시간을 걸으니 여름 장마를 준비하는 논두렁과 성곽이 보였다. 성문 앞 문지기가 자신의 눈에 보이자, 양 손이 빈 시클란이 겨드랑이가 보일 정도로 활짝 양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야호~ 저희 왔습니다~”

똑같이 두 소녀를 확인한 문지기는 창으로 바닥을 찍고는 우렁차게 외쳤다.

“공주님이 돌아오셨다! 어서 문을 열어라!”

그 명령과 함께 지평선 너머 햇님도 들어갈 수 있을만큼 커다란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빠르게 두들겨지는 북소리처럼 울렸고, 안에서 제각기 생활을 하고 있던 백성(요정)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아기를 안은 두 소녀가 입성했고 그 주위로 요정들이 몰려들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한들 사람들이 모이면 당연 떠들썩해진다. 나무 구멍 속 세상에서 듣는새들의 자장가 밖에 몰랐던 아기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안고있던 프리무가 울음을 그쳐보려고 살랑살랑 흔들어봤지만, 울음을 그치기엔 요원해보였다. 결국 곤란해하는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봄화정들이 몰렸다. 어느 봄화정은 웃긴 표정도 지어봤고, 또 어느 봄화정은 노래를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아기가 울음을 그친건 나비와 같은 날개를 가진 봄화정이 자신이 가진 작은 종을 손에 쥐어줬을 때였다. 

딸랑딸랑… 맑은 종소리는 봄이 왔다는 또다른 소식이 됐다. 이렇게 매년 어머니 나무에게 받아온 봄의 한조각 님을 환영하기 위해 요정들이 몰려드는 것은 그들이 봄을 맞이하는 소소한 행사이기도 했다. 

 

 

드디어 두 소녀는 이번 여정의 종착지이자 출발점이었던 궁전에 도착했다. 궁전의 문이 열리자 기품있는 옷을 입고 우아한 몸짓을 하고 있는 보탄과 에리카가 먼저 맞이했고, 둘보다 더 높은 신분이라는 걸 나타내듯 칸자시가 둘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시클란과 프리무.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봄의 한조각님은 안녕하신지요?”

칸자시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한조각의 안부를 묻자, 프리무는 여태 자신이 안고 있었던 아기를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건네줬다. 프리무에게서 아기를 받아든 칸자시는 품으로 안으면서 그 이마에 한 차례 키스를 해주고는 ‘지난 겨울에도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라고 속삭였다. 

칸자시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네 명의 시종도 그녀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궁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옥좌가 있는 곳. 칸자시는 그곳까지 이어지는 붉은 융단을 밟으며 걸어가고는 그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는 옥좌에 앉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옥좌를 앉을 자격이 있는 군주는 지금 그 품 속에 있으니, 보모자격으로 그 자리에 앉는 걸 용서받고 있다. 어찌됐든 왕이 처음으로 옥좌에 앉았다. 그렇다면 이제 화려한 대관식이라도 치러야할까. 그러나 가신 5명만이 지키고 있는 대관식은 너무나 소소할 것이다. 그러니 성대한 음악 대신 칸자시가 조용한 동요를 불러줬다.

“봄이여 오라… 어서 오라…”

아이들은 정말 눈깜빡할 사이에 큰다고 하지만 한조각의 성장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꽃이 떡잎에서부터 자라나는듯한 빠르기로 보일 거다. 다른 아이들은 3개월에 걸쳐야할 성장을 일주일만에 커버리는 한조각은 어느 날 보면 이가 없었음에도 그 다음 날보면 분홍 잇몸에 분명히 젖니가 자리잡고 있었고, 시클란이나 프리무가 가볍게 업을 수 있었던 몸무게도 다음 주에 다시 보면 도저히 그녀들로는 업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한조각을 어머니 나무에게서 데려온 겨울 한기가 남아있던 봄에서 벗어나 초목이 무성해지고 햇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여름이 됐다. 한조각이 아장아장 두 발과 두 손을 이용해서 기어다니던 시절에서 벗어나 서툴게 두 발로만 걸을 수 있게 되고 이내 두 발로 걷는거 뿐만 아니라 우다다 뛸 수 있게 됐을 때, 이제는 아기가 아닌 꼬마가 된 하얀 공주는 아직은 어림에도 자신이 너무나 빨리 자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칸자시. 난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거야?”

그래서 하얀 공주는 밤마다 침대 머리맡에서 칸자시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그 시간에 자신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잘 됐네요. 오늘은 그걸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칸자시는 자신이 가져온 동화책의 표지를 하얀 공주에게 보여줬다.

“스노드롭 여왕님…?”

“네. 그리고 이건 공주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펼쳐지는 동화책. 그 속에 적혀있는 이야기는 이러했다.

요정들이 사는 왕국을 사랑하며 다스렸던 여왕님. 그 어느 요정보다 커다란 힘을 가진 여왕님은 봄의 온화한 햇살을 부르고, 여름의 선선한 바람을 몰고 가을의 달콤한 열매를 맺게 했다. 그 왕국은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겨울은 너무나 차갑고 매마른 바람으로 요정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자신의 백성들이 매서운 바람에 떨고 심지어 필 때가 지나가버린 꽃처럼 생명이 사그라드는 걸 슬퍼한 여왕님은 한가지 결심을 하고 산에 올랐다. 

요정들이 떠받드는 어머니 나무 앞에 선 여왕님은 겨울은 어떻게 해야 따듯해지는지 물었다. 

‘눈이 와야한단다.’

어머니 나무가 대답했다. 

‘눈은 차갑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 눈이 겨울을 따듯하게 해준다는 겁니까.’

‘아니란다 얘야. 차가워진 땅과 지붕을 덮어주는 하얀 눈은 솜이 되어 겨울을 따듯하게 해줄 거란다. 그리고 봄이 되면 녹은 눈은 땅으로 스며들어가 새싹을 피운단다.’

‘하지만 저희 땅은 눈이 오지 않습니다. 어떡하면 눈을 내릴 수 있습니까?’

‘자연을 다룰 수 있는 너라면 반드시 눈을 불러오는 것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얘야, 눈을 불러오는 것은 꽃을 피우고 바람을 불러오는 것이랑은 다르단다. 힘을 다 써버린 너는 꽃이 씨앗으로 돌아가듯, 갓난아기로 돌아가고 말거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걸로 제 백성들이 겨울을 지낼 수 있다면…’

자신이 할 일이 뚜렷해지자 여왕님은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눈이여 오렴, 눈이여 오렴. 그렇게 소망을 올리자 먼 하늘에서부터 먹구름이 왔다. 검은 먹구름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얗게 쏟아지는 눈… 일찍이 눈을 보지 못했던 요정들은 잡아보려고 손바닥을 펼쳤다. 

차가웠다... 그러나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는 과연 어머니 나무가 말했던 눈의 따스함일까, 그 눈을 내리기 위해 희생한 여왕님의 눈물일까. 그래도 여왕님의 나라는 처음으로 따스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첫눈이 온 첫번째 겨울, 그 후의 두 번째 겨울과 세 번째 겨울이 지났다. 그동안 매 겨울마다 눈이 왔다. 그리고 봄이 왔다. 여왕님을 그리워하던 가신들에게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아, 어서 너희의 여왕을 데려가렴.’ 

자신들의 여왕님은 이미 사라졌다고 반문하고 싶어도, 여왕님만큼 어머니 나무도 믿었기에 그들은 아무말 없이 그 인도를 따라 어머니 나무에게로 갔다. 

그곳에는 아기가 있었다. 비록 아주 어려진 모습이었지만 가신들은 그 아기가 자신들의 여왕님이라는 걸 알았다. 

'그 아이는 또 다시 눈을 내릴 운명이란다.'

어머니 나무에게서 데려온 아기는 너무나 빨리 자랐다. 여름이 되니 꼬마아가씨가 됐고, 가을이 되니 어엿한 숙녀가 됐다. 그리고 겨울이 되어 다시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다시 갓난아이가 되어 잠에 빠졌다. 이렇게 4년마다 깨어나서 겨울에 눈을 내리는 여왕님을 요정들은 스노드롭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난 겨울에 눈을 부르기 위해 태어난 거야?"

하얀 공주님의 물음에 칸자시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 했다. 그녀는 처음의 여왕님을 기억한다. 그때의 칸자시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서, 딱 지금의 시클란과 프리무 정도의 키였다. 그때 올려다본 여왕님은 정말로 자상하고 순수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분이었다. 그렇기에 처음 순백의 눈을 손으로 만졌을 때 여왕님을 떠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기가 된 여왕님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 아기가 점점 자라갈 때, 칸자시는 그 아이가 자신이 알던 여왕님이 맞는지 의문이었다. 설령 같은 몸을 가지고 같은 모습으로 자란다고 한들 그동안의 추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같은 사람이 맞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에도 하얀 공주님은 칸자시가 알던 백성들을 사랑하는 여왕님으로 자랐다. 그리고 다시 봄의 한조각이 됐다. 아아… 그제서야 알아챘다. 몇 번을 갓난아기가 되든, 자신과의 추억이 있든 없든 자신이 알던 여왕님이 맞다고. 그 다음 여왕님도, 그 다음 여왕님도 비록 그 몸에 깃든 추억은 사라지지만 분명 자신이 아는 여왕님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또다른 슬픔을 낳았다. 4년마다 아무것도 기억을 못한채로 세상으로 던져지고 다시 1년만에 다시 잠에 빠진다. 추억을 1년 밖에 가질 수 없는 싸라기눈과 같은 윤회. 봄이 되면 녹을 걸 아는 눈은 과연 행복할까.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전 공주님이 좀 더 오래 살고 싶다고 한다면 따르겠습니다."

칸자시는 누워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조금씩 꾸벅 졸고 있는 공주님의 이마에 잘자라며 입맞췄다. 

 

 

아이들이 능숙하게 달릴 수 있게 되면 마음껏 뛸 수 없던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거처럼 우다다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시절이 온다. 그건 하얀 공주님도 똑같았고, 궁전 안의 쥐가 만들어놓은 쥐구멍 속 미로까지도 샅샅이 알려는 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덕분에 아직은 어린 시클란과 프리무로는 힘이 부쳤다. 

두 시녀의 체력이 방전되든 말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활력 넘치는 하얀 공주님은 굳게 닫힌 어느 방문 앞에 섰다. 어떠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 앞에 선 건 아니였다. 그냥 거기에 서야겠다고 정한 것도 아니였고, 달리다가 지쳐서 쉬려고 멈춘 것도 아니였다. 굳게 닫힌 문 하나가 그녀를 아련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 문에게서 아련함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손을 높히들어 손잡이를 잡고는 망설임 없이 당겼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여름인걸 깜빡할 정도로 한기가 흘러나왔다. 다 열린 문 너머의 방은 그저 있을 거 다 있는 평범한 방이었다. 검은 레이스가 달린 침대와 촛대와 잉크 그리고 책 몇 개가 올려진 책상과 옷장 등등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만 있으면 아늑한 방이었다. 

사실 사람은 있었다. 기품있는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도도해보이는 흑발의 여인. 그러나 그녀는 방 안을 돌아다니며 생활의 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 아닌, 한가운데에서 수정처럼 투명하고 두꺼운 얼음에 갖힌채로 잠을 자고 있었다. 어째서 그 얼음에 갖혀 잠을 자고 있는 걸까. 죄인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얼음 안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해서 억지로 얼려진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여기 계셨군요, 공주님…”

그때 어느덧 하얀 공주님을 찾아 방으로 들어온 프리무가 말을 걸었다. 

“이 사람은 누구야, 프리무?”

“공주님의 친구이신 헬레보라스 님이십니다.”

“내 친구라고…? 프리무랑 시클란이랑 똑같이?”

“흠… 글쎄요. 저희도 공주님의 친구라면 친구일 수 있겠지만, 저희는 일단 공주님의 사용인이라서요.”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음… 사용인이라고 공주님과 친구가 될 수 없는건 아니지만, 저희는 일단 입장상 공주님의 명령이라면 들어야하잖아요? 하지만 이 분은 공주님의 친구.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도와주는 관계예요.” 

“음… 대충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그런데 내 친구가 왜 이렇게 얼음 속에 갖혀있는 거야?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

“아뇨…” 

프리무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헬레보라스가 잠든 얼음 앞으로 다가가고는 사람이 손바닥과 손바닥을 맞추듯 차가운 얼음에 손바닥을 맞췄다. 

“공주님. 저희는 영원히 곁에 있을 수 없어요. 공주님의 반복되는 삶들 중에 분명 우리는 언젠가 사라지고 말거예요. 그렇기에 헬레보라스 님은 공주님에게 부탁해서 자신을 얼음 속에 가둬달라고 부탁했어요. 공주님이 깨어나는 해가 되면 자신도 깨어나서 지낼 수 있도록요.”

“…어떻게 하면 이 얼음을 녹일 수 있어?”

“그건 공주님이 어른이 되고 자연을 다룰 수 있게 됐을 때 배우시게 될 거예요.”

프리무는 차가운 얼음에서 손을 떼면서 붉게 떠오른 손바닥을 공주님에게 보이지 않도록 꽉 쥐면서 감췄다. 그런데 이번엔 하얀 공주님이 프리무처럼 얼음에 손바닥을 댔다.

“나 빨리 헬레보라스를 얼음에서 꺼내고 싶어.”

삶을 반복할 때마다 모든 추억을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영혼 한켠에선 남아있는 것일까. 만나고 싶다, 함께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함께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싶다…

 

 

햇살이 부담스럽던 여름이 지나고 곡물향이 나는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다. 하얀 공주님은 이제 꼬마티를 완전히 벗고 눈과 같은 백발과 우아한 곡선을 가진 몸매 그리고 따스한 미소를 가진 아가씨로 자랐다.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된 그녀를 사람들은 스노드롭 여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자연을 다룰 수 있게된 스노드롭은 칸자시와 함께 헬레보라스가 잠들어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너무나 기다려왔던 날이었다. 잠들어있는 헬레보라스를 본 이후로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빨리 만나고 싶다, 혹시 자신이 얼음을 녹이는데 실패하면 어쩌지? 그러한 걱정을 하는게 눈에 보일 때마다 칸자시는 괜찮을 거라며 타일렀다. 

긴장하며 얼음 앞에 선 스노드롭은 칸자시를 봤고, 칸자시는 웃어보이면서 그녀가 할 수 있다고 응원해줬다. 그렇게 마음을 다진 스노드롭은 두 손을 모았다. 올리는 기도는 얼음이 녹는 것과 친구를 만나는 것. 그 따스한 마음의 기도는 얼음을 녹이고는 헬레보라스를 4년만에 세상으로 나오게 했다. 

얼음 속에서 풀려나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는 그녀를 스노드롭은 품으로 받아줬다. 품 안에서 오랫동안 감겼던 눈을 뜨는 헬레보라스… 그리고 그녀가 제일 처음보는 얼굴은 역시나 자신을 안아주고 있는 스노드롭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첫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스노드롭에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스노드롭.”

“헬레…”

스노드롭은 헬레보라스의 이름을 부르려다 목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서 한번 숨을 골랐다.

“안녕, 헬레보라스.”

그렇게 어색하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둘의 몇번째인지 모를 첫만남이 시작됐다.

 

 

"너가 깨어나면 무엇을 해야할지 항상 고민했었어. 그래도 오랜만에 깨어났으니 우선 바깥 공기부터 마셔야겠지?"

얼음이 녹은 물에 축축히 젖은 헬레보라스의 옷을 아로마지가 불러준 메마른 바람으로 말린 후에, 스노드롭은 그녀의 손을 잡고는 궁전 바깥으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나저나 헬레보라스에겐 오랜만이라고 해야하는게 맞을까. 시간은 4년이 흘렀을지 몰라도, 그녀에겐 그저 눈을 감았더니 아침 햇살이 뺨을 톡톡 건드리는 하룻밤의 잠과 같은 동면이었다. 그렇다… 그녀에겐 바로 어제 일이었다. 추억을 1년 밖에 가질 수 없는 스노드롭에겐 없던 일, 칸자시와 같은 그녀를 모시는 가신들에겐 4년 전 일, 헬레보라스에겐 바로 어제 일 아니, 방금 전 일이었다. 

‘다음 가을에 또 만나자’

스노드롭이 눈물 한방울 떨구면서 말했었다. 

‘그래… 다음 가을에 또 만나자.’

헬레보라스가 잠들기 전에 나지막히 대답했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다음 가을은 그저 하룻밤의 잠 끝에 왔다. 

비록 체감은 하룻밤과 같아도 몸은 그 4년을 기억하는 것인지 무척 뻐근했다. 그러나 목줄을 물고 산책을 재촉하는 강아지와 같이 바깥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스노드롭을 보니 피곤한 다리라도 나갈 가치는 있었다. 헬레보라스는 스노드롭이 잡은 손의 인도를 따라 궁전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가자 올려다볼 수 있게된 하늘. 올려다보면 날개만 남은 구름들이 닿는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높게 떠있었다. 그 높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과 마당에서 키우는 나무에 맺힌 열매들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헬레보라스에게 가을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아, 여왕님과 헬레보라스 님이군요." 

붉은 열매를 맺은 나무가 있는 마당을 지나고 있을 때, 그 마당의 주인인 감귤 머리를 한 시트라가 둘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곡물로 잔치를 벌여 살을 찌운 로비나와 여치 소리는 가을의 증거지만, 요정들에겐 스노드롭과 헬레보라스가 같이 다니는 모습도 가을의 증거였다. 

"헬레보라스 님도 오랜만에 깨어나셨고, 마침 감도 잘 익어서 홍시가 됐으니 몇 개 따가시는게 어떠신가요?"

"그래도 되나요?"

붉은 홍시는 높은 가지에 달려있다. 그나마 낮아보이는 가지에 달린 홍시를 향해 스노드롭이 까치발을 들고 팔을 뻗어보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헬레보라스가 그녀보다 키가 크긴하지만 닿지않을 건 매한가지였다. 

“어쩔 수 없네. 내가 등을 빌려줄 테니까 헬라가 등을 밟고…”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가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헬레보라스가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양손으로 감고는 가볍게 들어올렸다. 

“무겁지 않아?”

“무거우니까 빨리 따.”

여자가 여자를 들어올리는 거라 무겁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거짓말이라도 하나도 안 무겁다고 하길 바랐건만… 아무런 꾸밈 없이 말하는 모습에 뺨을 뾰루퉁하게 부풀리면서도 스노드롭은 홍시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래도 키가 커진만큼 수월하게 닿았다. 잘못하다 힘을 꽉주면 터질 것만 같은 홍시 두 개를 따고는 헬레보라스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내려왔다. 

“자, 먹자.”

스노드롭이 홍시를 권하면서 한입 물자, 안에 있던 과즙이 톡하고 터졌다. 미처 입으로 받아내지 못한 과즙은 그녀의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그렇게 달콤함을 즐기면서 자신이 먹고 있지않는 다른 홍시를 친구에게 내밀었지만, 헬레보라스는 그녀를 한번 놀려보고 싶어서 소악마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이미 한 입 베어문 자국이 있는 홍시를 잡은 손을 자신 쪽으로 끌고와서는 그 자국을 따라 자신도 한 입 베어물었다. 

“달콤하네…”

그녀는 그렇기 말하면서 입술에 묻은 홍시즙을 혓바닥으로 쓰윽 핥아닦아냈고, 그 요염한 모습을 본 스노드롭의 뺨이 홍시만큼이나 붉어졌다. 개의치 않은 척 다시 한 입 먹으려고 했지만, 홍시에 남아있는 친구의 입술 자국을 보고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장난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기에 진짜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남은 걸 헬레보라스에게 주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로 만나지 못한 4년의 공백을 채우려는 거처럼 둘은 성 안을 발따라 바람따라 돌아다녔다. 그녀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알아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말을 걸면서 무언가를 건내주려고 했다. 포도나무를 키우는 피오네는 올해는 알이 토실토실하다며 포도를 줬다. 포도 한 송이를 다먹자 다음엔 어느 농부 부부가 밀떡을, 또 누군가가 배를 가져오면서 둘의 손이 빌 틈이 없었다. 

“넌 정말 사랑받고 있네.”

헬레보라스가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을 거의 한 광주리를 들고 낑낑대며 스노드롭에게 말했지만, 요정들은 언제나 헬레보라스의 몫까지도 챙겨주고 있어서 사실 그녀도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지 자신이 받고 있는 모든 사랑을 스노드롭에게 넘겼다. 

자신들이 키운 작물과 과일들을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이러다간 시간을 다 뺏겨버리고 말 것이다. 결국 둘이 조용하게 있을만한 곳을 찾기 성 밖으로 나가봤다. 밖으로 나서니 바로 보이는건 바람에 차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밀밭이었다. 그리고 그 밀밭에서 기나긴 여행 중에 쉬고 있던 후완다리즈를 만났다. 그 친구는 그녀들이 모르는 바다 너머 세상의 소식을 들려줬다. 흥미로운 먼 세상 이야기를 듣고 새가 다시 여행을 떠난 후, 그녀들이 궁전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놀 휴식처로 정한 곳은 방앗간의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는 냇물이었다.냇가에 앉은 스노드롭은 스타킹을 신은 그대로 물 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사실은 벗어놓고 발을 집어넣고 싶었지만, 속옷까지 완벽하게 감싼 팬티 스타킹이라 친구 앞에서 치마를 들추고 속옷을 벗는듯한 동작을 취하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냇물을 헤엄치던 작은 물고기들이 호기심에 스노드롭의 발가락을 건드려봤다가, 그녀가 양발을 첨벙첨벙 소리를 내면서 흔들자 도망쳐버렸다. 헬레보라스도 그녀를 따라 냇물에 발을 넣었다. 

"그런데 헬라야."

스노드롭이 옆에 앉은 친구를 불렀다. 

"왜?"

"정말로 나를 위해 얼음 속에서 잠들어도 괜찮은 거야?"

"...딱히 너만을 위해서 그러는 거 아냐."

헬레보라스는 자신이 짚고 있던 바닥 근처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처음엔 그저 손 안에 쥐고 굴리면서 놀 생각이었지만, 넓적한 것이 물수제비를 하기 딱 좋은 돌이라서 묵혀뒀던 마음을 토해낼 겸 냇물에 던졌다. 

"그냥 너가 없는 나날이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야."

확김에 한 말이었지만 역시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쓰고 있던 베일을 깊게 눌러썼다. 괜히 말했나. 당장에라도 스노드롭이 베일을 벗기며 수줍은 신부 같이 붉어진 뺨을 드러내려고 할 거 같았다. 그러나 스노드롭은 그녀의 베일을 벗기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큰게 첨벙하고 냇물로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일까, 헬레보라스는 무슨 일인지 보려고 얼굴을 드러냈다. 

“에잇!”

헬레보라스의 얼굴에 냇물이 뿌려졌다. 그녀의 얼굴 뿐만 아니라 눌러쓰고 있던 베일과 가슴 부근까지 흠뻑 젖었다. 어느덧 스노드롭이 냇물 안으로 들어가 두 손 가득 물을 모아 친구에게 뿌려버린 것이었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덕분에 차가웠던 뺨이 식었다. 

“정말 다행이다. 히히. 너가 그렇게 생각해준다니까 다행이야.”

그리고 다시 한번 친구에게 물을 한번 더 뿌렸다. 꽃이 피고 있었다. 얼굴에 피어지는 웃음꽃. 입고 있던 드레스의 치맛자락도 냇물의 흐름을 따라 흐르니, 나무에서 떨어져 물에 흐름에 몸을 맞긴 한 조각의 꽃잎이었다. 옷은 몸에 완전히 들러붙어 속옷이 비추고 머리카락도 풍성한 느낌이 사라질 정도로 흠뻑 젖은 스노드롭이 헬레보라스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이제 슬슬 추워지는데. 너 그러다 감기 걸린다.”

“완전히 추워지면 못 하는 거잖아. 딱 지금이 마지막으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시기 아니겠어?”

그럴지도 모른다. 여름이 다 지나가고 깨어나는 헬레보라스에겐 물놀이를 할 기회가 지금 뿐일지도 모른다. 바람은 슬슬 차가워지고 있지만 중천에 뜬 햇빛은 아직까진 몸을 뜨겁게 하고 있는데, 감기 걸릴 거 같다고 미룬다면 모처럼 시원한 냇물이 아깝지 않을까. 

“그럼 그럴까…”

헬레보라스는 부츠를 벗고는 냇물에 천천히 들어갔다. 그리고 두 손 가득 물을 모아 스노드롭에게 뿌리는 것으로 복수를 시작했다. 

 

 

“에… 에취!”

스노드롭이 재채기를 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방에 있는 난로 앞에서 쭈그려 앉은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아직은 그다지 춥지는 않다곤 하지만 역시 물 속에 흠뻑 젖어가며 놀기에는 역시 쌀쌀한 날씨였다. 해가 지기 전에 궁전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옷을 말릴 틈도 없었다. 그래서 젖어서 살짝 투명해진 옷 너머로 속옷이 보여서 돌아가는 길 내내 헬레보라스가 가림막이 되어줘야 했다. 

칸자시에게 그렇게 혼나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녀와 더불어 혼난 친구도 칸자시가 그렇게 화내는 걸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비록 혼이 많이 났지만 스노드롭에겐 간직할 가치가 있는 추억이었다. 그래서 이불을 덮고 떨고 있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일기를 쓰고 있었다.

“일기 쓰고 있네?”

잠옷으로 갈아있고 스노드롭의 방에 온 헬레보라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가 들은 머그컵 두 개를 가져오고는 그대로 스노드롭이 덮고 있던 이불 안으로 몸이 부대끼도록 들어갔다. 

“자.”

그녀가 건내준 머그잔을 스노드롭이 감사히 받았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후후 불어 치우고는 한 입 마셨다. 손 안에 들어온 온기가 입술을 통해 몸 속으로 들어갔을 때,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내가 썼던 일기들이 보관되어 있는 방을 봤거든. 그중에서 하나를 꺼내서 읽어보니까 비록 기억나는건 아니였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생생하더라. 그 후에 깨닫게 됐어. 내가 추억은 1년만 가질 수 있어도…”

“그 추억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다고?”

스노드롭이 자신이 할 말을 어떻게 알았냐며 친구의 얼굴을 보자 헬레보라스는 그 이유를 덧붙였다. 

“이전의 너도 똑같은 말을 했었으니까. 지난번의 너든 지금의 너든 똑같은 사람이니까,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렇구나… 그것도 그러겠네.”

서고에 쌓인 일기장들을 처음 봤을 때, 스노드롭은 그 중 하나를 꺼내고는 펼쳐봤다. 좌르륵 넘기면서 그녀가 보고 싶었던 내용은 바로 자신이 눈을 불러오기 직전의 이야기였다. 어떤 심정으로 한 생의 마지막을 임했을까. 덤덤하게 몸을 바쳤나 아니면 아쉬움을 남기며 한 생을 마쳤나. 자신의 최후가 어떨지 궁금한 것은 삶에 대한 원초적인 궁금증이니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해결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일기장이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심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찮았던  걸까. 그런거 치고는 마을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나 헬레보라스랑 놀았던 일 등등은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결국 어떠한 심정으로 마지막을 살아났는지는 지금 존재하는 스노드롭이 직접 알아갈 수 밖에… 아니 직접 느껴야할 것이다.

 

 

붉은 잎을 몰고온 가을이 끝나고 색바랜 서리꽃의 겨울이 왔다. 그 온기 충만하던 곳과 같은 곳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겨울은 혹했다. 선선한 그늘을 만들어냈던 나뭇잎은 이젠 다 떨어져서 가지만 남았고, 그 사이로는 손가락 끝이 삐그덕거릴 정도로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지붕과 벽도 별로 쓸모가 없었다. 벽을 끊임없이 두들기는 한기는 집 안 그 자체를 얼음장으로 만들었다. 난로에 모여서 겨울의 냉기를 잊으려고 해도 딱 그 지점 그 시점일 뿐이다. 

이틀 후면 크리스마스다. 요정의 땅이 아닌 곳에서는 한해의 끝을 축복하는 날이지만, 이곳에서는 겨울을 무사히 보내기를 기원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스노드롭 여왕이 눈을 불러오기 시작한 때부터, 크리스마스는 그녀의 끝을 애도하는 자리이자 감사하는 날이 됐다. 

그렇다. 스노드롭에겐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거다. 또 하루를 마친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책상 앞 의자에 앉아서 일기를 쓰고 있었다. 

‘요즘은 어째서인지 사람들이 나를 보고 티어드롭 여왕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잠들기 전에 알았으면 좋겠다.’ 

최근에 그녀가 일기장에 세세하게 자신의 심정을 적는 일은 적어졌다. 모르겠다… 지금 자신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일기장에 적으려고 하면 출구없는 맹인의 미로에 선 기분이었다. 그렇게 일기장에 내용을 더 적지 못한채 차가운 바람이 문을 열어달라며 두들기는 창문을 보던 스노드롭은 갑갑해져서 다 쓴 일기를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나가 향한 곳은 헬레보라스의 집이었다.

노크를 한 후에 헬레보라스가 문을 열어주자 스노드롭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그녀를 안았다. 그대로 그 푹신해보이는 가슴에 얼굴을 묻으니 그대로 잠들 것만 같은 편안함이 와락 안는듯했다. 

“놀자~”

아무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왔음에도 헬레보라스는 스노드롭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기에, 찾아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너 요즘 자주 찾아온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사실 알고 있었다. 이맘때면 그녀는 자신의 방에 찾아와서 이렇게 와락 안기는 일이 많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심정은 헬레보라스도 똑같기 때문에 스노드롭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으로 들였다. 헬레보라스가 침대에 걸터 앉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스노드롭이 그녀의 허벅지의 머리를 올리며 누웠다. 난롯불의 따스함과 자신의 전용 베개의 따스함에 빠져들면 무심코 잠에 빠질 거 같지만, 지금은 졸음에 몸을 맡기는 것보다는 슬슬 끝나가는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드디어 내일이네…”

내일… 크리스마스 이브… 요정들에겐 이 땅을 따스하게 감싸줄 눈이 올 날이지만, 헬레보라스와 스노드롭이 4년 후를 기약하며 잠드는 날이다. 비록 4년이 하룻밤 같더라도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면 영원토록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게. 스노드롭, 혹시 조금 더 추억을 가지고 싶다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헬레보라스가 넌지시 물어봤지만 사실 그녀는 돌아올 대답을 알고 있다. 스노드롭이 헬레보라스에게서 머리를 떼고 일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자신이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마을을 내려다봤다. 한 집도 빠짐없이 창문에서 불빛이 세어나오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분명 이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요정들이 지펴놓은 난롯불일 것이다.

그녀에게 추억은 헬레보라스와 만든 추억만 있는게 아니다. 포도나무를 키우는 피오네와의 추억도, 허브를 키우는 로즈마리와의 추억도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다. 그러나 간직하고 싶어도 그들이 고통받고 있다면 기꺼이… 분명 처음의 스노드롭도 그랬을 것이다. 

“추억은 내 머릿 속에선 사라질진 몰라도 어딘가에선 쌓인다고 믿어.”

“그래… 너가 그렇다면 더 이상 잡지 않을게.”

이렇게 스노드롭이 손을 내밀지 않고 헬레보라스가 손을 잡지 않았으니, 그 날 밤은 운명대로 마지막 밤이 됐다. 스노드롭은 춥디 추운 창문에서 떨어져 난로 앞에 앉았다. 헬레보라스는 방 안의 등불을 모두 거둔 다음 똑같이 난로 앞에 스노드롭과 꼭 붙어앉았다. 둘은 그 날 밤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4개월 동안 있었던 추억들을 말없이 회상했다. 

 

 

“다음 가을에 또 만나자.”

스노드롭의 소탈한 작별인사였다. 웃고 있었다. 그러나 눈물 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 다음 가을에 또 만나자.”

헬레보라스는 지금 나누고 있는 약속이 지켜질 거라는 걸 알았다. 몇 번이고 지켜졌던 약속이니까. 그렇기에 다시 친구와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잠들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다음에 만날 땐 스노드롭이 자신을 기억 못 하더라도, 그럼에도 만날 수만 있다면… 

스노드롭이 눈을 감자 헬레보라스도 조용히 감았다. 스노드롭이 양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다. 친구가 평안 속에 잠들어 자신과 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얼음이 헬레보라스의 발끝부터 잡아간다. 발끝에서 복사뼈, 허리를 잡고 이내 얼굴까지. 이제 그녀는 다시 한번 4년의 잠에 빠져 다음 스노드롭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가죠.”

스노드롭의 결의와 슬픔이 찬 한 단어를 들은 가신들은 궁전 밖으로 그녀를 배웅했다. 궁전에서부터 성 밖으로 나가는 길까지 요정들이 그녀와 이별하기 위해 나와있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말들이 마지막을 향하는 그 길 내내 들려왔다. 스노드롭은 애써 웃어봤지만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거 같은 눈가는 어찌하지 못했다. 

“역시나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거 같은 표정이시군요…” 

송별을 하던 어떤 요정이 말했지만 스노드롭은 그걸 듣지 못 했다. 그녀가 성 밖으로 나가고 성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이제 배웅해주는 사람은 다섯명의 가신만 남은 거다. 이번 봄에 프리무와 시클란이 아기 한조각을 데려왔던 그 길을 거슬러갔다. 

어머니 나무에게 당도했다. 스노드롭이 예를 갖추며 앞으로 나섰다.

“어머니 나무이시여. 이번에도 이 몸을 바쳐 눈을 소망하러 왔습니다.”

“그래… 넌 언제나 올곧게 자신의 추억을 바쳐 백성들을 위했지. 이번에도 내가 너를 지켜주마.”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 기도이다. 스노드롭은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이 땅의 사람들이 따듯한 겨울을 보낼 수 있기를… 그리고 헬레보라스랑… 

먼 하늘에서부터 눈을 머금은 먹구름이 왔다. 스노드롭은 자신의 발끝에서부터 점점 자신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아아, 나는 사라지는 구나… 결국 참아왔던 눈물 방울을 흘렸을 때, 스노드롭은 요정들이 티어드롭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지붕에 눈송이가 떨어졌다. 머리 위에 한 송이, 땅 위에 한 송이. 그건 티어드롭이 잠에 빠졌다는 소식이기도 했다. 딸랑 딸랑 딸랑. 눈이 내리는 걸 기념하는 건가 티어드롭이 잠든 걸 슬퍼하는 건가. 어디선가 종이 구슬프게 운다. 

 

 

2. 흑설의 이야기 

얼음에서 해방된 헬레보라스가 몸을 겨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몸은 앞에 있던 여린 소녀가 받아줬다. 아아… 스노드롭이다. 분명 하룻밤의 꿈처럼 순식간에 지나간 4년일텐데, 왜 그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엔 반가움을 주체할 수 없을까. 

“오랜만이야, 스노드롭.”

“헬레…”

스노드롭이 숨을 한번 골랐다.

“헬레보라스.”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지만 처음 봐 낯설다라는 느낌이 헬레보라스를 괴롭게 했다. 그럼에도 손을 내밀어주는 스노드롭. 그 손을 잡는 것으로 몇 번째일지 모르는 첫만남이 시작된다. 이제 그 손을 이끌고 스노드롭이 궁전 밖으로 끌고가면 되는 건데…

“콜록 콜록…”

헬레보라스는 갑자기 기침이 나오자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가벼운 기침이 아닌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심한 기침이었다. 

“괜찮아, 헬레보라스?”

자신을 처음 봤을 친구가 걱정을 하며 부축해주니 힘내서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원래 자다깨면 몸이 무겁기는 했지만 이번은 확실히 달랐다. 

"콜록. 아무래도 감기인가봐. 미안, 오늘은 못 나가겠네."

일단 차가운 얼음 속에 있다가 깨어난 몸. 좋은 얼버부림이었다. 어쨌든 스노드롭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럼 나중에 올게..."

 

그녀는 가신만을 남기고는 헬레보라스의 방을 떠났다. 남아있는 가신들은 헬레보라스가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줬다. 

"정말 괜찮습니까?"

칸자시가 갈아입은 잠옷의 옷소매를 정리해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 그냥 감기일 뿐일 거야."

그녀는 아픈 몸을 침대에 눕히고는 가신들을 물렸다. 그대로 한숨 자고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눈을 감았다. 

몇 시간쯤 잤을까.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마침 깊은 잠을 자고 슬슬 깨고 있던 헬레보라스는 상쾌하게 일어났다. 

"누구야?"

"나야, 스노드롭. 들어가도 돼?"

들어와도 된다고하자 문이 열렸고, 쟁반을 든 스노드롭이 들어왔다.

"배고프지? 너가 좋아하는 걸로 가져왔어." 

그러고보니 얼음에서 깨어나고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지금 헬레보라스의 배를 만지면 꿈틀거릴 거 같았다. 스노드롭이 침대에 걸터앉아 쟁반 위의 음식을 보여주자 그녀가 상체를 일으켰다. 쟁반 위에는 신선한 계란노른자 빛을 내는 호박죽과 곁들여먹기 좋은 식빵이 있었다. 호박죽 안에는 동글동글한 새알떡이 보였다. 

“내가 호박죽을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남겨놓은 일기장에 너의 이야기가 많이 쓰여있거든. 그 중엔 호박죽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래…”

헬레보라스는 친구가 일기장을 쓰는 모습을 많이 봐왔지만 한번도 읽어본 적은 없어서, 그런 세세한 이야기까지 적어놓았냐며 놀랐다. 그래도 덕분에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출출하니 스푼을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스노드롭이 그녀보다 먼저 스푼을 들더니 호박죽을 떠서 권했다.

“자, 내가 떠먹여줄게.”

점점 헬레보라스의 입술로 다가오는 스푼… 덥썩 받아먹는건 너무나 부끄러웠다.

“돼, 됐어. 내가 알아서 먹을게.”

그렇게 말하면서 스노드롭에게 스푼을 뺏다시피 가져갔다. 헬레보라스가 과거에 일부러 스노드롭이 먹고 있던 홍시에 입을 대며 놀린 적이 있었지만, 오늘 스노드롭의 놀리는듯한 행동은 분명 고의가 아닌 순수한 호의일 것이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스푼을 받은 헬레보라스는 호박죽을 새알떡과 함께 뜨고는 입 안으로 넣었다. 질겅질겅 씹는 즐거움이 있는 떡이 잘리면서 호박의 달콤함이 퍼졌다. 맛있긴하다… 분명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달콤함이었다. 그러나 궁전 안의 요리사가 해주는 고급스러운 맛이 아닌 조금 요리가 서툰 사람이 한 투박한 맛이었다.

“…이거 너가 만들었지?”

“어, 어떻게 알았어?”

"난 맛만 봐도 너가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거든."

스노드롭 자신은 기억이 안 나겠지만 몇 번이고 먹어본 그녀의 요리이다. 요리를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유달리 단 음식을 만들 땐 그녀는 눈이 쌓인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설탕을 많이 넣는다. 그래서 처음 먹었을 땐 너무 단 맛 때문에 물렸지만, 먹다보니 좋아하게 된 달달한 맛이다. 

헬레보라스는 한 스푼 한 스푼 그릇을 비어갔다. 호박죽만으로는 빈 속을 다 채우는데 부족할 수 있었는데, 그걸 충분히 들은 새알떡이 포만감을 채워줬다.

 

 

며칠 후. 헬레보라스는 서고로 들어왔다. 읽은 찾으러 자주 들어오는 곳이지만 오늘은 그럴려고 온게 아니였다. 그녀는 서고 한 켠에 있는 가죽 표지의 일기장을 찾아냈다. 손으류 떠듬떠듬 세어보니 25권, 전부 스노드롭이 써낸 일기장이다. 

"25권... 1년에 한권씩 썼다고 했으니 대략 100년인가."

그녀는 적당히 가운데에 있는 일기장을 꺼내 펼쳐봤다. 맨 앞장부터 보니 여름 끝자락 때부터 쓰게된 거 같다. 헬레보라스가 모르는 스노드롭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도 여름이면 아직 어린아이라서 그런지 문체가 순수했다. 가을에 들어가선 헬레보라스가 깨어난 후엔 문체는 성숙해졌고 내용은 온통 친구와 함께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그냥 스치듯이한 이야기도 적혀있으니 호박죽을 좋아하는 걸 아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헬레보라스는 그 일기장을 원래 자리에 정확히 꽂아넣었다. 그리고 맨 앞에 있는 일기장을 꺼냈다.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그 일기장이 스노드롭이 처음 다시 태어났을 때의 일기장일 거다. 펼쳐봤다. 일기장의 시작은 아직 하얀 공주님인 스노드롭이 궁전 앞 정원에서 놀고 있는 것으로 시작했다. 기억난다… 헬레보라스는 그 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날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친구가 죽은 줄 알았다. 헬레보라스에겐 스노드롭이 자신의 몸을 바쳐 눈을 불러온 그때부터 매년 크리스마스는 친구의 기일이었다. 그렇기에 친구가 갓난아기가 되어 다시 돌아온걸 보고 기쁘기도 했지만 역시 같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걸로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정원에서 칸자시와 공놀이를 하고 있던 하얀 공주님을 봤다. 겉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친구의 어릴 적 모습과 정말 똑닮아 있었다. 

“재미있게 놀고 있니?”

헬레보라스가 말을 걸어봤다. 친구의 옛모습을 찾고 싶었던 걸까,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건 지금의 그녀도 알지 못한다. 

"네. 칸자시랑 노는 건 정말 즐거워요."

"그래? 다른 사람들은 잘 대해주니?"

"잘 대해주긴하는데..."

그녀의 질문을 받은 하얀 공주는 칸자시에게 받아든 공을 제자리에서 튕기기 시작하더니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떨궜다.

“잘 대해주기는 하는데?”

“왜인진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절 보는게 아닌 거 같아서요…”

그 말을 들은 칸자시와 헬레보라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친구와 똑같은 모습 그 안에 자신이 아는 스노드롭이 있을까 기대했던 것인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한 어린아이에게 자신이 모르는 사람의 그림자를 짊어지게 한 꼴이었다. 빛바랜 사진첩을 보듯 추억에 잠기고 싶었지만 하얀 공주는 빛바랜 사진첩 따위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어린아이인 것이다. 

하얀 공주가 스노드롭의 레플리카 같은 것이 아닌, 자신만의 삶이 있는 어린아이라는 걸 깨닫게 됐을 때 헬레보라스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비록 하얀공주가 자신이 알던 스노드롭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라더라도 그녀를 그녀로서 사랑하자고. 굳이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모습을 찾지 말자고. 

그 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니 헬레보라스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하얀공주님은 그녀가 알던 스노드롭과 완벽히 똑같은 모습으로 자랐다. 헬레보라스는 이번엔 누구 하나 곁에서 사라지는 일 없이 누구의 삶이 다할 때까지 함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겨울날에 스노드롭이 직접 한 말로 깨져버렸다. 

“그동안 고마웠어, 헬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스노드롭은 슬픈 눈빛을 하면서 창문 밖에 보이는 마을을 내려다봤다. 뼈를 으스러트릴 거 같이 차가운 바람이 흐르는 겨울 마을. 집 안에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눈을 내리길 바라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는 눈이 안 온다고 어머니 나무님이 말하셨어. 그래서 올해도 내가 기도를 올려야한대.”

“싫어!”

눈처럼 녹았다고 생각했지만 간신히 다시 만난 친구와 오래토록 함께 있을 줄 알았던 헬레보라스에겐 1년은 너무나 찰나와 같았다.

“지난 3년이면 됐잖아! 3년이나 은혜를 줬으면 충분…”

울분을 토해내는 헬레보라스의 입을 스노드롭이 손가락으로 막았다. 

“그동안 고마웠어. 다음에도 내가 태어나게 된다면… 그때도 친구가 되어줄래?”

다음이라… 사실 그때의 헬레보라스에겐 다음 만남이 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영원한 헤어짐도 잠깐동안의 헤어짐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친구의 걱정을 아는지 스노드롭은 위로해주려 그녀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괜찮아… 난 분명 다시 돌아올 거니까.”

그리고 스노드롭은 약속대로 돌아왔고, 운명대로 다시 사라졌다. 돌아오고 나타나고, 돌아오고 나타난다. 그 윤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일기장을 덮은 헬레보라스는 목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근질거림을 참지 못하고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기침을 했다. 기도 전체를 긁을 듯이 심하게 나오는 기침에 헬레보라스는 입 안에 비릿한 냄새가 느껴져 손바닥을 뗐다. 입 속에서 나온 붉은 피가 손바닥 안에 고여있었다. 그녀는 동요하면서 피묻은 손바닥을 가렸다.

 

 

“하윽… 드디어 오늘 할 일 끝났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일을 끝마친 칸자시는 기지개를 펴며 일 끝난 후의 여유를 가졌다. 책상 위에 있던 머그컵을 쥐었다. 남아있는 건 몇 모금 안 남은 커피. 분명 처음 시클란이 가져왔을 땐 자칫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커피였지만, 햇살의 따사로움마저 훔쳐가는 겨울 한기 앞엔 커피의 숨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였다. 차갑게 식은 걸 마시는 건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래도 잔을 비우고 이제 잘 준비를 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여왕님인가요…?”

12시 정각이 넘었을 정도로 늦은 이 밤이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지만, 보통은 스노드롭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녀라고 짐작한 것이다. 

“나야 헬레보라스.”

하지만 찾아온 사람은 정말 의외의 사람이었다. 칸자시가 놀라면서 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간에…”

헬레보라스는 목구멍에서 밀려오는 기침 때문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칸자시는 어찌된 일인지 알아채고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 그녀를 침대에 걸터앉게 한 칸자시는 난로 근처에 있는 빨래줄 같은 거치대에 물이 들은 주전자를 올렸다. 

“단순한 감기일 거예요. 기침에 좋은 차를 끓여줄게요.”

“아니… 너도 알잖아.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는 걸.”

그러면서 헬라보라스는 주머니 속에 넣어놨던 손수건을 꺼냈다. 새하얀 손수건엔 섬뜩할만큼 붉은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수시로 나오는 기침과 거친 숨결, 상당히 피곤한듯한 눈과 추위에 떠는 어깨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사람같아 항상 여유로워보이는 칸자시도 초조함을 내비췄다.

“아무래도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 할 거 같아, 칸자시.”

“그런 말하지 마세요…”

어느덧 물이 끓기 시작하며 주전자 주둥이에서 하얀 김이 나오고 있었다. 칸자시는 그 물을 티백이 들은 잔에 따랐다. 잔에 들어간 물은 보리이삭 색으로 변하며 은은한 향을 냈다. 칸자시는 그걸 헬레보라스에게 조심히 건냈다. 한모금 마신다. 옅은 향은 코를 즐겁게 했고 칼칼한 목구멍을 따스하게 감싸줬다. 

“우리 둘 다 각오하고 있었잖아. 원래는 더 빨리 찾아올 시간이 얼음 속에서 잠자는 시간만큼 유예된 거 뿐이라는 건 너도 알잖아.”

칸자시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흐를 거 같은 눈물방울을 보이고 싶지 않아, 착찹하게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렇죠… 저도 알고 있었죠.”

헬레보라스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다. 어릴 적엔 금방이라도 신이 데려갈 거처럼 앓아눕는 일이 많았기에 어른으로 자란 것만으로도 기적과 같았다. 그러나 어른으로 무사히 자랐을 뿐이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약했으며 앓는 병은 점점 심해졌다. 그녀의 주치의도 그다지 희망적인 의견을 내진 못했고, 그녀 자신도 다른 요정들보다 훨씬 적은 삶을 살거라고 생각하며 언제든지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녀의 친구인 칸자시는 물론이고, 처음의 스노드롭도 알고 있었다. 

‘정말로 나를 위해 얼음 속에서 잠들어도 괜찮은 거야?’

몇 윤회 전에 스노드롭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냥 너가 없는 나날이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야.’

견디기 힘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대부분을 스노드롭이 없이 보내야한다니. 어처피 얼마 남지 않는 삶이라면 그녀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 

‘나도 너와 함께 하고 싶어.’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스노드롭에게 가서 부탁했다. 자신의 몸이 약하다는 말은 하지 않은채 너와 함께 깨어나고 잠드는 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의 얼굴에 그렇게 그림자가 낀 건 처음 봤었다. 

‘정말 괜찮겠어?’

스노드롭은 헬레보라스가 뜻을 무르길 바라면서 거듭 물었다. 그러나 헬레보라스는 요지부동이었고 스노드롭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칸자시? 이번에 얼음 속에 잠들면 분명 다음 가을에 스노드롭의 품에서 잠들게 될 거야. 그럼 그 얘는 엄청 슬퍼하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그 얘가 슬퍼하는 일 없이 잠들게 되겠지.”

“헬레보라스님. 마지막 순간이라면 자기가 원하는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요? 여왕님도 분명 슬퍼하겠지만,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는 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럴까…? 나 스노드롭의 곁에서 죽어도 되는 걸까?”

칸자시는 아직도 고민을 하고 있는 헬레보라스를 세상 어느 어머니보다 다정하게 안아줬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결국 쏟아진 칸자시의 눈물 방울은 그녀의 등을 보고 있는 헬레보라스에겐 보이지 않았다. 헬레보라스를 안아준 건 그녀를 위로해주길 바래서였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눈물을 보여주기 싫어서였을까. 

 

 

크리스마스 이브. 다시 운명의 날이 왔다. 스노드롭이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헬레보라스 앞에 섰다. 

“다음 가을에 또 만나자.”

스노드롭의 소탈한 작별인사였다. 웃고 있었다. 그러나 눈물 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 다음 가을에 또 만나자.”

여러 번 반복해온 마지막 작별인사다. 그러나 이번이 진정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스노드롭이 손을 모으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헬레보라스는 그에 맞춰 눈을 감았다.

“나 헬라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얼음에서 잠들기 직전에 들었던 스노드롭의 말은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말이다. 

 

 

3. 만년설의 이야기 

묵은 눈이 녹아가는 봄이 됐다. 시클란과 프리무가 함께 걸었던 어머니 나무에게로 가는 산길을 스트레나에가 즐거운 산책길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올랐다. 가는 길에 꽃님에게 말을 걸어보고, 새와 구절을 맞추며 벌과 동행을 하다보니 어느덧 어머니 나무에게 당도할 수 있었다. 

어머니 나무 앞에선 그녀는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나무 드리아스여. 올해도 봄의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왔습니다.”

어머니 나무는 데려가는 걸 허락했고, 스트레나에는 나무에게서 한조각을 품에 안았다. 그 후엔 여태까지와 똑같았다. 한조각은 금방 자라 하얀 공주님이 됐고, 자신이 왜 빨리 자라는지도 칸자시에게 들었다. 빨리 자라는 어린이는 그만큼 빨리 달려서 작은 체구를 가진 스트레나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우다다 뛰어다니던 하얀 공주는 운명처럼 헬라보라스의 방 앞에 멈춰섰다. 여름이란 걸 깜빡하고 뜨거운 불을 찾고싶을 정도로 한기가 문 안에서 흘러나왔다. 어째서 그 방이 끌리는 거고 어째서 한기가 느껴질까. 하얀 공주는 문을 열었다.

"이게 뭐지...?"

문을 열자 입구에서부터 가득 채운 얼음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방 안 전체를 채운 얼음이지만 너무나 투명해서 안쪽은 비어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안에 서서 잠들어있는 사람. 하얀 공주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헬레보라스 님이에요."

어느덧 하얀 공주를 찾아낸 스트레나에가 그녀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누구길래 이렇게 얼음 속에 갖혀있는 거야?"

"헬라님은 공주님의 친구예요."

"친구? 레나랑은 다른 거야?"

"아뇨, 똑같은데요."

"그런데 왜 저렇게 얼음 속에 갖혀있는 거야?"

"그건 말이죠..."

스트레나에는 프리무와 달리 아직은 어린아이 티를 벗지 못했지만 사뭇 진지한 말투로 하얀 공주와 헬레보라스의 일을 이야기해줬다. 경험해보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 어쩌면 남의 이야기일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거처럼, 하얀 공주는 헬레보라스에게 친근함과 감사함을 느꼈다. 

“그런데 말이야.”

이야기를 다 들은 하얀 공주는 어떠한 의문을 가지면서, 영원히 헬레보라스를 가둬두려는 얼음 벽… 아니 얼음 감옥에 손을 댔다. 석방 없는 얼음 감옥은 그 어느 다이아몬드 산보다 투명하고 단단했고, 잠깐만 손을 댄 것만으로도 차갑게 채찍질했다. 그래도 어린 공주는 자신의 과오에 절대로 손을 떼지도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잠에 빠진 헬레보라스. 얼음 감옥이 내뿜는 한기는 칼날 같아서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그 안 깊숙한 곳에서 편안하게 잠든 모습은 남의 뜻으로 영원히 아름다움을 가둬놓은 유리병 속 인형 같아서 섬뜩하기도 했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아? 꼭 이렇게 방 안 전체를 얼릴 필요가 있는 거야?”

“그럴 필요는 없었죠…”

스트레나에는 손이 완전히 붉어졌음에도 무의식적으로 얼음벽에 손을 대고 있는 하얀 공주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차가워진 그녀의 손을 자신의 체온이 잔뜩 담긴 숨결과 손바닥으로 뎁혀줘 붉어진 손이 다시 하얘지도록 도와줬다.

“따라와주세요.”

 

 

스트레나에가 하얀 공주와 함께 온 곳은 스노드롭의 일기장이 있는 서고였다. 헬레보라스가 마지막으로 왔을 땐 일기장은 겨우 한 구석을 작게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젠 그 수도 꽤 들어 책장의 한층을 꽉 채우고도 남아 아래층까지 채우고 있었다. 스트레나에는 그 중 한 권을 뽑았다. 

"이게 뭐야?"

"저번의, 저번의, 저번의... 에구 모르겠다. 어쨌든 아주 예~전의 공주님이 쓰신 일기장이에요."

그녀갸 하얀 공주에게 쥐어준 일기장은 얼마나 많이 사람 손을 거친건지 옆면이 꽤 헐어있었다.

"거기에 공주님이 알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적혀있어요."

하얀 공주는 일기장을 들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올라가면 땅에 다리가 안 닿을 정도로 높은 의자에 어영차 올라가서 허벅지에 일기장을 올리고 펼쳤다.

일기장엔 아주 오래전 헬레보라스가 칸자시의 방에 갔던 날의 일도 적혀있었다. 그 날 스노드롭은 늦은 밤, 남몰래 밖으로 나와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달빛의 인도를 따라 꽃향기의 흐름을 따라 그저 정원을 거닐다가, 슬슬 밤가을의 바람이 선선한게 아닌 차갑게 느껴질 때 쯤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때마침 복도를 걷고 있던 헬레보라스를 봤다. 등불마저 꺼진 밤 중의 어둠은 끈적하게 벽이든 바닥이든 천장이든 붙었기에 헬레보라스는 스노드롭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자꾸만 나오는 피맛 나는 기침을 숨기지 않았다. 

“감기가 아직도 안 떨어졌나…?”

스노드롭은 그녀에게 기침에 좋은 차라도 끓여다주려고 조용히 다가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느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칸자시의 방이었다. 물론 헬레보라스도 이 궁전에 사니 칸자시의 방에 한번쯤 드나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스노드롭은 이상하게 낯선 느낌이 들었다. 헬레보라스가 칸자시의 방에 가는 건 이번 생엔 당연히 본 적이 없었고, 이상하게 기억나지도 않는 지난 생을 모두 통틀어 처음 보는거 같았다. 

헬레보라스가 칸자시의 허락을 받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스노드롭은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다가가 문에 귀를 댔다. 

“아무래도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 할 거 같아, 칸자시.”

...

“어떻게 해야할까, 칸자시? 이번에 얼음 속에 잠들면 분명 다음 가을에 스노드롭의 품에서 잠들게 될 거야. 그럼 그 얘는 엄청 슬퍼하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그 얘가 슬퍼하는 일 없이 잠들게 되겠지.”

스노드롭은 입을 틀어막고는 문에서 한발자국 물러섰다. 지금 그 입에서 손을 뗀다면 멈출 수 없는 절규가 흘러나올 거 같았다. 어둠에 잠긴 형체들이 꿀렁였다. 창문 밖에 보이는 저 달은 아까까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창백한 환자의 피부로 보였다. 가벼운 줄로만 알았던 그 기침이 친구의 한 숨결 한 숨결을 앗아가고 있었다니… 무심했던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마지막이 오고 있다. 헬레보라스의 몸이 땅에 묻히고 온기에 녹는 새 봄의 눈처럼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름날엔 녹은 눈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듯 결국엔 잊게되는 걸까. 그렇게되지 않게하기 위해 스노드롭은 그 날 일기장에 자신의 심경을 더욱 자세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적었다.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 할 자신에게 슬픔과 의무를 전하면서…

단순히 스노드롭이 적은 일기장을 읽고 있는 거였지만, 하얀 공주는 그녀의 심경이… 아니 자기 자신의 심경이 사진첩을 보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읽어가다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의 일기까지 읽어갔다.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이다. 헬레보라스 앞에 선 스노드롭은 이제 손바닥에 닿은 눈처럼 금방 사라질 마지막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친구의 모습을 눈에 또렷히 담았다. 이제 그녀를 얼음 속에 재우고 자신도 잠에 빠진다. 친구를 다음 자신에게 넘긴다. 그리고 조문도 다음 자신에게 넘긴다. 이제 그녀는 모르는 척 친구를 놓아주면 되는 거였다.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여태까지 모든 스노드롭이 바란 순수한 소망이다. 

“나 헬라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러나 순수한 소망에 끼어드는 욕망 하나. 새하얀 눈밭 위에 떨어진 한방울의 피눈물일 뿐인데, 한 방울이 덮힐 틈도 없이 두 방울 열 방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갔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 소원이 얼마나 이기적인 욕망인지 알면서도 스노드롭은 자꾸만 기도에 그 소원을 넣었다. 

방 안에 눈보라가 불기 시작했다. 그 눈보라는 헬레보라스 뿐만 아니라 방 안의 모두를 얼릴 기세로 차갑고 강하게 불었다. 뭔가 잘못 됐다는 걸 깨달은 스노드롭은 눈보라를 멈추려고 기도를 올렸지만 그럼에도 더욱 강하게 불었다. 헬레보라스 뿐만 아니라 스노드롭의 발 끝도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멈춰! 멈춰! 멈춰!”

소리를 지르며 눈보라에게 기도가 아닌 발악에 가까운 명령을 해보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결국 칸자시가 더 늦기 전에 스노드롭의 팔을 당겼다. 헬레보라스만 남겨두고 모두 방을 빠져나왔다. 방 안에서 부는 눈보라는 헬레보라스 뿐만 아니라 방 안 전체를 얼음으로 가뒀다. 

“아… 아…”

스노드롭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 했다. 그저 작은 욕심일 뿐이었는데, 그 작은 욕심 때문에 이리 큰 벌을 받아야하는가. 그녀는 주먹으로 얼음 벽을 쳐댔다. 그러나 손가락이 부러질지 언정 얼음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노드롭은 부러진 손으로 계속해서 쳐댔다. 

“아가씨 그만하시지요…”

보자못한 칸자시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멈추게 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눈물 방울의 여왕님을 끌어안으며 위로해줬다.

그 후에도 일기는 몇 장 계속 됐다. 그러나 하얀 공주는 더 이상 읽지 않고 덮었다. 그리고 폴짝 의자에서 뛰어내려왔다. 곧장 헬레보라스의 방으로 뛰어갔다. 

헬레보라스를 가둔 얼음. 그 얼음 감옥은 헬레보라스를 가두고 있었지만 사실 스노드롭의 죄악도 함께 가둬두고 있었다. 형량은 종신형인가. 반성하면 감형이라도 해줄까. 설령 자신이 그 죗값을 받더라도 안에 있는 친구를 되돌릴 수 있다면…

“스트레나에에게 다 들었나보군요. 공주님.”

등 뒤에서 늙은 노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칸자시였다. 흑발이 밤하늘처럼 짙었던 그녀였지만 이젠 눈이 내려앉은 거처럼 백발이 됐다. 이제 허리도 구부정할 나이지만 여왕의 신하로서 위엄을 보여아한다며 아픈 허리임에도 자세는 꼿꼿하고 우아했다. 

“나 꼭 헬라를 꺼내고 싶어.”

“공주님은 항상 그렇게 말하셨어요. 공주님은 항상 공주님이었으니까요.”

“칸자시. 헬라가 이렇게 얼음에 갖힌게 얼마나 오래된 일이야?”

“천 년이 조금 넘었으려나요.”

“천 년…? 천 년동안 난 헬라를 깨우는데 실패한 거야?”

천 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가. 80년 남짓을 사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오래사는 칸자시도 이젠 흑발이 사라지고 백발만 남은 긴 시간이다. 1년 살이 하얀 공주에게는 상상도 불가능할 정도로 긴 시간이기도 하다. 

“실패한게 아닙니다, 공주님. 천 년동안 포기하지 않은 거죠.”

“하지만 난 1년이면 기억을 잃잖아. 그저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거 아니야?”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기억은 사라질지 언정 소망은 분명 쌓일테니까요.”

하얀 공주는 칸자시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몰랐지만, 비록 그 말이 두루뭉술한 응원이라고 해도 희망을 잃고 싶지 않았다. 

 

 

가을이 되고 공주는 여왕으로 성장했다. 이제 스노드롭은 자연을 다루는 법을 알게된 것이다. 알자마자 바로 헬레보라스의 방에 달려갔다. 

“자, 그럼…”

한번 숨을 고른 후에 얼음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녹아라, 녹아라. 얼음 새장이여 녹아서 안에 있는 새를 풀어주렴. 그러나 새장의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실망이었지면 역시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이제 첫걸음이다. 자연을 다루는 능력은 점점 더 능숙해질 것이다. 이대로 계속해서 능력을 기른다면 분명히… 

그런 희망을 품으며서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옮겼다…가 다시 제자리에 멈춰섰다. 

“분명 나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모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자신은 여태까지 지나온 자신과 무엇이 다른가. 칸자시는 여태까지 스노드롭은 스노드롭이었다며 말했지만, 그건 결국 똑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과 같은 말 아닐까. 자꾸만 불안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천 년동안 포기하지 않은 거죠.’

그 칸자시의 말이 스노드롭을 다독였다. 지난 날의 스노드롭이 전부 똑같이 불안에 떨었을 거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들은 적도, 헬레보라스가 얼음 독방의 공주님이 된 이후의 일기장도 본 적 없지만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론 무의미한 반복일 뿐이야.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할지도. 다른 방법이라…”

“아, 공주… 아니 여왕님 여기 계셨네요.”

스노드롭이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그녀를 찾고 있던 스트레나에가 그녀를 불렸다.

“무슨 일이야?”

스노드롭은 자신에게 뛰어오는 스트레나에를 가볍에 들어올렸다. 불과 몇 개월전만해도 키가 엇비슷했던 둘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스노드롭이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키 차이가 많이나게 됐다. 물론 이건 둘만의 비밀놀이 같은 거다. 만일 이걸 다른 가신들이 본다면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저녁 준비가 다 됐대요.”

“그러고보니 배가 고프네. 같이 먹을래?”

“정말요?”

가신들은 주로 여왕인 스노드롭이 식사를 마친 후에 먹기 때문에 같이 식사를 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였다. 스노드롭은 혼자 먹는 식사에 적적함을 느꼈고 하는 일이 별로 없어보이는 스트레나에와 같이 식사를 자주 즐겼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친근하게 느껴져 마치 피가 이어진 여동생을 가진 거 같았다. 왜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까. 칸자시에게서도, 보탄, 에리카, 프리무, 시클란에게서도 그런 친근함을 느끼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가족 같았다. 스노드롭은 그냥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가신이 스트레나에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스노드롭은 친구의 일로 머리가 복잡해서 식사로 나온 샐러드를 깨작깨작 느리게 먹고 있었다.

“여왕님, 헬레보라스 님에 대해서 생각 중이시죠?”

결국 그 속마음은 스트레나에에게 들켜버렸다. 겉모습과 행동거지는 어려보여도 은근 이런 눈치는 좋은 편이다. 

“저기 레나야.”

“네?”

“넌 만약에 아무리 주먹질을 해도 뚫을 수 있는 벽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흠… 포기하겠죠.”

“그, 그래…”

당연한 대답이긴 했지만 김이 샌 스노드롭은 어린아이에게 물어본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 엄청 큰 대포를 가져오겠죠.”

“어, 엄청 큰 대포?”

“네. 주먹으로는 천년을 때려도 뚫을 수 없는 벽이라도 대포로는 한방에 뚫을 수 있잖아요. 양보단 한방 아니겠어요?”

어린아이다운 어린아이 같은 대답이다. 그러나 스노드롭은 흘겨듣지 않고 새겨들었다. 그 방식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됐다. 12월은 올해도 차디찬 바람을 몰고왔다. 운명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서 역시 초조해졌고, 잠을 거의 자지 않아서 냇물처럼 맑았던 스노드롭의 눈동자가 퀭해졌다. 최대한 잠을 자지 않고 방법을 찾으려고 끝없이 사고하고 책을 읽었다. 그야말로 서고에 있는 모든 책을 읽을 기세로 책을 읽어갔지만, 서고는 넓고 책은 많았으며 그녀의 시간을 짧다. 

자기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잠에 빠졌던 스노드롭이 부스스 눈을 떴다. 그녀의 어깨를 덮어준 부드럽고 따듯한 쇼올. 그녀는 그걸 덮었던 기억이 없었다. 

“아, 여왕님 깨어나셨네요.”

스노드롭가 눈을 뜨자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스트레나에. 그녀는 스노드롭 앞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거 레나가 덮어준 거야?”

“이 땅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데요.”

“잠을 자면 안 되는데… 빨리 헬라를 꺼낼 방법을 찾아야하는데.”

“괜찮아요, 공주님. 공주님은 반드시 답을 찾으실 거예요.”

“넌 정말 긍정적이구나. 그건 그냥 여유가 있는 거니, 아니면 어떤 근거가 있는 거니?”

“헤헤. 제가 근거없이 떠벌리는 걸로 보였나요? 나름 근거가 있는데.”

“어떤 근거!?”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편인 스노드롭이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면서 책상을 쾅 치고 일어섰다. 맑은 하늘의 번개를 만난 꼴인 스트레나에는 놀라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어이쿠 깜짝이야…”

“아, 미안. 그래서 그 근거가 뭐야?”

“여태까지 여왕님은 그 해법을 찾았으니까요.”

“왜 그 말을 이제 말해!”

다시 한번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스노드롭. 그러나 이번엔 스트레나에는 놀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여왕님. 우리 여왕님…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여왕님의 간절함이에요.”

“내 간절함?”

“네. 만일 제가 이 이야기를 해줬으면 분명 안심했을 거고 간절함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여왕님이 찾으신 방법은 간절함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안심하세요, 여왕님은 반드시 답을 찾으실 거고 여태까지 잘 해오셨어요. 여왕님은 지금까지 여왕님이었거든요.”

스트레나에는 잔향처럼 스노드롭의 마음 속에 은은하고도 깊게 남는 말을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왕님, 일기를 쓰는 이유가 뭐라고 하셨죠?”

“비록 내가 추억은 1년 밖에 가질 수 없어도.”

“추억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다고 하셨어요. 여왕님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에요. 여왕님이 남기신 추억은 일기장에만 있는게 아니에요. 우리들도 다 여왕님이 남기신 추억인 걸요. 어쩌면 여왕님이 남기신 답은 분명 우리들에게도 남아있을 거예요.”

스트레나에가 서고를 떠났다. 그녀가 떠난 후에 스노드롭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답을 찾아낸 자신은 왜 그걸 시도하지 않았을까. 답은 찾았지만 너무 늦은 걸까? 아니면 당시엔 불가능했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녀도 서고를 떠나려고 했는데, 스트레나에가 앉아있던 자리에 읽고있던 책을 봤다. 

“그러고보니 레나가 책을 읽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스노드롭은 그 책을 들고는 표지에 적힌 제목을 읽어봤다.

“저주받은 하인킹의 이야기…?”

 

 

스노드롭은 머리가 복잡할 때면 어머니 나무를 찾아간다. 그저 줄기에 등을 대고 가지만 바라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고, 가끔은 상냥한 말을 하고, 가끔은 꾸짖어주니 그녀의 곁에서 있다가 지혜의 말씀 한마디를 듣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좋았다.

어머니 나무에게 다가선 스노드롭은 자신이 한조각이던 시절에 신세를 진 요람이 있는 구멍 안을 들여다 봤다. 주인없는 그 나무구멍은 어느 메르피 가족이 둥지를 짓고 살고 있었다. 그들도 그 집의 원래 주인을 알아보는 건지 스노드롭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음에도 전혀 도망치지 않았다. 

“역시나 찾아왔구나.”

“제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나보네요, 어머니.”

“넌 항상 이맘때쯤에 찾아오니까.”

“헬라가 그렇게 된 이후로요?”

“아니. 항상 그랬단다. 이맘때쯤이면 넌 마지막이 곧 온다는 걸 알고 마음을 정리해야 했으니까.”

“그렇군요…”

스노드롭은 어머니의 줄기에… 아니 품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머리도 살며시 맡겼다.

“왜 제 힘으로 그 얼음을 녹일 수가 없는 걸까요?”

“그건 그때의 스노드롭의 소망이 무척이나 강했기 때문이란다.”

“지금의 제가 헬라를 깨우고 싶다는 소망은 약하다는 소리인가요?”

“겨울은 혹하지만 어떤 겨울은 더욱 혹한 법이란다. 똑같이 어떤 소망은 더욱 지독한 법이야. 넌 순수하단다. 순수해서 너가 비는 소망엔 티끌이 없었지. 하지만 그땐 그 소망에 티끌이 담겼던 거야.”

“그리고 그 티끌 때문에 헬라는 영원히 얼음에 갖히게 생겼는 걸요.”

“내 아이야. 내 아이야. 넌 왜 헬라를 깨우고 싶은 거니?”

“그야! 그야… 헬라가 어떻게 살지는 헬라가 선택하는 거잖아요. 저도 알아요, 헬라는 곧 죽을 거란 걸요. 하지만 그 얘는 저와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다고 했어요. 헬라가 그걸 원한다면 전 그걸 들어주고 싶어요. 그게 친구잖아요.”

“그렇단다, 내 아이야. 넌 항상 똑같이 올곧은 대답을 했지. 왜 그런지 아니?”

“모두가 똑같은 저라서요?”

“아니. 소망이 쌓이기 때문이란다. 이전의 너가 지금의 너라고 한들, 아니라고 한들 모두의 소망은 점점 쌓이고 있단다.”

“소망은 쌓이고 있다…”

불현듯 서고에서 스트레나에랑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추억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다고 하셨어요. 여왕님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에요. 여왕님이 남기신 추억은 일기장에만 있는게 아니에요. 우리들도 다 여왕님이 남기신 추억인 걸요. 어쩌면 여왕님이 남기신 답은 분명 우리들에게도 남아있을 거예요.’

분명 과거의 들었던 말이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서, 마치 스트레나에가 자신의 뒤에서 자신의 귓가에 입을 대고 직접 말해주는 거 같았다. 

“…둘이… 둘이 저에게 알려주려고 하는군요.”

“자, 이제 너의 소망을 쌓으러 가렴.”

“네!”

스노드롭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들추며 뛰어가다가 잊어버린게 있어서 다시 어머니 나무에게 몸을 돌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

그렇게 스노드롭이 떠나가버리고 혼자 남은 어머니 나무. 그 가지에 눈 한송이가 아무도 모르게 떨어졌다. 

 

 

헬레보라스의 방 앞에 선 스트레나에. 그리운 사람의 모습을 보는 듯 아련한 얼굴로 얼음 요람 속의 헬레보라스를 보고 있었다. 

“꼭 꺼내줄게, 헬라…”

복도를 급하게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늙은 칸자시는 이젠 다리가 무거워 뛰는 소리에도 세월이 느껴진다. 에리카는 궁전에선 절대로 뛰지않고 보탄은 좀 더 경쾌하게 뛰고 프리무는 폴짝폴짝 시클란은 다급하다. 이렇게 우아하게 뛰는 사람은 오직…

“레나, 역시 여기있었구나.”

스노드롭 밖에 없다.

“그렇게 급하게 오시는 거 보니, 해답을 찾으셨군요.”

“그래…”

스노드롭은 거친 숨을 고르면서 스트레나에의 옆에 서서 헬레보라스의 얼굴을 같이 바라본다. 

“레나, 너가 내가 쌓은 소망이지?”

“네… 전 그저 과거의 여왕님이 지금의 여왕님에게 헬라를 부탁하며 맡긴 작은 소망이었어요.”

처음엔 작은 소망일 뿐이었다. 사람의 형체도 없고, 의지도 없는 반딧불 같은 빛을 내는 소망. 그리고 쌓여갔다. 10년? 100년? 500년? 아무리 한 줌의 소망이었더라도 긴 세월동안 모이면 찬란해진다. 자기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고, 자기 스스로 손발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처음 그녀가 움직이는 걸 보고 말하는 걸 봤을 때, 스노드롭은 확신했다. 헬라보라스를 깨울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뜻은… 레나, 너가 희생해야한다는 뜻이잖아.”

“여왕님… 아니 스노드롭.”

스트레나에는 헬라보라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 누구보다 강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스노드롭을 봤다. 그 눈은 망설이는 친구를 보는 눈도, 어머니를 보는 눈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보는 굳건한 눈이었다.

“난 너가 모은 소망, 난 너야.”

그리고 방긋 웃었다. 

“저기 말야. 꽃이 피려면 눈이 녹아야해. 눈이 내리려면 꽃이 져야해. 영원히 내리는 눈은 그저 아무도 품어주지 못 하는 만년설일 뿐이야. 난 그 눈을 녹이고 꽃을 피우기 위해 태어났어. 그건 스노드롭의 소망이 아닌 나만의 소망. 그러니까 망설이지마.”

그녀는 손을 뻗었다. 스노드롭의 뺨에 흐르는 눈물 방울… 그걸 손등으로 살며시 닦아줬다. 

“울지마. 너가 그렇게 우니까 사람들이 티어드롭이라고 놀리잖아.”

“…괜찮겠어?”

“괜찮아. 녹은 눈은 흙으로 스며들고, 흙에 스며든 눈은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내리지. 난 그저 녹아서 다시 너에게 돌아갈 뿐이야.”

“널 꼭 기억할게.”

스노드롭은 가슴에 양손을 모았다. 손바닥에 모이는 따스함. 그걸 스트레나에에게 건내줬다.

“나의 소망 잘 받았어. 지금은 아니지만 이제 느껴져. 이제 곧이야. 조금이면 헬라를 구할 수 있어.”

곧… 그 말이 스노드롭을 가슴 뛰게했다. 비록 지금의 그녀는 헬라보라스가 깨어나는 걸 보지 못 하겠지만, 미래의 그녀는 반드시 헬라보라스를 깨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미래의 스노드롭은 바로 자기 자신이니까…

 

 

4. 녹은 눈의 이야기

“확신할 수 있어요. 이제 마지막이에요.”

그 후 얼마나 더 소망을 모았을까. 스트레나에는 기억했지만 스노드롭은 기억하지 못 한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괜찮겠어?”

“네… 그동안 나를 나로 있게해줘서 고마웠어요.”

“난 정말 사랑받기만 하네.”

스노드롭은 자신의 소망을 스트레나에에게 건내줬다. 그걸 받은 스트레나에는 그 따스한 마음을 받아들이며 미소지었다.

“세상엔 사랑받기만 하는 사람은 없어, 스노드롭.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야.”

이번엔 스노드롭이 아닌 스트레나에가 기도를 올린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도. 그리고 만년설을 녹일 기도이다. 그녀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사라져갔다. 그리고 헬라보라스를 재운 기나긴 얼음 달걀이 녹아갔다. 릴리스 되는 스트레나에. 목소리가 안 나오기 전에 마지막 말을 건낸다.

“헬라를 잘 부탁해.”

스트레나에를 사라졌다. 그리고 헬라보라스가 풀려났다. 스노드롭은 슬픔을 뒤로하고 곧장 헬라보라스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헬라야!”

영원과 같은 오랜 잠에서 해방된 헬라보라스는 눈을 뜨고 자신을 안고 있는 스노드롭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어루어만졌다.

“뭔가 천년만인 거 같네…”

 

 

“고마워. 너의 곁에서 죽고 싶다는 내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해줘서.”

만나기 위해 헬라보라스를 얼음에서 꺼내줬지만, 그건 그녀가 원하는 이별을 위한 거였다. 역시 헬라보라스의 상태는 빠르게 나빠졌다. 지금은 일어서는 것도 힘들어서, 침대에 누워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다. 

“미안. 나 때문에 그걸 못 이루게 될 뻔해서.”

“하지만 난 이렇게 너의 곁에 있잖아. 너가 반드시 날 깨울 거라고 항상 믿었었어.”

밖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이 날에 울리는 종소리는 눈이 오는 걸 환영하는 나팔이고, 여왕님이 다시 잠에 빠졌다는 눈물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스노드롭은 지금 헬라보라스의 곁에 있다. 며칠 전에 친구의 곁에 있고 싶다고 요정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간곡하게 부탁했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군중 속의 스프라우트가 말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많은 요정들이 그 말에 동조했다. 

“우린 그동안 여왕님의 은혜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여왕님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죠.”

“모두… 고마워요.”

그렇게 지금 이브에 울리는 저 종소리는 스노드롭과 헬레보라스의 마지막 시간을 애도하는 종소리가 됐다. 항상 그 종이 울리기 전에 잠들었던 헬라보라스는 처음 듣는 그 소리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드네…”

“그러게. 오늘 처음 듣는 종소리인데.”

둘 다 그 종소리에 취하는 와중에 헬라보라스는 창 밖에서 믿을 수 없는 걸 봤다. 

“저건…”

일어서기도 힘든 몸이지만 창 밖에 보인 그건 헬라보라스에게 마지막 힘을 짜내게 했다. 동글동글하고 새하얀 것. 분명 눈이었다. 함박눈이었다. 

“저게 뭐야?”

눈을 불러옴에도 눈을 보지 못 했던 스노드롭은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 했고, 헬레보라스도 이젠 그 형태와 온기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이야…”

“눈이요? 하지만 전 여기에 있는데.”

“소망은 쌓여간다지…”

결국 힘이 풀려서 주저 앉아버린 헬레보라스. 스노드롭이 깜짝 놀라면서 그녀를 받아줬다.

“헬라야, 괜찮아?”

“이제 때가 온 거 같아… 그런데 정말 다행이다. 저 눈을 보게 돼서.”

크리스마스에 지는 꽃은 너무나 행복했다. 원하는 친구가 곁에 있고, 천년 이상이나 보지 못 했던 눈꽃이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 그녀가 제일 무서워했던 것은 언젠가 자신의 친구에게 잊혀지는 거였다. 그러나 이젠 그럴 걱정은 사라졌다. 자신의 친구는 설령 만년이 지난다고 해도 자신을 잊지 않을 친구이니까. 

크리스마스에 지는 꽃은 눈꽃과 함께 떨어졌다.

 

 

”어때, 칸자시. 어울려?”

이제 완전히 새로운 걸음을 내딛게 된 스노드롭. 공주님 티가 났던 드레스를 벗고 여왕님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새로운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엔 앞머리엔 티아라를, 뒷머리엔 투명한 베일을 썼다. 

“정말 어울리십니다. 스노드롭… 아니 티어드롭 여왕님.”

“그래?”

보탄이 꽃다발을 가져왔다. 푸른색 장미 아래에 하얀 눈이 쌓인 듯이 백합이 깔린 꽃다발이었다. 그걸 받아든 티어드롭은 이제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궁전 밖을 나섰다.


끝.


 

뒤지는 줄 알았네. 한달이면 여유롭다고 생각했는데, 일 때문에 사실상 주말 밖에 시간이 없었음.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짧은 소설을 쓸걸. 덕분에 좀 빨리 쓰려고만 했던 거 같아서 아쉬움이 남음.  때문에 퇴고도 잘 못함. 오타가 많다면 미안  

육화랑 ㅈ도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솔직히 육화 스토리 뭣도 없던데 내가 어떻게 살을 붙이든 내 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