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메이드 저택 살인사건


 

오후 5시, 저택에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다. 정문에는 용의 꼬리를 단 메이드들이 손님들을 받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윽, 주인님은 도대체 왜 이렇게 손님을 많이 초대한 거야?”

 

“그러게요... 전 아픈 환자들을 돌봐야 하는데 여기서 손님이나 받고 있어야 한다니... ”

 

“그러니까 말이야, 어휴. 그나마 너랑 같이 마중하니까 조금 낫네, 혼자서 할 때는 손님이 워낙 많아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니까! 아, 마왕초룡 베에르제우스님 오랜만이시네요! 아드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그새끼 강염룡이랑 눈맞아서 집 나갔어, 호로자식 같으니라고”

 

“아...그, 그렇군요... 손님들 응접실은 1층 안쪽이니 아무쪼록 편하게 계세요...”

 

너서리와 피루라가 손님들을 거의 다 받을 무렵, 저택 안에서는 티루루와 체임의 환대 준비가 한창이었다.

 

“티루루님, 여기 커튼 정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 네 물론이죠! 잠시...깍!!!”

 

놀란 티루루가 급하게 뒤로 물러서며 휘청거리자 체임이 재빠르게 티루루를 잡아주었다.

아래로 꽂힌 시선에는 수많은 다리를 가진 괴생물체가 발발거리며.....!

 

“앗, 거기 서! 도망가지 마!”

 

어딘가에서 물에 젖은 라도리가 뛰쳐나와서는 잽싸게 디노미스쿠스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티루루와 체임의 묘한 자세를 슥 쳐다보더니

 

“....어 언니들...? 왜 서로 껴안고 있어?”

 

“네? 어머, 잠시만, 하하... 체임님 그...얘가 오해를..”

 

“아..아! 네 하하...응? 왜 그러니 라도리, 방금 무슨 일 있었니?”

 

황급히 서로 몸을 떼며 허둥지둥하는 언니들을 라도리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들 혹시.. 초융합.. 하려는 거..”

 

“조용히 하세욧!”

 

“아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라도리의 정수리에 꿀밤이 날아왔다. 짧은 비명소리에 머리를 문지르는 라도리의 시선이 위를 향하자 이글거리는 하스키의 눈빛이 라도리와 마주쳤다.

 

“식탁보 빨래를 맡기기만 했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게다가 그 이상한 생명체는 또 뭔가요”

 

“버0스토마 라고 해요! 물족이니까 빨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니 왜 모자이크가.. 어쨌거나 라도리, 이제 그만하고 다시 빨래나 하러 가세요. 얼마 전부터 다 이자 라던가 이상한 귀신 들린 검이라던가 이런 건 다 어디서 가져오는 건가요?”

 

“선물로 받았어요!”

 

(도대체 누가 선물로 이런 걸 준거야..?)

 

“디노미스쿠스랑 조금만 놀다가 하면 안되나요?”

 

“...뭐 정 그러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와! 하스키 언니 만세! 가자 디노미스쿠스!”

 

쩔쩔매는 고생대 애완동물을 품에 안고 달려나가려는 찰나 라도라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탁기괴 런드리 드래곤....”

 

순간, 라도리의 다리가 경직되었다.

 

“아무리 더러워도 파괴,제외...세탁할 때 대상도 지정하지 않는다...”

 

“어..언니..?”

 

“소비자 권장 가격 1500엔.....양심적인 가격이네..?”

 

“언니! 잘못했어요! 지금 당장 빨래하러 갈게요! 제발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오늘 7시에 오시는 드래곤의 제왕 콘서트도 아직 못 봤고.. 제 키가 10cm만 더 클 때까지라도 제발!!”

 

“후훗. 장난이니까 진정하세요 라도리, 설마 제가 그런 폭력적인 짓을 하겠어요?”

 

“그렇죠? 전 언니가 화나서 주인님을 방에 데리고 갔다 나오면 주인님 얼굴이 핼쑥해지길래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잖아요~헤헤”

 

“네? 어...라도리? ..아! 그 그건 주인님이 자꾸 장난치시길래 잠시 따끔하게! 할 말을 한 거죠. 네, 하하, 그렇고 말고요”

 

“잠시라고 하시기엔 꽤 오랜 시간 계셨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하셨나요 하 메이드장님, 게다가 데려가신 방은 어째서인지 침ㅅ...”

 

“잠시만! 헟 참;; 와 라도리 하하 대체 무슨 말을... 그리고 그 말투는 또 뭐...”

 

“어저께 티비에서 ‘덤핑,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큐의 명추리 선생님이 이렇게 하시길래”

 

“언니”

 

체임의 손이 하스키의 어깨에 살포시 놓였다. 부드러운 어투에 웃는 얼굴이었지만 라도리는 해깃번개를 덤핑했을 때의 싸한 분위기를 느꼈다.

 

“저희가 잠시 안 본다고 순서를 그렇게 맘대로 어기시면 곤란한데...”

 

“아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난 잘...”


식은땀을 흘리며 흔들리는 눈빛의 하스키를 그녀들은 묘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라도리, 어서 빨래하러 다시 가세요. 언니들끼리 잠시 중요한 얘기를 할 거라서”

 

티루루가 빙긋 웃으며 라도리의 등을 떠밀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 라도리였지만 빠져나갈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디노미스쿠스를 꼭 안고 신속하게 탈출했다.

보통 이런 경우 다음날 주인님 얼굴이 초췌해 있길래 라도리는 주인님이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세탁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죠”

 

빨랫비누에서 나와 몽실몽실 떠다니는 비눗방울 사이에 두 소녀가 쭈그려 앉아 고생대 애완동물을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은 푸근한 비눗물이 꽤 기분 좋은지 다리를 늘어뜨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어머, 정말요? 그거 정말 재밌었겠는데요?”

 

“에이, 뭐가 재밌어요? 그냥 꾸중 들었을 뿐인걸요”

 

“그래도 서로 티격태격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걸요? 저희 집은... 현사 오빠 빼고는 얼굴 보기도 힘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꽤 부럽기도 해요”

 

“언니...”

 

손님의 푸른 눈이 잠시 반짝였기에, 라도리는 뭐라도 말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도 정령룡 아저씨는 정말 멋있는걸요!“

 

”..이젠 보이지도 않는데요 뭐..요즘 동시특소 락은 퍼미션 취급도 못 받으니까.. 흑..“

 

소녀의 푸른 눈망울이 점점 글썽거려지자 라도리가 어찌할 줄 모르며 위로하려는 순간,

 

 

 

”꺄아아아아아악!!!!!ㅡㅡㅡ“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저택에 울렸다.

 

”와앗! 이게 무슨 소리지..? 언니, 여기 디노미스쿠스좀 돌보고 있어 주세요. 잠시만 보고 올게요!“

 

”그, 그래.. 무슨 일이지..?“

 

화들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라도리는 서둘러 소리가 난 방향으로 뛰어갔다.

 

‘소리는 분명 2층 객실에서 났어... 그리고 내 느낌이 맞다면 이 비명소리는...”

 

라도리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길 바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2층 객실에 거의 다다르자 웅성거리는 손님들과 언니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안 그래도 하얀 체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상태로, 방 안에 시선이 꽂혀 있었다.

라도리는 재빨리 손님들의 다리 사이를 제쳐 방 안을 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는....

 

자그마한 방안은 환하게 비쳐있었다. 흐트러진 침대 옆에는 분홍빛 드래곤이 싸늘하게 엎드려 누워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모습은 흡사 비스크 돌을 떠오르게 했다.

 

“너서리...언니...? 어째서...”

 

“누운채로...죽었어!”

“여기 직원 아냐?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지명자 없었나? 묘지 덤핑된 애도 없는데 너서리를 왜 죽였담”

 

“라도리”

 

하스키가 조용히 라도리의 옷 자락을 잡아 끌었다. 

 

“여긴 언니들에게 맡기고 다시 빨래를 하러...”

 

“빨리 좀 와봐! 여기 또 시체가 있다고!!”

 

복도 저 너머에서 손님의 외침이 들렸다.

 

“설마 누가 또..? 체임씨, 잠시 저쪽 상황을 보고 올 동안 여기 정리정돈을 부탁드릴게요”

 

하스키는 말을 마치고 날개를 펼친 뒤 복도를 날아갔다.

체임은 초조한 얼굴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듯 보였다.

 

“그 그러니까 일단은 시체를....”

 

“언니, 잠시만요!”

 

허둥지둥대는 체임을 라도리는 급하게 붙잡았다.

 

“현장이 훼손될 수도 있어요. 범인 추리를 위해서 일단 손을 대지 말아주세요!”

 

“라도리, 추리라니 무슨..? 일단 너서리부터 살펴봐야...”

 

“어차피 정리정돈 하다 보면 살아날 텐데요 뭘, 그보다 범인을 빨리 찾아 피해자를 줄이는 게 먼저지 않을까요?”

 

“아니 그렇다 해도 범인을 어떻게...”

 

“일단 현장을 한번 살펴볼게요”

 

라도리는 참혹한 살해 현장을 한번 슥 둘러봤다. 어디서 본 건 있었는지 제일 먼저 시신을 살피면서 라도리는 생각했다.

 

(그때 들렸던 비명 소리는 분명히 너서리 언니었어... 그렇다는 건 사건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거지)

 

“범인은 이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아마 멀지 않은 곳에 있겠죠”

 

라도리가 운을 떼자 손님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그럼 여기도 위험한 거 아냐?”

 

“그건 아니에요”

 

라도리는 너서리의 손에 쥔 무언가를 꺼냈다.

 

“라도리, 그건...”

 

“네, 체력 증강제 슈퍼 Z...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니들이 항상 갖고 싶어했던 물건이죠”

 

“그, 그게 어쨌다는 거니!”

 

“생각해 보세요.. 아무도 없는 방에 너서리 언니가 혼자 갈 일이 어디 있겠어요? 분명히 누군가 불렀을 거에요. 용무는 아마도 누군가, 즉 범인과의 슈퍼 Z 거래...

모두들 손님이 많아 바쁜 틈에 범인과 너서리 언니 둘 다 자연스럽게 빈 방으로 빠져나왔겠죠.”

 

라도리는 말을 쏟아낸 후 찰랑거리는 체력 증강제 슈퍼 Z를 손에 들었다.

 

“그나저나 언니들은 이게 뭐길래 구하려고 안달이람?”

 

라도리는 이 음료수가 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주 맛있는 음료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라도리, 그것보다 범인이 누구인지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 이대로는 우리 모두 죽고말거야!!”

 

“에..그래서 범인은 말이죠”

 

라도리는 생각했다.

 

“아니 역시 범인은 저분이죠”

 

라도리는 굳이 어려운 생각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야 범인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사실 여기까지 생각 한 것만 해도 라도리 치고는 꽤나 선방한 셈이었다.

 

“저 사람이 범인...?”

 

라도리의 손끝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당황해 하는 그자와는 달리 모두는 갑자기 납득하기 시작했다.

 

“아 쟤라면 그럴 수 있지”

 

“멍청하게 모두 범인을 옆에 두고 뭐했지?”

 

“어떻게ㅋㅋㅋㅋ 범인ㅋㅋㅋ 이름이ㅋㅋㅋㅋㅋㅋ”

 

“잠깐!”

 

지목된 쪽에서는 억울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난...난 그냥 평범하고 선량한 손님일 뿐이야!!”

 

 

 

용살자는 열심히 항변했다.

 

“.....”

 

체임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용살자에게 지그시 보냈다.

 

“다들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거야! 난 아무짓도 안했다고! 아니 들어봐 난...”

 

“예 예 아무럼요, 자세한 얘기는 일단 경라과 언니한테 먼저 간 다음에 하시고, 마계의 족쇄가 어딨더라...”

 

“크로스 어택!!”

 

“아야! 으으 내 머리... 하스키 언니? 언제 돌아오셨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이게 무슨 소동인지... 휴..”

 

“언니, 그래도 범인을 찾았어요! 범인은 바로 6레벨에 공격력 2000이라는 흉악한 능력치의 용살자 씨라구요!”

 

하스키는 용살자를 슥 흘겨봤다. 흠칫거리는 용살자를 잠시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 뒤 라도리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라도리, 퀴즈를 내볼게요. 한번 맞춰보세요”

 

“와! 재밌는 퀴즈다!”

 

“가장 먼저 당한 희생자는?”

 

“너서리 언니요!”

 

“틀렸습니다! 정답은 피루라에요”

 

“예...? 피루라 언니 죽었어요? 언제...?”

 

“그야 제가 죽였으니까”

 

순간, 라도리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라도리는 그녀 앞의 아름답고도 엷은 웃음의 의미에 대해 두뇌를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어.. 언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당연히 거짓말이에요. 설마 제가 그러겠어요? 중요한 건 라도리가 저보다 말도 안되는 추리를 했다 이 말이죠”

 

“휴 다행이다!”

 

“아 피루라가 죽은 건 사실이에요. 방금 확인하고 오는 길이거든”

 

“!!!!”

 

하스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손짓을 살짝 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독살, 탕비실에서 혼자 농땡이 치면서 마신 홍차에 노인의 맹독약이 검출됐어요”

 

“그 홍차 러시아산이었어요? 세상에...”

 

“라도리, 러...뭐요? 아니 그보다 피루라... 그런데 피루라가 너서리보다 먼저 당했는지는 어떻게...?”

 

체임이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피루라가 당한 탕비실은 2층 복도 중앙에, 그리고 너서리가 당한 이 방은... 복도 끝에 있는 마지막 방이니까요.”

 

“그게 왜요?”

 

“아...그렇구나, 그러니까 라도리, 2층은 직선 일반 통행으로 이루어져 있잖아. 계단은 반대쪽에만 하나 있고. 결국 이 방에서 너서리를 살해하고 탕비실까지 이동하려면 비명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았겠어?”

 

“그래. 범인은 먼저 탕비실을 들러 피루라에게 독이 든 홍차를 건낸 후 복도 끝 방에서 너서리를 만나 살해했을 거야, 그리고 범인은 비명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오기 전에 빠져나갔겠지. 바로....”

 

하스키는 커튼을 잡고 오른쪽으로 슥 젖혔다. 상쾌한 밤공기가 답답해진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바뀌어주었다.

 

“이 창문을 통해서 말이야.”

 

하스키는 창밖에 몸을 약간 숙이고는 시선을 바깥에 고정시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각 층의 끝 방은 다른 방들과는 다르게 창문이 정문 쪽을 향해있지 않고 왼쪽 벽을 향해있는 구조야. 범인은 이 점을 미리 생각하고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잡았겠지”

 

“여기서 너서리를 살해하고 벽 쪽을 향한 창문으로 나가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는 거군요”

 

“맞아, 나가기 전에 커튼은 쳤지만 사람들이 예상보다 빨리 왔는지 창문은 닫아놓지 못하고 도망쳤군. 아무튼 그래서 결국 범인은...”

 

하스키는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너서리와 피루라의 공격력은 500... 나 제외 모두 인간형은 공격력이 같으니 직원을 의심할 필요는 없고.. 애초에 여긴 작은 방이니 용폼으로 변신도 힘들겠지..

그나저나 너서리는 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한거지? 기습을 당했다 하더라도 변신 정도는 할 수 있었을텐데.. 정말 용살자씨의 효과로 순식간에 당해버린 건가...?)

 

“용살자씨, 의심해서 미안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으니.. 사건 당시 알리바이가 있을까요?”

 

“나..난 그때 방에서 컴퓨터로 드래고닉 택틱스 게임을 즐기고 있었어! 겨우 승기를 잡았나 했는데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서 와본 것 뿐이라고!”

 

“그러니까, 방에서 게임을 하는 걸 본 사람은 없다... 이건가요?”

 

“엇 젠장 얘기가 이렇게 되나? 이봐 뭘 생각하는지는 대충 예상이 가지만 아니라구! 난...”

 

“잠깐”

 

손님 중 하나가 입을 뗐다. 숨길 수 없는 불쌍한 기운이 느껴진 하스키는 눈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용살자는 범인이 아니야, 왜냐하면 그때 같이 게임을 하고 있던 플레이어는 나였으니까”

 

“뭐.. 둘이 친하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상급 레벨의 공격력을 가진 환상의 레어 드래곤 붉은 눈의 흑룡님은 그 말을 입증하실 만한 증거라도 있으신가요?”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난 게임을 하는 도중 방에서 증식하는 무언가를 발견해서 호출 벨로 직원을 불러 처리했다구, 자세한 건 거기 아가씨가 더 잘 알텐데?”

 

“앗, 네 분명 호출을 받고 흑룡씨 방에 가긴 했어요. 사건이 터지기 조금 전이었던 걸로 분명히 기억해요”

 

“체임이 그렇게 말한다면 뭐.. 그래서 무려 서치카드 코스트가 덤핑인 흑룡씨의 말이 맞다면 용살자씨는 의심할 필요가 없어지네요, 그럼 결국 사건은 제자리라..”

 

“아니 무슨 내가 호감고닉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상한 수식어 붙이지 말아줄래?”

 

“물론이죠 다이나소 류자키의 전재산 500원어치 붉은 눈의 흑룡님. 어쨌거나 범인은 창문을 통해 나가서 그대로 도망쳤을 수도 있고, 또 다른 희생자를 찾으려 1층으로 들어왔을 수도 있으니 정문을 지키고 있던 티루루에게 가봐야겠어요.”

 

“아니 저 용족같지도 않은게 끝까지 저러네, 야 니가 내 설움을 알기나 해?”

 

“라도리, 손님들을 일단 안심시키고 방으로 돌려 보내세요, 그럼 전 이만”

 

“라져 댓!”

 

울먹거리는 흑룡을 뒤로 하고 하스키는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악의는 없었지만 흑룡은 놀리는 맛이 찰졌기 때문에 그를 만나면 은근히 재밌었다.

 

하스키는 계단을 내려가 1층 정문을 향해 달렸다. 경라과에 전화를 해 놨으니 사건은 빠르게 해결될 터였지만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겼는데 주인님은 도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하여간 뒤처리는 항상 내 몫이라니까.. 일 끝나면 다들 따끔하게 한마디씩 해야겠어)

 

퍽, 소리와 함께 달리던 하스키의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은 몸뚱이는 가벼운 충격과 함께 땅을 향해 쓰러져갔다.

 

“괜찮으신가요?”

 

(핫, 뭐야 나 넘어질뻔 한 거야? 아 쪽팔려, 메이드장이나 돼서 뛰다가 부딪혀서 넘어지다니...

어라? 그런데 이 사람은...)

 

“...버스터 블레이더 씨?”

 

“하하, 다행히 상처는 없어 보이네요, 갑자기 달려오셔서 피할 생각도 못하고 부딪혔지 뭡니까. 무슨 생각을 하셨길래 그렇게..”

 

하스키는 자신이 그의 품에 반쯤 안겨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숨기고 괜히 옷을 툭툭 털며 요란스럽게 일어섰다.

 

“아하하 이것 참 죄송합니다, 2층 일 때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거든요”

 

“아, 방금 2층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던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봤다.

 

“그게 말이죠..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직원 중 하나가...”

 

말을 하다가 하스키는 문득 바로 앞의 그 남자를 바라봤다.

용살자가 그 존재 만으로도 범인으로 의심 받지 않았었나? 그런데 지금 그녀의 앞엔 용족 고로시의 끝판왕 그 자체인 존재가 서 있었다.

 

“저.. 갑자기 죄송하지만, 혹시 오늘 저택에서 뭘 하고 계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정보 수집 차원에서...하하..”

 

“예..? 전 뭐 여기 1층 응접실에서 D-타임이나 갖고 있었습니다. 어제 반룡이랑 놀아주느라 오늘은 피곤해서 말이죠”

 

“그런가요.. 혹시 D-타임을 가지시던 걸 보신 다른 분이 계실까요?”

 

순간 그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차, 너무 몰아붙였나?

 

“저, 메이드장님 혹시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2층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그저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을 뿐입니다! 전 결백해요!

응접실에 다른 손님들도 계셨고, 무엇보다 D-타임을 서빙 하신 분이 저쪽에 계신 티루루 님입니다. 물어보시면 바로 말씀해 주실 거에요!”

 

“앗 아뇨아뇨, 어디까지나 범인을 찾기 위한 정보 수집을 위해서 그런 거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나저나 죄송합니다.. 다짜고짜 범인 취급을 해서”

 

하스키의 미안함 섞인 말이 끝나자 그는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군요.. 저야말로 괜히 오버해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런 자리에 사건이 생기면 항상 곤란해지긴 합니다”

 

하긴, 지금의 그는 그저 평범한 용 사냥꾼일 뿐이었다. 좁은 방에서 너서리가 맘먹고 싸우게 된다면 공격력 500이 올라간 정도로는 쉽게 당해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하스키는 눈앞의 사내에게 상당히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른 이 자리를 정리하고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니에요, 잘못한 건 저인걸요. 여러모로 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2층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부디 계시는 동안 편안히 계세요”

 

꾸벅 인사를 하자 사내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발길을 돌려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하며 다시 하스키는 생각했다.

 

(괜히 미안한 짓을 했네.. 하긴 요즘은 비스테드라던가 막기 힘든 용족도 많아서 저분도 힘들 거야.. 아 거의 다 왔다)

 

1층의 드넓은 공간에는 초대한 뮤지션들의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공연 시작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틈을 헤치며 하스키는 열심히 나아갔다.

 

저택은 꽤 넓었다. 특히나 1층은 저택의 얼굴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붉은 머리칼에 흥건한 선홍빛 액체를 발견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하스키는 주저앉아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활짝 열린 대문을 통해 불어오는 서늘한 밤공기가 그녀의 흥분과 관객들의 기대를 식혀주었다.

 

하스키는 티루루의 시신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였다.

아니, 직원들은 저택 안을 모두 돌아다니기에 발견되기 쉽지만, 방에 있는 모든 손님들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다. 추가 피해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시된 상황과 눈앞에 보이는 싸늘한 시체의 메시지를 보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빠르게 결론을 내려야 한다. 범인은 결국 누구인가? 그리고 어디에 있는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티루루, 버스터 블레이더, 붉은 눈의 흑룡, 용살자, 라도리의 추리, 피루라,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점인 너서리의 비명...

 

(잠깐, 비명?)

 

범인은 너서리를 초대 후 암살, 피루라는 독살, 티루루는...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을 보니 역시 기습적으로 한순간에 해치웠을 것이다. 모여있는 관객들도 쓰러진 티루루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상처가 깊지 않고 작다. 그래, 단도가 아니었을까? 가령 잠시 상대방의 혼을 빼놓는 새크리파이스 스워드라던가... 아마 그런류의 무기였을 거야)

 

소리를 내지 않고 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너서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유도한 건가?

 

피루라에게 장치를 만들어 놓고 너서리를 일부러 소리 내어 살해했다,

 

(비명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반대쪽 계단으로 올라왔지, 그리고 방의 창문을 통해 사람들 눈을 피하며 그대로 1층으로 내려와 정문에서 혼자 있는 티루루를 살해했어.)

 

(암살을 계속 하기 위해 우리들을 유인하고 있다. 특히 나를)

 

지금 내가 이곳에서 티루루의 시체를 살펴보고 있는 것도 다 계산된 행동일 거야. 그렇다는 건 지금 녀석은 4번째 희생자를 내 눈을 피해 노리고 있다는 거겠지.

 

자, 범인은 지금 어디 있을까?

 

라도리는 2층 끝 방에 너서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을거야.

 

체임은 4층으로 올라가 주인님에게 사건에 대해 설명하러 갔겠지, 그리고...

 

사건이 일어날 당시 라도리는 1층 세탁실에서 비명 소리를 듣고 올라왔다. 즉 1층과 2층 사이는 소리가 잘 울리는 구조다.

 

범인은 이번에도 아무도 모르게 암살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가장 좋은 방법은...

 

주위에 가득 찬 소리에 비명을 숨기지 않을까?

 

 

“오후 7시, 드래곤 자각의 선율 공연이 시작할 시간이야”

 


 


 


 

하스키는 곧바로 날개를 펼져 정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곤 곡선을 그리며 2층 끝 방 창문을 향해 곧바로 날아갔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고동치는 심장에 날개가 미세하게 떨렸다.

 

달빛이 등을 환하게 비쳐주었다. 밤의 허공에 그녀는 잠시 동안 떠 있었다. 상쾌한 공기가 폐에 채워지며 자신감을 복돋아주었다.

 

하스키는 잠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아래를 바라봤다. 

 

울려 퍼지는 음악 속에 환하게 열린 창문이 그녀를 초대하는 듯했다.

 

곧바로 머리를 사선으로 떨어뜨리며 직사각형 문을 향해 고속으로 날갯짓했다.

 

머리칼이 눈을 잠시 상냥하게 가렸다.

 

짧은 둔탁음과 함께 그녀는 안정적인 자세로 방 안에 착지했다. 반동으로 물건들이 잠시 떠올랐다.

 

곧바로 눈을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흐트러진 가구와 백색 형광등 불빛이 그녀를 맞이했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어깨에 쇳덩이를 얹은 듯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방 구석엔 이불에 숨은 채 어떻게든 맞서보려 노력하는 라도리가 있었다.

 

“언제부터긴요, 그쪽은 우리들을 쉽게 찾는데, 그 반대는 어련하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좁은 방 안은 이상하리 만큼 공기가 무거웠다. 숨쉬기조차 쉽지 않았다. 하스키는 눈빛으로 라도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다.

 

“반룡씨는 이제 세상에 없으니까”

 

청백색의 갑주 사이로 번득이는 눈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거만한 자가 아니었다. 철저히 강함에 근거한 여유였다.

 

(호기롭게 내려왔지만, 이미 융합한 상태였을 줄이야.. 이대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떡하지.. 주인님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라도 최대한 끌어 봐야겠군)

 

“융합 소재는 어디서 구한 거에요?”

 

“응? 2층으로 오던 길에 방 하나를 들르니 백룡이 한 마리 있더군. 운동 삼아 처리했네”

 

(하여간 백붕이 그 인간은 도움이 안돼..)

 

“어째서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걸치며 하나씩 처리한 거죠? 당신이라면 충분히 저희 모두를 한번에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오늘 이 저택엔 드래곤족이 아닌 자들도 많으니까, 가령..여기 주인이라던가 말이야. 공연히 힘을 뺄 필요는 없지”

 

“그래서, 아무 잘못도 없는 직원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살해한 건가요? 이런 짓을 해서 당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길래...”

 

그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라도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용살자가 용을 잡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재미없는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 그럼.. 불청객 때문에 잠시 미룬 일부터 처리해야겠군”

 

하스키는 자신의 절망적인 말주변을 저주하며 뭐라도 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방 한구석에선 푸른 용 하나가 애처로운 그림자를 등에 지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스키 언니...”

 

용살자가 라도리를 향해 몸을 완전히 돌린 순간, 하스키의 몸에 신비한 광채가 모여들었다.

빛이 방을 가득 채우며 용살자를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소용없는 짓일텐데”

 

빛에 휘감겨가며 하스키는 생각했다. 본모습을 꺼내더라도 상황을 바꾸긴 힘들겠지만 최소한 그의 주의를 잠시 끌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몇 초 뒤, 방 안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왜... 변신이 안되지? 어째서 갑자기.. 그의 힘은 몬스터 효과만을 억제할텐데..?”

 

“아, 사실 어제 정리 정돈하다가 항아리를 하나 깨뜨렸는데...”

 

라도리는 갑자기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도 보지 못했던 일을 자기 입으로 꺼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라도리 그거 혹시 금색과 초록색 얼굴이 두 개 달린 항아리 아니었나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라도리! 그런 물건을 다룰 땐 조심하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악!!”

 

“에이 언니, 그건 제 잘못이라기보단, 울며 겨자 먹기로 욕졸이라도 써야 하는 드메의 저주스런 초동 안정성을 탓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여간 일 끝나고 봐,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너!!”

 

“...너네 지금 이 상황에서 장난치는 거냐...?

 

용살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두 드래곤을 바라봤다.

 

”뭐 상관없지, 이번에야말로...“

 

다시 용살자의 팔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용을 수백 번 베어본 자만이 보일 수 있는 간결한 한 획이었다.

 

”라, 라도리..!“

 

그녀는 뭐라도 해보려 했으나 몸은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명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순식간에 끝났다.

등을 보이며 서 있는 그의 앞에는 라도리가 축 늘어져 있을 것이다.

 

라도리마저 당했다. 이젠 자신의 차례일 것이다.

하스키는 글썽이는 눈을 꾹 감으며 빨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도대체 뭘 해야 저 괴물같은 사내를...

 

”이봐, 뭘 얼빠져 있는 건가?“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떴다.

 

어렴풋이 푸른 꼬리가 보였다.

이리저리 굴러다닌 탓에 엉망이 된 꼬리였지만,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하스키의 눈에 가득 찬 빛의 색깔은...

 

 

황금색이었다.

 

 

”정말이지.. 여기 직원들은 믿음직하지 못하군, 엘드릭시르 테라피라도 받아보는 게 어떻겠나?“

 

”엘드리치 씨!“

 

”우와! 아저씨! 멋찌다!!“

 

번쩍이는 왕은 내색하진 않았으나 조그만 용의 칭찬이 꽤 흡족한 모양새였다.

 

”아니,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 여긴 언제부터 계셨는지...?“

 

하스키는 어안이 벙벙해 눈을 깜빡거리며 왕을 바라봤다.

 

”응?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가? 일단 눈앞의 상대부터 해치워야 하지 않겠나“

 

”황금 아저씨! 저 나쁜 아저씨 혼내주세요!!“

 

황금경은 짧게 미소 짓더니, 곧바로 몸에서 황금빛 광채를 강하게 뿜어냈다.

 

”신사라면, 숙녀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지“

 

두 용을 제외한 방의 모든 것들이 금빛으로 덧칠되어갔다.

벽, 침대, 천장, 바닥 모두 강렬하게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웃! 크윽.. 이게 뭔..!!“

 

전설적인 용살자에게도 그 빛은 버거웠는지 점점 뒤로 밀려갔다.

황금경이 꽉 쥔 검을 시작으로 황금색 물결이 그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어떤가? 그대는 꽤 강해 보이니 이대로 짐의 심복이 되는 것도 괜찮아 보이네만“

 

”웃..기지 마라..! 내가.. 내가 이런 잔기술에!!!“

 

”생각은 뇌수마저 금맥으로 바뀌었을 때 해도 늦지 않네, 그렇게만 되면 나와 황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데만 머리를 쓰면 될 것이니 문제가 간결해질 것이네. 양껏 버텨보시게나“

 

하스키는 놀라운 눈빛으로 왕을 바라봤다. 

아무리 드래곤족이 아니라지만 강하기로 소문난 사내를 이렇게 몰아붙이다니..

 

”황금경씨! 조금만 더 힘내세요! 이제 거의 끝나가요!“

 

”왕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네, 여유를 갖고 해야 일의 정확도가 올라가는 법이지, 지금처럼 말이야“

 

금색 물결은 벌써 그의 어깨까지 넘실거렸다. 여유롭던 용살자의 낯빛이 다급해졌다.

 

”크으..윽!.. 이건 아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군..“

 

용살자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땅에다 던졌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 듯 했으나..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그대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전설의 황금향을 지배하는 불사의 정복왕...

황금경 엘드리치“

 

마룻바닥에서 갑작스럽게 창백한 손이 솟아올랐다.

손은 황금빛 광원을 향해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를 지명했다.

 

”에엣? 와타시ㅡ?!“

 

”어..아저씨, 갑자기 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나도 모르겠구나, 다만 저 손이 가리키자 꼭 말해야 할 것 같았어“

 

빛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방 곳곳의 황금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라도리의 앞을 든든하게 지키던 두 다리가 비틀거렸다.

 

”방심..했군... 미안하다 라도리, 이봐 거기 메이드장, 뒷일은.. 맡기겠....“

 

쿵, 소리를 내며 왕은 무릎을 끓고 쓰러졌다.

앞에는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으앙! 황금 아저씨...“

 

라도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감싸 안으며 훌쩍였다.

 

하스키는 다시 급박한 상황이 왔음을 깨달았다.

 

(황금경씨가 이렇게 간단하게 당하다니... 제길, 주인님은 도대체 왜 이렇게 안 오시는 거야? 뭐라도,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아껴두었던 카드지만...이젠 끝이다.. 너도, 그리고 너도... 자, 그럼“

 

용살자가 다시 라도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상 때문인지 절뚝거리며 힘겹게 다가가고 있었다.

 

”라도리야.. 콧물 묻는다...“

 

”아저씨! 다행이다, 무사해서..쿨쩍“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라도리.. 그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단다. 항아리를 부쉈을 때 나온 카드가 있지 않았니?“

 

라도리는 어제 주머니에 카드를 찔러 놨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써야할지 잘 몰랐기에 그냥 넣어둔 카드였지만, 지금은 하스키 언니가 곁에 있었다.

 





”언니! 이거 받아요!“

 

라도리가 있는 힘껏 카드를 던졌다. 

정확히 하스키의 앞에 도착한 카드를 본 하스키의 얼굴에는...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마워 라도리.. 그래, 이 카드만 있으면...!“

 

하스키는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어깨는 비행 코끼리가 올라탄 것 마냥 무거웠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카드를 꼭 붇들고 있었다.

 

”무슨 수작이냐.. 요즘 드래곤들은 성가시군..! 얌전히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해줄 텐데 말이야!!“

 

사내가 짜증섞인 말을 마침내 내뱉었다.

 

하스키는 부서진 안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이제 저 성가신 손님을 배웅할 시간이다.

 

”저희 저택의 메이드들은.. 언제든지, 누구든지 간에... 손님에게 최선을 다하니까요!“

 

그녀는 짧게 씩 웃고는 소리쳤다.

 

”체임!!“

 

그녀의 외침에 문 가까이 복도에 숨어있던 수줍은 용이 깜짝 놀랐다.

 

”어, 언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니 전 일부러 숨으려던 게 아니고 방금 도착했는데 막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팔이 솟아나오고 그래서 들어갈 타이밍을 놓쳤달까... 지금 막 들어갈 참이었어요..“

 

”주인님은?“

 

”그게.. 자리에 안계시던데요...?“

 

”내 이 용박이 인간을 진짜.....!! 젠장, 아무튼 체임, 빨리 변신을 부탁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빨리!!“

 

”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제 용폼이라니.. 하하, 언니도 아시면서..“

 

”우물쭈물 할 시간이 없어! 이걸 봐!“

 

하스키가 그녀를 향해 카드 하나를 재빨리 보여주었다.

체임의 동공이 잠시 수축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침내 그녀는 납득한 듯이 보였다.

 

”그런 거라면.. 이 상황에선 어쩔 수 없군요 알겠어요, 그럼..“

 

하스키의 때처럼 신비한 빛이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라도리는 구석에서 빛에 감싸진 언니를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언니의 용 모습이라니, 그런 것은 이상하게 모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말을 이어가려던 그의 눈에 하스키가 내밀었던 카드의 단면이 어렴풋이 보였다.

용살자는 카드의 정체를 깨닫고 몹시 당황했다.

 

”네, 네녀석들 그 카드는 분명..!“

 

그의 시선을 눈치챈 하스키는 다급하게 말했다.

 

”저쪽에서 낌새를 감지한 것 같아, 빨리 1층에 계시는 그분을 이곳에 불러와야 해!!“

 

체임의 전환은 거의 끝나가는 듯 했다.

 

”네 녀석의 용 모습은 분명히..! 그렇군.. 나와 그 녀석을 제물로 삼을 셈인가!“

 

하스키는 분노하는 그를 향해 시선을 옮기곤 나지막히 말했다.

 

”이제와서 숨길 것도 없겠군, 그래. 아무리 당신이라도 저항할 수 없는 이 카드... ‘초융합’이라면, 1층에 계신 그분을... 불러낼 수 있겠지..“

 

”파동룡기사 드래고에퀴테스... 용케 그럴싸한 걸 생각해냈군 그래?

하지만 최강의 용살자가! 눈앞의 사악한 용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것 같나?!

특별히 보여주지, 내 최강의 기술을...“

 

말을 마친 그는 모든 정신을 손 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파’

 

강력한 힘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괴’

 

하스키는 그가 어떤 기술을 쓰려는 지 깨달았다.

 

‘검’

 

(저 기술은 위험해... 이 상황에선.. 그래!)

 

‘일’

 

항아리에서 나온 카드는 두 장이었다.

 

”서....!!“

 

”소울 테이커!!!“

 

하스키가 다급하게 외치자 카드에서 강력한 광선이 뿜어져 나와 용살자의 심장을 향해 순식간에 뻗어 나갔다.

 

”그딴 카드를 대체 왜 쓰는 거.... 크아....아악!!!“

 

그는 심장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듯이 나지막한 신음을 내질렀다.

 

”해치웠나...?“

 

”아 언니 그 대사는..!“

 

빛에 전신이 휩싸여가던 체임이 갑자기 단말마를 내질렀다.

하스키가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체임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차가운 마룻바닥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시선은 다시 용살자에게 옮겨졌다.

그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의 손아귀에 잡힌 물건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따라서 체임의 쓰러진 시체까지 바닥에 한 줄기의 타버린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래, 이런 종류의 사건을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하셨군, 비극의 방아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용들의 행동 따위는 이미 내 계산 안이다. 어떤 발악을 하더라도 이미 너희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단 말이다!“

 

하스키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너서리는 침대에 널부러져 있었고, 피루라는 여전히 찻잔에 코를 박고 쓰러져있을 것이다. 피루라는 누운 채 정문을 통해 바깥 공기를 쐬고 있을 것이고, 이젠 체임도 쓰러져버렸다.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그녀를 도울만한 자매들은...

 

”블레이더 씨,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게 세 가지 있어요“

 

”뭐냐“

 

”첫째, 저희는 메이드로써, 언제나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하는 선량한 메이드라는 것“

 

용살자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 비친 방 한구석의 침대에는 분홍색 용이 비틀거리며 앉아 있었고, 그 위에는 뿌듯한 표정의 라도리가 있었다.

침대는 정리정돈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너서리! 부탁해요!“

 

”걱정 마세요, 아픈 환자를 돌보는 게 제 일이잖아요?“

 

너서리가 체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큭! 이 조그만 녀석이 언제 정리정돈을 이렇게 말끔하게..!!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내가 있는 한 너희들 용의 힘은 사용할 수 없어!“

 

”둘째, 우리의 사랑스러운 막내에겐 아주 독특하고 다정한 친구가 하나 있다는 것“

 

황금빛 팔이 그를 향해 빛을 뿜었다.

 

”짐을 너무 쉽게 잊은 것 아닌가? 몽환포영의 덧없음을 그 몸으로 느끼시게“

 

순간 용살자의 몸에 부서지는 기계룡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는 황금경의 공격으로 검을 놓치고 말았다.

 

”이 몸이... 이 내가...!! 용에게 질 수는 없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는 다시 품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어 바닥에 던졌다.

창백한 손이 다시 파편을 튀기며 솟아올라 체임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려던 순간,

 

 

”마지막으로 셋째, 지금 모두가 계신 이 방은... 그리고 이곳의 모든 방은...

드래곤들이 일하는 ‘저택’이라는 것“

 

 

으스스한 기운이 몰려왔다.

 

 

”웃..기지 말....“

 

 

저택에는 초대한 손님들 외에도 소녀가 하나 더 있었다.



"지명자는 이번이 두 번째..."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가끔씩 메이드들의 정리정돈을 장난삼아 방해하던 소녀였다.




”체인하세요, 와라시“

 

 

 

”와끼얏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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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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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뒤로는 일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1층 객실에서 바렐로드 슈팅 퀘이사의 다키마쿠라를 안은 채 꿀잠을 자고있던 드래고에퀴테스는 자신의 은밀한 취미가 밝혀진 것에 대해 잠시 당황했지만, 난장판이 된 방과 쓰러진 버스터 블레이더, 체임을 보자 납득하고 뒷정리를 도와줬다고 한다.

 

너서리는 라도리의 부축을 받으며 방 안의 인원들을 시작으로 탕비실, 정문 순으로 직원들을 치료했다.

쓰러진 버스터 블레이더도 치료를 받고 깨어났지만 라도리는 마계의 족쇄를 잊지 않았다. 

 

몇 분 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계의 경라과 데스폴리스가 도착해 버스터 블레이더를 체포해 감으로써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저택의 주인은 3층 끝방에서 진행된 텐 사우전드 드래곤 TS 야설 낭독회 모임에서 발견되었고, 일주일 뒤 무리한 운동으로 인한 체력고갈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당일 1층에서 진행된 드래곤 자각의 선율 콘서트는 뜨거운 분위기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황금경은 뒤늦게 도착한 부하들을 시켜 보수공사를 도운다는 명목으로 며칠 동안 저택에 머물며 라도리와 함께 놀아주었다.

 

저택은 3일동안 보수공사를 한 뒤 손님들을 받으며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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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색 빛과 시끄러운 사이렌을 뿜어내는 검은 차량을 향해 용살자는 묵묵히 걸어갔다. 그의 손엔 무거운 족쇄가 메여 있었다.

마계 경찰에게 호송되어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는,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왜...이런 짓을 벌이셨나요..?"

 

용살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다시 뒤돌아 문을 활짝 열었다.

 

"용살자가 용을 잡는데 이유..."

 

"버스터 블레이더 씨!"

 

그녀는 차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그의 때 묻은 갑주를 비추어 은은하게 빛을 냈다.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떼었다.

 

"......예전에는 용을 사냥하는 게 쉬웠지"

 

마계 경찰은 분위기를 살피고는 잠시 기다려주었다.

 

"점점 어려운 상대가 나타났지만 어떻게든 돌파하며 살아갔어.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니 신기하게도 용살자가 용을 기르게 되었지"

 

그의 눈은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힘을 얻은 후 나에게 대적할 용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세상의 모든 용을 사냥할 수 있었네. 하지만..."

 

그의 손목에는 족쇄만이 감싸고 있었다.

 

"더 이상 검을 들기가 힘들더군, 왜인지는...모르겠네. 모르겠어... 해답이 필요했네.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러던 도중 초대장이 날아왔지. 용들의 연회에 용살자를 부르다니, 자네 주인 제정신인가?"

 

"아하하...저희 주인새ㄲ... 아니 주인님은 용에 관련된 거면 뭐든지 다 좋아하셔서..."

 

멋쩍은 웃음을 짓는 하스키를 잠시 쳐다본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 생각없이 용을 사냥하던 때로 한 번 돌아가 보고 싶었네.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그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몰두하며 여러 계획을 세웠지. 나름 즐거웠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고개를 숙이곤 차량 안에 묵묵히 앉아 문을 닫았다.

경찰은 일이 마무리된 듯 싶어 앞 좌석에 앉았고, 차에 시동이 걸렸다.

차가 출발하려던 찰나, 그는 마지막으로 하스키에게 말을 건넸다.

 

".....명랑하더군, 그 아이..."

 

적색 불빛은 저 멀리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쌀쌀하지만 포근한 새벽의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황금경이 치료 받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막은 게 아니야. 난입했을 때, 이미 그의 공격은 끝난 상태였네'

 

하스키는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어 쉽게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얼마 후 라도리가 그녀를 찾아 주인의 행방을 신나서 말해주었고,

그녀는 주인에 대한 뒷담화를 라도라와 가볍게 나누며 저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니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후기

추리물을 빙자한 라도리문학

웨 아무도 소설대회에 라도리를 소재로 한 글을 쓰지 않는거야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

막차 겨우탔다.

여러분 라도리 애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