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올클리어 분량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음.

블로그에 있는 글을 옮겨온 것이므로, 가독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음.


사쿠라의 각 -벚나무 숲 아래를 거닐다-


5.6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를 뜻한다.

7.0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철학논고>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저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시나리오 라이터 스카지(SCA-自)의 처녀작 <종말의 하늘>. 그리고 그것의 셀프 리메이크에 가까운 <멋진 나날들>과 주제 의식을 계승한 <사쿠라의 시>. 그리고 그 작품에 일종의 마침표를 찍은 본 작품 <사쿠라의 각>까지. 하나의 주제 의식에서 출발한 이 작품들은 작품을 거듭하며 사유를 확장하고 그 끝의 작품인 <사쿠라의 각>에서는 지난 작품들의 주제를 아울러 그 주제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내놓았다.

 

  <종말의 하늘>이라는 작품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를 통해 지난 글#1#2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동일한 사건을 네 명의 서로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며 같은 사안이더라도 보는 시야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보이며 각각이 바라보는 '세계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즉, 세계의 원형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바라보고 지각하고 언어로 구현할 수 있는 세계만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세계이며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란 것은 우리 스스로가 정의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해 낸 작품이다.

 

  그러나 그 작품에 표현하고자 한 주제는 있지만 플레이어에게 건네는 인상적인 메시지는 없다. 있는 것은 주제와 끝없는 회의주의뿐. 시대상과 맞물려 일정 부분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스카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작품을 스스로 리메이크하며 새로운 스테이지로 나아간다. 그 작품이 바로 <멋진 나날들>이다.

 

  <멋진 나날들>이라는 작품은 <종말의 하늘>에서 다루지 않았던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작품이다. <종말의 하늘>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를 '문자 그대로' 실현한 작품이라면, <멋진 나날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말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삶의 의의를 뜻한다. 그 삶의 의의를 '멋진 나날들'이라는 용어로 표현해냈고, 이 작품은 그 멋진 나날들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준' 작품이다. 그곳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의지'.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삶의 주인이 자신임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보여주었다.

 

  <사쿠라의 시>는 '멋진 나날들'에 서기 위한 스타트 라인에 선 이후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 '예술'이라는 테마로 '삶'을 표현해 냈던 작품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작품을 왜 만들어 내는 것인가? 예술을 하는 삶-가치 있는 삶-만이 의미가 있는 삶인가? 예술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술에서 진품과 위작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예술의 가치는 무엇인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에 대한 질문을 제시하고 답변한 것이 바로 <사쿠라의 시>라는 작품이었다. 이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통해 스카지는 궁극적으로는 예술과 삶, 그리고 행복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 의식의 발전은 <사쿠라의 각>에 와서 마침표를 찍는다.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주제는 바로 삶과 세계다. 예술이 주제의 근간에 닿아 있던 <사쿠라의 시>와 달리 <사쿠라의 각>은 예술을 테마로 인간의 삶과 세계를 그려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예술 그 자체가 중요한 작품은 오히려 아니게 되었다.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한 수단으로 예술을 이용한 작품이다. <사쿠라의 시>를 통해 플레이어에게 '예술'에 대한 생각을 품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예술을 덜어내어 이야기를 풀어나갈 힘이 생긴 것이라 느껴진다.

 

  그렇다면 대체 이 작품은 어떻게 삶과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걸까?


울란트의 시는 정말로 대단하다.

다른 모든 시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기에

그 어떤 의미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할 수 있는 것에 포함되어 있다.


  인용한 문장은 비트겐슈타인이 친구인 엥겔만이 보내온 시인 요한 울란트의 <에버하르트 백작의 산사나무>라는 작품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평론한 내용이다.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십자군 원정을 나갔던 군인이 전쟁에서 돌아오는 길에 산사나무의 가지를 꺾어 자신의 정원에 심는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군인은 노인이 되고 훌쩍 자란 산사나무 밑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이 시는 '도덕'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지극히 평이한 언어로 장면을 서술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시를 읽고 떠올린 정경을 통해 '도덕'이 어떤 것인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로 전하려고 시도하면 오히려 그 의의를 잃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은 논하지 않고, 단지 보여주어야 한다. 삶, 예술, 도덕, 정의와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져간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행위나 시나 그림과 같은 예술을 '보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그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이해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아름다움이 만약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말하려고 한 행위는 아름다움에 대한 모독이다.

운명이라는 신이 있다면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지.


  이 작품 역시 작중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의 모습을 통해서 삶이나 세계와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보여주는지에 대해 한 번 알아보고자 한다. (물론 그것에 비해 이것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장면도 상당히 많이 나오기는 한다. 배경지식이 부족한 플레이어를 위한 배려인지, 아니면 과욕인지는 모르겠지만.)


- 신생 유미하리 학원 미술부


  사쿠라의 각에서 두드러지는 큰 특징 중 하나는 전작 <사쿠라의 시>가 오롯이 예술가들만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였다면, 이번 작품 <사쿠라의 각>에서는 예술가들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지만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의 모습을 상당히 조명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질적인 에피소드가 2장 <전람회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에피소드에서 다루는 캐릭터들이 바로 유미하리 학원 미술부 학생들이다.

 

  전체적인 작품의 구성을 보면 1장 <도둑 까치>나 3장 <민둥산에서의 하룻밤>, <기망>, <시인의 이야기>와 4장 <나의 장식 깃털>, 5장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모두 예술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예술가가 아닌 존재에게 집중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은 2장 <전람회의 그림>뿐인데, 그렇기에 이 에피소드가 다른 이야기에 비해 겉돈다는 느낌을 받기가 쉽다.

 

  하지만 2장은 이야기 전체 줄기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쿠사나기 나오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헌신했다. 미사쿠라 린과 나츠메 시즈쿠도, 아리아 호 잉크가 된 히카와 리나도, 그리고 수단을 가리지 않던 나가야마 카나도. 하지만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고 결심한 쿠사나기 나오야가 더 높은 곳까지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었을 뿐 본질적으로 쿠사나기 나오야를 다시 일으킨 존재는 다름 아닌 '예술가가 아닌 존재'들이었다. 2장 <전람회의 그림>을 통해 쿠사나기 나오야는 다시 일어설 힘과 앞으로 나아갈 각오를 다진다.


저건 확실히 색채의 발자국이야.

지나가 버린 색채, 그 발자국.

그것이 다시 빛나기 시작하는…, 그런 작품이야.

벚나무는 매년 당연한 듯이 꽃을 피워내.

그래서 그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거지.

하지만 당연한 것은 없어. 모든 것은 기적적인 거야.

<벚꽃의 색채 발자국>이 그걸 알려줬어.

너희들과 함께 저걸 완성시켰을 때,그 작품이 다시 색채를 내뿜었을 때.

표본의 나비는 색채를 띠어 다시 날아올랐다고 생각했어.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더 이상 멈춰 섰던 게 아니었던 거야.

걷지 않았던 게 아니었던 거야.

벚나무 숲 아래를 걷고 있었던 거야.

그런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넌 조금 전 변함없네요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보일지도 몰라.

분명 그때의 난 이런 식으로 옥상에서 먼 곳을 보고 있었어.

하지만 그때와는 달라.

여기에서 이제 그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예술에 대해서는 고등학생 수준의 기초적인 지식밖에 모르던 사쿠라코에 의해 유미하리 학원 미술부는 다시 부활하고, 그런 그녀의 질문을 통해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자각했기에 쿠사나기 나오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온다 호사이는 나오야를 '다시 달리게 만든다'라고 했지만, 나오야는 그 이전부터 이미 조용히 걷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학생들을 대하면서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확립이 되고, 3장 <시인의 이야기>과 같이 교사로서의 길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지는 나오야로도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군, 이렇게 걷기 시작하는 방법도 있었구나.

나는 이 녀석들과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학생들과 함께,

교사로서 걷기 시작한다.

교장의 마음을 약간 이해할 것 같다.

교사인가……. 예술가가 아닌 교사로서…….

나는 이제 슬슬 다른 길을 걸어도 괜찮겠지.

“케이. 나는, 그 너머로 갈 거야.”


  나오야 파트에서도 다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나오야의 여러 가능성 중 '교사'로서 '멋진 나날들'을 살아가는 부분을 개화시키는 데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존재들이 바로 유미하리 미술부 학생들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앞서 말했다시피 <사쿠라의 시>에서는 전적으로 예술가의 삶만을 비춰냈지만, <사쿠라의 각>에서는 오히려 그걸 내려놓고 재능 있는 예술가만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예술가가 되는 길만이 예술적 인생을 사는 방법이 아냐. 아니, 예술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 자체가 맘에 안 들어. 표현이란 작품을 만드는 게 다가 아냐. 작품은 아무런 문맥도 없이 갑자기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그 의미와 의의를 포착하는 것 역시 작품을 만드는 것에 비견될 만큼 중요해.


재능을 타고난 화가만이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게 아니에요.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의 작품이라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창작에 성역 따윈 없어.

영혼의 무게가 작품의 질을 결정한다 하더라도 가벼운 영혼이 그린 것에 가치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예술을 바라보고 그 의미와 의의를 포착하는 것 역시 중요하고 나아가 재능이 없더라도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언급한다. 이는 예술이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목적이 아니라 삶의 수단이 되는 것을 뜻한다. 재능의 여부와 관계없이, 기술의 여부와 관계 없이 어디까지나 이들은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예술의 본질은 나와 세계, 혹은 나와 다른 누군가와 거리와 시간에 관계 없이 이어지게 하는 수단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 작품의 의미와 의의, 누군가가 감상했을 때 메시지가 전해지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예술을 향유하고 나아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에 삶을 매진한 전문가나 기술자가 아니라 삶 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다.




이 악보는 쇼팽의 왈츠 9번이에요.

일반적으론 이별의 왈츠라고 불러요.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던 쇼팽은

자신이 사랑한 여성에 대한 마음을 담아

이를 예술로 승화시켰다고들 이야기해요.

엄밀하게 말해서 이별의 왈츠는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것은 쇼팽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친 곡이에요.

그 쇼팽이 승화시킨 이 음악은 고백이라 불러야 하겠죠.

왈츠 9번은 두 가지 별명으로 불려요.

하나는 이별의 왈츠, 하나는 고백.

그렇지만 고백일지 이별일지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에요.

내가 왈츠 9번을 연주할 때 담은 생각은, 고백이니까요.

이별은 아니에요. 제가 연주하는 음악은 언제나 고백이에요.

그러니까 몇 번이라도 다시 연주할 거예요.

저는 왈츠 제9번을 고백의 왈츠로 연주할 거예요.

사키자키 님도 그럴 테죠.


  이런 '예술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찾아낸 의미 있는 삶─멋진 나날들─들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2장에서 스즈나가 사쿠라코에게 조언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는 작품 전체를 놓고 보아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지난 작품 <멋진 나날들>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런 멋진 나날들에 이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의지다. 스즈나를 비롯한 유미하리 미술부 학생들, 더 나아가자면 미사오나 토마스 같은 조연들 역시 자신의 한계를 긍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의지를 보여 '멋진 나날들'을 이룩할 수 있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쿠라의 각>의 또 하나의 매력이다.


“린에게 안부 전해 줘. 나는 여기 있다고…”

“린은 이 땅에 사로잡힌 너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겠지.”

“그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곳에 아는 사람이 있단 건 굉장히 중요해. 걔도 세계구급으로 활약 중이잖아. 가끔은 돌아와 봐. 그때는 술이나 한 잔 하자.” “전해 둘게. 아마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짓겠지만.”

“아닐걸? 좋아할 텐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변경에 자리한 남쪽 섬에서 죽은 남자의 작품명. 아니 서명인가.”

“화가 폴 고갱은 태어난 고향 프랑스에 돌아오지 않고 변경의 땅에서 죽었지.”

“그러니 더욱 그렇지.”

“더욱 그렇다?”

“난 린이 그렇게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갱은 불행한 놈이야. 돌아갈 땅이 없었지. 그러니, 저 머나먼 남녘 땅으로 도망쳤어. 린에게 그런 삶은 어울리지 않아. 제비는 남쪽으로 날아갔지만 언젠가는 돌아와. 이 땅에.”


  다만 작품 전체적인 구조면에서는 이 작품의 시나리오 방향성이 중간에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3장까지만 하더라도 '교사로서의 나오야'가 새로 걸어 나가는 전개를 구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단순히 신생 유미하리 미술부의 존재로 추측한 것이 아니라 전작 <사쿠라의 시> 6장에서 프리드먼과의 대화 속에서 나오야가 린에게 있어 돌아올 장소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남긴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기존 플롯은 신생 유미하리 미술부와 함께 교사로서 활약하며 <벚꽃의 색채 발자국>과 같이 인과 교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고독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부정하고 삶과 더불어 함께하는 예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잡혀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추측된다.

 

  특히 2장 마지막에는 케이에게 독백으로 '교사로서 그 너머를 걷는다'는 표현을 쓰고, 3장의 경우는 아예 교사로서의 길을 포기하는 경우 배드 엔딩으로 빠진다. ─물론 조건을 달성하면 교사로서의 길을 포기하여 현재의 트루엔딩, 4장과 5장으로 이어지지만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해 보면 작품의 시나리오 방향성 자체가 중간에 크게 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교사로서의 쿠사나기 나오야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쿠사나기 나오야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실제로 발매 이후에도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그런 방향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긴 했지만. 기존 플롯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선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 토리타니 일가와 나카무라 레이카


  토리타니 일가─토리타니 마코토, 시즈루, 사키─와 나카무라 레이카의 경우 예술에 발을 들여다 놓았지만, 전적으로 예술에 매진하는 것이 아닌 예술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 특징인 캐릭터들이다. 토리타니 사키는 예술가를 지원하는 교육으로, 마코토는 예술계 출판업으로, 시즈루는 본업을 커피로 위장한 채 뒤에서 도자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것으로, 마지막으로 나카무라 레이카는 그런 시즈루의 예술에 새로운 비평을 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이 캐릭터들은 예술계를 맴돌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캐릭터들이 메인 시나리오로 부각되는 3장 <기망─Kibou─>은 예술에 헌신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을 동경하지만 닿을 수 없으며, 그런데도 거기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위조품에는 위조품의 진실이 머문다.

진짜 작품과의 차이는 오직 그 가치가 때와 장소에 따라 크게 바뀌는 것뿐이다.


  토리타니 시즈루와 나카무라 레이카의 관계에서는 '예술품에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읽어낼 수 있다. <설경작도화병>은 토리타니 사키에게서 출발한 모네의 2번째 까치를 모티프로 한 위작이다. 세간에서는 단순히 '위조품'으로 취급받아 가치가 없으리라 추정되는 이 제품을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고, 그 아름다움에 이름을 붙여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서사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읽어낼 수 있는 메시지는 사실 작품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메시지와 공통된 메시지이다. 바로 '아름다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신이 부여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설명'이라고 덧붙이며 예술에 있어 비평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사람에겐 각각 정해져 있는 한계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여러 삶의 방법을 생각하며 살아가지.

모두가 만화 속 히어로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은 쉽게 굴러가지 않을 거야.

한계가 보이기 때문에 사람은 여러 가지 삶의 방법을 취하니까.

어릴 때는 그게 보이지 않아──.

그 시절엔 누구나 자신의 힘은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을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하지.

열중하며 읽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처럼 그런 히어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지.

닿지 않는 달에 계속 손을 뻗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야.

보름달, 밤하늘을 아름답게 비추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일지도 몰라.

하지만 손안에 있는 6펜스도 나쁜 건 아니야.

달은 아름다움이자 광기. 그리고 6펜스는 속세이자 동시에 우리가 잘 아는 일상이니까.

광기에 물들여진 아름다움만이 세계를 구하는 건 아냐.

왜냐면 사람은 아름다움이 아닌, 손에 쥐어진 돈으로 살아가니까.


  본작의 마코토 루트는 <사쿠라의 시>의 마코토 루트와 마찬가지로 '달과 6펜스'를 모티프로 그대로 재사용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인데, 이는 아소 에이가 시나리오를 작성했던 전작 마코토 루트의 어레인지 정도로 보는 것이 옳겠다. 마코토가 보여주는 테마는 '6펜스', 즉 현실이다. <사쿠라의 시>나 역사에 남은 화가들을 보더라도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현실과 동떨어지게 된다. 이는 작품 내에서도 끊임없이 인용되는 '빈센트 반 고흐'나 '폴 고갱'과 같은 위대한 화가들 뿐만 아니라 작중에서는 나츠메 케이나 미사쿠라 린, 혼마 미스즈와 같은 캐릭터들의 모습으로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런 삶만이 옳은 삶인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삶의 한 부분이다.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플레이하다 보면 예술만이 숭고하며, 의의나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렇기에 이런 에피소드는 거기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한다. (물론, 시나리오의 임팩트 상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지에는 의문은 있다.)


  마찬가지로 쿠사나기 나오야 역시 예술을 하는 삶만이 삶의 정답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의 본질이 예술과 맞닿아있다고 하더라도이다. 전작 <사쿠라의 시>의 마코토를 위해서만 그림을 그리는 쿠사나기 나오야와 그녀를 위해 기망(幾望, 既望)의 형상을 본뜬 반지를 준비하는 쿠사나기 나오야 역시 정답이다.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닌,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가 창작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여러 작품에서 그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와 의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앵일광상> 그림 한 점에 구원받았지만 두 천재에게 도달하지 못했던 토리타니 마코토도,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쿠사나기 나오야도 의미와 의의를 가진다.


  이렇듯 3장 <기망>은 행복을 보름달, 불행을 그믐달로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는 삶을 달의 주기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기망(幾望)도, 기망(既望)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달은 차오르고 보름달이 된다. 쿠사나기 나오야의 말 대로 행복과 불행은 우리 삶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요소이니 행복을 잃는 것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불행을 겪을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희로애락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예술의, 그리고 삶─멋진 나날들─의 본질인 것이다. 마치 불교의 교리를 보는 듯 한 메시지이다.



세계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아름다움.

그런 것을 쭉 곁에서 보고 있다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진리의 아름다움을 좇는 자의 앞에 있는 건, 대체 무엇일까───.

예수를 팔아버린 남자는, 대체 왜, 얼마 되지 않는 은화를 위해 신의 아들을 판 것일까.

세상을 구원할 신의 아들, 온갖 세계의 진리를 지닌 자의 곁에 있으면서

왜 그 남자는 예수를 팔아야만 했던 것일까?

올바른 구원이라는 것을, 얼마 정도의 사람이 바라는 걸까…….

꽉 찬 보름달은 분명 진리겠지.

하지만 진리 같은 건 필요 없어.

진리에서 조금은 벗어난 정도가 좋다고 생각해.

기망(幾望)의 빛으로도 충분해.

기망(既望)의 빛으로도 충분해.

부족하기 때문에야 말로 사람은 거기에서 희망을 볼 수 있어.

완전한 것에서 희망을 찾는 행위는, 마음에 광기를 불어넣는 일.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12번째 사도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거야.


  또한 오히려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서툰 사람에게는 진정한 아름다움보다 다소 부족한 아름다움 쪽이 더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도리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아름다움이 그 자체로 완전한 미라면 모든 인간을 매혹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에게 있어서 그런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3장의 미스즈 루트에서 미스즈가 '극한까지 갈고닦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라고 하는 예술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같은 루트에 등장하는 미사오에 대한 나오야의 평인 '창작에 성역 따윈 없어. 영혼의 무게가 작품의 질을 결정한다 하더라도 가벼운 영혼이 그린 것에 가치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어'에 부합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 전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술 작품의 절대성이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읽어내는 의미와 의의에 집중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겠다.


- 온다 네이와 온다 호사이


  어중간한 재능을 타고 난 예술가 포지션을 다루고 있는 캐릭터가 온다 네이와 온다 호사이다. 이 두 캐릭터가 다루는 가장 핵심 질문은 바로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다. '미야자키'에 얽매여 그 타이틀을 미스즈에게 빼앗겨 그녀에게 복수하는 길만을 걷는 네이와 재능에 매몰되어 허상에 가까운 진정한 재능만 좇게 된 호사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재능과 예술, 진정한 아름다움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그 에피소드가 바로 3장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이다.



다른 누구를 실망시키더라도 괜찮아.

하지만, 예술과 관련되는 일에 한해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린다면

케이의 영혼만큼은 실망시키지 마.

너는 말했어. 그 녀석의 무덤 위에 올려진 그림 도구를 받았다고.

그 독특한 향도 좋지만 무엇보다 색이 훌륭하고,

나아가 개체마다 색의 차이가 지금까지 본 것보다 더 복잡하고 아름답다고.

처음으로 만져 본 유화 튜브의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너는 그 뒤에 들어버린 온다의 혈통의 비밀이나

나츠메 케이나 미야자키 하카이의 이야기로 머릿속이 가득 차 버려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만 거야.

그때, 네가 케이의 묘 앞에서 케이에게 받은 것은

자신의 혈통의 비밀 같은 게 아니라 유채의 아름다움이잖아.

색채를 낳는다는 행위, 붓으로 그린다는 행위.

그리고 작품에 네가 생각하는 진실을 머물게 한다는 행위.

그것들, 가장 단순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그 아름다운 행위들을 너는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그 순간에 분명히 케이에게 받았던 거야.

회화를 그린다는 것, 예술을 연주한다는 것을.

영원의 상 아래에서 바라보는 방법을.


  온다 네이의 4색각은 분명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기술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야자키 미스즈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이는 단순히 재능의 격차로만 분석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온다 네이의 이야기인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도, 기술도 아닌 내가 바라본 세계의 진실을 작품에 깃들게 한다는 행위인 것이다.


  이에 이르게 하는 것은 바로 전작 <멋진 나날들>에서 강조했던 의지다. 스스로의 의지로 세계의 진실의 단편을 회화에 새기는 행위야 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기술도, 재능도 아니다. 이들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이룩하기 위한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떤 마음을 담아 그려내는가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란 그런 마음을 담은 작품이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순간적으로 그 사람과 이어지는 그 순간 체현된다고 작품은 시종일관 묘사해내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온다 네이라는 캐릭터가 좌절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나아가 이는 단순히 예술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의 삶에 대한 자세에도 적용시켜 나갈 수 있다. 사람의 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본질에 있는 것이며 나머지들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어떤 형태의 삶을 살 것인가를 천명하는 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영역에서 살지 않는 인간이, 사람에게 감동할 리가 없잖아!

사람이니까! 사람의 아픔을 알 수 있기에, 사람에게 감동하는 거야!

모든 일을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해.

호사이 선생, 당신은 확실히 비뚤어졌어. 당신의 눈은 흐려.

어쩌면 케이를 죽인 것은 나일지도 몰라.

또 네이는 미야자키 미스즈라는 괴물에게 매료되었을지도 몰라.

그건 부정할 수 없겠지. 그렇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어.

파고, 또 파고, 또 파도 손에 닿지 않고.

아무리 파더라도 눈앞의 목표는 계속 땅 아래로 파묻힐지도 몰라.

하지만 파는 것을 그만두는 걸로, 그런 안이한 결단으로

손에 들어오는 건 보물 같은 게 아니야.

페트로가 이워시를 죽여서 보물을 손에 넣었다고?

아니, 달라. 그 희곡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공물을 바쳐서 신이나 악마의 도움을 받는 그런 간단한 방법으론

진정한 보물 같은 건 손에 들어오지 않아.

자신의 손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파고, 또 파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계속 파서 나아가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보물 같은 건 손에 들어오지 않아.

케이는 페트로도 이워시도 아니야.

그 녀석은 끝까지 손에 닿지 않는 보물을 향해 파고 또 파서 앞으로 나아갔어.

그 결과가 그런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의 비유는 역시 너무 싸구려 같아.

피로 예술이 태어난다고? 분명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제물로 태어나는 것처럼 간단한 건 또 아냐.

예술의 피는 칼로는 생겨나지 않아.

예술은 화가의 생명과 피에 의해 그 붓으로 새겨지는 거야.


  온다 호사이 역시 재능에 절망하여 망가진 예술가다. 미스즈나 나오야를 만나지 못한 온다 네이가 겪었을 미래에 해당하는 캐릭터인데 결말부에 온다 네이로 인해 온다 호사이가 구원받는 구조로 이야기가 짜여 있어서 그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쿠사나기 켄이치로라는 재능에 짓밟힌 온다 호사이는 스스로 예술을 만들어 내는 일을 단념하고 훌륭한 재능이 좋은 예술을 만들어 내는 행위 그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온다 호사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테마는 바로 '재능'이다.


  예술에 있어서 진정한 재능이란 무엇인가? 재능은 전부인가? 호사이는 스스로의 예술론에 입각해 재능이 예술 작품에 있어서 절대적이며 '피'나 '재능' 없이는 훌륭한 작품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를 케이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설명해 나가고, 이에 대한 반박을 쿠사나기 나오야가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이야기에 갈림길이 추가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선 온다 네이의 에피소드를 비롯해 케이나 나오야, 나가야마 카나 등과 같은 캐릭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어서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 그 중요한 것을 <사쿠라의 각>은 '아름다움이 스스로 곁에 다가오는 순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 예술가로부터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예술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게 호사이 선생님이 말했던 '아무리 파도 닿지 않는 재보' 같은 거죠.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기술을 갈고닦아도 '아름다움'이라는 재보에는 손이 닿지 않아요.

하지만 호사이 선생님은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닿지 않는 이유란 재능의 차이도, 제물과 같은 피가 모자란 것도 아니에요.

예술이란, 예술이 스스로 곁에 다가오는 순간───.

그 순간, 처음으로 자신의 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움이 스스로 다가오는 순간.

그건 긴 고뇌 끝에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순간이죠.

간혹 매우 드물게 처음부터 나타나는 일도 있겠죠.

하지만 그 예술이, 그 사람의 곁에 쭉 함께 있는 일은 없어요.

그러니 예술과 함께 사람은 긴 고뇌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고뇌 없는 예술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공예품에 불과하겠죠.


  이 문구는 오프닝 무비에도 등장할 만큼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 문구인데 <사쿠라의 각>의 주제를 한 구절로 압축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수없이 많은 노력을 거듭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재능을 갖고 있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역으로 그것이 다가온다는 표현으로 설명해 버린 것이다. 고흐가 생을 마감하고, 고갱이 머나먼 타히티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마저도. 수없이 많은 노력과 재능, 그리고 고뇌가 겹쳐지는 순간 아름다움과 예술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예술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이나 재능을 넘어서서 고뇌 속에서 세계의 진실의 편린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의지다.


회화는 피로 그리는 것만이 아니며,

영혼의 조각만이 예술인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조카딸의 붓은 그걸 그에게 알려준 거지.

예술이란, 즉, 단지 기원과 같은 것이라는 걸.

아름답게 있길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라는걸.


  <사쿠라의 각>은 두 명의 캐릭터를 통해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로 나츠메 케이와 쿠사나기 나오야의 존재다. 그리고 이 둘의 모습을 통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에 감화되고 앞으로 나아갈 계기를 얻는다. 그야 말로 인과 교류의 예술인 것이다. 온다 호사이 역시 이에 감화된 온다 네이를 통해 구원받는다. 나오야의 직접적인 말에도 감화되지 못한 온다 호사이가 조카 딸인 온다 네이의 작품에서 구원 받는 것. 그야말로 언어의 힘도 뛰어 넘는 예술의 힘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현실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깨달음과 구원을 얻는 식으로 이야기가 짜여져 있다. 나츠메 케이나 쿠사나기 나오야와 같은 주연은 물론이고, 온다 호사이나 나카무라 레이카와 같은 악역, 조연들도 말이다.


- 과거 유미하리 미술부


  사실 전작 <사쿠라의 시> 플레이를 마쳤을 당시만 하더라도 내가 생각했던 <사쿠라의 각>의 플롯은 직접 플레이한 것과는 완전 다른 방향으로 예상했었다. 당시 핵심이었던 5장 <행복한 왕자와 그외 이야기들>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것은 '유미주의'를 표방한 린과 '상대주의'를 표방한 나오야의 대립이었고, 여기에 6장에 가서는 나가야마 카나가 합세하여 '포스트 모더니즘' 까지 제시되었었기에 필연적으로 <사쿠라의 각>은 이런 3대 미학의 대립이 작품의 근간을 이룰 것이라고 예상했다. 거기다가 이번 작품 오프닝 첫 머리에는 린의 뒤에 배경으로 라파엘로의 <삼미신>까지 등장했으니, 각각의 미의 여신에게 세 가지 관점의 미학을 대비시킨 것인가?하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신났었으니.


  하지만 실제 작품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다. <사쿠라의 각>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예술, 그 너머의 이야기다. 이는 스카지가 전작 <멋진 나날들>에서 다뤘던 것과 같은 삶 그 자체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소재는 몹시도 중요하고 예술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설명하기에는 이 방법은 몹시도 적절하고, 그렇기에 내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갔지만 오히려 만족스러운 전개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이런 전개 방식을 택하여서 잃은 것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전작의 중요 캐릭터들의 입지였다고 생각한다. 전작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대가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사쿠라의 시>와 달라진 <사쿠라의 각>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대표적으로 희생된 게 바로 미사쿠라 린, 나츠메 시즈쿠, 히카와 리나 같은 전작의 주요 히로인들이다. 



  미사쿠라 린과 나츠메 시즈쿠, 히카와 리나는 쿠사나기 나오야에게 받은 은혜를 되갚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통째로 바쳐 헌신한다. 이에 대한 암시는 전작 <사쿠라의 시> 5장에서 미사쿠라 린과 쿠사나기 나오야의 대화에 남아 있는데, 스크립트 상으로는 '………'로 기록되지만 미사쿠라 린이 나오야의 말에 사실은 자기도 동의한다고 혼잣말을 하는 대목이 있다. 거기서 미사쿠라 린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체현하는 것은 스스로가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또한 약한 신을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야를 일어서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츠메 시즈쿠 역시 플레이 타임 내내 나오야에게 무언가를 돌려주려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전반적으로 이런 전개에 대한 암시는 충분히 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 암시에 걸맞은 장면이 나왔는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요소가 조금 남아 있다. <사쿠라의 각>의 주제 의식 부각을 위해 쿠사나기 부자나 나츠메 케이, 혼마 미스즈 같은 캐릭터들은 기존 작품과 비슷한 포지션으로 남았지만 그 외 예술가 캐릭터들은 존재감이나 비중이 심각하게 낮아졌다. 비중이 낮아진 것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캐릭터 취급이 좀 엉성한 면이 있다. 나츠메 시즈쿠는 대사조차 얼마 없고, 그마저도 흘러가는 대화 정도였다. 미사쿠라 린이나 히카와 리나는 각각 최종보스와 중간보스 격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묘사나 스크립트가 본래의 캐릭터성을 드러내는 데는 많이 부족했다.



노력은 배신한다. 간단히 사람을 배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다음의 말을 아는 사람은 적다.

‘재능은 자신을 배반한다.’

‘노력은 자신을 배반한다.’

그 말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야박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재능은 사람을 배반한다.


  특히 히카와 리나가 그중에서도 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다. <사쿠라의 각>의 주제에 가장 크게 희생된 캐릭터다. 나가야마 카나의 활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히카와 리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장면만 보여주었다. 특히나 이 캐릭터가 쿠사나기 나오야를 일으키기 위해 10년 동안 아름다움에 헌신한 캐릭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10년의 노력과 시간과 열정이 단 하루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 또한 <사쿠라의 각>이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바로 '재능도 노력도 배신한다'라는 점. 히카와 리나가 단순히 재능이나 노력에만 의존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히카와 리나의 사례만큼 이 테마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이 작품에는 달리 없다. 다만 전작의 팬의 입장에선 이러한 취급에 안타깝거나 혹은 분노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더라도 안타깝게 묘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담담하게 카나에게 전부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은 좀 아쉬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보가 흘러넘치면 흘러넘칠수록 본질적으로 바보가 돼.

시장의 본질을 잡는 데는 정보나 지식 같은 고찰은 필요 없어.


  카와치노 유미 역시 조명이 좀 이상하게 된 캐릭터인데, 카와치노의 캐릭터 디자인이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나오야와의 H신은 굳이 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스카지는 기존에 <사쿠라의 시>에서 ZYPRESSEN과 Merchen 루트가 왜 그런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미소녀 게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작법까지 깨가면서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에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나는 그 행위가 매우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카와치노 유미라는 캐릭터가 이렇게 형성된 이상 나오야와의 루트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렇기에 Merchen 루트는 리나와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도 꿈같은 이야기로 결말을 맺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 와서는 이유가 어찌 됐건 이런 장면을 넣은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남성성에 이상하리만치 거부감이 있는 유미가 그 이상의 가치인 '리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리나가 좋아하는 나오야'를 더럽히기 위해서 그런 행위를 한다? 이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리나에 대해서도, 유미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야기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행위였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아쉬웠다. 미소녀 게임 작법을 위해서였다고 이야기하더라도, 결말이 그래서야 어쩌라고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그나마 잘 부각한 점은 예술이 아닌 영역, 주식에서 어떻게 보면 삶과 예술에 관한 태도와 유사한 무언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시장의 본질을 잡는 데는 정보나 지식 같은 고찰은 필요 없다는 대목은 마치 예술에서 재능이나 노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과 스스로의 사고가 영원한 베타판임을 끊임없이 자각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가 삶에 대해 지녀야 할 태도와 같은 무언가를 전달한다. 이는 작품의 주제에서 벗어난 묘사가 아니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그것의 본질을 잡는 것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아가 삶이라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대하는 태도 면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다만 분량상 아쉬운 점은 이걸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는 점과 흘러 지나가듯이 생략된 부분 정도일까.



그러니까 저는 이제 현역이 아니라니까요.

인생의 도중에 조금 그리는 정도라면 가능하지만,

인생 그 자체를 걸어서 회화에 매진하는 일은 이제 없어요.

일상과 함께 있는 것이 저의 회화.

그러니까 저는 이 마을에 있는 거예요.


  미사쿠라 린의 경우에는 대접이 나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작품의 본질적인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는 포지션에 있다. 이는 작품 내에서 미사쿠라 린이 직접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데, 진정한 미의 체현이라는 수식어가 달리던 미사쿠라 린이 인생을 걸어 예술에 매진하지 않고 일상과 함께 하는 것이 자신의 예술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이다. 이 대목이 곧 이 작품이 이야기하는 큰 주제 중 하나인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예술'을 잘 표현하는 부분이다. 진정한 예술가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삶의 편린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넌지시 이야기하는 점에서 주제 의식면에서는 좋은 포지션을 부여받은 캐릭터다.


  하지만 문제는 캐릭터의 소모 방법에 있다고 생각하는 데, 미사쿠라 린은 철저히 쿠사나기 나오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다. 이는 전작 <사쿠라의 시>에서 겪은 일련의 사건이 크게 작용했는데, 복선이 충분히 깔려 있어서 이러한 전개가 납득이 가는 면이 있지만 주인공인 쿠사나기 나오야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전개가 아닌 미사쿠라 린은 이미 모든 내용을 깨달은 상태에서 나오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만 행동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물론 <사쿠라의 시>가 미사쿠라 린을 위해 희생한 나오야의 이야기라면 <사쿠라의 각>은 반대라는 점에서 대구를 이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쿠라의 각>을 하나의 작품으로 놓고 보았을 때 비중이나 분량 면에서 팬이라면 아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츠메 시즈쿠는 미사쿠라 린의 취급에 더해 오로지 미사쿠라 린의 보조 역할만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특히 아쉬운 지점이다. 두 캐릭터를 하나로 묶어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스포트라이트가 미사쿠라 린에게 쏠렸다는 점에서 취급이 특히 아쉽다. 하쿠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주제 의식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코스트나 역량이 모자랐던 걸까. 팬디스크를 통해 과거 유미하리 미술부의 캐릭터들을 조명할 생각이 있는 것 같지만 단일 작품의 완성도를 생각했을 때는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 혼마 미스즈와 나츠메 케이


  <사쿠라의 각>은 분명 쿠사나기 나오야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비중을 놓고 보자면 죽음으로 이야기에서 리타이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주인공은 나츠메 케이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로 비중을 많이 할애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혼마 미스즈'나 '쿠사나기 켄이치로' 같은 타입의 예술가도 조명했다는 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다. 작품 전체에서 완성도가 가장 높은 부분을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4장 Mon panache!를 고를 것이다.


  이는 내가 전작에서 비판했던 지점 '나츠메 케이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캐릭터'라는 부분을 해소해 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과거 나츠메 케이라는 예술가가 탄생하기까지의 배경을 다루면서 나츠메 케이의 캐릭터성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 과정에서 혼마 미스즈나 쿠사나기 켄이치로 역시 아름답고 멋지게 묘사되면서 이야기 전체적으로 근사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점이 특히 훌륭하다.



희로애락 그 모든 것을 사랑해라.

너는 괴로움을 너무 사랑했어.

분명 괴로움은 예술에 있어 중요한 과정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돼.

예술을 알려면, 모든 감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재미있을 때는 웃고,

화날 때는 분노하고,

슬플 때는 울고,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해라.

맛있는 밥을 먹고 제대로 자라.


  좋은 스승은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 채 뒤바꾸기도 한다. 나츠메 케이와 쿠사나기 켄이치로의 관계가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술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일정 부분은 그러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갱이나 고흐와 같은 거장들 역시 그런 고통 속에서 피어난 예술가다. 하지만 예술이란 분명 고통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표현해 내는 것 역시 삶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쿠사나기 켄이치로는 그런 중요한 사실을 나츠메 케이에게 알려 준다.


  나츠메 케이는 뛰어난 재능을 안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일반적인 삶과 다른 기구한 운명을 걷게 된다. 이 때문에 나츠메 케이에게 예술이란 괴로움이자 동시에 삶의 돌파구라는 비틀린 무언가가 되었다. 그런 케이에게 켄이치로는 괴로움만이 아닌 희로애락 그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한다. 예술이 삶의 전부가 아닌 인생의 즐거움 속에 예술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베스파를 타고 산과 해안, 여러 거리를 넘으며 케이에게 전해주는 데 이 장면이 <사쿠라의 각>을 넘어 <사쿠라의 시> 시리즈가 표현하는 주제 의식을 가장 아름답고 근사하게 표현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베스파를 타고 산을 오르고, 해안을 달리고, 여러 거리를 넘어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숲을 지나자 산길에서 바다와 거리가 보였다.

끝없이 계속되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을 보고 지구는 둥글구나! 고 생각했다.

켄이치로는 새롭게 단 스피커로 커다란 음량으로 락을 들었다.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음량.

하지만, 산이나 바다는 너무나도 넓어서 이 커다란 음악을 전부 삼켜버리고 만다.

내가 얼마나 격렬한 음악을 듣더라도, 고요하게 모두 지워버린다.

음악이 사라져 가는 앞에, 풍경도 같이 사라져 갔다.

흐르는 경치와, 흘러가는 록.

그것은 서로 다른 세계를 보는 방법처럼 느껴졌다.

풍경과 음악이다.

풍경도, 음악도 흘러서 지나간다.

각각이 서로 다른 감동을 내게 준다.

그것들은 엄청 닮았지만, 또 전혀 달랐다.

나는 켄이치로가 말했던 2가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켄이치로의 말은 어렵고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켄이치로가 말했던 세계를 바라보는 2가지 견해란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흐르는 풍경, 울려 퍼지는 기타.

그것은──. 세계와 선율.

그 차이는, 아마 음절과 소리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너무 인상적인 장면이어서 나도 당장 베스파를 사서 밖으로 뛰쳐나가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들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인용하며 베스파로 달려 나가는 길은 분명 텍스트와 그림뿐이었지만 내리쬐는 햇살, 해변의 냄새, 몸을 스쳐가는 바람, 지나가는 풍경과 음악, 시간의 흐름과 같은 감각이 안에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좋은 작품이란 감상자의 내면에서 작품의 메시지와 작가가 보는 정경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작품의 주제에 너무나도 부합하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장면을 플레이하는 내내 마음속에 행복감이 치솟아 올랐다.


  켄이치로는 케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이를 화면 너머에 있는 감상자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구성하려고 노력한 덕분인 걸까? 아니면 단지 내가 감수성에 취해있었던 것뿐일까. 그 답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삶에서 중요한 메시지가 케이에게도 내게도 전해졌다는 점이었다. 세계의 기적을 그려낸다는 것, 연주해 낸다는 것이 삶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 지를 말이다.


너의 붓은 록이야!

디킨슨조차 맨발로 도망칠 정도로, 네 그림은 쾅쾅 울리는 록이야!

그러니까 연주해!

여러 가지, 지금이라고 하는 기적을!

세계의 기적! 지금이라는 기적! 너라는 기적을!

하지만 곧바로 사람은 그 기적을 잃지.

존재의 기적을 잊어.

그러니까 연주해!

세계의 끝에 도달할 정도 쾅쾅 연주한 음악으로, 이 기적을 새기는 거야!

여러 세계에! 여러 사실에! 여러 마음에!

세계의 기적을 연주해!


  그 결과 케이는 허물을 벗고 진정한 예술가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세계의 진리의 일부를 그 과정에서 붙잡아낸 것이다. 감정 표현이 서툴고, 화를 내지 않고, 즐거워할 수 없이 그저 괴로워만 하던 소년은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화를 낼 수 있게 되었으며 진심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나츠메 케이는 '허무를 발견한 후에 아름다움을 발견한 나이지만, 그것보다 더 나아 후에는 허무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내 곁에는 아름다움만이 남았다.'라고스테판 말라르메의 말을 비틀어 인용하여 표현한다. 삶의 기적을 회화로 표현할 수 있게 된 나츠메 케이는 나오야와 친구가 되고 더는 괴로운 예술이 아닌 삶 속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예술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분신처럼 보이는 혼마 미스즈를 만나게 된다.



“며칠 전부터 보고 있었지?”

“네, 알고 있었던 건가요?”

“그거야 알지. 나는 시선에 민감하니까.”

“그건 놀랍네요. 저는 기색을 지우는 걸 잘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이야. 네 시선은 상당히 날카로우니까.”

“아뇨, 세계에서 저를 찾아낸 것은 당신 정도뿐이에요.”

“그래?”

“네. 나는 이 세계에서 언제나 미아가 되었어요. 왜냐면 이 세계는 마치 모든 것이 텅 빈 듯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렇구나. 허무를 발견한 후에, 나는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허무?”

“내가 지금, 얼마나 맑고 드높은 영역에 이르렀는지는, 당신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겠지…….”

“뭐예요 그건?”

“몰라! 지금의 내겐 너무 어려워.”

“그렇게 말해도, 제가 곤란해요.”

“그렇지. 하지만 뭔가 근사하잖아. 지금 이 말.”


  쿠사나기 켄이치로와 나오야에게 구원받은 케이는 어릴 적 자신과 똑같아 보이는 혼마 미스즈를 발견하고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받았던 것을 건네주려고 한다. 이는 구원과 선의의 연쇄다. 이러한 연쇄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켜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그런 면에서 신 캐릭터인 혼마 미스즈의 조형이 상당히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켄이치로에게 받았던 것처럼 케이는 미스즈를 데리고 베스파를 타고 훌쩍 떠난다. 그리고 그가 받았던 것처럼 그녀에게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지 차근차근 알려주게 되는데, 이를 통해 이 작품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거듭 강조한다. 진정으로 훌륭한 예술에 이르는 길은 예술에 있지 아니하고, 삶 속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진정한 예술 역시 목적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날, 나는 이 녀석과 만났다.

상처투성이로 서 있던 소녀. 옷은 더러워지고, 생채기 투성이.

그런데도 굳세게,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고 단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눈에는 통찰의 날카로움이 두드러졌다.

그것은 그 무엇에게도 유혹당하지 않고 강하게 땅을 딛고 서는 시선이다.

그러니 미스즈가 우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 소녀는 나보다 더 아득히 강하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으니까.

슬픔으로 그 눈동자가 흐려지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꿰뚫는 그 깊은 눈동자에서 지극히 평범한 눈물이 흐른다.

너덜너덜하게 복받쳐오는 슬픔에 물기를 띈 눈동자는 아마 그녀를 약간 정도 세계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가끔씩은, 세계가 눈물로 희미해지는 편이 좋다.

언제나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닥에서 표층을 올려다볼 필요는 없으니까.

울고, 울고, 눈동자를 흐리게 하며, 심연도 표층도 바닥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아도 좋다.


  미스즈에게 예술을 전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 짜내 자신만의 예술을 세상에 남긴 케이는 미련 따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본인의 삶을 '행복했다'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케이의 삶의 궤적을 통해 스카지는 '멋진 나날들'을 이룩하는 방법을, 삶의 의의를 그려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바로 '행복하게 살아라!'는 명제 말이다.


  반면 작품 외적인 의의를 떠나서 내적인 이야기를 바라본다면 케이의 죽음은 서사적으로 큰 충격을 자아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캐릭터들이 슬퍼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슬퍼한 캐릭터가 바로 쿠사나기 나오야와 혼마 미스즈일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이 자아내는 이야기 역시 예술의 본질의 일부분을 다루고 있다.



  혼마 미스즈 개별 루트인 2-1장 Der Dichter spricht는 세계와 그 속에 있는 나와 타인, 그리고 아름다움을 다루고 있다. 이는 전작 <사쿠라의 시>에서 마지막 장, 미사쿠라 린이 떠나기 직전 나오야와 다루었던 미학의 대립에서 다룬 부분이 있는 부분이다. 미스즈 루트에서는 이를 좀 더 확장하여 다루고 있는 데, 바로 '타인'이라는 개념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나'와 '타인'은 서로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그런 관계다. 왜냐하면 나라는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세계가 단 하나의 존재로 성립된다면, 그 속에서 '나'라는 개념은 태어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나'라는 개념은 '타인'이라는 개념이 있어야지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홀로 태어나, 그대로 허무로 자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못하는 유아는 적절한 영양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몇 년 살지도 못한다.

자신 이외의 ‘누군가’의 말이 없다면, 사람은 죽는다.

‘누군가’라는 존재가 있기에 나의 세계가 형성된다.

사람은 고독하게 홀로 태어나 그리고 홀로 죽어간다.

그 사실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타인의 존재가 없으면 나라는 세계는 형성되지 못한 채 썩어 사라진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유아를 둘러싸는 침대의 촉감, 집의 냄새, 어머니의 웃는 얼굴, 다정한 말. 이와 같은 모든 것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야 말로 나라고 하는 존재가 형성된다.

나라는 존재는 언뜻 닫혀 있는 것 같지만 세계에 대해서 열려 있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다.

세계의 한계는 나의 한계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세계와 나는 마치 순환하듯 동일화한다.

그러니 세계는 내게 속하지 않는다.

예술의 의의는 그 점에 있다.

우리는 온갖 장소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장소를 발견한 나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머문다는 것은 세계가 아름다움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나에 의해 초래된다.

즉 아름다움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예술 작품은 세계에 속하지만, 예술 그 자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또 하나의 사실을 부각하게 한다.

아름다움 역시 세계와 순환하고 있다.

그 순간 아름다움과 세계는 동일화한다.

그러니까 예술가가 자란 세계는 그 예술에 윤곽을 준다.


  나는 타인으로부터 구별되어서 생겨난 존재이자 동시에 타인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나라고 하는 내면은 세계와 타인에게 열려있어야만이 존재할 수 있다. 또한 내가 바라보는 세계의 한계는 나의 한계와 동일하므로 세계는 내게 속할 수 없다. 단지 세계와 나, 그리고 타인은 계속해서 순환하면서 상호작용 순간마다 접점이 생기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내가 발견해 낸 아름다움과 예술 역시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다른 타인이 그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 상호작용을 통해 접점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즉, 미스즈 개별 루트에서는 예술과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무언가가 아닌, 각자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주관적인 관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상대주의 미학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전작에서는 이를 린과 나오야의 대화를 통해 설명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이를 하나의 이야기로 표현한다. 바로 미스즈의 오빠와 함께 게임을 만드는 이야기로 말이다.


재능을 타고난 화가만이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게 아니에요.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의 작품이라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창작에 성역 따윈 없어.

영혼의 무게가 작품의 질을 결정한다 하더라도

가벼운 영혼이 그린 것에 가치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어.


  미스즈의 오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재능을 갖고 있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이를 표현하는 기술이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이야기는 치졸할지도 모르지만 쿠사나기 나오야의 혼에 꽂혔다. 재능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감동시키게 만드는 것은 그 작품에 실려 있는 혼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재능이나 기술은 그 혼을 담기 쉽게 만드는 도구에 가까운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객관적인 것이 아닌 각자의 내면에서 촉발되는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전체적으로 케이와 쿠사나기 켄이치로도 그렇지만, 미스즈와 나오야의 이야기 역시 이야기의 근간인 삶 속의 예술이라는 명제를 잘 표현해내고 있는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단지 작법이 전자는 일반적인 극이라면 후자는 미소녀 게임의 정석을 따른 것 정도의 차이라는 점이다. 전작들과 비교해 보면 미소녀 게임의 문법에 꽤 익숙해진 스카지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 나가야마 카나


  <사쿠라의 각>은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예술과 아름다움을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취한 작품인데, 그 시점 중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캐릭터 중 하나가 바로 나가야마 카나다. 전작에서는 단순 악역 포지션을 취했지만, 본작에 와서는 오히려 미사쿠라 린이나 혼마 미스즈, 히카와 리나와 같은 캐릭터들 이상으로 분량과 비중을 부여받았다. 전작에서 복선이 꽤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놀랐던 것은 포지션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 <사쿠라의 시>에서는 절대주의, 상대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미학들의 대립을 다룰 것이라고 예견했는 데 그중 포스트 모더니즘의 축을 담당하던 나가야마 카나가 결국 그 포지션을 버렸다는 점은 좀 특이했다.



정말 예쁘네.

더럽혀진 벚꽃이 다시 피어나.

마치 이 벚꽃은 피어야 할 때를 알고 있는 것처럼.

정해진 주기에 스스로 피어나. 벚꽃의 시간을 새기면서.

당연하겠지만, 이 빛의 작품은 우리들이

다시 만들었던 <벚꽃의 잿빛 발자국>이 아니지.

완전한 신작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우리 <브루바기>의 업적으로 여겨지고 있어.

정말 새겨져야 할 이름은 다른데도 말이야.

정말 보기 흉하네.

우리들이 하고자 했던 예술적인 갱신은

단 하룻밤만에 좀 더 아름다운 것으로 바뀌어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이것도 거짓된 아름다움이겠지.

하지만, 거짓된 아름다움이 이렇게나 아름답다면──.

──진짜 같은 건 필요 없을지도 몰라.


가짜인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내가

오랜만에 스스로가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런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가짜.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는 건 난 아름다운 것이 좋다는 사실이야.

그것이 거짓된 이름이라도,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나는 사랑할 수 있어.


  나가야마 카나의 수식어는 '평범', '범인'일 것이다. 작품 내에서 재능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나오고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아이나 사키자키 같은 캐릭터도 존재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재능이 없다고 여겨지는 캐릭터 중에서 예술에 자신의 삶을 건 캐릭터는 오직 나가야마 카나 하나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캐릭터는 <사쿠라의 각>에서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 재능이 없는 그냥 평범한 예술가가 예술을 좇는 과정을 나가야마 카나를 통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나가야마 카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가짜'라고 칭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가짜'와 '위조품' 같은 것에도 의의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왜냐면 예술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작품에 담긴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주의 미학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감동받는 완벽한 작품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작품에 담긴 기술이나 재능은 의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영혼이 없는 작품이 된다고 작품에서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재능이 없는 나가야마 카나라고 하더라도 세계의 본질, 아름다움을 손에 쥐려는 갈망만 있다면 많은 시행착오 끝에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작품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평범함에 상처 입으면서도, 끝까지 단념하지 않고

천재에게 대항해 온 비범한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끝까지 자각하는 천재적인 평범한 사람.

스스로를 가짜라고 치부하고, 실제로도 그 기술은 가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짜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가

진정한 것을 죽이는 것을 허락받은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트럼프의 조커가 될 수 있다.


  이를 작품에서는 최종장에서 표현하고 있다. 히카와 리나가 자신이 가진 압도적인 재능과 그에 걸맞은 노력을 통해 구축한 기술,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잡아낸 세계의 아름다움을 나가야마 카나는 그를 이용해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덮어씌워 버린 것이다. 정작 본인은 시니컬하게 대중들이 보는 눈이 없다는 점을 이용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그 현장에서는 나가야마 카나의 그림이 대중들에게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술이란 결국 단순히 재능과 기술의 우열로 결정되는 가치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더 중요하게 판단된다는 생각이고 실제 역사에서도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그림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점을 잘 이용했기 때문에 나가야마 카나가 히카와 리나를 능가할 수 있었다. 이는 예술에 대한 고찰 없이는 불가능한 위업이다.



기뻐요.

기쁘고, 기뻐서, 정말 저는 여기에 서 있는 거네요.

여기까지 참 멀었어요.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서니 순식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길면서도──────, 한 순간. 그러니까.

아픔 따윈 없어. 여기에 고통 따윈 없어.

왜냐면, 나의 아름다움은, 그런 고통조차 삼켜버리니까.

아픔이 뇌에 전해지고 그 아픔이 붓을 통해 아름다움이 돼.

아픔의 끝에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저는 얼마든지 그 앞으로 나아갈 거예요.

───따라올 수 있나요?


  나가야마 카나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쿠사나기 나오야의 곁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그를 일으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때로는 무리하기도 한다. 그녀의 목표는 많은 이에게 칭송되는 작품이 아니다. 역사에 새겨지는 작품 역시 아니다. 단지 쿠사나기 나오야라는 아름다움의 옆에 서는 것. 그것만이 그녀의 목표였다. 쿠사나기 나오야와의 일전에서는 결국 그러한 순수한 마음에 호응한 것인지 천년 벚꽃의 개화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는 작품을 그려낸다.


  중요한 것은 나갸아마 카나가 자신의 한계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예술이 삶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녀에게 예술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결국 그녀가 그렇게까지 노력하는 이유는 결국 쿠사나기 나오야라는 사람의 옆에 서고 싶었다는 일념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도 역시 예술은 수단이다. 아름다운 작품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운 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좋네요. 이거예요. 이게 나의 동경이었어요.

그 밤, 달이 숨고, 그리고 달이 세계를 비춘 밤.

재능의 구현화인 존재와 함께 쿠사나기 나오야가 만들어 낸 한 장의 거대한 회화.

수영장을 캔버스로 한, 단 하룻밤 한정의 예술.

공간이 색채가 되고, 시간이 캔버스가 되는.

2명의 천재의 합작. 관람자는 오직 나뿐.

그 아름다운 회화. 훌륭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행복했어요.

아름다운 것이 좋으니까, 그렇기에 그 작품을 앞에 둔 저는 행복했어요.

하지만, 아마, 저는 예술가였기 때문에.

저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천재가 만들어 낸 예술 앞에서 전──.

닿지 못한다는 분함에 휩싸였어요.

감동과 함께 남겨진, 그런 감정이 폭풍우처럼 제 안에서 들이닥쳤어요.

그곳에는 나는 설 수 없다. 어쩌면, 평생.

그러니까 저는 달린 거예요.

이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는 달렸어요.

이 대지에 서기 위해서라면 세계적 천재 아리아 호 잉크조차 장애물에 지나지 않아요.

세계적 천재? 하하, 재능에 축복받았을 뿐인 녀석에게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아름다움에 저주받아 온 내가 질까 보냐고요.

아리아 호 잉크는 저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졌겠죠.

하지만 말이에요, 제가 질 이유가 없어요. 왜냐면 저는 말이에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벚꽃의 예술가와 함께, 꽃 피우는 예술. 흩날리는 예술.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개인적으로 <사쿠라의 각>의 진 히로인은 나가야마 카나라고 생각한다. 다른 캐릭터들 역시 순수한 마음이 돋보이는 캐릭터지만, 이 캐릭터는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순수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 그 목표 하나만을 위해서 순수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도 비중이 상당하지만 아예 루트 하나를 별개로 만들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 쿠사나기 나오야


  쿠사나기 나오야라는 캐릭터는 이러한 캐릭터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인과 교류의 예술'의 결과를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는 삶 속에서 예술을 실천하며 수많은 캐릭터들의 마음을 구원해 왔다. <사쿠라의 각>은 그런 쿠사나기 나오야가 무너졌을 때,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는 구도로 그려져 있다. 그야말로 '인과 교류의 예술'의 극의라고 할 수 있다.


  <사쿠라의 각>이 작품으로서 의의를 갖게 되는 점이 바로 이 나오야라는 캐릭터의 삶을 완성시킨 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 타인이 얼마나 소중한 지, 그리고 그를 예술로서 어떻게 표현해내는 지를 쿠사나기 나오야를 통해 그려내고 이러한 주제를 담아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야에 한해서 할 이야기가 크게 없다. 왜냐면 그걸 다루기 위해서는 결국 작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캐릭터의 이야기에서 자아낸 이야기가 결국 쿠사나기 나오야의 이야기이고, 곧 <사쿠라의 각>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잔혹해.

만약, 운명이 허락해 준다면.

케이가 있고, 내가 있고, 그리고 린이 있어서 말이야.

서로가 역사에 남는 화가로서 서로를 성장시켰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미래는 없었어.

운명은 뒤죽박죽이고.

그 무엇 하나 소망대로 된 것이 없었어.

그래도 린이 준 것, 시즈쿠가 준 것. 그걸 나는 받았어.

이것을 영원의 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다정해서.

그러니까──. 먼 기억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는 그 여정에.

아득한 저 편에서부터 여기까지 도달한 이 감촉.

그것들 전부를 캔버스에 태울 거니까.

그건 월등히 커다란 게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모든 기억을 그려 넣은 그 회화는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에 의해 없어졌어.

아연실색이었지만 동시에 신기하게도, 신기하게도 개운했어.

아마, 그때 직감한 거겠지.

거대한 캔버스가 불타고 나서야 처음으로 알았어.

시간의 흐름에서 분명 많은 마음이 태어나고 사라졌어.

시간의 흐름은 잔혹해서, 그야말로 아무리 커다란 음량으로 연주한 음악조차 무한의 대지에 안개처럼 흩어져.

소리가 있던 장소엔, 단지 대지가 있을 뿐이고, 넓은 하늘이 훤히 영원을 기리고 있어.

우리들의 선율은 작은 거야.

왜냐면, 이 세계는 무한하니까.

하지만, 하지만 달라.

영원을 기린 넓은 하늘에서, 사라진 것이 분명했던 음들은.

그런데도 분명히 있었던 거야.

그 전부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 정도의 크기로도 좋아.

케이가 선택한 캔버스의 사이즈.

저 녀석이 해바라기를 그린 캔버스.

그것 정도의 크기로도 충분해.

사람의 머리는 1400cc 정도지만.

그런데도, 그건 무한과 이어져 있어.


  나오야는 작품 안에서 자기 자신이나 대중을 위한 예술을 하지 않는다. 그가 예술을 행한다면 그것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오로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마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는 나오야에게 있어 예술이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사쿠라의 시>에서부터 일관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사쿠라의 각>에 와서는 자신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전해준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거대한 캔버스에 그 마음을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그렇게 완성할 뻔했던 작품은 불타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제야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오야는 발견한다.


시커먼 캔버스.

형태가 있는 건 거기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행복한 나날에, 형태를 주지 않는 것이 좋다.

형태가 있는 것은 반드시 망가지니까.

그러니까 형태 같은 건 남기지 않아도 좋다.

그런데도 마지막 마음은, 마치 베어져 시든 태양처럼 보였지만.

해바라기.


  작품의 클라이맥스, 나오야의 마지막 작품에서는 하쿠키의 꿈의 물방울을 안료로 사용하여 결국 작품이 형태로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나, 작품 내 속의 존재들은 그 작품에 감동할 수 있다. 이는 우리는, 그들은 쿠사나기 나오야라는 인물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삶의 궤적이 그의 형태로 남지 않는 작품에 우리들을 감동하게 만든다.


  결국 아름다움에 있어서 형태란 상관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형태가 없더라도 그 의의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어떤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고, 표현해 낼 수 있다.


  <사쿠라의 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술'이라는 개념에 대해 안기 쉬운 오해를 부수는 작품이다. 재능이나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작품의 완성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특별한 사람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작품은 끊임없이 주장한다. 예술이란 단지 삶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누군가와 나누는 과정일 뿐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에 와서는 예술에는, 아름다움에는 형태마저 없을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우리는 많은 등장인물과 쿠사나기 나오야의 삶의 궤적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작품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메시지의 전달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생은, 모든 흘러가는 것에 의해 채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간다.

그것은, 벚꽃의 시간.

그리운 나날들.

그리우면서도, 이곳에 있는 나날들.

그러니, 그 앞에──.

나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고마워.


- 마치며


천천히 우리들이 걸어 나가자

바보 같은 이야기가 하늘에 사라져 간다.

어떤 소리라도 역시 하늘이나 숲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것이 예를 들면, 장엄한 음악이더라도.

커다란 음량의 록이더라도 모두 세계로 사라져 간다.

나는 여기서 시시한 이야기로 웃은 풍경을 언젠가 잊을 것이다.

풍경은 사라지고 또 나타나고, 사라지고, 나타나며 명멸한다.

그런데도 잊었을 때, 다시 여기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잊었을 때 만나면 되는 것이다.


  <사쿠라의 각>은 예술이 우리 삶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해야 하는 지, 그리고 아름다움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아가 쿠사나기 나오야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인과 교류가 예술에서도, 그리고 삶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려낸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삶과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의 좋은 점은 바로 예술을 굉장히 아름답고 근사한 그러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 일로 묘사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삶의 정답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것에 있다. <사쿠라의 각>은 끊임없이 이 삶의 기적을 노래하고 있다. 베스파를 타고 도로를 달릴 때 지나가는 풍경과 음악이라던가, 마코토 루트에서 언급되는 달이 차고 기울어지는 과정이라던가, 그리고 쿠사나기 켄이치로가 이야기한 빛의 명멸에 의한 음절이라던가. 이러한 은유를 통해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러한 일상들이 사실은 기적 위에 성립되고 있는 것이고, 예술이란 이런 삶 속의 기적들을 표현해 내는 수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그리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것이라고 작품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예술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심지어는 예술이 아니어도 괜찮다. 누군가와의 대화나 흘러가는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사쿠라의 각>은 예술을 이용하여 삶의 의의와 아름다움을 그려내었다. 여전히 우리들은 삶이란 무엇인지 정돈된 말로 설명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을 보고 있으면 삶이 내게 있어 어떤 것인지 그 편린을 조금 잡을 수 있을 듯하다. 나로 완결된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삶.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여 또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삶. '말할 수 없는 것'을 정말 근사하게 표현해 낸 작품이 아닌가 싶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은 내게 그런 아름다움이 있는 작품이었다.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시간이 달린다.

그리고 끝없는 세계를 향해 그 소리는 사라져 간다.

그런데도 이 소리는 서로 겹쳐지며, 울려간다.

시간은 흐르고──그리고 이윽고 시가 된다.

벚꽃의 시간은, 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