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말을 아는가?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다"


결과론적으로 모든 원자를 정확히 관측하는 건 불가능하다고는 증명되었지만 그건 그거고.


항상 나는 생각하곤 한다. 이 세상은 원자 레벨에서 미래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영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그저 한낱 전기신호에 불과하고, 내가 이 글을 쓰는 변덕도 이미 우주에서 결정되어있던 사실이며, 당신들이 이 글을 보는 것도 어쩌면, 거창하게 말하면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해진 하나의 세계선을 더듬어 가는 수동적 객체에 불과하지 않을까?


물론 진실은 신이라도 되지 않는 한 알 길이 없다. 나도 너도 다른 세계선을 관측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다른 세계선을 관측하고, 이동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이다.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슈타인즈 게이트 소개해 봄.



슈타인즈 게이트는 나온 지 10년도 더 된 게임이지만 루프물을 말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갤에도 한 사람 많을 테고, 게임은 안 했지만 애니는 본 사람(인생 손해 본 사람)도 많을 걸로 안다.




내가 개인적으로 평가하기에 슈타인즈 게이트라는 게임은 정말 정교하게 완성된 미술품과도 같다.


소재, 플롯 구성, 템포 분배, 루트 분기, 각 캐릭터의 개성 등 2009년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빼어난 완성도를 가졌다.



우리의 주인공 오카베 린타로는 키도 크고 초 이케멘인 대학생이지만 정신 나간 중2병 말투를 사용한다.


진히로인인 마키세 크리스는 금수저에 미국에서 유학하다 귀국한 초절정 천재 미소녀지만 유감스럽게도 2ch 중독자다.


알겠는가?


씹덕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캐릭터다. 우리는 잘 만든 캐릭터 하나가 쓰레기 같은 작품을 살리는 걸 몇 번이고 목격해왔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사람들이 좋아하는 속성을 전부 쑤셔박을까? 그것도 나름대로 먹히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자칫 플레이어들의 인식에서 괴리할 수 있는 하이스펙의 캐릭터들에게, 저마다 친근한 약점을 넣어서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했다.


중2병오타쿠와 2ch커뮤니티중독자라는 속성은 유붕이들에게 친밀감을 줘서 작품에 몰입하기 쉽게 만든다.


거기다 배경도 씹덕의 정신적 고향인 아키하바라. 오타쿠 배려 정신이 뛰어난 게임이다.



슈타인즈 게이트의 핵심적 소재는 D-메일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과거로 메일을 보낼 수 있는 장치로, D-메일은 작중의 세계선이 변경되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주인공은 세계에서 단 한 명 D-메일에 의한 세계선 변동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며, 다시 말해 바뀌기 전의 과거와, 바뀐 후의 미래를 체험할 수 있는 존재이다.


당연히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기적의 장치를 가진 주인공은 신나서 다른 라보멘(연구실 멤버)에게도 과거를 바꾸게 한다.


게임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결국 과거를 존나 바꿔서 꼬이고 꼬여버린 세계를, 다시 D-메일을 보내서 바로잡아가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 오카베 린타로는 히로인을 구하기 위해 타임 루프와 세계선 이동을 반복하면서 발버둥친다. 그야말로 오타쿠들의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야기다.


▲얘는 D메일을 보내서 자기가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나도록 과거를 바꾼다



슈타인즈 게이트의 큰 특징 중 하나라면 메일 시스템이다. 짤은 일본어지만 준한글화 패치 적용하면 메일도 번역되어 있다.


히로인들이 메일을 보냈을 때 특정 키워드를 선택해서 답장을 보낼 수 있고, 어떤 답장을 보냈냐에 따라 히로인들의 답장이 달라진다. 일부를 제외하면 스토리에 영향은 그다지 없지만 소소한 재미가 있다.


적어도 필자는 여자랑 메시지를 나눠 본 경험이 읽씹 당한 경험 말고 거의 없기 때문에 즐거웠다.



앞서 말했듯이 이 게임은 이쪽 업계에서는 정말 완벽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완성도가 있는 작품은 없었고,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이 명성을 따라잡는 작품이 나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꼭 완벽한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스카지처럼 정신병 걸린 작품을 좋아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키누가사처럼 만들다 만 작품을 좋아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니이지마처럼 트롤 냄새가 나는 작품을 좋아할 수도 있다.


내 글을 읽고 슈타인즈게이트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안 읽었는데 그냥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이 글을 보고 슈타인즈게이트 찢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이 작품을 새로이 플레이 하는 사람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이 슈타인즈 게이트의 선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