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앨범 2(WHITE ALBUM2)


  다시 그 계절이 온다. 화이트 앨범의 계절이 온다. 에로게 역사에 기록된 공전절후의 명작, 화이트 앨범 2를 다시 플레이했다. 아마 이걸로 5회 정도 플레이 했는데, 이미 내 안에서는 겨울의 대명사와 같은 것이라 12월 말쯤부터는 이 작품이 공연히 떠오르곤 한다. 그 정도로 겨울을 테마로 잘 살린 작품이다. 게다가 유명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나리오 라이터 중 하나인 마루토 후미아키의 마지막 게임 시나리오였다. 스스로도 라이터 인생의 20%를 담은 작품이라고 말한 만큼, 여전히 마루토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를 자랑하고 있다.


  전작인 화이트 앨범도 에로게 역사에 남은 작품인 만큼 후속작은 시나리오 라이터의 네임벨류와 함께 발매되기도 전부터 이리저리 기대를 받으며 시끄러웠던 작품인데, 이런 작품은 원래 김이 새기 마련인데 말 그대로 에로스케 랭킹을 싹 다 갈아엎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형 만한 아우 없다는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전작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퀄리티에 다들 놀랐던 작품이다. 현재는 순위 변동이 있지만, 과연 이 작품이 당시 올 타임 넘버 원을 차지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작품일까?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전부 네 탓이니까.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괴로움을, 네가 알려줬으니까.


  이 작품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사에 있다.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서사인데, 그 가장 중요한 무기를 극한까지 갈고닦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인 것이다. 서사 그 자체도 굉장히 강렬하고 매력적이지만, 이것을 더 매력적이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바로 구성이다.


  화이트 앨범 2의 소재는 바로 삼각관계와 불륜인데 전작의 경우에는 주인공이 이미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에서 게임이 시작해 선택지에 따라 바람을 피우게 되고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저들이 죄책감을 느꼈는데 반면 이 작품은 IC 파트를 이용해 굉장히 공을 들여서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해 나간다.


  이 작품은 IC-CC-Coda 3단계 구성을 갖고 있다. IC에서는 카즈사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 세츠나와 연인이 되는 과정, 그리고 세 사람이 두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챕터는 단순히 '밑밥'을 까는 과정으로 치부하기엔 아쉬울 정도로 한 편의 단편 소설 같은 완성도를 갖고 있다. 


  IC 단계에서 부터 삼각관계를 도입시켜서 플레이어의 감정을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하지 않고 계속해서 뒤흔든다. 아무래도 시작하자마자 여자친구였던 캐릭터보다는, 그 과정을 긴 호흡에 걸쳐 묘사해 나간 여자친구가 된 캐릭터에게 플레이어는 감정 이입을 더 할 수밖에 없다. 마루토는 바로 그 지점을 노렸던 것이다. 본인 인터뷰에서 밝혔다시피 전작에서 그 부분이 아쉬워서 여기에 힘을 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제일 잘 한 점이라면 카즈사와 세츠나 둘 모두에게 적당한 비중을 주었다는 점이다. 여자친구는 세츠나였지만, 오히려 서사를 극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것은 카즈사다. 카즈사와 하루키의 이야기에 끼어든 것은 세츠나였고, 그 세츠나가 하루키를 차지하면서 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극의 마지막에는 카즈사를 리타이어 시켜서 비장미를 극대화시킨다. 언제까지나 세 사람으로 있고 싶어 했던 세츠나의 소망은, 결국 그녀 스스로의 행동으로 무너진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비극을 느끼고 이 작품에 더욱 몰입하는 계기가 된다. 그 자체로도 수준 높은 단편 소설이지만, 한 작품의 프롤로그로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로 승화된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처음으로 둘도 없는 친구가 생겼다.

기쁨이 두 가지가 겹쳐서, 그 기쁨이 수많은 기쁨을 불러와서.

꿈같은 시간을 손에 넣었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CC 파트에 들어오면 극의 중심은 세츠나로 이동한다. IC 이후에 붕괴해버린 두 사람의 모습을 처절하게 표현해 낸다. 세츠나는 세츠나대로 어두워지고, 하루키는 극단적으로 여자를 배척하는 성격적 결함을 안게 된다. 그래서 이 CC는 철저하게 이 둘의 회복을 다루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세 명의 서브 히로인을 등장시키는데, 사실 말이 서브 히로인이지 다른 작품 가면 능히 메인 히로인을 차지할만한 매력과 서사를 지닌 캐릭터들이다. 세츠나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루키는 이 세 명의 히로인과 교류하면서 세츠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힘을 얻게 되고, 나아가 그 사람과의 미래를 그리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누군가─세츠나─를 상처 입히는 것이 두려워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두려웠던 하루키가 모두를 상처 입힐 결의를 하면서 그 사람과 행복을 얻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CC 서브 루트들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더 상처 입는

괴롭고 슬픈 선택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결단 너머에 행복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거기에 시간제한까지 딸려있는 선택지를

나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두를 상처 입히더라도,

아주 조금의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서.


  코하루 루트는 동질감에 테마를 두고 있다. 소하루키라고 불리는 코하루가 하는 행동, 겪는 일들을 통해 하루키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코하루는 하루키 같은 참견으로 하루키의 과거를 알아내고 이를 극복해내게끔 도와준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한 하루키가 스스로로 인해 곤경에 빠진 코하루를 구해주는 상호 구원 서사를 통해 둘 모두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


  마리 루트는 동경에 테마를 두고 있다. 작중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하루키는 마리에게 카즈사를 투영하고 있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연애에는 서투른 모습까지 카즈사를 복사한 느낌인데 두 사람이 엇갈리는 과정도 하루키와 카즈사의 서사와 유사하다. 다른 점이라면, 시간이 흘러 조금은 성장한 하루키가 그런 마리를 품고 결말에서는 IC에서는 차마 따라가지 못했던 비행기 너머를 따라가서 그 시절의 실패를 만회하는 성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치아키 루트는 과거에 테마를 두고 있다. 다른 두 서브 히로인 루트와 다르게 2회 차 해금 구조를 갖고 있고 하루키에게 강한 사랑을 부여하는 다른 이야기와 달리 철저하게 배신하는 모습까지 그려낸다. 치아키는 세츠나를 연기하는 캐릭터인데, 이를 통해 하루키에게 스스로가 세츠나를 배신한 것에 대한 고통을 맛보게 해주는 서사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런 치아키를 용서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과거를 회피하는 것이 아닌 마주 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얻는다.



당신은,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치료해 줘.

내 상처는 이젠, 당신의 전문 분야 밖이니까.

그래, 당신만큼은,

이제 내 상처를 달래는 게 불가능하니까….


  이 세 루트는 각 캐릭터가 하루키-카즈사-세츠나를 상징한다. 코하루는 하루키를, 마리는 카즈사를, 치아키는 세츠나를. 이 세 캐릭터의 모습이 엿보이는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IC와 CC 사이에 넘지 못했던 새로운 벽을 넘어가는 힘을 얻는 구조이다. 코하루에게서 하루키 자신과 닮은 동질감을, 마리에게서 카즈사에 대한 동경을, 치아키에게서 세츠나와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제각각의 방법으로 하루키는 과거를 극복해 낸다.


  자신과 유사한 코하루에게 자신이 과거에 선택하지 못했던 '문제 해결 방법'을 꺼내 그걸 돕는 과정에서 성장해 내고, 카즈사와 유사한 마리에게 자신이 과거에 따라가지 못했던 그 벽을 너머 마리를 붙잡는 것으로 성장해내고, 세츠나와 유사한 치아키를 용서하는 것으로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진 못하지만 마주 보는 용기를 얻는 구조로 굉장히 인상적인 성장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하루키 군, 방금 카즈사와 대화했던 거지?

카즈사가 등을 떠밀어 준 거지?

카즈사를 포기할 용기를, 카즈사에게 받은 거지?

나를 안기 위해서 카즈사에게 격려받은 거지?

치사하네 하루키 군.

당신은 몇 년이 지나도, 나에게 거짓말만 하는구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잊어버린 듯 거짓으로 덮어서

스스로를 죽인 채 살아갈 생각이었구나.

그저… 나만을 위해서.


  이런 세 사람과의 교류와 친구들의 노력으로 용기를 얻은, 카즈사를 가슴에 품고 잊을 결심이 선 하루키가 세츠나와 마주 보려고 하지만 세츠나는 하루키의 마음속에 아직 카즈사가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를 거절한다. 이후의 회복 과정이 바로 세츠나 루트이다.


  하루키는 하루키대로 과거에 구애받고 있고, 세츠나는 세츠나대로 하루키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후벼 파는 행동을 통해 파국을 만들어내지만 하루키는 마리와 코하루, 치아키를 통해서 이를 극복해낼 힘을 얻게 되고 세츠나는 야나기하라 토모를 통해 자신의 본모습과 마음을 긍정하고 표현하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둘 사이의 금기 중의 금기였던 호죠대 부속 동아리 시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과거를 극복해 낸다.


  이 과정이 인상적인데, 일반적인 연애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결로 이를 극복해 낸다. 하루키가 카즈사를 잊어내는 것도 아니고, 세츠나가 하루키를 용서하는 것도 아닌 이 모든 것을 품어내고 앞으로 나아갈 결의를 해내는 것이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아해.

그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내 눈앞에서 즐겁게 노래하는 세츠나니까.

내 허접한 기타에 올라타서 노래하는 세츠나를.

노래방에 가면 주위를 무시한, 

혼자 다섯 곡을 연속으로 넣고 마이크를 놓지 않고

자기만족하고 마는 세츠나를.

일주일간 매일, 24시간, 어떤 힘든 연습이더라도

당연한 듯이 노래하는 세츠나를.

리허설에는 벌벌 떨면서,

본무대에는 팔팔 날아오르며 노래하는,

관객의 환성에 완벽한 웃음으로 답하는 세츠나를.

좋아해. 세상에서 제일.


  하루키는 카즈사를 잊지는 못하지만 세츠나를 가장 좋아하는 것을 깨닫고 세츠나는 자신과 상극에 가까운 토모를 통해 꾸며낸 가련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게 되면서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간다. 이는 현실을 초월해내는 결말이 아니라 현실 위에서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낸 대목이라서 좋아한다.


  전체적으로 CC의 구조는 서브 히로인들의 루트를 통해 하루키의 회복을 다루고 나아가 세츠나의 망가짐을 먼저 보여준다. 치아키 루트에서는 하루키를 스스로 차버리고, 코하루 루트에서는 하루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마리 루트에서는 하루키에게 차인다. 이 과정에서 IC 루트를 거쳐온 플레이어들은 카즈사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세츠나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결실이 세츠나 루트에서 맺어지는 것으로 플레이어의 감정은 극대화되고 폭발한다.


  마루토 후미아키가 세츠나를 상처 입히고 그 모습을 플레이어에게 목격시킨 뒤에 구원받을 수 있게끔 구성을 한 것이다. 가장 밝은 빛은 가장 깊은 어둠에서 볼 수 있듯, 이런 감정의 낙차는 플레이어가 세츠나에게 최대한 몰입할 수 있는 구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IC에서는 카즈사에게 비중이 조금 쏠려있었고, 플레이어 역시 카즈사에게 연민을 느끼게끔 만들어져 있는데 이를 CC에 와서 둘을 동등한 스타트 라인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이 작품의 핵심이자 최대의 매력 포인트인 Coda로 이어진다.



왜 지금… 이 타이밍에 네가 나오는 거야?

나, 세츠나에게 프로포즈할 생각이었다고?

이번에야 말로 너와….

이제 몇 번째일지도 모를 '영원히 안녕'을 할 생각이었다고?


  플레이어에게 오랜 기간 세츠나와의 엇갈림 보여주고 다시 결합시킨 이후 그야말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기 직전인 하루키와 플레이어 앞에 카즈사를 내보낸다. 이게 바로 화이트 앨범2의 정수 중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이 극단적인 이지선다 질문을 다시금 하루키와 플레이어에게 질문하는 점에서 마루토 후미아키의 기획력과 인성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이야 Coda의 존재가 사실 WA2에 필연적으로 따라 다니는 존재라 다들 어떤 경로로든지 알게 된 후 플레이하지만, 이 제품 발매될 당시에 초회 플레이를 했을 때는 이 부분에서 그야말로 신의 계시가 떨어진 신자처럼 전율이 흘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IC에서 세 사람의 엇갈림을, CC에서 두 사람의 결합을, 그리고 Coda에 와서 다시 세 사람의 엇갈림을 다루는 이 구조야 말로 화이트 앨범2의 매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원래여도 재미있었을 시나리오를 3배, 10배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매우 강력한 요소. 그래서 글의 서두에 이 작품의 강점이 구성이라고 했던 것이다.


  세츠나와 카즈사 루트는 각각 서로 다른 것을 테마로 삼고 있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미니 애프터 스토리의 부제인데, 세츠나 루트의 경우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카즈사 루트의 경우 '행복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두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행복으로 접근하는지 잘 나타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카즈사를 향한 마음을 믿고 있으니까.

너의 카즈사에 대한 사랑을 믿을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내게 돌아올 거라고

최후의 최후까지 완전히 믿을 순 없어.

난 하루키 군이 행복해지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행복해 지고 싶어.

하루키 군이 좋아, 카즈사가 좋아, 그리고 내가 좋아.

있지, 하루키 군. 도망치면 안 돼. 서로가 말이야.


  세츠나 루트에서는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테마로 하고 있다.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대단원이다. 세츠나의 소원이었던 '세 사람'이서 함께 하는 것을 그려낸 루트다. 조금 어색할 정도로 완벽한 해피 엔딩을 연출하고 있는 점이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 수도,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카즈사에 대한 마음을 5년이나 포기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하루키가 5년의 시간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관계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카즈사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결의해서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이야기에서의 핵심은 세츠나 루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와 카즈사에게 있다. 세츠나가 쓰러져버린 하루키를 대신하여 카즈사를 일으키지만 결국 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내는 것은 하루키와 카즈사의 포기에 달려 있다. 물론 세츠나의 모습에 감화된 두 사람이 내린 결정이기 때문에 세츠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를 열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이야기의 가장 아름답고 슬픈 부분이 두 사람이 결별을 선언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는 세츠나의 비중이 안타깝다.



미래 따윈 없다. 그런 건 필요 없다.

단지, 지금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그걸로 좋다.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간다.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짓밟아 가면서.

아니, 짓밟아 버렸기 때문에야 말로

우리만은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을

발판으로 삼은 의미가 없다.


  카즈사 루트에서는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랑을 테마로 하고 있다. 5년 간 마음을 차마 저버리지 못했던 하루키와 카즈사가 결국 그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그려낸 이야기다. IC와 CC라는 5년 간의 시간을 보내 성장한 하루키가 카즈사의 본심과 과거를 알게 되고,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을 내던져가면서 카즈사를 택한다.


  이 과정에서 백미는 바로 하루키와 카즈사의 앞에 놓이게 되는 절망이다. 모두에게서 비난받고, 버림받는. 모두를 상처 입힌 결과 스스로 또한 상처를 받게 되는 그런 강렬한 사랑. 누구보다도 견실하게 살아왔고, 살아가고자 하는 하루키가 이런 선택을 해서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전부를 내던지고 사랑을 얻은 뒤에, 그곳에서 조그마한 행복들을 찾아가는 것. 그야말로 행복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나는 하루키가 행복해졌으면 해.

… 사실은 내가 하루키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아무리 노력해도 그럴 수 없었어.

나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은….

내가 가지면 망가져 버리고 말아.

소중히 다루려고 하고,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해도,

나는 서투르니까… 어느샌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게 돼.

그러니까 나보다 더 제대로

그 보물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려주는 편이 더 나아.

너를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작품의 절정에 이르는 것이 바로 바람 루트. 카즈사를 잊지 못한 하루키, 세츠나를 저버리지 못한 하루키는 이 둘 사이에서 결국 망가져버리고 만다. 이 과정을 너무나도 절절하게 표현해낸 것이 굉장히 인상적인 루트라고 할 수 있다. 하루키는 세츠나에 대한 죄책감과 카즈사에 대한 사랑이 충돌한 끝에 망가져 버리고, 그 망가진 하루키를 구해내기 위해 두 사람의 인생이 망가져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작품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루트인데,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갈구하는 하루키에게 5년에 걸쳐서도 잊지 못한 카즈사의 강렬한 사랑이 한 인간을 어떻게 철저하게 부숴나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삼각관계, 불륜이 갖고 오는 인간관계의 파국 또한 잘 묘사해내고 있어서 이 작품의 핵심 테마인 삼각관계를 정말 잘 보여주고 있는 명 에피소드.


  최악의 이지선다 질문에 대해 최악의 결말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그 사이에서 흔들려 나가는 한 인간의 고뇌와 파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인상적인… 어쩌면 진 엔딩에 가까운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엑스트라 에피소드에서 그려내는 회복 과정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화이트 앨범2의 서사의 뼈대인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와 파멸, 그리고 회복'에 꼭 맞는 그런 에피소드다.



나를 잊어 극복하던가, 나와 함께 극복하던가.

지금의 하루키 군에게는 그 둘 중 하나밖에 없다고?


  순수하게 인간관계, 연애 이야기만으로 이처럼 가슴을 뒤흔드는 작품은 정말 만나기가 쉽지 않다. 단순히 에로게 영역을 넘어서서 이건 어느 포맷으로 넘어가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화이트 앨범2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해낸 작품이고 그렇기에 아직까지 마스터 피스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플레이 타임 내내 사람의 심장을 쥐고 격렬하게 흔들어 댄다. 이것이 서사의 힘이다.


  그리고 서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면에서도 최고점을 줄 만한 작품이다. 바로 캐릭터와 음악이다. 특히 이 작품의 캐릭터는 굉장히 매력적인데, 두 메인 히로인뿐만 아니라 서브 히로인들도 각자 어느 작품에 가더라도 메인 히로인을 차지할 수 있을 만한 매력과 서사를 갖고 있고 조연인 타케야나 미오, 토모도 굉장히 매력적이다. 특히 인상적인 조연은 역시 타케야. 사실 이 작품에서 주연 3인방을 제외하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타케야다. 바람둥이와 진중한 면모, 우정을 우선시하는 그 모습엔 이젠 세츠나나 카즈사도 필요 없고 타케야만 곁에 있으면 그런대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


  성녀처럼 묘사되지만 실은 소악마에 가까운 캐릭터인 세츠나, 늑대의 가죽을 뒤집어쓴 토끼로 묘사되는 캐릭터인 카즈사 역시 훌륭한 메인 히로인이다. 세츠나는 진심과 꾸며낸 모습의 갭에서 매력이 오고 카즈사의 경우엔 고고한 척 하지만 쓸쓸해지면 죽어 버릴 것 같은 그런 갭에서 매력이 온다. 둘 다 굉장히 치밀하게 조성된 캐릭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역시 하루키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하루키를 욕하면서 작품을 끝내지만, 나는 이 작품이 성립하기 위해선 이 하루키가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루키가 흔들릴 때마다 이해하지 못하는 플레이어가 잔뜩 있지만… 사실 하루키는 작품 내 묘사에서도 단 한 번도 카즈사를 잊은 적이 없다. 그렇기에 하루키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곧게 살아오고,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하루키가 흔들리는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의 매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면서 고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실수하고 일어서고, 잘못된 줄 알면서도 실수하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캐릭터라 더 사랑스러웠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최근엔 완성형 캐릭터들이 많이 나오다 보니 이렇게 흔들리고 성장하는 캐릭터가 더 빛나는 걸지도.


  항상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하루키이기에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상처받고, 상처를 주면서 인간관계란 무엇인지 그 본질에 다가간다고 할 수 있다. 필연적으로 사람과의 관계란 상처를 주고, 받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더듬어 찾아 나가는 하루키의 모습이,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하루키의 모습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는 듯했다.


  전반적으로 모든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굉장히 훌륭한 캐릭터 조성이었다.



기어코 내리기 시작했다.

항상 세 사람이서 있기를 약속했던 날에도.

세 사람에서 두 사람이 빠져나와 버렸던 날에도.

두 사람에게서 한 사람이 떠나,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남겨져 버린 날에도.

한 사람과 한 사람이 한번 두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그럼에도 도저히 서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날에도.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몇 번이고 서로를 상처 준 끝에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두 사람이 되자고 맹세했던 날에도.

그리고… 오늘.

아아, 그렇구나. 역시 오늘인 거구나.

오늘이 내 인생의… 그리고, 세 사람의 분기점이구나.

내 운명이 굴러가기 시작하는 건 항상 겨울이었다.

그날들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음악의 경우에도 에로게 역사에 손꼽히는 명반이 만들어졌는데, BGM의 퀄리티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언젠가 보았던 풍경, 아름답고 덧없는 것, 말할 수 없는 마음, 마지막에 남는 것 같은 굉장히 인상적이고 마음을 울려오는 음악들이 계속 이어진다. 평범한 일상 씬에서의 음악도 굉장히 인상적인 편이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이 플레이어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시나리오의 매력을 200%, 300% 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WHITE ALBUM이나 POWDER SNOW 같은 전작의 곡도 십분 살려 전작의 팬도 만족시키고, 새로운 팬에게도 인상적인 음악을 선사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각 루트 엔딩곡은 또 그 에피소드에 걸맞게 훌륭한 가사와 멜로디로 쓰여있다. 그래서 게임이 마친 뒤 그 곡만 들어도 그 이야기의 정경이 생생히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보컬곡이나 배경음이나 모두 에로게 역사에 기록될 만큼 훌륭한 퀄리티였던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반면 단점으로는 작화를 거론할 수 있겠는데, 전체적으로 작화가 불안정하다. 나카무라 타케시가 가장 저점일 때 만들어진 작품이다 보니 작화 퀄리티가 도저히 좋다고는 하지 못한다. 특히 작화 스케줄이 붕괴해버려서 CC 발매 연기까지 해가면서 고쳤는데 그에 따라 여러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투입되어 그림체가 중구난방인 점도 감점 포인트. 그나마 다른 사람이 그린 CC 쪽 CG의 퀄리티가 좀 좋다는 게 더 메인 일러스트레이터를 비참하게 만든다. 특히 송곳킥 같은 경우엔 밈화 되었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포인트다. 이후 추가된 미니 애프터 스토리 쪽 CG의 퀄리티를 보면 리메이크라도 해서 재발매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야말로 엄청난 그림의 변화


  다시 한번 플레이하면서 마루토 후미아키의 빈자리가 아쉬워진 작품이다. 만들어내는 족족 취향인 작품인데, 양지로 가고 나서는 오히려 약간 취향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어서 더더욱. 시나리오에 호불호는 있을 수 있으나, 이게 잘 쓰인 시나리오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매 겨울마다 다시금 떠오르는, 내 안에서 불멸의 생명력을 가진 작품이다. 아마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다시 그 계절이 온다.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겨울처럼, 아마 이 작품도 끊임없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숨 쉴 것이다.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게 바로 오타쿠의 행복이 아닐까.


약간 융통성 없이… 그러면서도 견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행복을 붙잡아 가는…

그게 네 올바른 인생이잖아?


블로그에 있던 글 옮겨온 거라 조금 깨질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