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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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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시조
태조 고황제 | 太祖 高皇帝
조선 초대 국왕
태조 | 太祖
태조강헌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
太祖康獻至仁啓運應天肇統光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光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출생
즉위
1392년 8월 5일 (음력 7월 17일)
사망
1408년 6월 18일[3] (향년 72세)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별전
능묘
재위기간
초대 국왕
조선 태상왕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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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성계(成桂) → 단(旦)[7]
부모
형제자매
이복형 완풍대군, 영성대군 이천계
누나 정화공주
이복동생 의안대군, 정윤 이영
이복여동생 이씨
왕비
종교
신장
중결(仲潔) / 군진(君晋)
아호
송헌(松軒) / 송헌거사(松軒居士)
인소전(仁昭殿) → 문소전(文昭殿)
묘호
태조(太祖)
별호
성조(聖祖)
존호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
(至仁啓運應天肇統光勳永命)[9]
시호
조선: 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
(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10]
대한제국: 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11]
: 강헌(康獻)[12]

1. 개요2. 생애3. 시호, 묘호, 휘4. 배우자와 자녀들5. 사용한 무구
5.1. 어궁구5.2. 전어도5.3. 화살보다 빠른 말5.4. 팔준마
6. 평가
6.1. 당대의 평가6.2. 고려 말의 토지겸병 문제6.3. 위화도 회군 이후6.4. 국방 기여6.5. 무신경, 혹은 무책임6.6. 고려 왕씨 몰살6.7.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의 비교6.8. 현대 한국에서6.9. 북한의 평가
7. 여담
7.1. 무학대사 일화
7.1.1.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7.1.2. 꿈 해몽7.1.3. 멸망 예견의 진실7.1.4. 돼지띠
7.2. 불교 관련
7.2.1. 해석7.2.2. 결론
7.3. 명나라 관련
7.3.1. 주원장 관련7.3.2. 황제와의 사돈 논의
8. 기타9. 대중매체에서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1. 개요 [편집]

청룡 백호가 좌우에 둘렀는데 / 靑龍白虎左右邊
마치 호랑이가 바위에 걸터앉은 듯 / 山虎石上如蹲踞
공후며 부귀며 영화로운 세상 / 公侯富貴榮華世
일세를 통령한 대장군일세 / 出世統領大將軍
명예는 우레처럼 천하에 떨치고 / 雷振名譽天下遍
온 세상 막힘 없어 글과 수레가 사해에 통하였네 / 四海無防車書通
석 자 칼로 사직을 편케 하고 / 三尺劍頭安社稷
한 줄기 채찍으로 천하를 평정하였네 / 一條鞭末定乾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中', 영흥부 준원전 소장 태조어진의 뒷면에 적힌 글귀
고려말기 백전불패(百戰不敗)의 명장이자 조선왕조창업군주.

묘호는 태조(太祖), 성은 이(李), 초명은 성계(成桂)로,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에 이름을 단(旦)으로 개명하였다.[13] 대중적으로는 다른 역대 국왕과 달리 '태조'라는 묘호보다 '이성계'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다.[14][15] 후에 이른바 대한제국의 고종이 그를 황제로 추존하였다.

고려 말기, 불안정한 왕권과 권문세족의 횡포로 암울하던 현실에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신진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명분을 쌓은 뒤[16] 요동 정벌, 명나라 공격에 떠밀려 참전하여[17] 압록강 위화도까지 갔던 때 반란을 일으켜 역으로 고려 조정을 공격한 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우왕쿠데타로 몰아내고 4년 동안 권력 장악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공양왕을 쫓아내면서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고려를 뒤엎어버리고 새롭게 조선을 개국한다. 이성계의 책사이자 오른팔이었던 정도전, 조준 등과 함께 조선 왕조 500년의 기반을 닦았으나, 후계자 문제로 아들 이방원반란을 겪고, 권력에서 밀려나 씁쓸한 말년을 보낸 끝에 승하했다.[18]

조선 왕조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19](58세), 영조 다음으로 장수하고(74세),[20] 동시에 두 번째로 많은 나이(64세)까지 재위한 왕이다. 숙종이 60세[21], 중종선조가 57세, 고종이 56세, 세종대왕이 54세, 태종이 52세, 광해군이 49세, 정종은 44세까지만 재위했다. 영조는 31세에 즉위해서 훙서하기까지 약 52년간 호랑이 등을 탔다. 조선 왕 평균 수명이 47세 정도인데, 이성계는 47세에 동북면 도지휘사(외적 방어 군사지휘자)의 지위였고, 의안대군 이방석을 얻었다.

변방의 무인에서 시작하여, 외적과 맞서 싸워서 두각을 나타낸 끝에 결국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인생 자체가 사실상 한 편의 드라마 같았던 인물이기도 하다.[22]

2. 생애 [편집]

3. 시호, 묘호, 휘 [편집]

유교 예법상 제후국은 묘호를 올릴 수 없다. 천자의 칭호이니까. 시호도 스스로 올릴 수 없는데 이는 천자의 신하로서 천자가 주는 시호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23][24] 하지만 조선은 두 가지를 지키는 척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몰래 독자적인 묘호와 시호를 써서 태조(太祖) 포함 태조의 사대조에게 모두 천자의 묘호를 올리고 독자적 시호를 올렸다. 물론 명나라와의 외교에 있어서는 명나라가 준 시호를 철저하게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묘호는 절대 명에 알려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시호는 독자적으로 올리되 명 천자가 보내준 시호를 대표시호로 삼았다.[25] 그래서 조선이 올린 시호는 대표 시호로 삼지 않았고 명이 보낸 시호를 묘호 뒤에 대 자를 붙여 사용했다(묘호 + 명으로부터 받은 시호 + 대왕). 그래서 조선이 정한 공식 존호는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26] 하지만 청이 들어선 후 대표 시호를 아예 없애는 쪽으로 간다.

전조 고려처럼 굳이 조선의 자주적 묘호와 시호를 합쳐 부른다면 '태조 신무대왕(太祖神武大王)'이 된다.[27] 위대한 무장이었던 점을 감안해 올린 시호로 이성계의 두 아내들도 神 자 돌림 시호를 가지게 된다.[28] 군주와 아내의 시호를 맞추는 예법은 천자국의 예법으로[29][30], 태조 이성계에게만 이 예법을 적용하고 후대 국왕 왕후들은 시호를 맞추지 않았다.

조선조 역대 국왕의 자주적 시호 중 마지막 부분을 보면 태조 아래의[31] 모든 국왕이 '~효'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태종은 광효(光孝), 세종은 명효(明孝), 숙종은 원효(元孝) 등등. 이들은 태조의 자손으로 효성을 다해 국가를 이끌었다는 뜻으로 받은 것이다. [32]

종합하면 비록 태조의 대표시호는 명의 시호로 했지만, 조선은 시호 예법에 있어 해줄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바쳤다.

이후 대한제국이 열리고 대표시호를 바꾸었다. 함흥본궁의 위패엔 태조고황제라 쓰여있는데 이는 대표시호를 '강헌대왕'에서 '고황제'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 정식 시호는 명과 조선의 시호를 합친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1683년 정의광덕(正義光德)이 추가되어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이 되었고, 대한제국이 되면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증하며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인 '강헌(康獻)'을 뺐다. 그래서 최종 정식 시호는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33]

왕건과 마찬가지로 본명이 매우 대중에게 익숙하다. 그래서 대중적으로도 이성계나 태조 이성계라 많이 부른다. 오늘날에 많이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이태조(李太祖)'라고도 많이 불렸는데, 오늘날에도 장년, 노년층에서 이성계를 이태조라고 부르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실 이태조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고려 태조 왕건을 가리켜 '왕태조(王太祖)'라고 부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어감영 좋지는 않지만 일본어 잔재론 같은 명칭은 아니다. 다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 좋다.[34]

왕이 되면서 피휘 문제 때문에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개명했다.[35] 이성계의 성(成)자는 원래 이름으로 꽤 잘 쓰고, 일상적으로도 너무 자주 쓰이는 글자라서 아예 왕 본인이 갈아버린 것. 아침 단(旦)을 쓰고 있는데 조선에도 아침 조(朝)가 붙은 걸 보면 노린 듯. 피휘로 인해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는 단(旦)자의 日과 一 사이를 연결하는 짧은 획을 하나 더 썼고, 함부로 글자를 고칠 수 없는 경전에서 이 글자가 나올 때에는 원래 음 대신에 됴(=조)로 독음을 달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조차 군주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도 금기시 하기에 거의 불리지 않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인 것은 구한말의 일로 피휘를 할 필요가 없던 서양인들은 조선의 역사를 소개할 때 이단이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했다. 국내에서는 오랜 피휘의 역사 때문에 이단이라는 이름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역시 이성계라는 이름으로 주로 쓰인다.

여담으로 별호로 성조(聖祖)라고도 불리웠는데 1446년 세종용비어천가의 팔준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安堅)을 시켜 태조의 여덟 마리 말들을 그리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팔준도로 당시 세종은 이 팔준도에 대해 이듬해인 1447년에는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에서도 팔준도를 제목으로 하는 글을 짓도록 했다. 이 때 신숙주성삼문이 올린 글귀과 찬시들을 보면 당대 집현전 학사들이 '태조(太祖)'를 '성조(聖祖)'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들인 태종 이방원의 별호는 성종(聖宗)이었다.

4. 배우자와 자녀들 [편집]

  • 정비: 신의왕후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한씨(韓氏)[36]
    • 진안군 (鎭安君) 이방우(李芳雨) 태조 2년(1393년) 사망. 세종 19년 진한정효공(辰韓定孝公) 추증
    • 영안군 (永安君) 이방과(李芳果) 조선 제 2대 국왕 정종
    • 익안대군 (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 회안공 (懷安公) 이방간(李芳幹)
    • 정안공 (靖安公) 이방원(李芳遠) 조선 제 3대 국왕 태종
    • 덕안대군 (德安大君) 이방연(李芳衍)
    • 경신공주(慶愼公主), 하가(下嫁)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이애(李薆)
    • 경선공주(慶善公主), 하가(下嫁)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37]
  • 계비: 신덕왕후, 신덕고황후(神德 高皇后) 강씨(康氏)
    •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 - 태종 6년 공순군(恭順君)으로 추시, 숙종 대 무안대군으로 복권
    • 소도군(昭悼君) 이방석(李芳碩) - 태종 6년 소도군(昭悼君)으로 추시, 숙종 대 의안대군으로 복권
    • 경순공주(慶順公主), 하가(下嫁) 개국공신(開國功臣)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
  • 후궁: 성비 원씨(誠妃 元氏)[38]
  • 후궁: 정경궁주 유씨(貞慶宮主 柳氏)
  • 후궁: 화의옹주 김씨(和義翁主 金氏)[39]
    • 숙신옹주(淑愼翁主), 하가(下嫁)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
  • 후궁: 찬덕 주씨(贊德 周氏)
    • 의령옹주(宜寧翁主), 하가(下嫁)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
  • 후궁: 궁인 이씨(宮人 李氏)
  • 후궁: 무협아(巫俠兒)[40]

5. 사용한 무구 [편집]

5.1. 어궁구 [편집]

태조(太祖)는 대초명적(大哨鳴鏑)[41]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馴鹿)의 뿔로써 소리통(哨)을 만드니, 크기가 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젊었을 때 환조(桓祖)를 따라 사냥을 하는데, 환조가 화살을 뽑아서 보고 말하기를, "이는 (범상한) 사람이 쓸 수있는 물건이 아니다."고 하였다.

태조실록 태조 총서


이성계가 친히 사용했던 어궁구(御弓具)는 일제강점기까지 보존되었던 흔치 않은 활유물이었으며 사실상 조선 최고의 명궁으로 알려져 있다. 어궁구는 함흥의 조선 왕실 사당인 함흥본궁(咸興本宮)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불행히도 한국전쟁 중 함흥본궁이 불타버린 이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가 되었다.

5.2. 전어도 [편집]


이성계의 칼로 알려진 전어도(傳御刀)가 지금도 남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자루 부분의 길이가 길어서 사진으로 보면 어째 단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길이가 150cm에 육박하는 대검이다. 길이 중 1/3가량, 약 50cm가 자루부분이라 이라기 보다도 폴암 같은 느낌. 더불어 일부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역날검은 아닌데, 칼날은 일반적인 환도처럼 휘어진 바깥에 있고 칼끝만 반대 방향으로 생긴 것. 칼끝 부분에는 양쪽에 날이 있는지라 일종의 의사도라 볼 수 있다. 지금 전해지는 유물은 실제 이성계가 쓰던 칼은 아니고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이성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모방품이라고 한다.

전어도에 얽힌 출처불명의 야사는 전어도 항목을 참조하길 바란다.

5.3. 화살보다 빠른 말 [편집]

또한 정사가 아닌 야사에만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성계의 화살보다 빠른 말도 있다. 내용은 이성계가 젊은 시절 무예를 갈고 닦을때 어느 연못에서 튀어나온 한마리 용마가 있었는데, 이 용마는 몹시 사나워 아무도 길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이성계가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아무도 길들이지 못한 말을 길들이기에 성공해 자신의 말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후로 무예 연습을 계속하다가 자신의 말이 얼마나 빠른지, 그리고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기위해 과녁에 화살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을 따라잡기로 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전력질주로 과녁에 도착하자 화살이 이미 박혀있는걸 보고 말이 화살보다 느린것에 빡친 이성계는 말을 곧바로 죽여버린다. 하지만 과녁에 박혀있는 화살은 예전에 쏜 화살이었고, 말을 죽이자 자신이 쏜 화살이 날아와 과녁에 꽂히게 된다. 이걸 본 이성계는 자신의 급한 성격을 고쳤다는 훈훈한??? 이야기. 사실 이 이야기는 견훤의 설화로 상주시에서, 김덕령의 설화로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말이 화살보다 느리다고 막 죽여도 된다는 건 아니다.

5.4. 팔준마 [편집]

용비어천가에서는 8마리의 애마들도 확인된다. 이름은 각각 유린청, 횡운골, 추풍오, 현표, 발전자, 용등자, 응상백, 사자황이다. 이를 조선 왕실에서는 '태조의 팔준(八駿)'이라고 불렀는데, 동각잡기에 이 말들에 대한 간단한 내력도 기록되어 있다.
  • 유린청(遊麟靑=기린과 노니는 청마): 함흥에서 난 말로 제1차 요동정벌황산 대첩 때 이 말을 탔고, 전장에서 화살 세 대를 맞았으며 31살 때 죽었는데 장사지낼 때 석조(石槽)에 넣어 묻었다. 실제로 이성계는 황산 대첩 때 혼전 중에 말 두 필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쩌면 이 때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말만 유독 수명과 어떻게 장사지내줬는지까지 기록된 걸 보면 이 말이 이성계가 가장 아꼈던 말로 추정된다.
  • 횡운골(橫雲鶻=구름을 가로지르는 송골매): 여진산 말로 나하추와 싸울 때나 홍건적을 토벌할 때 탔다고 한다. 기록대로면 이성계가 가장 젊은 시절부터 활용했던 말이다.
  • 추풍오(追風烏=바람을 쫓는 까마귀): 여진산 말로 화살 한 대를 맞았다.
  • 발전자(發電赭=번개를 발하는 홍갈색 말): 안변에서 난 말.
  • 용등자(龍騰紫=용처럼 오르는 보라색 말): 단천에서 난 말로 해주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탄 말이며 화살 한 대를 맞았다.
  • 응상백(凝霜白=서리가 내린 백마): 제주산 말로 위화도 회군 때 탔던 말이다.
  • 사자황(獅子黃=사자 같은 누런 말): 강화 매도에서 난 말로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탔다.
  • 현표(玄豹=검은 표범): 함흥산 말로 토아동(兔兒洞)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탔다.

1446년 세종용비어천가의 팔준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이를 그림으로도 그려 건국의 자취를 남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림의 발견]안견의 팔준도(八駿圖) 이야기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安堅)이 태조의 여덟 마리 말을 그렸으며, 집현전 학사들은 찬문(撰文)을 붙였다. 이듬해인 1447년에는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에서도 팔준도를 제목으로 하는 글을 짓도록 했는데, 성삼문(成三問ㆍ1418~1456년)이 1등으로 뽑히기도 했다. 해당 그림은 임진왜란 이후 사라져서 현존하지는 않으나 숙종 대에 어느 사대부가에서 안견의 팔준도를 모사한 듯한 그림이 나와 그 그림을 모사했는데 이것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 화첩이다. 비롯 원본은 사라졌지만 그 당시 신숙주성삼문이 올린 글귀과 찬시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동문선 제44권 / 표전(表箋)

집현전 진 팔준도 전(集賢殿進八駿圖箋) /성삼문(成三問)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聖人)은 천 년의 운수를 맞추셨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馬] 같은 것이 없으며, 신물(神物)은 한 시대의 재능을 바쳤기로, 감히 새 그림을 만들어서 예감(睿鑑)에 올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면, 왕자의 작흥(作興)에 있어어도 역시 축산(蓄産)에 힘입어 성공하였습니다. 촉한(蜀漢)의 왕은 적로(的盧)를 타고서 능히 단계(檀溪)의 액(厄)을 면하였고, 금(金) 나라 태조는 자백(赭白)을 타고서 곧장 흑수(黑水)의 깊은 물을 건너갔으니, 진실로 큰 업이란 돌아갈 데가 정해져 있사오매, 미물(微物)도 또한 그 힘을 분발하는 것이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옵서 용맹은 하늘에서 타고나시고 부덕(副德)은 오직 날로 새로우시매, 고려의 운수가 끝날 무렵에 외부의 적이 자주 틈을 노리니 나라를 위하여 적개심을 품고 백성 보살피기를 상처입은 것을 대하듯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의기(義旗)를 한번 돌이키자 백성은 화난을 면하게 되었고, 신과(神戈)를 사방으로 휘두르매 삼한(三韓)은 청명한 세상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원근(遠近)이 지극한 인(仁)을 당적(當敵)할 길이 없었지만 근골(筋骨)은 먼저 크나큰 임무에 부지런하셔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시매, 몸은 상처에 피곤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당하여 세상에 이름난 인재만 용의 비늘에 붙어 절개를 다한 것이 아니오라, 기르는 짐승 같은 천물(賤物)까지도 제 몸을 바쳐 수고를 맡을 것을 알아서, 혹은 사냥터를 달리기도 하고, 혹은 싸우는 진중을 출입하여 주선(周旋)하는 데 힘을 다하고 걸음걸이는 사람을 따르는데, 그 크고 건장한 체격은 이미 익숙한 모습을 볼 만하고, 달리는 곳에는 앞설 놈이 없어 참으로 사생(死生)을 의탁할 만하더니, 마침내 그 장기(壯氣)를 발휘하여 큰 업을 이룩하는 데 도움되었으니, 어찌 영걸(英傑)만이 유독 능연각(凌煙閣)에 오르리오. 권기(權奇)로 소릉(昭陵)에 참열하게 된 것을 믿을 만하옵니다.

삼가 생각하오면, 도(道)는 생성(生成)에 흡족하시고, 공은 조화(造化)에 참예하시고,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시고 선대의 일을 잘 기술하시어 삼가 수성(守成)만 하시고, 선대의 공을 계승하시고 선대의 정책을 드러내어 창업(創業)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며, 사랑은 견(犬)ㆍ마(馬)에게도 버리지 않으시고, 신의는 돈(豚)ㆍ어(魚)에까지 미치며, 특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도찬(圖贊)을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모두 조전(雕篆)의 기술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온즉, 하물며 이 칭송이야. 바로 직분이옵기로 삼가 사적에 실린 것을 상고하고 겸하여 부로(父老)의 말을 채택하여, 화사(畵師)로 하여금 모형을 그리게 하고 졸한 글을 엮어서 공적을 기록했사오니, 터럭이 꼬부라진 한혈(汗血)은 완연히 당시의 용모와 같고, 늠름한 자태와 높은 공로는 거의 뒷사람의 안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상서로움은 하도(河圖)와 더불어 나란히 가고 노래를 지으면 천마가(天馬歌)를 누추하다며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한가한 틈이 나시오면 한 번 보아 주시옵소서. 그 덕을 칭찬하고 그 힘을 칭찬하지 않은 것은 선니(宣尼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랐고, 아들에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길이 성조(聖祖)의 공을 살필 수 있사옵니다.
동문선 제3권 / 부(賦)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申叔舟)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起業)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룰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元) 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倭寇)를 지리산(智異山)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德澤)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신숙주가 올린 팔준도에 대한 찬시】
'성인이 자리에 계셔, 삼가고 애쓰심이, 무릇 30년에
聖人在位<성인재위> 祗懼勵精<지구려정> 凡三十年<범삼십년>

정치와 교화가 훌륭하고 밝으사, 사방에 염려가 없고, 조야가 태평했다
治敎休明<치교휴명> 四境無虞<사경무우> 朝野晏清<조야안청>

이에 수성하기 어려움을 알고, 안락의 해독을 생각하여, 창업의 어려움을 추모하고
於是知守成之不易<어시지수성지불이> 念燕安之鴆毒<념연안지짐독> 追惟刱業之艱難<추유창업지간난>

성조의 크신 공적을 선양할 제, 여덟 준마의 미미한 것까지, 포장하여 높이는 축에 있게 하였다
敷揚聖祖之義烈<부양성조지의렬> 乃至八駿之微<내지팔준지미> 亦在褒崇之列<역재포숭지렬>

대저 준마의 태어남이, 신비롭고 기특하다
夫駿之生也<부준지생야> 神矣奇矣<신의기의>

방성이 정기를 받아, 용들이 새끼 낳으니, 힘차게 굼실굼실, 끊임없이 움직이며
房星委精<방성위정> 虬螭孕漦<규리잉시> 扶輿磅礴<부여방박> 蜿蟺逶蛇<완선위사>

그 기세 왕성하고, 명암이 뒤섞였고
氣化淋漓<기화림리> 晦明雜遝<회명잡답>

풍우처럼 멋대로 변화하고, 음양이 그 굽히고 폄을 좇아서
風雨恣其變化<풍우자기변화> 陰陽從其闢闔<음양종기벽합>

온갖 미를 교묘히 합성하여, 이 탁월한 천조물을 이루었으니
集衆美以妙合<집중미이묘합> 成此天機之卓犖<성차천기지탁락>

의젓하고 조용하며, 윤택하고 큼직하다
旣佶旣閑<기길기한> 孔阜孔碩<공부공석>

귀 늘리면 대를 쪼개논 듯, 굽으로 차면 우박을 흩으며
耳䏉批竹<이습비죽> 蹄蹴散雹<제축산박>

모난 걸음 구에 맞고, 둥근 걸음 규에 맞네
方者中矩<방자중구> 圓者中規<원자중규>

생긴 체격 현란하다, 누운 갈기. 일어선 갈기
姿格絢練<자격현련> 鬃䰕髬髵<종려비이>

껑충껑충 술렁술렁, 휙휙 저벅저벅
駓駓袪袪<비비거거> 翼翼騑騑<익익비비>

뛰는 모습 번개인 듯, 털빛도 찬란해라
電影回合<전영회합> 神光陸離<신광륙리>

머리를 내두르면 서늘바람 불어오고, 몸을 굼틀거리면 봄구름이 일어나네
駊騀而凉颸吹<파아이량시취> 躨跜而春雲起<기니이춘운기>

한 번 울매 서역 사막이 와스스하고, 두 번 울면 기북(冀北 말의 명산지)이 휩쓸어지나니
一鳴兮胡沙浙瀝<일명혜호사절력> 再鳴兮翼北風靡<재명혜익북풍미>

이런 말은 천백 중에 하나 둘, 기린과 봉황과 미를 견준다
如是者顧千百而一二<여시자고천백이일이> 將與麒麟鳳凰而並媺矣<장여기린봉황이병미의>

준마의 쓰임이, 지극하고 크다
若夫駿之用也<약부준지용야> 至矣大矣<지의대의>

나서부터 땅에 쓰여져, 천재일우의 좋은 만남
生爲地用<생위지용> 千載際會<천재제회>

놀랜 듯 나는 듯, 등등하게 날뛴다
若恤若失<약휼약실> 驕騰沛艾<교등패애>

싱싱하게 혼자 걷고, 굼실 높이 서며
騤騤獨步<규규독보> 蟜蟜卓立<교교탁립>

빠른 걸음 바람 치듯, 펄쩍펄쩍, 저벅저벅
馺x飄颺<삽x표양> 蹕蹳躞蹀<필발섭접>

항산ㆍ화산을 흙덩이인 양 지나가고, 강과 시내를 잔으로 마시는 듯하며
塊歷恒華<괴력항화> 杯飮河瀆<배음하독>

갈기는 가는 구름을 솔질하고, 꼬리는 유성을 갈기며
鬛刷行雲<렵쇄행운> 尾捎流星<미소류성>

먼지가 발굽에 묻지 않고, 그림자가 몸을 못 따른다
塵不識蹄<진불식제> 影不及形<영불급형>

진중에 힘 바치고, 굴레에 복종한다
輸勞行陣<수로행진> 服力銜勒<복력함륵>

수레 끌어 중한 소임으로 멀리 가건만, 오히려 힘보다 덕을 일컬은다
任重致遠<임중치원> 猶不稱力<유불칭력>

사람과 일심되어, 기특한 공적을 끝내 이루어
與人一心<여인일심> 卒成奇蹟<졸성기적>

명성을 드날리고, 단청으로 전한다
馳聲策名<치성책명> 功歸丹靑<공귀단청>

희어서 길이 후세에 썩지 않고, 천추에 향기를 끼치나니
垂永世而不朽<수영세이불후> 終萬古而揖餘馨<종만고이읍여형>

이런 말은 백대에도 만나기 어려운 것, 기린각ㆍ능연각과 명성을 같이 하리로다
如是者曠百代而難遇<여시자광백대이난우> 將與麟臺煙閣而同聲矣<장여린대연각이동성의>

어허, 준마의 태어남이, 기특하다, 신비하다
欷駿之生也<희준지생야> 奇矣神矣<기의신의>

말로 다하지 못하겠고, 어허, 준마의 쓰임이
不可陳矣<불가진의> 欷駿之用也<희준지용야>

크다 지극하다. 글로 적지 못하리니
大矣至矣<대의지의> 不可紀矣<불가기의>

하늘이 이런 신물을 낳은 것은, 천백년 대의 이적을 나타내어
此天之所以産<차천지소이산> 此神物顯異於世一千百<차신물현이어세일천백>

우리 조선의 천명받는 상등 상서를 짓고자 함이었네
曠百代而爲我朝鮮受命之上瑞者也<광백대이위아조선수명지상서자야>

생각건대, 금계(金鷄 신라)가 죽고 병록(丙鹿 여(麗)의 파자(破字), 고려)이 잃어지매
想夫金雞滅丙鹿失<상부금계멸병록실>

큰 운이 가고 나라의 맥이 끊겨, 하늘의 벼리가 끊어지고
大運去國脈絕<대운거국맥절> 天網斷維<천망단유>

동녘 땅이 함몰하여, 간신들이 안에서 뽐내고
東土汨沒<동토골몰> 奸回內贔<간회내비>

도적이 사면에서 날뛰고, 북풍이 모래를 휘몰아치고
寇賊四軼<구적사질> 朔風吹沙<삭풍취사>

흑수가 물결을 날려 들리느니, 땅땅 북소리
黑水揚波<흑수양파> 鏜鏜鼙鼓<당당비고>

도처에 칭칭 징라 소리, 서로 깨물고 물어뜯고 아지직
鉿鉿鉦鑼<협협정라> 窫窳叩吻<알유고문>

박박 이를 갈아, 피가 흘러 개울처럼
鑿齒磨牙<착치마아> 殷血瀎㴽<은혈말설>

백골이 쌓여 산 같으며, 집은 모두 타서 잿더미되고
白骨嵯峩<백골차아> 居室化爲煨燼<거실화위외신>

마을이 변하여 싸움터되어, 변방 땅은 폐허되고, 도성은 황지되었네
邑井變爲戰場<읍정변위전장> 邊徼丘墟<변요구허> 神州榛荒<신주진황>

이에 이르러 세도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화가 극했으니
至是而世道之亂<지시이세도지란> 生民之禍極矣<생민지화극의>

성인이 아니면, 누가 이를 건져낼꼬
不有聖人<불유성인> 孰濟墊溺<숙제점닉>

그때에 우리 태조, 천재일우의 운을 타고 나사
時維我祖<시유아조> 運値千一<운치천일>

세상에 드문 신자와, 하늘이 주신 용지로
神姿絕世<신자절세> 勇智天錫<용지천석>

만성의 무고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세의 유업을 분연히 일으켜
愍萬姓之無辜<민만성지무고> 奮四世之遺業<분사세지유업>

북두를 응하고 천관을 나르며, 건곤의 추축을 휘둘리어
順斗極而運天關<순두극이운천관> 旅乾樞而轉坤軸<려건추이전곤축>

위무를 떨치고, 풍뢰를 질타하여
伸威奮武<신위분무> 叱風咤雷<질풍타뢰>

창끝이 가리키는 곳, 썩은 가지 꺾어지듯
天戈攸指<천과유지> 若朽斯摧<약후사최>

홍건적이 달려들어, 성읍을 쳐부수고
紅寇豕突<홍구시돌> 殘城破邑<잔성파읍>

뽐내고 으르릉대어, 멋대로 살륙하여
憑陵咆咻<빙릉포휴> 恣其燔炙<자기번자>

종사가 불바다 되고, 군왕은 파천했었다
宗社焚蕩<종사분탕> 乘輿播越<승여파월>

그때 우리 성조께서, 용맹을 뽐내어 깃발을 휘두르고
維我聖祖<유아성조> 賈勇振節<가용진절>

활을 들고 앞장 서서, 친병을 휘몰아 적을 치니
握蝥弧而先登<악모호이선등> 麾親兵而餌敵<휘친병이이적>

흉도들이 서로 짓밟아서, 수급이 십만이라
兇徒自蹈<흉도자도> 十萬其級<십만기급>

손의 칼로 마구 찍고, 말이 뛰어 성을 넘어
手劒縱斮<수검종착> 躍馬踰城<약마유성>

도망하는 놈들을 뒤쫓으니, 도적이 이에 평정되었다
追奔逐北<추분축북> 賊遂以平<적수이평>

납씨가 교활하여, 사나움을 막 부리고
納氏老猾<납씨로활> 逞其猩獰<령기성영>

변방의 간민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을 못 살게 굴며
䏈我邊奸<䏈아변간> 虐我邊氓<학아변맹>

막 죽이고 싹 베면서, 홍원까지 이르러서
䖍劉芟刈<䖍류삼예> 至于洪原<지우홍원>

그 세가 치열하여, 깨물어 삼킬 뜻이었다
厥勢孔熾<궐세공치> 志在噬吞<지재서탄>

그때에 우리 성조는, 지혜를 내고 기회를 타
維我聖祖<유아성조> 運智應機<운지응기>

단기로 내쳐 나아가서, 장수를 베고 기를 뺏으며
單騎梃進<단기정진> 斬將搴旗<참장건기>

입을 쏘고 겨드랑이를 쏘아, 마른 가지 꺾듯 수염 뽑듯
射口射腋<사구사액> 拉槁摘髭<랍고적자>

적이 여러 번 패전에 움츠러져, 도망가 숨만 붙어
累敗窮縮<루패궁축> 犇竄假息<분찬가식>

교활한 놈 넋을 잃고, 종신토록 심복했다
老猾褫魄<로활치백> 終身心服<종신심복>

머나먼 저 동녕은, 망한 원 나라 잔당이다
漠彼東寧<막피동녕> 亡元之蘖<망원지얼>

초황령(草黃嶺 함흥에 있다)ㆍ설한령(薛罕嶺 강계에 있다)이, 높이 솟아 험하였고
草黃薜罕<초황벽한> 與天盤折<여천반절>

출렁거리는 압록강이, 남북으로 경계했었다
鴨江澎濞<압강팽비> 限彼南北<한피남북>

고려 왕(王 우왕)이 태조께 명하여, 먼 땅을 회복하라커늘
王命我祖<왕명아조> 圖恢遠略<도회원략>

원수로서 출정할 제, 위령이 떨쳤었네
元戎啓行<원융계행> 威靈震疊<위령진첩>

하늘에 뻗친 자색 기운이, 점사에도 나타났고
漫空紫氣<만공자기> 占辭攸屬<점사유속>

말똥구리가 바퀴를 막은 듯이, 기를 바라보자 적이 갑옷을 벗고 항복했네
螳臂拒轍<당비거철> 望旗釋甲<망기석갑>

완악한 추장이 잘못을 고집하면서, 오히려 올라성을 보호하려 하였네
頑酋執迷<완추집미> 猶保兀刺<유보올자>

저 올라성은, 천생 험준한 곳
維彼兀刺<유피올자> 峻嶮天設<준험천설>

만장 절벽에, 성무 한 번 번쩍이매
峭壁屹屹<초벽흘흘> 聖武赫赫<성무혁혁>

성중이 저희끼리 궤멸되고, 사면으로 나와 항복하여
孤城中潰<고성중궤> 降附四集<강부사집>

와글와글 부산함이, 불나방이 촛불에 날아들 듯
霍繹紛泊<곽역분박> 宵蛾赴燭<소아부촉>

덕과 위엄이 멀리 퍼져, 북방을 완전히 토평했다
仁威遠暢<인위원창> 克淸朔漠<극청삭막>

머나먼 저 동해는, 섬 오랑캐 소굴
逖彼東溟<적피동명> 島夷之窟<도이지굴>

배 타기에 나고 자라, 사납고 영리하며 날쌔고 빨라
生長舟揖<생장주읍> 猂黠飄疾<한힐표질>

죽음에 나아가기를 집에 돌아가듯, 이만 쫓아 다니는 터
視死如歸<시사여귀> 維利是逐<유리시축>

쥐 도적질ㆍ개 도적질, 우리 해변의 틈서리로 쳐들어와
鼠竊狗盜<서절구도> 投我邊隙<투아변극>

돛대가 바다를 덮고, 배들이 마치 베를 짜는 듯
帆竿蔽海<범간폐해> 舳艫如織<축로여직>

왕이 태조께 명하여, 성화같이 달려가 치게 하니
王命我祖<왕명아조> 星馳往擊<성치왕격>

적의 무리 구름처럼, 지리산 옆에 진쳤겠다
賦徒雲屯<부도운둔> 智異之側<지이지측>

우리 무용 드날릴 제, 한 살[矢]에 적이 기가 질려
我武惟揚<아무유양> 一箭氣奪<일전기탈>

낭패하여 도망쳐, 험한 곳에 몰려 지켜
敗覆狼狽<패복랑패> 就險自固<취험자고>

깎은 듯한 절벽에, 검과 창이 섞여 쏟아지거늘
峻崖嶙峋<준애린순> 劒槊交注<검삭교주>

흰 칼을 빼어들고 말을 채찍질하니, 붉은 번갯불이 해에 번쩍
白刃鞭馬<백인편마> 紫電干日<자전간일>

준마 한 번 솟구쳐 오르니, 천 척 절벽이 평지인 듯
駿騰一躍<준등일약> 險失千尺<험실천척>

칼을 맞고 떨어지는 적이, 골짜기를 채우고 메워
迎刃崩墜<영인붕추> 塡坑滿谷<전갱만곡>

태산에 눌린 알과 같이, 씨도 없이 다 죽었네
若山壓卵<약산압란> 靡有遺孑<미유유혈>

섬 오랑캐 회개치 못하고, 또 관서에 입구(入寇)하여
島夷罔悛<도이망전> 又寇關西<우구관서>

신천ㆍ문화ㆍ안악ㆍ봉산이, 모두 다 어육되고
信文安鳳<신문안봉> 毒慘鯨鯢<독참경예>

여러 장수들 달아나서, 적의 칼을 못 막았네
諸將奔潰< 제장분궤> 鋒莫敢嬰<봉막감영>

성조(태조)께서 명을 받아, 동정에서 싸우실 제
聖祖受命<성조수명> 戰于東亭<전우동정>

싸움이 한창일 때, 진흙에 빠졌으나
方事之殷<방사지은> 阻于泥淖<조우니뇨>

준마 한 번 치뛰니, 대번에 솟구쳐 나와
龍駒蹀足<룡구접족> 一奮而趒<일분이조>

활시위 소리 나자 떨어지는 열일곱 놈, 모두 왼눈 맞았었네
應弦十七<응현십칠> 皆左其目<개좌기목>

적이 놀라 흩어지며, 저희들끼리 짓밟는 꼴
賊駭而散<적해이산> 爭相轥轢<쟁상인력>

성조께서 말에서 내려, 술마시며 풍악을 치니
聖祖下馬<성조하마> 命酒張樂<명주장악>

남은 적들 험한 데 가서 몰려 의지했다가, 세가 궁하여 충돌하매
遺燼投險<유신투험> 勢窮衝突<세궁충돌>

쏘는 살이 자리 앞에 무수히 떨어져도, 의기가 태연자약
矢集坐前<시집좌전> 意氣自若<의기자약>

천천히 휘하에 명하시와, 남은 적을 섬멸했다
徐命麾下<서명휘하> 遂殲餘賊<수섬여적>

섬 오랑캐 회개치 못하고, 또 남도에 침범했네
島夷岡悛<도이강전> 又寇南道<우구남도>

험함도 지킬 틈 없고, 성도 보전할 겨를이 없어
嶮不睱守<험불하수> 城不睱保<성불하보>

무인지경같이 치고 함락하여, 풀처럼 베며 깎으며
攻陷若空<공함약공> 芟薙如草<삼치여초>

여러 고을을 무찌르고 불사르며, 운봉까지 이르렀네
屠燒州郡<도소주군> 至于雲峯<지우운봉>

성조께서 명을 받아, 흉적을 쓸기 맹세하니
聖祖受命<성조수명> 誓掃頑凶<서소완흉>

정성이 해를 꿰어, 흰 무지개 뻗었었네
精誠貫日<정성관일> 有白其虹<유백기홍>

천 리가 폐허되고, 강시만이 쌓였거늘
千里索漠<천리색막> 僵屍相積<강시상적>

성조께서 측은하사, 침식을 폐하셨네
聖祖惻然<성조측연> 爲廢寢食<위폐침식>

이에 여러 장수를 독촉하여, 인월역에서 싸우실 제
乃督群帥<내독군수> 戰于引月<전우인월>

위무를 드날려서, 사졸의 앞장 서서
振威耀武<진위요무> 身先士卒<신선사졸>

적진을 함락하고 포위를 무너뜨려, 날랜 장수(왜장 아지발도(我只拔都))를 쏘아 죽이니
陷陣潰圍<함진궤위> 殪彼驍將<에피효장>

적군이 칼날이 꺾여져서, 감히 못 대항했네
鋒摧刃折<봉최인절> 莫我敢抗<막아감항>

온 나라가 기뻐하여, 개선가로 맞이했었던 것이다
擧國欣歡<거국흔환> 迎我凱唱<영아개창>

섬 오랑캐 또 개전치 않고, 또 함흥과 홍원에 침범해서
島夷罔悛<도이망전> 又寇咸洪<우구함홍>

고래처럼 날뛰고 미친개처럼 충돌하니, 여러 군이 소문만 듣고 달아나서
鯨奔猘突<경분제돌> 諸軍望風<제군망풍>

싸움도 한 번 못해보고, 양이 범에게 물리는 듯
不敢交綏<불감교수> 若虎驅羊<약호구양>

왕이 명하여 평정하게 하니, 성조께서 나가셨다
王命于襄<왕명우양> 聖祖是將<성조시장>

일곱 살[矢]로 승리를 점치니, 군중이 환호했다
七箭卜勝<칠전복승> 軍中歡呼<군중환호>

지세를 보아 복병을 두고, 고삐를 늦추어 천천히 나가다가
因地設伏<인지설복> 按轡徐移<안비서이>

취라로 적을 놀래니, 적이 간담이 떨어져서
螺聲讋賊<라성섭적> 破膽裂腑<파담렬부>

고기가 솥에서 노닐 듯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거늘
魚游於鼎<어유어정> 東西相聚<동서상취>

성조께서 여유를 보이고자, 안장을 끌러놓고
聖祖示閑<성조시한> 從容解鞍<종용해안>

오라고 유인하여, 냅다 싸워 진퇴할 제
誘致其來<유치기래> 轉戰盤桓<전전반환>

사면의 복병이 일어나니, 적군이 모두 그물 안에 떨어져서
四伏並起<사복병기> 若隳于羅<약휴우라>

뛰어 무너지고 서로 짓밟아, 송장이 너저분, 그리하여 동해변이 내 산 되고 내 언덕 되었네
奔崩蹂躡<분붕유섭> 籍籍他他<적적타타> 我岡我陵東海之阿<아강아릉동해지아>

대명이 장차 바뀌려 하니, 하늘이 우왕의 넋을 빼앗아서
大命將革<대명장혁> 天奪其衷<천탈기충>

저 앙큼스러운 애(우왕)가 자량치 못하고, 숫제 큰 나라를 공격코자
彼狡不量<피교불량> 大邦是攻<대방시공>

6월에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지향하니
六月稱兵<륙월칭병> 指遼之東<지료지동>

뭇 신하들 위태로이 여기고, 인심이 흉흉한데
群寮岌岌<군료급급> 萬姓洶洶<만성흉흉>

간절히 충고하나, 이 귀먹어 못 들은 체
告之雖切<고지수절> 聽我若聾<청아약롱>

외로운 섬에 군사를 주둔하니, 마침 큰 장마 져서
屯兵孤島<둔병고도> 霜潦澒浵<상료홍동>

진퇴가 난처하고, 온 군사가 다 불평했다
進退維谷<진퇴유곡> 大小悉恟<대소실흉>

성조께서 의를 드시니, 흰 깃살에 붉은 활
聖祖擧義<성조거의> 白羽彤弓<백우동궁>

만 사람이 경하하여, 서로 도모하지 않으나 한마음이었으며
萬口相慶<만구상경> 不謀而同<불모이동>

멀리 야인(野人 여진)까지, 천 리 길에 따라왔으며
爰至野人<원지야인> 千里影從<천리영종>

늙은이ㆍ어린이 손을 잡고, 미음 그릇 들고 맞았으며
老幼相携<로유상휴> 壺漿以迎<호장이영>

사특한 것들 숙청할 제, 시정도 안 놀랬네
蕩滌邪穢<탕척사예> 巿肆不驚<불사불경>

난을 헤치고 반정하여, 병기를 다 거두니
拔亂反正<발란반정> 戢武韜兵<집무도병>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했네, 무릇 이 몇몇 일은
國以之定民以之寧<국이지정민이지녕> 凡是數者<범시수자>

다 우리 태조의 크고 높으신 공적이, 탁월히 성취된 것
寔皆我太祖豐功峻烈<식개아태조풍공준렬> 卓卓有成者也<탁탁유성자야>

깊고 두터운 은택이, 생령들에게 젖어든 것
深恩厚澤<심은후택> 浹于生靈者也<협우생령자야>

경을 쌓고 덕을 심어, 뿌리가 깊고 근원이 멀어
積慶樹德<적경수덕> 根深源遠<근심원원>

후세 자손들이 천만억 년간 의지할 바, 그러나 이것들은 다만 그 대략일 뿐
而爲後世子孫千萬億載之所憑者也<이위후세자손천만억재지소빙자야> 然此亦特其大略耳<연차역특기대략이>

예컨대 저 달천의 이김과, 철관의 승전
如㺚川之勝<여달천지승> 鐵關之捷<철관지첩>

해풍의 싸움과, 요양을 함락시켰음 등
海豐之戰<해풍지전> 遼陽之拔<료양지발>

크고 작은 여러 싸움에, 가는 곳마다 이겼으니
大小百戰<대소백전> 所向輒克<소향첩극>

이것이 비록 신성한 무략에서, 어찌 사람의 힘으로 미칠 것인가
此雖出於聖武神略<차수출어성무신략> 亦豈人力之所能及哉<역기인력지소능급재>

그때에, 용맹 있는 무사들과
于斯時也<우사시야> 材勇之士<재용지사>

지략 있는 사람으로서, 일기와 일능이 있으면
智謀之彦<지모지언> 苟有一技一能<구유일기일능>

각기 재주를 바치며 경쟁하여, 용의 비늘을 잡고 봉의 날개에 붙어
各爭售而竸扇<각쟁수이경선> 攀鱗附翼<반린부익>

앞뒤에 분주하며, 많이 모여 있고
奔走後先<분주후선> 叢叢林林<총총림림>

이리저리 움직이며, 좌우로 잡고 손을 끌어
紜紜紛紛<운운분분> 左右提挈<좌우제설>

함께 대훈을 협찬하였으니, 대개 하늘이 성인을 내어 어려운 시국을 구하려면
共贊大勳<공찬대훈> 蓋天之生聖人以救時艱也<개천지생성인이구시간야>

반드시 영웅ㆍ호걸들을 내어 그를 좇게 하고
必生英雄豪傑以爲之從<필생영웅호걸이위지종>

또한 반드시 좋은 상서ㆍ신령한 물건을 내어 그로 하여금 쓰게 함이다
亦必生休祥神物以濟其用<역필생휴상신물이제기용>

이로 보면 여덟 준마가 났음은, 곧 하늘의 뜻이요
此八駿之生<차팔준지생> 乃天意也<내천의야>

모두 우리 태조께서 일어나실 것을 도움이었다, 막상 두 진이 교전하려
而無非所以佑我太祖之興者也<이무비소이우아태조지흥자야> 方其兩陣交綏<방기량진교수>

북소리 쾅쾅 울리고, 살기가 하늘을 찌르며
鼖鼓雷轟<분고뢰굉> 殺氣干天<살기간천>

풍운이 첩첩할 때, 기특한 꾀와 임시의 변통으로
陣雲屛屛<진운병병> 出奇制變<출기제변>

기회를 다투고 형세를 노려, 장사와 용사들이
爭機竸角<쟁기竸각> 壯士猛夫<장사맹부>

곰같이 잡고 범처럼 할퀴며, 서릿발 같은 칼과 창에
熊挐虎攫<웅나호확> 白刃霜磨<백인상마>

빗발처럼 떨어지는 화살들, 수선거리기는 들끓어서
飛鏃雨落<비족우락> 紛紜沸渭<분운비위>

구름이 뭉치고 벼락이 터지는 듯, 천만 군병이 와아 와아 소리치고
雲合霆發<운합정발> 濱駍駖礚<빈평령개>

가로 세로 뒤섞여 맞붙어, 성패가 잠깐 사이에 달리고
縱橫膠臈<종횡교랍> 成敗懸於俄頃<성패현어아경>

생사가 순식간에 결정될 때, 늠름하신 성조께서
生死決於呼吸<생사결어호흡> 桓桓聖祖<환환성조>

매처럼 날치시어, 이리 치고 저리 치면, 그 앞에 당할 자 없네
奮我鷹揚<분아응양> 馳堅突衆<치견돌중> 所指無疆<소지무강>

벼락과 번개가, 불을 토하듯 채찍을 갈겨
霹歷列缺<벽력렬결> 吐火施鞭<토화시편>

만 사람이 모두 뒷걸음치매, 혹은 마음대로 출입하네
萬人辟易<만인벽역> 肆意周旋<사의주선>

민첩하고 재빠르게, 안개가 흩어지고 연기가 사라지는 듯
焂䎶倩浰<숙이천리> 霧散煙銷<무산연소>

찬 서리를 날려 나뭇잎을 지게 하고, 맹렬한 불에다가 털을 태우는 듯
飛嚴霜而脫葉<비엄상이탈엽> 擧烈火以燎毛<거렬화이료모>

거기 맞닥치는 자 어느 강함이 안 꺾이며, 거기 부딪치면 어느 굳음이 안 부숴지리
當之者何剛不折<당지자하강부절> 觸之者何堅不碎<촉지자하견불쇄>

파죽지세로도 그 형세를 비유치 못할 것이요, 돌을 굴림으로도 그 쾌함을 논하지 못할지니
破竹不足以諭其勢<파죽부족이유기세> 轉石不足以論其快<전석불족이론기쾌>

대개 세상에 없는 큰 자질을 가진 분은, 마땅히 비상한 천명을 받는 법이요
蓋有不世之資者<개유불세지자자> 當受非常之命<당수비상지명>

세상에 없는 큰 공을 세우는 이는, 마땅히 비상한 경사를 누리게 마련이다
建不世之功者<건불세지공자> 當享非常之慶<당향비상지경>

우리 태조께서 쇠란의 때를 만나, 하늘이 주신 성으로써
我太祖値衰亂之季<아태조치쇠란지계> 以天縱之聖<이천종지성>

애쓰심이 지극하셨고, 공업이 다툼이 없어
勤勞旣至<근로기지> 勳業無竸<훈업무경>

위엄이 임금을 떨게 하고, 공이 상을 초월했으니
威挾震主<위협진주> 功戴不賞<공대불상>

천명이 돌아가는 곳, 인심이 모두 우러러서
惟天命之<유천명지> 所歸亦人心之所仰<소귀역인심지소앙>

드디어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하여, 끝내 집을 변화하여 나라를 이룩하고
遂應天而順人<수응천이순인> 終化家而爲國<종화가이위국>

당세의 남은 덕택을 펴시어, 길이 만세토록 흘리셨으나
演當世之餘澤<연당세지여택> 流萬葉而不渴<류만엽이불갈>

맨발로 뜀은 원래 무를 연습하는 것이요, 벽돌을 나름은 수고를 단련하는 것이므로
然跣躍所以習武<연선약소이습무> 運甓所以肄勞<운벽소이이로,

)한가하신 때 사냥을 납시니, 거저 놀이가 아니었다
因閑圍獵<인한위렵> 匪以遊遨<비이유오>

때로 벌판을 달리고, 다음 언덕을 지나
時聘廣漠<시빙광막> 乃歷林皐<내력림고>

혹은 벌과 산이 일[起]락 엎드락한 데로, 혹은 언덕이 구불구불 이은 데로
原隴起伏<원롱기복> 丘陵牽聯<구릉견련>

혹은 진펄이 울툭불툭, 밑에는 깊은 소
罷池陂陁<파지피타> 下屬于淵<하속우연>

혹은 깎아지른 듯한 석벽, 하늘에 달린 듯한 뵈는 산은 끝으로
石壁神截<석벽신절> 脩崖天懸<수애천현>

혹은 격한 여울이 못을 이루어, 늠실늠실
激湍成澤<격단성택> 浩汗㶀䔽<호한교애>

서미도 주검을 못 남기고, 열자도 발을 디디지 못할 곳으로
胥靡不能以遺死<서미불능이유사> 御寇不能以展足<어구불능이전족>

혹 큰 못에 다다르면, 갈대가 우거지고
或臨大澤<혹림대택> 蒹葭蓊鬱<겸가옹울>

얼음이 갓 얼었는데, 가벼운 비단을 엷게 편 듯
淵冰初合<연빙초합> 輕羅布薄<경라포박>

맹수가 안 보이는 데 엎드렸다가, 변이 재갈에 나기도 하고
猛獸蔽伏<맹수폐복> 變生銜橜<변생함걸>

혹 얼음판이 기울고 미끄러운데, 혹은 태산 준령이
或當冰坂傾側險滑<혹당빙판경측험활> 或當峻嶺<혹당준령>

드높고 가로질려, 새 짐승이나 살 곳
峌X嶻㠔<질X절배> 飛走之所栖托<비주지소서탁>

인적이 못 미칠 데를, 우리 성조께서는
人迹之所不及<인적지소불급> 維我聖祖<유아성조>

고삐를 놓고 왕복하사, ‘앞으로 가라’ 하면 나아가고
縱轡往復<종비왕부> 曰前而前<왈전이전>‘

물러가라’ 하면 물러나서, 도에 맞는 일거일동이
曰却而却<왈각이각> 周旋合度<주선합도>

좌로 우로 척척 맞아, 별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이르며
左右中節< 좌우중절> 星流歘至<성류훌지>

공처럼 구르고 번개같이 번뜩여, 화살을 헛되이 놓는 법이 없고
圜轉電掣<환전전체> 矢不虛散<시불허산>

맞추면 꼭 눈알을 뚫어, 길짐승은 언덕에 머리 두고 화살을 받고
中必決眥<중필결자> 走獸首丘而斂羽<주수수구이렴우>

나는 새는 공중에 돌다가 피를 뿌리니, 왕량(王良 명기사)ㆍ조보(造父 명기사)의 무리와
飛禽盤空而洒血<비금반공이쇄혈> 王良造父之徒<왕량조부지도>

분ㆍ육ㆍ오획(烏獲 이름난 장사들)의 무리들도, 손을 여미고 숨을 헐떡이며
賁育烏獲之屬<분육오획지속> 斂手喘息<렴수천식>

앞에 와서 굴복하리니, 이는 비록 성인의 신무이나
邀瓻受誳<요치수굴> 是雖聖人之神武<시수성인지신무>

또한 준마의 위대한 공적이다, 저 깎아지른 절벽, 둘러 빠지는 진흙구렁 속에서
抑亦神駿之偉績<억역신준지위적> 當其懸崖峻絕泥淖束阸<당기현애준절니뇨속액>

위험이 경각 창졸 간에 닥쳤을 때, 제 아무리 모사와 맹장으로도
危在頃刻倉卒之際<위재경각창졸지제> 縱有謀臣猛將<종유모신맹장>

제 재주를 부릴 틈이 없겠으니, 이로 보면 준마가 성체를 붙들고 보우함이
亦無所措其技矣<역무소조기기의> 是則神駿之扶佑聖躬<시즉신준지부우성궁>

혹 사람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전하께서 여덟 준마를 그림에 거두어서
或有非人之所可企者也<혹유비인지소가기자야> 此我殿下之所以收八駿於繪事<차아전하지소이수팔준어회사>

썩은 뼈에게도 신공을 생각하심이니
錄神功於腐骨者也<록신공어부골자야>

이는 대개 효자는 어버이가 사랑하시던 개와 말을 잊지 않음이요
兹蓋孝不遺於犬馬<자개효불유어견마>

교훈은 후손을 편안하게 하려고 남겨, 명과 함께 궤석에 붙여 놓고
謨乃恢於燕翼<모내회어연익> 嫓嚴銘於几席<嫓엄명어궤석>

간절한 경계를 썩은 밧줄에 두심이요, 이제 보건대 새 그림이 하늘에서 내려 펼친 듯
存切戒於朽索<존절계어후색> 觀夫新圖天闢<관부신도천벽>

끼친 빛이 번쩍하니, 바람과 서리가 비단에 일고, 조화가 붓에 생겨
遺光儵爚<유광숙약> 風霜起練<풍상기련> 造化生筆<조화생필>

이미 죽어서 흙 속에 파묻힌 모습을 일으켜, 일세의 위관을 솟구쳤네
起塵土之幽姿<기진토지유자> 聳當世之觀覿<용당세지관적>

형모는 아스름하나, 기상은 늠름, 구름을 가로 지르고 바람을 쫓는 듯
形貌靉靆<형모애체> 氣象鬱勃<기상울발> 橫雲追風<횡운추풍>

번개가 치고 서리가 엉긴 듯, 기린이 놀고 용이 뛰어오르며
發電凝霜<발전응상> 麟游龍騰<린유룡등>

표범은 검고 사자는 누른 듯, 놀이 겹치고 비단을 쌓은 듯
豹玄獅黃<표현사황> 重霞累錦<중하루금>

빛나는 비단에 함께 그려 보물들이 나란히, 공이 같은 다른 놈들이
沓璧連璋<답벽련장> 同功異體<동공이체>

서기를 모으고 상서를 드날리며, 위풍이 늠름하고
集瑞騰祥<집서등상> 威風懍懍<위풍름름>

기염이 당당한데, 백전에 상한 흔적, 아직 살촉이 박혀 있고
峻焰煌煌<준염황황> 百戰瘢耆<백전반기> 尙帶遺鏃<상대유족>

드날리며 날치던 자태, 어제런 듯 여실하매
搶攘之態<창양지태> 視之如昨<시지여작>

장한 기운에 보는 사람 기가 질려, 간담이 서늘, 머리가 쭈뼛
壯氣讋人<장기섭인> 膽寒髮立<담한발립>

놀라 달아난 혼과 넋이, 며칠 만에야 진정될 듯
魂驚魄褫<혼경백치> 彌日而定<미일이정>

이는 다만 여덟 준마의 재강일 뿐으로, 오히려 사람의 시청을 움직이거늘
此特八駿之糟粕<차특팔준지조박> 尙能動人之視聽<상능동인지시청>

당시의 기상을 상상하면, 천년 뒤에도 경의를 일으키리
想當時之氣像<상당시지기상> 隔千齡而起敬<격천령이기경>

이는 신령한 물건의 극치이나, 사람에 있어서도 쉽지 않다
是神物之極致<시신물지극치> 在夫人而亦不易<재부인이역불역>

하필 몸에 날개가 돋치고 그림자가 열이어야, 기이타 할 것인가
又何必肉趐十影<우하필육혈십영> 然後始爲之異哉<연후시위지이재>

아아, 물건이 각기 만남이 있고, 만남이 각기 때가 있나니
嗚呼<오호> 物各有遇<물각유우> 遇各有時<우각유시>

나서 만나지 못하면, 소금 수레에 곤욕을 당하고
生不得遇<생부득우> 則鹽車自足相困<즉염차자족상곤>

만남의 때를 못 얻으면,북 수레에 매어지기 족할 뿐이요
遇不得時<우부득시> 則鼓車徒足見縻<즉고차도족견미>

혹 의장에 참예해 섰더라도, 한갓 콩이나 조나 먹고 배부를 뿐
雖或參於立仗<수혹참어립장> 亦空飽於豆粟<역공포어두속>

한 번 크게 울려 해도,끝내 맘대로 안 되는 것
苟欲一鳴<구욕일명> 終不可得<종불가득>

이제 이 여덟 준마는, 그 출생이 마침 성조께서 용처럼 일어나실 때였고
今夫八駿<금부팔준> 其生也當聖祖之龍興<기생야당성조지룡흥>

그 죽은 뒤에도 성주(聖主 세종)의 추념을 의탁하여, 때를 만나고 의탁할 곳을 얻었으니
其死也托聖主之追念<기사야탁성주지추념> 得時遇而得托<득시우이득탁>

마땅히 영세토록 유감이 없을지로다, 부를 마치고 또 노래하여 이르되
宜永世而無憾<의영세이무감> 賦已復爲之謌曰<부이부위지가왈>

어허, 용인 듯 준마의 새끼, 하늘이 주셔서 내려왔도다
若有龍兮驥之子<약유룡혜기지자> 其之來兮天所俾<기지래혜천소비>

풍운을 일으키고 뇌우 달릴 제, 어허. 준마여, 용의 벗일세
風雲澀譶兮雷雨走<풍운삽답혜뢰우주> 若有駿兮龍之友<약유준혜룡지우>

살아서 신이 있고 죽어서 이름이 있다, 어허, 준마로고, 용의 정일세
生有神兮死有名<생유신혜사유명> 若有駿兮龍之精<약유준혜룡지정>

이름이 만고에 변치 않으니, 어허. 준마여. 용의 무릴세'

6. 평가 [편집]

6.1. 당대의 평가 [편집]

조선 왕조의 개국자였기에 조선 시대에 쓰인 기록에서는 행적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신격화도 많은 편이지만, 전반적인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천하 제일의 명궁이요 당대 동아시아 최강의 용사인 동시에 전설적인 명장이었다. 또한 적이나 오랑캐라고 해서 무조건 뚜드려잡지 않고 가능한한 항복시켜 부하로 포섭하는 관대한 덕장의 면모도 있었다. 가히 난세에는 영웅이라 할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왕으로서는 행정이나 정책적으로 정도전, 조준 등을 재상으로 세우고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6.2. 고려 말의 토지겸병 문제 [편집]

대표적으로 고려 말의 재정 파탄을 초래했고, 전시과의 붕괴를 가져온 고려 말의 토지겸병 문제 해결이 바로 이성계의 대표적인 개혁이자 업적들 중 하나인데 고려 말의 지배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발생한 이 토지 겸병의 문제는 이후 권문세족들의 끝없는 토지겸병 확대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족들이 가진 농장의 비정상적인 확대와 함께 토지를 잃은 양민들이 권문세족들에게 노비로서 위탁하는 일명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 현상이 폭발적으로 발생하여 노비비율이 폭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더 나아가 고위 관료층들조차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막장 상황으로 하물며 일반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으니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고 그리고 군대를 유지할 재정도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 초래될 정도였었다.

이때 권문세족들이 소유한 토지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는데 어느정도였냐 하면 고려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을 경계로 할 정도로 광대했다. 당연히 세족들의 이런 토지확대는 필연적으로 고려 백성들이 먹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토지들 마저도 권문세족들이 몽땅 강탈해가는 바람에 백성들 입장에서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는 도탄의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

6.3. 위화도 회군 이후 [편집]

하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 등이 사전 개혁에 찬성하자 이성계가 토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여, 중앙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고 도의 양전(量田)을 시작하였으며, 또한 반대하는 자는 탄핵·추방하고, 1390년(공양왕 2년) 음력 9월 공사 전적(公私田籍)을 소각하여 철저한 개혁을 실시했다. 이듬해 음력 5월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科田法)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로써 강력한 왕권의 부재를 틈타 중앙 조정의 국사를 관장하는 도평의사사(도당)를 좌지우지하며 나라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대농장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세족들에게 속해있던 투탁노비들 상당수 또한 다시 양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추가로 고려 말 토지제도 문란의 3대 요소로 평가받던 토지겸병과 병작 반수제, 지주전호제는 이후 경국대전에서 이 3가지를 모두 법적으로 금지했는데 이유는 당연히 그만큼 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었다.

6.4. 국방 기여 [편집]



또한 국방에도 힘써 고려 말을 지옥으로 만든 왜구들의 침략대마도 정벌 등을 통해 사실상 대규모 침략은 조선 건국 이후로는 완전히 종식시킴으로서 새 왕조의 안보를 튼튼하게 만든 것으로도 평가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무인 출신답게 화통한 면이 있어서 조회 때에도 "번잡한 예절은 생략하고, 할 말 있는 대신은 빨랑 나와서 의견을 말해 봐"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많았으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스타일이었다고. 왕이 되던 날 아침으로 먹은 것이 물에 만 밥 한그릇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실록에는 "평소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지만 한번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하나의 화기(和氣) 덩어리가 되어 많은 이들이 태조를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6.5. 무신경, 혹은 무책임 [편집]

다만 정치가로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것인지 상식적으로도 뻔한 정치적 변수에 무신경한 기질이 있었다. 이게 기록에는 덕있는 사람의 면모로 포장되어있지만, 사실은 정치적 무능의 일종이다. 이성계란 사람 자체가 머리 복잡한 정치에는 별로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성품을 볼 수 있는 일례로 전세가 아군측으로 기울어 승기를 잡았는데도 여진족 군인이 왜구를 마구 죽이자 불쌍하니 이제 그만 죽이고 생포하라고 할 정도로 이를 인간적인 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모진 면이 없기도 했다.[42] 이런 면이 있어서 낙마사고 이후 결국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정몽주를 죽이지 않으면 전주 이씨 전체가 멸족당할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차마 손을 대지 못해서 질질 끌기도 했다.

단순히 무신경할 뿐만 아니라 실로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모습도 종종 보이는데, 아들이 7명이나 있었는데도 젊은 왕비의 성화 때문인지 고집스럽게 막내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무리수를 남발하다가 1차 왕자의 난을 당하고 말았다. 대중들에게는 흔히 신의왕후파와 신덕왕후파 간의 대립으로 알려져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는 역시 신덕왕후의 소생인 세자의 동복형 이방번부터 죽게 내버려두겠다는 선포나 다를바 없었다. 효령대군처럼 정말 욕심이 없어서 양보한것도 아니고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국왕의 친형은 존재 자체가 위협이다. 하물며 동북면 가별초의 계승자인 이방과나 정치적 활약이 두드러졌던 이방원, 야심 하나는 엄청난 이방간은 위협 그 자체인 만큼 신덕왕후가 장수했다면 직접 잡아죽일 예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막내가 왕이 되면 그 형들이 모조리 다 끝이 좋지 않게 될 것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신만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괜찮을거라고 과신한 탓인지 막무가내로 막내를 세자로 밀었다. 결국 이 셋 중 이방원은 형제들의 생존을 위해 난을 일으켰고, 이방우의 아들 이복근까지 그런 숙부 이방원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이방번조차 자신의 자리를 뺏어간 친동생의 위기를 수수방관하다가 함께 죽고 말았다.

결국 이성계보다도 정치적 결단을 잘 해낸 것은 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었다. 애시당초 순수 무골인 이성계나 이방과와 달리 이방원은 과거를 급제한 문관출신이라 이런 정치적 게임에도 능해, 정치에 능하지 못한 이성계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위험한 정적인 정몽주를 끔살한다던가. 왕자의 난으로 서열정리를 확실하게 한다던가. 다 죽이는 것만..[43][44]

6.6. 고려 왕씨 몰살 [편집]

태조 이성계는 혼자서 고려를 구한 수준의 불세출의 명장이자 전설적인 전공을 세웠고 고려 말의 폐단에 일격을 날리며 새 나라를 창업한 위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민중의 신망이 높았던 최영이나 (본의는 아니었다고 한들) 정몽주 등 고려의 충신들을 숙청하고 죽이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새 왕조가 건국되고 그 전 시대의 기득권 세력인 왕족이나 귀족세력이 숙청당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는 이렇게 전대 왕족들을 숙청한 사람은 이성계가 유일하다. 사실 자수성가에 나온 설명처럼 우리나라는 귀족들이 대대로 자기들끼리 지배한 역사인데 고려 왕씨는 스스로 고구려 귀족 혹은 중국 귀족의 태생이라 주장하였지만 고려사조차 왕실의 조상에 대해 의문을 가진 노근본 왕족이라 전례없는 숙청과 차별이 더 의미심장하다.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베었다.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4월 20일 己丑)

얼마나 철저하게 왕씨들을 색출했는지 왕씨인 줄 알고 숨겨주면 사형, 왕씨와 혼인하여 인척이 되어도 사형을 당하였다. 문종 대에 이르러서 이러한 조치가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조선 말기인 1880년에도 의흥 박씨(義興 朴氏) 박응상(朴應商)이라는 자가 본래 부계 성씨가 왕씨(王氏)인데 모계 성씨인 박씨를 따랐다며 왕씨로 회복하고자 상소를 올렸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박응상의 조상 박수검은 홍문관 제학을 지내고 사당까지 있었는데 이 일로 박수검의 사당도 헐리었다.[45]

6.7.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의 비교 [편집]

비슷한 시기 명(明) 태조 주원장도 대상은 다르지만 이성계의 왕씨 몰살에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는 않으니 숙청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숙청은 피할 수 없다지만 처형당한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고, 형벌은 잔혹하였다. 개국 공신들 가운데 제대로 명을 살다 죽은 이는 탕화(湯和) 한사람 뿐이었으니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후대 청나라 역사가 조익은 "그의 잔인함은 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일이다. 의심 많고 죽이기 좋아하는 것은 그의 천성이라 하겠다"는 말로 명 태조 주원장을 평했다.

6.8. 현대 한국에서 [편집]

14세기 말, 사방팔방에서 위기에 처한 고려 말기에 전국 각지의 반란군과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 원나라 황제가 보낸 군대, 나하추 같은 멸망한 원나라의 군벌, 남쪽에서 패악질을 부렸던 대규모의 왜구, 북쪽의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당대 동아시아 최대의 혼란기 속에 최영과 함께 고려를 지탱한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주자였으며, 마지막에는 고려마저 멸망시켜버림으로서 당대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들과 싸워서 이긴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46]

물론 위화도 회군역성혁명으로 대변되는 그의 행보는 끝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은 최영정몽주와 대비되어 까이기도 하고, 말년의 우유부단함(...)과 때로는 냉혹해 보이는 몇가지 사례들로 인해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태조 본인이 앞서 보여준 군사적 역량과 행동력, 측근의 관리와 더불어 비범한 개인적 일화 덕분에 그가 창건한 조선이라는 왕조의 후대 평가와 상관없이, 한 국가를 개국한 시조로써 부족함이 없으며, 이에 대해 받는 평가는 현대에도 높은편이다.

6.9. 북한의 평가 [편집]

북한의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서는 이성계를 고려를 배반한 역적이라고 규정하고 리조 봉건 시대의 괴수라면서 엄청나게 폄하하기도 했다. 북한 역사서적의 '리성계' 서술

김일성 생전에는 그가 금야군에 지나가고 있을 때 열차 커튼을 닫아서 보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한다. 나라 이름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북한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조선은 단군 조선을 의미하는데 1948년 북한의 국호 선정 과정에서 고조선을 염두에 두었을리는 없고 대내외적으로 한민족 공동체를 부르는 호칭이 조선이라 국호를 조선이라 한 것이다. 문제는 한민족 공동체가 조선이라 불린 이유는 2천 년도 더 전에 망한 고조선이 아닌 최근 왕조인 조선이라는 점. 이는 군사정권 시절 한국 사회에서도 조선 시대를 무조건 당쟁이나 벌이던 뒤떨어진 시대로 매도하던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매도하여 당시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뤄졌다고 보기도 하여서 세월이 흐르면 재평가될지도 모른다.

이성계가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정치 방식을 시도한 혁명가적 면모도 보였고 민본주의에 기반한 정책도 펼쳤지만 동시에 한국사에서는 드문 대규모 학살자이기도 했다. 새 왕조가 건국되고 전 시대의 기득권 세력인 왕족이나 귀족 세력이 숙청당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한국 전근대사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전대 왕족과 기득권 귀족들을 몰살했다고 기록된 사람은 이성계가 유일할 것이다.[47] 정작 김일성도 이성계를 아득하게 넘는 학살자였던게 함정이다.

하지만 동시에 근세사 파트가 붕 떠버린 북한 입장에서는 마냥 백안시만 할 수는 없어서 애매한 상황에 놓여있다. 남북이 각자의 영역 내에서 한반도의 역사적 정통성을 제시하자면 남한은 진-삼한-신라(+가야)/백제(+마한)-통일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상고-고대-중세-근세-근현대의 흐름을 완성할 수 있지만 북한은 용을 써도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으로 남북국시대와 근세 조선시대가 공백이 된다.[48] 지역별로 따지면 남한도 고려를 빼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고려의 수도 개경은 완전 접경 지대로 역사적으로 경기수도권에 속했던데다가 원래 남한 땅인 것을 6.25 전쟁으로 북한이 뺏어간 것이라 남한에서도 지분을 요구할 수 있고 고려 부수도 2곳(동경-경주, 남경-서울)이 남한에 위치해 있고 대몽항쟁기에는 남한 영토인 강화도로 38년간이나 수도를 옮긴 전적도 있는데다가 조선 왕조는 고려의 승계 국가로 자산을 거의 흡수했기 때문에 다시 서울을 점유하고 <고려사>와 같은 서지 자료들 등의 자산을 물려받은 남한이 북한에 비해 월등히 연구 성과가 높을 뿐더러 광복 후 6.25 전쟁 이전까지 개성시가 남한에 속했던 관계로 개성 박물관에 위치한 양질의 고려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주요 유물 문화재는 북한이 아닌 남한에 위치하고 있다. 서희, 강감찬, 최영, 정몽주 등 고려시대 주요 인물들도 남한 지역 출신이고 묘소도 남한에 위치한다.

고구려의 경우를 보아도 고려가 대놓고 고구려 후계국을 자처한데다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삼국시대의 역사서들도 죄다 남한에 남아있고(북한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원본 1권도 가지지 않았다.) 중국 현지 조사와 연구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결과를 축적해 온 상태이기 때문에 남한은 북한 사학계의 믿는 카드라 할만한 고구려에 대해서도 나름 할 말은 있다. 그 고구려조차도 북한이 고구려 역사 704년을 다 갖는 것도 아니고 만주 지역이 463년을 가지고 북한은 평양에 도읍한 나머지 241년만을 가질 뿐이다. 신라 991년사와 백제 677년사가 모두 온전히 귀속되는 남한과 대비되는 부분. 조선 왕조로 오면 빼도박도 못할 남한 영역인 서울을 수도로 삼은 정권이라 북한 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평양이든 삼수갑산이든 서울에 종속된 지방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49] 북한이 괜히 6.25 전쟁 중에 그렇게 욕하는 <조선왕조실록>을 통째로 실어간게 아니다.

이성계에게 역적 프레임을 씌우자면 자기들이 띄워주는 고려 역시 왕건이 궁예를 통수친 것이 된다. 욕을 하고 해봤자 한반도의 500여 년을 조선 왕조가 통치했음은 부인할 수 없고 창업 군주로써 북쪽 출신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북한 입장에서는 근세사에 자기 지분을 들이밀려면 이성계말고 딱히 내세울 건덕지가 없다. 고려 이전 유적은 작살났고 조선시대 유적은 별 볼 일 없고 궁궐 유산이 전무하다시피 한 북한 입장에서는 이성계 덕에 남겨진 함흥본궁만 해도 엄청난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지금 함흥본궁만 해도 6.25 전쟁 때 파손된 것을 없는 돈 들여 거의 완전히 복구해놓고 함흥력사박물관으로 쓰면서 귀중한 문화재라고 띄워주고 있으니 츤데레적인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7. 여담 [편집]

7.1. 무학대사 일화 [편집]

7.1.1.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편집]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야사에서 유래한 듯 하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보고 장난 삼아 "내 눈에는 대사가 돼지처럼 보이는구려."라고 놀리자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소승은 전하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성계가 "허허, 나는 대사를 돼지라고 했는데 대사는 왜 나를 부처님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무학대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처럼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처럼 보이는 법이지요"(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라고 받아쳐 이성계가 크게 웃었다고 한다.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조사의의 난 직후 이성계를 설득하러 찾아온 무학대사와 만나서 나누는 말로 나온다.

근데, 이 일화를 잘못 써먹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돼지 눈에는 돼지로만 보인다'나 '돼지 눈에는 돼지처럼 보인다'로 '단지 욕을 한 너의 눈이 잘못되어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반론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잘못 쓰고 있다. 이건 '돼지인 너의 눈에 내가 보이는 것은 너도나도 다 돼지기 때문이다.'는 뜻이 되어 상대를 돼지라고 까면서 스스로도 돼지라고 자학해버리는 꼴이 된다.

7.1.2. 꿈 해몽 [편집]

유명한 '집 무너지는 꿈'의 해몽 이야기 등으로 무학대사와 평생 동안의 우정과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역사상으로도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좋은 상담자이자 벗이었고 이성계에 의해 유교 국가 조선에서 고려의 불교 제도인 '왕사'로 무학대사를 임명했을 정도였으며 수도 한양의 위치를 정할 때 둘이서 같이 골몰하기도 했다. 봉우리가 딱 100개였는데 하루 아침에 하나가 그냥 언덕으로 닳아버려서 명당에서 탈락했다는 원통이 고개 이야기도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주인공이다.

7.1.3. 멸망 예견의 진실 [편집]

무학대사가 종묘를 28간만 짓게 해서 조선이 28대까지 갈 것을 예언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뻥이다.[50] 종묘는 처음 지을 때 제후의 예법에 따라서 7간으로 지었고 이후 정전을 확장하고 별전인 영녕전까지 지어서 지금은 추존 군주까지 포함하여 38군주 1황태자를 모시고 있다. 1980년대에 국내에 단전 호흡 붐을 일으켰던 소설 <단>에서도 거의 같은 이야기가 나오니 최소 30년은 된 도시 전설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 조선 왕조의 멸망은 필연이었다는 일제의 선전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 왕조 관련한 어떤 모 역사책에서는 무학대사가 수도를 한양[51]에 자리잡으려 할 때 그 일대를 가리키며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약 5백년 정도는 갈 것입니다"라고 이성계에게 말했고 태조는 이에 흡족해 하였다고 한다.

7.1.4. 돼지띠 [편집]

돼지띠로 민간 설화 등을 보면 묘하게 돼지와 연관되고는 한다. 자를 문 돼지가 이성계의 에 나타났다는 설화가 있고 개성에서는 돼지고기를 성계육이라 부르며 이성계를 두고두고 깠다는 민담도 있는데 그 돼지고기로 끓인 탕을 성계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 미륵 신앙/반정부 승려 조직인 당취(땡추)들은 주기적으로 돼지를 죽인 뒤 그 생고기를 씹으며 이성계를 저주하는 의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조랭이 은 이성계의 개성에 있는 고려 왕씨 일족을 몰살하는 행각에 분노하여 이성계의 주리를 튼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떡이다.

7.2. 불교 관련 [편집]

조사의의 난 전의 이야기지만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연회 중에 태종과 신하들이 "불교를 좋아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불공을 꼭 밖에서 드리셔야 합니까?"라고 묻자 이성계는 다음과 같이 쏘아붙여 태종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태조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대들의 뜻은 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방번과 방석, 사위인 흥안군 이제)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서방 정토로 가고 있다!" -《태종실록》태종 2년(1402년) 1월 28일

이성계가 불교에 매달린 것은 모든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교리에 감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변방의 장수로 시작해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한 나라를 세우는 임금이 되었는데 말년에는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아들과 싸우다가 감시받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안사가 함흥으로 이주할 때부터 고려인이던 이씨 일가의 종교는 불교였는데 이는 고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주위 여진족과는 대별되는 점이다. 비록 조선이 숭유억불을 기치로 삼았지만 이는 전조 고려에 대항하기 위한 구실이었고 실제로는 이 당시 원나라 황실로부터 들어온 티베트 불교의 잔재가 일소되고 고려 본래의 선종 중심의 불교로 일신되었다. 승려로서 조선 왕실의 국사가 된 무학대사는 바로 이런 저류를 반영한 것이며 이후 이성계는 조선 왕실의 원찰이면서 행궁 역할도 가능한 회암사를 창건하여 이런 친 불교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당시 사대부들처럼 외적으로는 왕도 정치와 도학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집에서는 시침떼고 불교를 숭상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업보를 받았느니 그래서 불교를 믿으며 참회했느니 하는 다양한 해석도 있다. 그래도 말년에는 왕실에서 더이상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태종이 왕실의 사돈이었던 이거이 부자를 숙청할 무렵 이를 태상왕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하늘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뜻대로[52] 결정했겠지만, 회안이 이미 쫓겨나고, 익안군이 이미 죽고, 상왕이 출입하지 않으니, 친척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몇 사람이냐?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낭패할 때에는 돕는 자가 적다. 사생지간에 돕는 자는 친척 같은 것이 없다. 네가 그들을 보전하면, 국가의 재앙이나 천변(天變)·지괴(地怪)가 적어질 것이다. 이 일은 큰 것인데, 나는 장차 큰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10월 20일
저 말은 '방간이는 폐인이 됐고, 방의는 죽고, 방과는 찌그러져 있는데, 우리 친척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그래도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은 친척 뿐이야. 사돈네는 살려줘야지 그러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누구한테 도와달라 할래?'라는 요지의 훈계. 3남 이방의는 이 해 9월에 이미 병사한 뒤였다.
이성계의 아들 8명 중 5명이 이성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남 이방우는 술병으로 죽었고 6남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요절했으며 7남 이방번과 8남 이방석은 왕자의 난 때 살해되었다. 이래저래 자식복은 없었다. 태조의 이 말을 들은 태종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실록의 이 날 기록은 전한다. 결국 이거이 집안은 폐서인이 되고 고향으로 낙향하는 데 그치는데, 이렇게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은 태조의 절절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53]
사실, 자식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에서 이성계가 보여준 비통한 절규나 그래도 어려울 때 믿을 사람은 친족뿐인데 친족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훈계(또는 호소)는 자신의 육친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을 벌이는 데 대한 분노와 고통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성계의 성장 기반을 볼 때 아주 실용적인 처세 원칙이기도 하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성계는 변방 국경의 반독립적 호족 출신이고, 게다가 국경 밖에 살던 이들은 주로 유목민(반유목민)이었으며, 이성계의 일족 자신도 그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는 점, 그리고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주변의 여진족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일단 유목민의 경우 떠돌아 다니며 방목하는 특성상 지연이나 학연 등의 의미가 없고,[54] 따라서 사회적으로 혈연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번 갈라주면 끝인 토지와는 달리 유목민의 재산인 가축은 형제가 많으면 각자의 몫이 좀 줄어들더라도 잘 키우면 쑥쑥 새끼를 낳아서 불어나기 때문에[55] 형제간의 유산 갈등이 농경민보다는 덜한 편이다.
이 때문에 거친 유목민 사회에서는 유사시에 의지가 될 수 있는 친족[56]과의 관계를 그만큼 중시하게 되는 것. 더구나, 주변의 여진족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빠지기 쉬운 변경의 호족 입장에서는 그만큼 친족들의 강한 유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성계가 젊었을 적 함부로 다른 장수들을 무시하는 실책을 범하다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도와준 것도 종중의 다른 어른들이 보내준 병력이었고, 그의 아들들 역시 군사 활동이나 개국 과정 전반에서 아버지의 심복 부하로서 큰 활약을 했다.
결국, 이성계의 세력 기반은 일족 공동체였고, 이 '이성계 일족'은 전주 이씨 친족 집단을 중심으로 고려계 유이민들이 뭉쳐 있는[57] 형태였다는 것. 이런 집단의 경우, 친족간의 유대가 극히 중요할 뿐 아니라, 친족의 수[58]가 그 일족의 세력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한 것.(이자춘이 유목민의 풍습을 받아들여 여러 부인을 맞아 많은 자식을 둔 것 역시 이런 상황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보면, 왕권을 탐내 서로[59] 죽여대는 아들들의 행태는 이성계가 성장하고, 활약한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완전히 미친 짓이고, 당장 배고프다고 제 살 깎아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인 셈. 물론 육친이 육친을 죽이는 것 자체가 이미 끔찍한 짓이지만 그의 입장에선 아예 일족의 자멸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일족 공동체에서는 다른 형제에게 가장 자리가 넘어가더라도 그냥 덮어놓고 협력하는 쪽이 현명하다. 내분을 벌이면 일족의 힘이 약해지고, 그만큼 외부의 위협에도 취약해지겠지만 계속 힘을 합치고 있으면 형제계승이나 숙질계승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으니까. 물론 조선 왕조는 그 후 500년 이상 유지되었고, 그 기간 동안 조선 왕실의 정치적, 사회적 논리는 이성계에게 익숙했던 일족 논리와는 많이 달랐지만.

7.2.1. 해석 [편집]

이에 대해 <조선 말 나라가 멸망해가는 와중에도 일족들끼리 싸움 때문에 집안이 힘을 합치기는커녕 알아서 소모해가며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을 생각할 때 이성계의 우려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주장은 애매한 도덕론에 기댄 공론(空論)일 뿐, 역사적 상황과 사건을 진지하게 평가한 결과라 보기는 어렵다. 일단 조선 말 나라가 멸망해가던 와중에 특별히 일족(왕족)의 내분이 그 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은 그 유지기간 내내 강력한 왕과 왕가의 권위 아래 권력의 집중을 통한 중앙집권체제와 정치적 안정성을 잘 확보한 편에 속하며, 조선 말의 몰락상은 왕가의 내분 및 왕권다툼과는 딱히 상관이 없다. 말하자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많은 경우에 유익한 도덕적 조언이지만, 그렇다고 이 조언을 아무데나 가져다 붙여서 <뭉치지 않아서 망했다>고 설명하려 드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라고는 할 수 없는 것.
특히 이러한 해석이 부적절한 것은, 실제 조선시대의 역사와 비교할 때 이성계의 사고방식은 틀린 것 이었다고 볼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성계의 행동원칙은 '정복, 개척등을 통한 세력 확장이 용이하고, 중앙 권력(일족의 수장)이 가진 영향력과 구속력이 느슨한' 변경의 일족 공동체에 어울리는 것이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조선 왕조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윗 문단의 내용처럼 변방의 일족 공동체라면 유력한 친족들간의 관계에 따라 형제계승이나 숙질계승도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농경민족의 중앙집권국가라면 형제중 하나가 왕이 되면 왕은 대대로 그 자식들에게서만 나오고, 다른 형제들은 대대로 그 신하가 된다. 이것을 뒤집으려고 하면 그때야말로 골육상잔의 비극이 터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가 그리 비통히 여긴 형제간의 참상에 대해서는 씁쓸하게도 이성계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7.2.2. 결론 [편집]

이성계 자신은 마치 동북면 이씨 일족의 수장처럼 가볍게 세자의 자리를 막내 방석에게 주었지만, 이성계의 창업에 앞장섰던 장성한 아들들의 입장에서 이는 자신들의 공적을 모두 부정당하고 그 성과를 고스란히 어린 막내에게 내놓으라는[60] 가혹한 선고였던 것. 차라리 장자의 명분을 세워 방과를 세자로 세우거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택하여 방원을 세자로 세웠다면 방간-방원 라인으로써도 반기를 들 명분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어리고 세력과 경력도 없는 막내를 굳이 죽이기까지 해야 할 이유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안 그래도 변경의 반유목 일족보다 훨씬 빡빡하고 가혹한 정주 중앙집권국가의 계승자 자리에 명분도 세력도 약한 어린 막내를 박아놨으니 누가 이기건 피 한바가지 쏟지 않으면 정리하기 힘들도록 상황이 꼬여버린 것. 이성계는 방원과 방간이 벌이는 참극에 절규했지만, 사실 이성계의 의도대로 정말 방석에게 왕위가 전해졌다면 그 과정에서 방과, 방간, 방원등에 대한 숙청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
그리고 이성계의 사고방식 중에서 '어려울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친족-혈연동맹뿐이라는' 부분 역시 이후 조선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썩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변경의 이씨 호족'에게는 동등한 혈연동맹이 가능하고, 이것이 일족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이씨 왕가'는 (조선 내에서) 다른 가문과 동등한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후 조선사에서도 권문세족, 특히 왕비를 배출한 외척의 득세는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이는 왕조국가의 논리에서 '왕실의 권위를 위해' 억누르고 제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지 권장하여 왕가와 상조하도록 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이성계에게 익숙했던 '동북면의 호족인 이씨 일족'의 논리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이것이 '왕조 국가 조선의 이씨 왕실'의 논리에서는 적절치 않았다는 내용의 일부분만 잘라내어 모호한 도덕적 공리공론으로 만들어 현실을 그에 끼워맞추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7.3. 명나라 관련 [편집]

7.3.1. 주원장 관련 [편집]

주원장키배를 뜬 적이 있다. 항목 참조. 또 주원장과 이성계 사이에는 희한한 전설이 하나있다. 주원장 집안이 원래는 한반도쪽 가문인데 어릴 때 이성계 아버지와 명당을 다투다 주원장이 차지한 명당으로 주원장은 명 태조가 되고, 옆에 명당을 차지한 이성계는 조선 태조가 되었다는 전설.

구체적으로 해당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이성계의 선조가 황해도 모처에 자손이 황제가 될 묏자리와 왕이 될 묏자리를 두고는 선친을 묻으려고 했더니, 주씨 성의 노비가 몰래 묏자리를 바꾸어서 후손들이 각각 명 태조, 조선 태조로 뒤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61] 우연히 만난 스님과 장수가 훗날 각각 명 황제, 조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이야기다. 그것도 한 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이성계와 주원장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탁발승에 도적 출신 주원장과 군벌 가문 출신 이성계는 출신은 다르지만, 변방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명당 이야기를 떠나서 사실 명 왕조가 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객관적인 근거들은 꽤 있다는 주장도 있다. 명나라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명 태조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주장.

또한 주원장의 아들 명 성조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즉 영락제의 생모가 효자고황후 마씨가 아닌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라는 기록. 명나라 황실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곳의 기록인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는 영락제의 생모는 공비(碽妃)라고 하였다.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는 "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성조(영락제)를 낳았기 때문에,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권근도 이를 언급한 걸 보면 조선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니, 조선과 명나라가 유독 가까웠던 데는 기저에 이러한 이유들도 있었을 것이다.

7.3.2. 황제와의 사돈 논의 [편집]

이와 별개로 주원장사돈을 맺을뻔한 적도 있었는데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는데 니가 X같이 굴어서 파투났다 씨X아!"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파투가 났다고 한다.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아마도 정황상 주원장은 "결혼까지 하면 이성계가 지랄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결혼까지 할 정도면 요동정도는 지참금으로 챙겨먹을 수 있겠지" 하고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파투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62] 그리고 이렇게 혼담이 완전히 파투나자말자 조선에서는 거의 곧바로인 1397년 6월부터는 요동정벌 논의가 본격화돼서 조준이 반대하니까 남은이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디스한다거나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1397년 9월에 심씨를 공식적으로 세자 이방석의 현빈으로 삼으면서 관련 논의들은 완전히 끝이나게 되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실제로 저 국혼이 성사되었다면 그 이후의 나비효과가 대단히 흥미진진했을 것이다라는 점인데 일단 주원장이 1398년 5월에 사망하기에 저 때 저 국혼만 성사됐으면 주원장이 죽자마자 8월에 터지는 정난의 변과, 마찬가지로 8월에 터지는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선의 입장이 너무너무 재밌어 진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처갓집이 명나라 황실이 되면 원래 막내였고 나발이고 세자 이방석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질 테니 함부러 비비기도 힘들고, 공식적으로 명나라랑 척지고 요동정벌 하자는 것도 아니니 그거 핑계로 쿠데타도 무리니 1차 왕자의 난은 아무래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 대신 그렇게까지 명나라 황실이랑 가까워진 상태라면 아무래도 정난의 변에서는 조선이 건문제의 편을 안 들수가 없어진다. 주원장도 말년에 번왕들 따로노는거 눈치 못챈것도 아니니 저 시점에 조선이랑 결혼동맹 했다 치면 당연히 건문제랑 가까운 혈연으로 맺었을 질테고 그렇다면 장인의 나라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정난의 변에 조선이 개입을 할 수 밖에 없어질테니 말이다.

8. 기타 [편집]

  • 몇몇 중국인 및 중국 웹사이트에서는 영어로 이성계를 시종일관 'Li Chenggui'로 한어병음 발음으로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장 구글에 검색해 봐도 중국 동명이인의 사례를 몇 개 제외하면 비록 적지만 분명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중국인은 한국인과 댓글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성계를 언급하면서 한국인이 'Yi Seonggye'를 계속 쓰고 있음에도 끝까지 'Li Chenggui'를 고집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는 동북공정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중국화를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이성계와 이자춘이 모두 당시 원나라 땅이었던 쌍성총관부에서 나고 활동했다는 점에 근거해서 '원나라가 중원 왕조였으니 그곳에서 난 이자춘, 이성계 역시 중국인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눈치가 빠른 위키러라면 알겠지만 이는 결국 '원나라(몽골 제국)=중국'이라는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칭기즈칸 역시 중화 영웅으로 여길 것임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자기들이 보기에도 대놓고 '이성계는 중국인임. 한국인 아님' 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껄끄러운지 'Yi Seonggye'가 아니라 'Li Chenggui'라고 정정을 요구하는 사례는 웬만해서는 없는 듯하다.


  • 아들인 이방원과의 사이는 매우 안 좋은 편이었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같이 연회를 가지거나 같이 식사를 하는 등 나름대로 화해를 하고 부자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고 조사의의 난이 진압되자 끌려오다시피 한양으로 귀환한 후에는 태종의 감시를 받고 유폐되다시피 했다는 말[63]이 있지만 조사의의 난 이후에도 온천에 요양을 가거나 왕실의 원찰(대표적으로 경기도 양주시회암사) 등 사찰로 행차하는 등 야외 활동을 한 여러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돌아온 이후 죽을 때까지의 기록을 살펴 보면 수라를 헌수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드리거나, 놀러 나갔다가 으로 돌아오는 태조를 마중나가거나 하는 일들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이방원은 고려 변방 시절부터 과거에 급제해 가문의 빛이 되주던 아들이었으니[64] 그런 아들을 아꼈던 마음은 어디 가지 않았을 것이다.
  • 함흥차사 야사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함흥에서 돌아올 때 마중나온 태종을 죽이려 했던 이야기도 유명하다. 태종이 이성계를 마중나가기 전 아버지를 맞고 나서 열 연회의 가건물을 설치할 때 태종의 참모인 하륜이 태종에게 건물의 기둥을 굵게 할 것을 주문했고 태종은 그 말을 따랐다. 이윽고 이성계가 도착하고 태종은 절을 올리려 했는데 이성계는 갑자기 을 들어 아들을 향해 쏘려고 했다. 놀란 태종은 재빨리 기둥 뒤로 피했고 화살은 굵은 기둥에 박혀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연회를 여는데 하륜이 또 귓속말로 태종에게 "전하께서 태상왕께 직접 을 올리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통해 올리십시오"라고 진언했다. 태종은 그 말을 따라 아랫사람을 시켜 이성계에게 술을 올렸는데 이를 본 이성계는 "이 모두가 천운이구나"라며 허탈하게 웃더니 철퇴를 품 속에서 꺼내 상에 올려놨다고 한다.[65] 야사의 기록이고 조사의의 난 이후 편히 살았지만 이 이야기는 태종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 전라북도 전주시의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 어진.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시대 어진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어진이다.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집경전의 어진을 1409년(태종 10년)에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한 것을 1872년(고종 9년)에 다시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이 당대로부터 전해지는 유일한 어진이며 홍룡포 버전은 후대인 헌종 대에 왕명에 따라 홍색으로 용포 색깔을 바꾸어 모사한 것이다. 참고로 홍룡포 어진같은 경우는 한국전쟁 당시에 부산광역시로 옮겨왔었는데 보관 도중에 화재로 얼굴을 포함해 절반 부분이 날라가버렸고 복원을 통해 2011년에 공개됐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태조어진 문서 참조.
  • 단순히 무용만 믿고 싸우는 인물이 아닌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 말 1377년 서해도(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날뛰던 왜구를 토벌하러 갔을 때 1차례 격퇴한 왜구가 험한 지형에서 섶으로 방벽을 만들고 버티기에 들어가자 느닷없이 풍악을 연주시키고 을 마시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병사들에게 왜구의 진 주변에 을 질렀다. 왜구들은 그냥 당할 수 없어서 진에서 뛰쳐나와 고려군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를 예측하여 사방에서 왜구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왜구들의 저항도 격렬해 왜구가 쏜 화살이 이성계의 술병까지 깼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고 부하들에게 소탕을 명령해 이성계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구워먹으며 왜구들이 타서 죽거나 무기에 맞아 죽는 모습을 구경했다. 자세한 전공 기록은 태조실록 1권, 총서태조(조선)/생애 문서를 살펴보면 관련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성계는 도 잘 타고 도 기가 막히게 쏘는 체육인이었으며 당시 무인들의 스포츠격구에도 능했다. <태조실록>에 그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데 가히 묘기급이다.
말을 달림이 너무 빨라서 벌써 수양이 되었는지라, 공이 문득 돌에 부딪쳐 놀라 거꾸로 달아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태조는 즉시 위를 쳐다보고 누워 몸을 돌려서 말 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 공이 도로 말 앞 두 발 사이로 나오므로,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이를 가리켜 방미라 하였다. 또 공을 운행해 칠 때는 또한 벌써 수양이 되어 공이 다리 기둥에 부딪쳐 말의 왼쪽에 나가므로, 태조는 오른쪽 등자를 벗고 몸을 뒤집어 쳐서 이를 맞히고,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가리켜 이를 횡방이라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 고대에는 '수정포도'라 불린 청포도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조선 임금 중 후대의 연산군과 더불어 청포도를 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임금.
  • 2020년대부터 한국 로판계에서 '북부 대공'이라는 북방에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주로 이민족을 상대하는 쿨계 남주 타입이 곽광받기 시작했다. 왕좌의 게임스타크 가문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이 클리셰를 장르소설 마이너 갤러리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까 한국사에서 북부대공 클리셰에 정확히 맞는 인물이 바로 이성계라는 결론이 나온 적이 있다.# 얼굴만 미청년계였으면 로맨스 사극 주인공으로 딱이라는 평가도 나올 정도.
  • 가문에 관련해 상당히 골때리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니 바로 '종계변무 사건'이다. 고려 말기 이성계의 준동을 우려한 반이성계파가 명나라 조정에 '윤이(尹彛)', '이초(李初)'를 첩자로 파견해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다"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일단 얼핏 명나라 내에서도 크게 믿지 않는 분위기였기는 했는데 불씨는 태조 즉위 후에 터졌다. 조선이 계속 명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일 낌새가 보이자 명나라에서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사신이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거짓말로 알 거라고 생각했던 태조는 당연히 오밤 중에 벼락맞은 꼴이 되었고 그 사신에게 "나는 이인임이 아니라 이자춘의 아들이다"라고 일러 보낸다. 자세한 내용은 종계변무 문서 참조.

9. 대중매체에서 [편집]

10. 관련 문서 [편집]

11. 둘러보기 [편집]

[1] 흔히 함흥부로 착각하는데, 정확하게는 함흥 인근의 화령이다. 그래도 함흥부가 이성계의 본거지였던 것은 사실.[2] 당시에는 국호가 바로 조선으로 바뀌지 않았다. 국호가 조선으로 바뀐 건 태조 2년의 일이다. 고로 태조는 처음에는 조선 초대 국왕이 아니라 고려 35대 국왕으로 즉위했었다.[3] 음력 5월 24일[4] 음력 1392년 7월 17일 ~ 1398년 9월 5일.[5] 음력 1398년 9월 5일 ~ 1408년 5월 24일.[6] 현존하고 있는 조선왕의 친필 수결 6종(태조, 태종, 세조, 정조, 순조, 고종) 중 하나. #, ##[7] 피휘 시 불편함을 방지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글자로 이루어진 성계 대신 덜 쓰이는 단으로 바꾸었다. 굳이 旦(아침 단)으로 개명한 이유는 조선(朝鮮)의 朝(아침 조)와 통하기 때문. 조선의 건국자이므로 조선과 통하는 글자를 골라 개명한 것이다. 여담으로 조선시대에는(그리고 현대의 유림들도) 피휘 때문에 旦 자를 '단'이라고 읽지 않고 朝의 발음인 '됴'(현대어로는 '조')로 바꿔 읽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고문헌의 旦은 朝로 바꿔 썼고(대자·代字), 정 旦을 써야 하면 획을 하나 빼서 '므'와 비슷한 형태로 적었다(결획·缺劃).[8] 현대에도 180cm는 큰 키에 속한다. 하물며 저 당시의 남성 평균 키가 161cm였음을 감안할 때, 지금으로 치면 채감상 대략 193cm 정도가 되는 엄청난 장신이다.[9] 밑줄 표시는 1871년 고종이 추가로 올린 존호[10] 밑줄 표시는 1683년 숙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11] 밑줄 표시는 1899년 대한제국에서 추가로 추존으로 올린 시호[12] 1899년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13] 왕의 이름은 피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쓰지 않는 한 글자 이름으로 바꾼 것. 당예종 이단의 휘와 한자까지 같다. 하지만 거의 다 이성계로 표기되므로 '이단' 이라는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로 자신의 직계 비속 왕들 중 다섯째 아들 이방원과 현손자 이홍위는 피휘를 하지 않았다.[14] 다른 왕들처럼 그냥 '태조'라고만 하면 고려태조 왕건과 혼동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태조 이성계'와 같은 식으로 묘호와 이름을 둘 다 쓰는 경우도 많다. 또한, 태조로서 지낸 시간이 별로 길지 않고 인생의 대부분을 이성계로 살았으므로, 사극 같은 데서는 거의 다 이성계로 나오니 그 이름으로 완전히 굳어졌다.[15] 조선에서 묘호보다 다른 호칭이 더 유명한 국왕은 3대 임금 태종과 7대 임금 세조가 있다. 각각 태종보다는 이름인 '이방원', 세조보다는 군호인 '수양대군'이 더 유명하다.[16] 고려 중기, 무신정권이 실패한 이유가 사상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성계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17] 애시당초 이성계는 명나라의 철령 이북에 대한 영유권 요구로 시작된 명나라와 고려의 외교 분쟁에서 요동 정벌을 통한 명나라와의 전쟁에 반대했다. 요동 정벌 직전 4불가론을 내세우며 괜히 고려 조정의 요동 정벌에 반대한게 아니다.[18] 사실 하나의 개인으로서 말년의 인생 자체만 놓고본다면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정작 본인은 장수했으나 이방우, 이방연, 이방석, 이방번, 익안대군, 경순공주 등 자식이 여섯이나 먼저 사망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아내인 신의왕후, 신덕왕후와 모두 사별했을 뿐더러 2번이나 아들들이 수도 한복판에서 서로 칼을 겨누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자신의 절친들이었던 정도전, 남은, 심효생, 정몽주, 이지란, 조준, 무학대사마저 모두 떠나보낸 다음에야 죽었기 때문이다.[19] 더불어서 유일하게 50대에 즉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차남 정종으로, 정종 또한 유일하게 40대에 즉위하였다. 태조와 대비되게 가장 적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군주는 헌종으로, 즉위 당시 8세였다.[20] 다만 이성계의 삶을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그에게 장수는 축복이 아닌 저주에 가까웠다. 오래살면서 못볼꼴을 다 봤고 나중에는 '나 언제 죽냐' 하고 한탄한게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이다.[21] 환갑이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환갑에 죽은 게 아니다. 숙종은 만 59세에 사망했다. 환갑은 61세를 뜻하는 것이다. 60세는 '육순'이라고 하나, 이는 그리 많이 쓰이지는 않는 단어이다.[22] 그래서 사극도 많이 만들어졌다.[23] 그래서 원 간섭기의 고려가 독자적 묘호도 시호도 없었던 것이다. 묘호는 고려 말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시호는 경효대왕 때 회복한다.[24] 그래서 당이 기록한 발해의 연호와 시호에는 사개(私改, 사사로이 바꾸다.), 사시(私諡, 사사로히 시호를 올리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당 입장에선 제후국인 발해가 천자의 연호를 쓰고, 시호를 천자에게 안 받고 독자적으로 올렸기 때문.[25] 고려의 경우 원 간섭기 이전엔 묘호를 독자적으로 쓰고 시호도 누구한테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쓰고 독자적 시호를 대표 시호로 삼았다. 고려국왕 문서의 '某조, 某종 某某대왕'의 모모는 전부 독자적 시호이다.[26]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태조편 제목도 "태조강헌대왕실록"으로 되어 있다.[27] 실제로 이렇게 불린 적은 없다. 조선왕조 당시 이성계의 대표 시호는 어디까지나 강헌대왕(康獻大王)이었다.[28] 신의왕후, 신덕왕후.[29] 대한제국이 이 시호 예법을 철저히 따랐다. 고종 '태'황제와 명성'태'황후, 순종 '효'황제와 순명'효'황후가 그 사례다. 대한제국 황제·황후로 추존된 조선 왕·왕후의 추존 시호에도 이 예법이 지켜졌다.[30] 고려는 세조 위무왕과 위숙왕후 때부터 시작해 원 간섭기 이전인 원종 순효왕과 순경태후 때까지 이 예법을 지켰다.[31] 효종은 제외이다.[32] 효종만 정덕(正德)인데 이는 이미 묘호에 효 자가 들어가 있어서 겹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33] 군주와 아내의 시호를 맞추는 예법도 다시 부활해 태조 고황제의 시호에 맞춰 왕후들도 신의'고'황후, 신덕'고'황후로 추존됐다.[34] 베트남의 경우 국호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왕조교체가 자주 일어나서 이태조, 진태조, 여태조와 같이 성과 묘호를 붙어쓰는게 정식이다.[35] 참고로 개명한 휘가 당예종과 완전히 겹친다.[36] 신의왕후 소생들은 당시엔 '대군'이라는 칭호가 없어서 그냥 군(君)으로만 호칭했다. 대군이라는 작위는 태종 시기에 등장한 작위이므로 정종과 태종은 실제 대군이 된 적은 없었다. 나머지는 후세에 추증받은 것이다.[37] 태종의 아들인 세종의 부인 소헌왕후의 작은 숙부이다.[38] 태상왕이 된 이후에 정식 봉작되는 바람에 후궁으로 분류되었다.[39] 김해의 관기 출신으로 이름은 칠점선이다. 외모가 출중해서 태조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40] 임금과 세자가 일어나 춤추니, 태상왕이 총애하는 기생 무협아(巫峽兒)를 불러 내어 잔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임금이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세자가 단(段) 1필을 하사하고, 지극히 즐기다가 파하였다. - 《정종실록》,정종 2년 8월 21일 계축 3번째기사[41] 글자 그대로 큰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이다.[42] 그렇지만 황산대첩 때는 살육당하는 왜구들의 비명소리가 마치 일만마리 소의 울음소리 같았다고 할 정도로 사실상 몰살시켰다.[43] 태종의 행보 중 정몽주나 외척에 대한 살해가 하도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그 외에는 가급적 죽이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친형인 이방간이나 자신의 측근이었던 이숙번 등은 말 할 것도 없고, 그 증오했던 신덕왕후의 친인척들도 어지간하면 살려줬다. 심지어 신덕왕후의 오빠 강계권도 직첩과 전민만 몰수하고 끝냈다.[44] 사실 '킬방원'이라는 비아냥을 듣지만 태종이 누굴 죽인 건 (민씨집안 숙청 정도를 빼면) 대부분 선왕인 태조 선에서 정리했어야 하는 것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라이벌이었으나 아버지를 위해 25세인 이방원이 총대메고 처리한 것이고, 왕자의 난 역시 태조가 후계를 상식적인 선에서 처리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이방석(의안대군)은 왕세자에 책봉될 당시 고작 10세였다. 능력있고 공이 많은 형들을 제치고 아무것도 안한 10세 어린이가 세자에 책봉된다는 건 불화의 씨앗이 없을 수가 없다. 결국 태조가 확실히 정리를 해주지 못한 탓에 왕자들이 다들 불만이 생겨났고, 태종이 칼춤을 출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45] 다만 왕씨로 태어났다고해서 무조건 죽거나 그런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멸시받았고 양반신분을 회복했음에도 과제에급제하여도 승진에 한계가있어 종2품이상까지 출세할수가 없었다. 때문에 조선왕조는 왕씨들에게 있어 생지옥판이자 철전지원수의 대상이었고 조선 왕족들역시 이를경계하여 항상 왕씨들을 감시하거나 역도로 몰아 차별하였다. 아마 박응상이 사형당한것도 왕씨라는 죄목보다는 가문대대로 왕씨임을 속이고 박씨로 살았으니 가문대대로 사람들을 속이고 희롱했다는 죄목이 더컸고 박씨 공명첩이 있었던것도 아니었기에 왕씨라서 사형당했다기 보다는 박씨를 사칭하고 관직에 나간 죄를 물어 사형당한것이 더크다고 볼수있다.[46] 그 점에서는 최영과도 비슷한데 최영은 고려 빼고 나머지 세력들과 전부 싸우고 이겼으며 이성계의 출현 전까지 모든 적들을 상대로 고분분투했다.[47] 당장 왕건만 봐도 여러 호족들을 혼인 정책 등으로 아우르는 정책을 썼다. 이렇게 된데는 이성계가 고려 무장 시절 비주류 출신으로 고려의 기득권 세력에 무시받은 증오가 쌓였다는 것과 정도전이 이를 적극 추진했던 탓도 컸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48]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바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427년까지 534년간이 비어있다. 한사군 기간이 대부분이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한사군이 북한에 위치한 것을 부정한다. 남북국시대에도 신라와 발해의 변경에 불과했으며 남경남해부가 북청에 설치된 정도가 고작.[49] 고려는 삼경제 같은 부수도 제도도 운영했고 지방 토호 세력의 권세가 막강해서 수도치고 개경의 위상이 막강한 편은 아니었다. 반면 조선은 부수도 없이 한양에 권력을 몰빵한 나라였고 지방 행정력도 고려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막강했다.[50] 주원장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51] 원래 한양 전에 충청도 계룡 부근으로 잡았다가 취소시키고 왕십리 일대로 수도를 재선정.[52] 실록 원문에도 '너 여(汝)'자가 쓰여 있다. 태종을 '주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사가에 있을 때처럼 격의 없이 '너'라고 부르기도 했던 듯.[53]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태종의 외척 가문인 민씨 집안은 이거이 입장에서는 폐서인이 된 자신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박살이 났다.[54] 지연은 물론이려니와 학연은 거의 없다. 학연이나 교육이라봐야 자기 부족 내에서 말은 이렇게 타라 하는 식의 교육뿐이니...[55] 물론 한파라도 찾아오면 확 줄어들기도 하고.[56] 특히 형제등의 가까운 친족.[57] 이들 유이민 집단 중에서 이씨는 아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신들이 나왔을 것이다.[58] 특히 제몫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수.[59] 그리고 역시 중요한 혈연 동맹인 사위까지.[60] 그나마 권력만 빼앗기면 양반이고 이미 세력과 공적이 탄탄한 형들이 세자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보여지면, 숙청까지 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61] 비슷한 전설을 가진 곳이 전국에 꽤 있다. 전라남도 해남 '한영정'이라는 사람 집의 머슴이었는데 주인 딸인 '한여비'와 눈이 맞아 지나국으로 도망갔다던지. 경상남도 진해시의 천자봉 이야기라든지.[62] 다만, 설령 이방석이 명나라 공주와 결혼했어도 무사히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대다수 사대부들은 자질이 검증된 이방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 데다가, 명나라에서도 정난의 변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63] 실제로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제 아무리 왕이라도 친아버지를 감시하는 것은 혹시 모를까 유폐했다가는 언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친아버지가 대원군도 아니고 태상왕에까지 오른 초대 국왕이었으니 제 아무리 왕자의 난으로 수족이 다 잘려나갔다고 해도 권위는 결코 무시못할 수준이었을 것.[64]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 동생 이방연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던 경력이 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하자 이성계는 기뻐해서 이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방원이 급제하면서 고려 조정에 몸을 담게 되었고 이 일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65] 철퇴가 아니라 던지는 무기인 철구(鐵球 : 쇠공)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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