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독일 (r120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오토 왕조 #===== 이후 콘라트 1세 역시 후사 없이 죽는데, 콘라트 1세는 죽기 전에 당대 가장 유력한 제후였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재위 919~936)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작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했던 경쟁자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와 슈바벤 공작이 하인리히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다. 결국 하인리히는 바이에른과 슈바벤의 이권과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협상을 통해 공작들 모두로부터 승인을 받아 919년 국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인리히는 왕국의 결속력을 강조했으나, 아르눌프의 바이에른 공국 등은 사실상 별도의 왕국과 다름없는 자치권을 누렸다. 공작들은 자치권의 확대를 추구했지만 프랑크 왕국 시절과 달리 더이상 왕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936년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동프랑크 왕으로 선출되었다. 오토가 왕위에 오를 당시 왕가의 권력 기반인 작센 공국의 상황은 매우 혼란하고 위험했다. 나라 안에서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나라 밖에서는 외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937년에는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가 작센의 여러 귀족을 이끌고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으며, 오토는 이를 진압했다. 1차 반란 이후 2차 반란이 일어났는데, 939년 오토에게 불만이 많던 프랑켄 공작과 로렌 공작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오토는 작센 백성의 두터운 지지와 슈바벤 공작의 전폭적인 협력 덕분에 2차 반란도 평정했으며, 반란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해 프랑켄과 [[로렌]]을 자신의 세력 아래 두고 사위를 로렌 공작으로 봉했다. 오토 1세는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당시 서유럽을 위협하고 있던 [[마자르족]]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로써 크리스트교 세계의 수호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오토 1세는 962년 교황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으며 단절되었던 서로마 황제위를 계승하였고, 카를스바트 대제의 뒤를 이어 위대한 황제(대제)라 불리게 되었다. 이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고도 말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기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었다. '신성 제국(Sacrum Imperium)' 및 '신성 로마 제국(Sacrum Imperium Romanum)'이라는 단어는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18.219.11.19)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