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독일 (r120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슈타우퍼 왕조 #=====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면서 잘리어가는 단절되었다. 이후 주플린부르크 왕조의 로타르 3세의 통치기를 이어 1138년 슈바벤을 근거지로 한 슈타우퍼 가문의 콘라트 3세가 황제로 선출되면서 슈타우퍼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콘라트 3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사촌이자 작센, 바이에른의 공작으로 큰 권세를 누리고 있던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면서 그의 영지를 몰수하여 강한 권력을 행사하였고, 이탈리아 원정 및 [[십자군]] 참전 등 군사적으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의 권력 기반은 제후 및 귀족들에 대한 정치적 양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 도중 익사한 후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의 공주 콘스탄체와 결혼하면서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 왕위를 획득했다. 1197년 하인리히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 필리프가 선출되었으나, 슈타우퍼 가문의 권력 강화를 견제한 제후들과 교황의 지원하에 오토 4세가 동시에 선출되면서 제국은 분열되었다. 1208년 필리프가 암살당한 후 오토 4세는 1209년에 로마 황제로 대관하였으나, 1214년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대패한 후 1215년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인 슈타우퍼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 왕으로 즉위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보다는 시칠리아의 왕으로서 시칠리아의 통치에 주력하였고, 독일의 통치는 아들인 하인리히에게 맡겼다. 이 과정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하인리히의 독일 왕 선출을 위해 제국의 성직 제후 및 세속 제후들과 각각 교회 군주들과의 동맹(Confoederatio cum principibus ecclesiasticis, 1220), 제후들을 위한 법령(Statutum in favorem principum, 1231)을 체결하여 제국 내 제후들의 영지 내 고급 재판권, 화폐 주조권, 관세 징수권, 축성권을 포함한 레갈리아를 인정하였다. 이 칙령은 프리드리히 1세와 필리프, 오토 4세의 시대를 거치며 이미 확대되고 있었던 제후들의 영지 내 권력을 법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영방 군주(Landesherr)로 성장한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를 영방화/영토 국가화(Territorialisierung)하면서 영방 지배권(Landesherrschaft)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질서는 연방주의적 형태로 발전하였다. 한편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통치 기간 내내 교황과 대립각을 세웠고, 교황에게 여러 차례 파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124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하인리히 라스페를 대립왕으로 선출하기까지 했다. 1247년 하인리히 라스페가 사망하자 홀란트 백작 빌럼이 뒤이어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한 콘라트 4세 역시 교황에게 파문당하였고, 1254년 콘라트 4세가 2세에 불과한 어린 아들 콘라딘을 남긴 채 사망하였다. 1256년에는 홀란트 백작 빌럼이 사망하면서 개최된 1257년의 황제 선거는 7인의 선제후 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선거이기도 한데, 여기서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동생 리처드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지지를 받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가 이중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제위는 사실상 공백 상태가 되었고, 대공위시대가 이어졌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47.55.42)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