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독일 (r120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중세 후기 #==== 권력 공백 기간이었던 대공위시대가 길어지면서 제국 내외에서 황제 선출에 대한 요구가 점차 강해졌고, 결국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된 후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으면서 대공위시대는 종결되었다. 제위를 세습하려 했던 루돌프 1세의 시도는 실패하였으나,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국 내 중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루돌프 1세의 선출 이후 중세 후기의 제국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바이에른과 [[라인란트팔츠|라인팔츠]]의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와 [[보헤미아]]의 룩셈부르크 가문과 같은 대귀족 가문들이 황제위를 경쟁하였다. 루돌프 1세 이후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재위 1291-1298), 루돌프 1세의 아들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재위 1298-1308),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재위 1308-1313)의 시대를 거쳐, 1314년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미남왕이 이중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미남왕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루트비히 4세는 1328년 교황의 승인을 얻지 않고 황제로 대관하였는데, 이로부터 황제 선출에 대한 교황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루트비히 4세의 뒤를 이어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가 선출되었는데, 카를 4세는 조부인 하인리히 7세 시대에 획득한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카를 4세 통치 시대인 1356년 제정된 금인 칙서는 대공위시대 이후부터 제도화되고 있던 7인의 선제후 및 황제 선출 관습을 명문화하였는데, 이후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그 작동 원리를 규정하는 중요한 기본법 중 하나로 기능하였다. 금인 칙서에서 선제후의 권한 및 황제 선출 절차를 법적으로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이를 통해 1198년 필리프와 오토 4세 이후 계속되고 있던 이중 선출을 근절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의 제국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를 4세는 1373년에는 브란덴부르크를 매입하면서 제국 동부에 [[브란덴부르크]]-[[라우지츠]]-[[슐레지엔]]-보헤미아-[[모라비아]]로 이어지는 광대한 영역을 형성하였고, 여기에 서부의 룩셈부르크 및 [[브라반트]]까지 아우르는 강력한 통치 기반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후임자인 벤첼은 무기력한 치세를 보내며 그 유산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벤첼의 뒤를 이은 라인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프레히트 황제 역시 권력 기반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벤첼의 동생이자 루프레히트의 뒤를 이어 선출된 지기스문트 황제 시대에도 유사하였으나,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상속받아 도나우 제국을 건설하여 동유럽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지기스문트는 1434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개최하여 서방교회 대분열을 수습하였다. 지기스문트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가 선출되었다가 그의 급사 이후에는 6촌 형제인 프리드리히 3세가 선출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프리드리히 3세의 통치 기간은 무력함으로 점철된 시대로 여겨졌다. 프리드리히 3세의 53년에 달하는 오랜 통치 기간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한 제위 세습의 출발점이자 모라브가 표현한 '구조화된 응고'가 결실을 맺은 시기였다. 프리드리히 3세의 시대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영지들이 통합되었고,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가 부르고뉴 공국의 계승권을 확보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 흥기의 기반을 닦았다. 또한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생전인 1486년 아들 막시밀리안을 독일 왕으로 선출함으로써 제위 세습을 확고히 하였는데, 이는 중세 후기 동안 카를 4세를 제외하고는 어느 황제도 달성한 적이 없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정치적으로 많은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흥기하는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의 '강력한'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구조적, 제도적으로 중대한 변화를 겪었고, 이는 근대 초 제국의 발전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18.118.145.192)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