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독일 (r120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30년 전쟁]] #==== 루돌프 2세의 후계자 마티아스는 [[개신교]]와 타협을 모색했던 총리 멜히오르 클레슬에게 국정을 맡겼다. 한편으로 [[합스부르크]] 세습 지역 내에서 특히 신교세가 강했던 [[보헤미아]] 지역에서는 가톨릭 종교개혁 및 교파화 시도가 강화되면서 양자 간의 대립이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618년에 보헤미아의 신교 귀족들이 황제가 파견한 두 명의 제국 의원을 창 밖으로 내던지는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 벌어졌고, 이와 함께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이후 독일을 30년 간의 전화로 몰아넣는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보헤미아 반란 이후 얼마 안 있어 마티아스 황제가 사망하자 1619년 신교 연합의 지도자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새로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가톨릭 리그의 군대와 함께 보헤미아로 진격하였고, 보헤미아군은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망명하였고,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은 프리드리히 5세가 지배하던 [[라인란트팔츠|라인팔츠]] 및 [[오버팔츠]] 지방을 점령했으며,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팔츠의 선제후 자리를 빼앗았다. 이렇게 30년 전쟁의 첫 번째 국면인 [[보헤미아-팔츠 전쟁]]은 가톨릭 및 합스부르크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1625년 신교도인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홀슈타인 공작 자격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부 독일을 침공했다. 그러나 그는 틸리 휘하의 제국군과 보헤미아의 귀족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패배하였고, 가톨릭 세력은 덴마크의 [[유틀란트 반도]]와 [[메클렌부르크]]를 점령하였다. 이후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의 권력 강화를 우려하여 1630년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발렌슈타인을 해임하였다. 황제군은 보헤미아-팔츠 전쟁과 덴마크 전쟁을 연이어 승리로 끝냈지만, 1632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참전하면서 최대 위기에 직면하였다. 구스타브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독일 남부까지 멀리 침투하였고, 틸리 백작이 전사하는 위기 속에서 황제는 발렌슈타인을 복권하였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아돌프가 전사하고 1634년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하는 일련의 사건을 거친 후, 황제군은 1634년 뇌르틀링엔 전투에서 신교도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황제의 권력을 크게 확장하는 내용을 포함한 1635년의 프라하 화약을 통해 전쟁은 종결되어 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고자 한 가톨릭 프랑스가 신교 측에 합류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급변하였다. 이후 전쟁은 프랑스-스웨덴 동맹과 에스파냐-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간의 패권 대결 양상으로 흘러갔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다. 1637년 선출된 새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1642년부터 평화 협상을 위해 노력하였고, 서부 독일 베스트팔렌 지역의 뮌스터에서 프랑스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스웨덴과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결국 1648년 10월 24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칼뱅파가 공인되었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며 땅에 떨어졌던 황제의 지위는 제국의회의 주권과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재차 강화될 수 있었다. 황제의 권력은 프라하 화약 당시에 비해 제한되었지만 1663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영구 기관으로 정착된 '영구 제국 의회(Immerwährender Reichstag)'를 기반으로 성직 제후 및 군소 제후들의 지지를 받아 제국 정치에서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이 폐기되고 교파의 자유는 완전히 보장되었다. 한편 베스트팔렌 조약의 또다른 결과로 언급되는 주권 국가의 시대, 즉 '베스트팔렌 체제'의 등장은 현재에 와서는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들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근대적인 의미의 주권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다. 제국 내 많은 구성국들은 자신의 보호를 보장할 수 있는 제국의 유지에 적극적이었고, 제국의 주요 기능은 제국 내 구성국을 외부(주로 프랑스) 혹은 내부(브란덴부르크, 작센, 바이에른 등)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었다. 또한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 영방 제후들은 다른 국가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긴 하였으나, 이는 제국 전체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18.220.71.71)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