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독일 (r120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바로크와 계몽 시대 #==== 30년 전쟁 이후 레오폴트 1세의 긴 치세 동안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과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의 확장이라는 두 가지 위협에 직면했다. 레오폴트 1세는 우선 1683년의 제2차 빈 포위를 일부 독일 제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지원으로 격퇴해내면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쳤고, 루이 14세의 팽창 정책에 대해서는 1688년에서 1697년까지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을 통해 대응하였다. 레오폴트 1세의 후계자인 요제프 1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면서 [[밀라노 공국]]과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병합하였고, [[합스부르크 제국]]은 레오폴트 1세와 요제프 1세 시기를 거치며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열강으로 떠올랐다. 한편으로 30년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각 영방 국가들은 30년 전쟁의 파괴와 인구 손실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고 통제된 경제 및 사회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특히 [[브란덴부르크]], [[바이에른]], [[작센]]과 같은 대형 제후국들은 재정권과 군사력을 장악하면서 국가 권력을 확대하고 초기적인 형태의 근대 국가 체제를 수립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발전에 있어 근대 초기 유럽의 전쟁이 핵심적으로 기능하였다. 군사 혁명으로 대표되는 군사적 혁신과 근대 초기 유럽에서 빈번하였던 종교 전쟁 및 계승 전쟁들은 유럽 각국의 정부에 막대한 재정 지출을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대 초 유럽 국가들은 조세 권한의 독점을 통한 재정의 일원화와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폭력의 독점을 달성하면서 국가 자체가 효율적인 전쟁 기구로 거듭났다.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 확보를 위해서 군주는 영방신분/영방등족(Landstände)[14]에 의해 대표되는 영방 의회(Landtag), 즉 신분제 의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중세 말 근대 초 유럽의 신분제 의회는 군주의 세금 징수에 대한 동의를 의결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근대 초기 유럽 각국에서는 군주와 신분제 의회가 타협하는 잉글랜드식, 군주가 신분제 의회를 무시한 채 세금을 직접 징수하고 신분제 의회가 이를 묵인하는 프랑스식의 두 유형이 나타났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각국마다 다르게 전개되었다. [[작센 선제후국]]과 [[뷔르템베르크]], [[메클렌부르크]] 같은 곳에서는 신분제 의회의 권력이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하기까지 유지되었다. 군주가 영국의 통치에 점차 집중하였던 하노버 선제후국은 전체 영방 의회가 소집되지는 않았지만 각 지방의 신분제 의회가 그 권한을 계속 유지하였다. 한편으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선제후국과 바이에른 선제후국, 헤센의 공국들은 17세기에 이르러 군주권이 강화되면서 전체 영방 의회는 점차 소집되지 않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8세기까지도 신분제 의회의 권력은 유지되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의 시대를 거치며 군주가 조세 권한 및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국 내 주요 영방 국가들은 국가가 조세를 통해 재정을 충당하는 근대적인 조세 국가(Steuerstaat) 및 상비군을 보유하는 무장 제국등족(Armierter Reichsstand)으로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특히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프랑스식의 초기 근대 국가 형성 과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케이스였다. 30년 전쟁 중인 1640년 즉위한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융커 계급에게 광범위한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30년 전쟁 기간 동안 전쟁 수행을 위해 도입된 관료 기구들을 상설 관료제로 발전시켜 나갔고, 상비군 역시 도입했다. 이로써 대선제후는 조세 권한과 군사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1661년 동프로이센의 신분제 의회가 소비세 도입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하면서 이들의 충성 역시 확보하였다. 이후 대선제후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황제를 지지하는 대가로 1701년에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적극적인 군국주의 정책을 통해 프로이센 군대를 크게 성장시켜 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거듭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유산을 계승받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1740년 카를 6세의 사망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계 후사가 단절된 것을 노려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문제삼으며 슐레지엔을 침공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 전쟁을 거치며 슐레지엔을 완전히 병합하고 폴란드 분할을 통해 크게 영토를 확장하면서 프로이센의 독일 내 지위를 오스트리아에 버금가는 양강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18.222.25.161)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