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독일 (r120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나폴레옹 전쟁]]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 [[프랑스 혁명]]은 초기에 독일에서도 열렬히 환영받았으나, 프랑스 혁명이 급진화하면서 이에 대한 거부감 역시 확산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연합군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프랑스의 지배자로 대두한 나폴레옹은 점차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우선 1801년 뤼네빌 조약을 통해 라인강 좌안 전체 지역을 프랑스에 합병하였고, 1803년에는 주교령을 폐지하는 세속화(Säkularisation)와 군소 제후령의 통합하는 중재(Mediatisierung)를 골자로 하는 제국대표단 주요결의안(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300여 개에 달하던 제후국들을 재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크게 이득을 본 것이 뷔르템베르크와 바덴이었고, 프로이센과 바이에른도 크게 영토를 넓혔다.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프랑스의 황제가 된 직후 황제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영지를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모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웠는데, 이는 이 즈음에 이르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가 유명무실한 지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였고, 1806년 [[라인 동맹]]을 설립한 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했다. 결국 1806년 프란츠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함으로서 제국은 종언을 고했다. 나폴레옹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라인 동맹에선 프랑스를 모델로 한 개혁이 실시되었다. 반면 프로이센은 틸지트 조약에서 엘베강 서쪽의 모든 영토와 [[폴란드 분할로]] 얻은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고 국토가 거의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국가적 굴욕은 프로이센으로 하여금 국가적, 민족적 대각성 및 개혁을 촉구하였고, 슈타인 남작과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국가 개혁에 돌입하였다. 초기에는 슈타인이, 나폴레옹에 의해 슈타인이 축출된 후에는 하르덴베르크가 주도한 프로이센의 개혁은 행정 개혁과 재정 개혁, 조세 개혁, 농지 개혁 및 길드 특권 철폐와 같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후 독일 내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점차 고조되었다. 1813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한 후 시작된 독일의 해방전쟁(Befreiungskrieg)은 독일의 민족 감정을 매우 고취시켰고, 독일 민족주의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독일의 해방전쟁은 1812년 12월 30일 프로이센의 장군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 백작이 몇 주 동안 머뭇거리던 왕의 명령 없이 러시아와 타우로겐 협약을 체결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렇게 재결성된 프로이센-[[러시아 제국|러시아]] 동맹은 1813년 2월 말에 공식화되었고, 이는 최후의 대프랑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는 1813년 8월에야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참전했지만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결정적 패배에 기여하였고, 이후 라인 동맹이 해체되면서 독일은 해방되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45.23.238)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