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독일 (r120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산업화와 독일 통일 #==== 3월 혁명 이후부터 독일 제국이 성립되기 전까지의 시기는 경제적으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독일 통일을 둘러싸고 프로이센과의 오스트리아의 경쟁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독일사에서는 이 시기를 건국 시대(Gründerzeit)라고 하기도 한다. 1848/49 혁명의 실패 이후 프로이센은 [[작센 왕국|작센]]과 [[하노버 왕국|하노버]]를 끌어들여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적 연합인 에어푸르트 연합을 결성하면서 독일 통합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려 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독일 연방을 복구하고자 하였고, 결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압박으로 프로이센은 1850년 올뮈츠 협약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의장으로 하는 독일 연방으로 복귀했다. 이후 1850년대 동안 독일 연방에서는 정치적으로 반동 정책이 계속되는 한편, 경제적으로 산업혁명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어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성립된 독일 관세동맹은 단일한 경제 지대를 구성함으로서 산업화를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을 제공하였다. 1840년대에는 초기 산업화가 크게 진전되었는데, 이는 1835년 [[퓌르트]]와 [[뉘른베르크]]를 연결하는 최초의 철도가 개설된 이래 폭발적으로 성장한 철도 시스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세기 중반부터 성장한 은행은 산업 및 무역 자금 조달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일 내 산업화의 선봉장은 단연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베를린과 라인란트, 슐레지엔을 중심으로 공업이 크게 성장하고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고, 또한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이주하면서 노동력의 조달이 이루어졌다. 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19세기 말에도 여전히 인구의 60% 가량이 농업 인구였다. 오스트리아는 입지 상으로도 석탄과 철광석 조달에 불리했고 농업 생산력 및 구매력도 현저히 낮았기에 경제적으로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관세 동맹 가입은 프로이센의 반대에 부딪혔고, 크림 전쟁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 등 대외적으로도 오스트리아의 실패는 계속되었다. 한편 프로이센에서는 1859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사망한 후 즉위한 빌헬름 1세가 신시대(Neue Ära)를 선포하면서 반동 체제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이에 세력을 회복한 자유주의자들은 곧 군제 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1861년 자유주의자들이 독일 진보당(Deutsche Fortschrittspartei)를 결성하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의회 과반수를 장악하자, 빌헬름 1세는 강경 보수파로 잘 알려진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임명하여 대처하고자 하였다. 1862년 수상으로 취임한 비스마르크는 정부와 의회가 대립할 때 국왕의 역할을 규정하지 않은 헌법상의 허점을 이용하여 의회의 동의 없이 군제 개혁안을 강행하였고, 이러한 내부 갈등을 프로이센 헌법갈등(Preußischer Verfassungskonflikt)이라고 한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내부 갈등을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우선 186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덴마크에 대항한 독일 민족주의 운동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독일-덴마크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전후 처리에서 처음에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국을 공동으로 관리하다, 1865년에 홀슈타인이 오스트리아령으로, 슐레스비히가 프로이센령으로 귀속되었다. 여기서 1866년 초부터 비스마르크는 독일 내 프로이센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홀슈타인 문제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정책을 펼쳤다. 결국 이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3세의 중립을 보장받은 반면, 오스트리아는 동맹 독일 국가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전쟁 개시 7주 만에 오스트리아는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전쟁의 결과 독일 연방의 최종적 해산과 프로이센이 이끄는 북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독일사에 있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분기를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19] 뿐만 아니라 헌법갈등 이후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적대자였던 독일 진보당 역시 전쟁의 승리 이후 비스마르크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출현하면서 분열하였고, 이는 이후 몇 년간 독일 정계를 주도하는 민족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의 창당으로 이어졌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친비스마르크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내밀어 1866년 9월 26일 1862년 비스마르크 취임 당시의 초법적 예산안 처리에 대한 사후 승인법 혹은 면책조항(Indemitätgesetz)이 통과되었고, 프로이센 헌법갈등은 종식되었다. 북독일 연방은 정치 구조를 비롯한 많은 면에서 이후의 독일 제국으로 계승되었다. 프로이센의 우위가 보장된 상원 연방참사원(Bundesrat), 프로이센 수상과 외무장관을 겸하는 수상 비스마르크, 입법 및 국가 예산에 관한 의사 결정 기관인 하원 제국의회(Reichstag)로 구성된 정치 체제는 독일 제국과 동일했다. 또한 북독일 연방의 의회 선거에서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25세 이상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제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향후 독일 제국의 정치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제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은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이끄는 프랑스 제국이였다. 북독일 연방과 프랑스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중립을 취하는 대가로 프랑스가 요구하였던 룩셈부르크 문제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스페인의 차기 왕위 계승자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레오폴트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이 지명된 것은 갈등을 격화시켰다. 여기서 비스마르크는 1870년 엠스 전보 사건을 통해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촉발했다. 이렇게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마침내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하여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가 남독일 국가인 [[바이에른 왕국|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를 포함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독일 제국이 건국되었다. 그와 더불어 프랑스는 프랑크푸르트 조약에서 알자스-로렌의 할양과 함께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도 받아들여야 했다. 독일 제국 성립 당시 프로이센과 더불어 규모 있는 제후국이었던 작센,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와 자유도시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에]] 대해서는 유보권(Reservatrechte)이라는 이름의 특혜가 주어졌는데, 이들은 주류세와 우편 및 철도 부문에서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33.146.237)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