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독일 (r120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고대 #=== 기원전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발트해 연안 지역에 머물던 게르만족은 기원전 2세기경 남하를 시작하여 기원전후 무렵 선주민이었던 [[켈트족]]들을 몰아내고 라인강과 도나우 강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라인 강 동부와 도나우 강 북부의 넓은 땅을 무대로 주로 유목과 사냥을 했으며, 추운 날씨를 견디며 척박한 땅에서 생활하다 보니 [[게르만족]]은 강인한 성격과 불굴의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 다만 이들에겐 문자는 커녕 그들만의 역사와 문화가 없었다. 그들은 짐승 가죽으로 간단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 몸을 가렸고, 나무를 쌓아 오두막을 지어서 비바람을 피했다. 로마인들은 이 땅을 게르마니아라고 불렀다. 기원전 50년경 [[갈리아]] 정복에 나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군과 게르만족이 최초로 접촉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일부를 차지하려고 시도했으나 게르만족의 호전성과 게르마니아의 울창한 숲을 이용한 게릴라 전투의 위험성을 깨닫고 곧 포기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 필적할만한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자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게르마니아 전역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라인강의 경계를 엘베 강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은 로마 제국 역사를 통틀어 최대의 정복 사업이라 할 만했는데, 무려 11개 이상의 군단이 투입되었다. 기원전 12년 시작된 게르마니아 정복은 기원후 4~5년경 엘베 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듯 했다. 이렇게 해서 게르만족이 생활하던 땅은 로마의 판도 안에 들어갔다. 로마의 장군 티베리우스는 3개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게르마니아에 주둔했으며, 게르마니아 지역에 있는 각 부족의 족장들을 설득해서 로마가 게르마니아를 통치하는 데 꼭두각시로 이용했다. 로마 정부는 부족을 통치하는 능력이 뛰어난 족장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그들을 로마 기사계급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후 9년 정치수완이 제법 좋았던 티베리우스가 갑자기 전출을 가게 되면서, 바루스가 부임했다. 바루스는 부임하자마자 군대를 정비하거나 정무를 돌보지 않은 채 군영에서 연회를 열며 놀기 바빴고, 이를 틈타 게르만족은 전쟁을 준비하여 로마군에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유명한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군이 로마군에 대승을 거두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 참패를 당한 [[로마 제국]]은 이내 라인 강 건너로 물러나고 만다. 이로써 게르마니아는 오늘날 서유럽 지역에서 유일하게 로마 제국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으로 남게 되었고, 게르만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 종교 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토이거부르거 숲의 전투의 승리를 오늘날 독일 정체성의 정신적 근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시각이 19세기 독일 통일 이후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태동한 역사관일 뿐이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근세까지 독일 지방에서 살고 있는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 더 거슬러 올라가면 [[트로이인]]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19세기 민족주의의 열풍 속에서 크게 재부각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로마 제국 말기인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훈족의 압박 등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고,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인 481년 클로비스 1세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세워진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28.202.221)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