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동로마 제국 (r19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로마 제국]]의 분할 ===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행정 제도인 사두 체제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공동 황제를 두어 정제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정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게 했으나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자 이 사두 체제는 무너졌고,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제 세습제를 세웠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옮기면서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기원후 330년 그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제2의 로마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과 서방 간 교역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그리고 천도와 함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다시 개선하였다.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통화였다.)를 안정시켰고 군사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 기독교는 더는 국가에 박해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풀어서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새로운 종교의 통일된 교리를 정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반영하였다. 395년 이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과 원칙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황조 세습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되어 이 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을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서방 전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 아르카디우스의 동방 제국은 [[발칸반도]], [[소아시아]], [[레반트]], [[이집트]], 동지중해의 섬들로 이루어졌다. 3세기와 4세기에 동로마 제국은 사회, 문화가 서로마 제국보다 발달했고 재정 자원도 풍부해 공물을 지불함으로써 국가의 침략자를 회유할 수 있었고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있어서 대개 서로마 제국이 직면한 곤란한 상황을 도와주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더욱 요새화하여 어지간한 공격은 대체로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벽은 1204년까지 한번도 적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훈족]] 아틸라의 침입을 피하고자 테오도시우스는 이 사람들에게 공물(300kg에 달하는 금이었다.)을 바쳤고 훈족이나 타 이민족과 교역을 장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를 계승한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이런 막대한 액수의 공물을 계속 바치는 것을 거부했으나, 아틸라는 이미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했고 동로마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훈족들은 결국 로마 제국 군대의 용병으로서 싸우게 된다. 아틸라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가 유명무실한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으며, 다른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네포스 등은 [[달마티아]]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로마의 황제를 자임했다.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마저 사망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최종 붕괴되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39.97.157)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