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영국 (r121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조지 6세 시대: 2차대전 전후의 영국 #==== 세 왕의 해를 전후해 [[대공황]]은 영국에 큰 타격을 입혔다. 중공업과 광업 분야의 피해가 심각했으며 식민지를 통한 해결도 제한적이었다. 한편 독일이 세를 불릴 때인 1938년, 네빌 체임벌린은 체코의 독일계 영토 포기에 동의하는 [[뮌헨 협정]]에 서명했지만[* 흔히 체임벌린의 실책으로 해석되지만, 당시 영국 국민들은 [[제1차 세계대전|큰 전쟁]]을 겪거나 참전자들에게 들었던 터라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짙었고 체임벌린 역시 국민 여론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전쟁을 조금 늦출 뿐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후 몇 달 동안의 [[가짜 전쟁]]을 거쳐 독일이 북쪽과 서쪽으로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하자, 유럽에 배치된 영국군은 마틸다 전차에 힘입어 전술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경과를 여러 번 거두었지만 전략 면에서는 독일에 밀렸기에 시간 벌기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했고 결국에는 [[됭케르크 철수작전|독일군에 쫓겨 본토로 돌아갔다]]. 됭케르크에서 시간을 번 영국 공군은 독일 육군의 [[바다사자 작전|교두보 확보]]를 막기 위해, [[영국 본토 항공전|진격해 오는 루프트바페에 맞서 싸웠고]], 이 과정에서 여러 도시가 폭격을 맞고 불탔지만 결국에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즈음 [[북아프리카 전선|이탈리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를 침공했지만]], 영국의 선전과 이탈리아의 졸전이 맞물려 이탈리아가 독일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영국 역시 롬멜의 군대 앞에 밀렸으나 미국의 도움을 받아 북아프리카를 탈환한다. 이후 미군과 함께 영국군은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남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지를 차례로 탈환하고 승전을 맞는다. 지구 반대편인 태평양에 배치된 영국군은 해군과 구르카를 제외하면, 식민지 치안 부대 정도로 부실했던 탓에 [[일본 육군]]이 [[남방작전|동남아시아를 침공]]하고 [[일본 해군]]의 [[말레이 해전|예상 외의 공격에 해군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나름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항복하거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철수했다. 이후 태평양의 영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미얀마 등의 아시아 각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구레 군항 공습]]에도 한몫했고, [[오보에 작전|보르네오 탈환]]은 영국군이 주역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계를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종전 이후 처칠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노동당 정부는 식민 제국의 시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제국의 보석이라 불리던 [[인도]]의 독립을 약속했던 1948년보다 이르게 승인했는데 이는 끝까지 식민지를 유지하려 20세기 후반까지 미련이 있었던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과 대비되는 처사였다. 1951년에 와서는 보수당조차 후에 '변화의 바람'이라 불리게 되는 식민지 정책을 수용하기에 이르렀고 최대한 평화롭게 식민지의 권력을 현지의 민주 정부에게 주려고 했다.[* 이 정책에 대해 이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펴면서 흑인들은 미개해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본 [[남아프리카 연방]]의 지배층들은 크게 반발했고 결국 1961년 [[영연방]]을 탈퇴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었다.] 결국 영국 본토 외의 제국의 국민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남은 국민의 절반 이상은 홍콩인들이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45.1.51)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