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영국 (r121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중세 #=== [[브리튼인]]들은 로마군이 떠난 뒤로 스코틀랜드, 웨일스, 콘월 방면에서 계속 [[픽트족]], [[스코트족]]의 침략을 받았다. 브리튼인만으로 버티는 것이 힘들어지자 유럽 본토에서 대규모로 [[앵글로색슨족]] 용병이나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게르만족]]이 잉글랜드로 들어왔다. 그러나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은 땅을 두고 전쟁을 벌였고 잠시나마 브리튼인이 앵글로색슨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나[* 이때 활약한 것이 아서 왕 등이다.] 결국 바다를 건너 계속 들어오는 앵글로색슨족을 견디다 못한 브리튼인들이 복속되어 7세기경까지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게르만족이 되었다. 브리튼인 일부는 [[웨일즈]], [[콘월]] 지방으로 대피하였고 대륙으로 건너가 [[브르타뉴 공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앵글로색슨 국가들 사이의 전쟁 끝에 [[칠왕국]]이 나타났다. 878년 [[데인족]]과 [[웨식스]]의 영토. 요크와 케임브리지 사이의 옅은 색으로 표시된 땅은 험버 강 하구 습지(The Humber Estuary)와 펜스 습지(The Fens)다.[* 이 습지들은 오늘날에는 대부분 개간되었다.] 이렇게 브리튼족을 웨일즈, 스코틀랜드로 쫒아내고 잉글랜드를 차지한 앵글로색슨족은 8~9세기에 [[바이킹]]들의 침략, 이른바 '''이교도 대군세'''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칠왕국 대부분이 바이킹에게 정복 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앵글로색슨족은 과거 브리튼족과 달리 역사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버텨내는 데 성공한다. 칠왕국 중 유일하게 건재했던 [[웨식스]]의 국왕 알프레드 대왕이 가열찬 바이킹의 군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여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간신히 영토를 지켰다. 그러다 마침내, 10세기 초에 웨섹스의 국왕 애설스탠이 아직도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바이킹 세력을 싹 몰아내고 칠왕국을 통일해 합쳐진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에드거 1세에 이르러서는 통일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11세기에 '''또 다시''' 바이킹 군세가 몰려와 [[덴마크]]의 왕자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정복,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잉글랜드에 이르는 강력한 [[북해제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크누트의 북해제국은 확고하게 융합되지는 못한 채 크누트 사후엔 흐지부지 분열되었고 잉글랜드 역시 참회왕 에드워드의 등극으로 다시 [[앵글로색슨족]]의 [[웨식스 왕국]]이 들어섰다. 후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할 준비를 한다. 문제는 풍향 때문에 윌리엄의 상륙이 지연됐고 침공에 대비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 고드윌슨은 수확기가 다가오자 징집병들을 해산시켰는데, 운이 나쁘게도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의 사주를 받은 마지막 바이킹 군주 하랄 하르드라다가 잉글랜드를 침공해왔다. 해럴드는 부랴부랴 병력을 소집해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바이킹들을 무찌르고 바이킹들에게 다시는 영국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바이킹 시대를 끝낸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윌리엄쪽으로 불던 풍향이 영국쪽으로 불기 시작하면서 [[노르만 정복|윌리엄이 침공해왔다]]. 해럴드는 하르드라다와의 전투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병력으로 윌리엄에게 맞서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만족을 상대로 시종일관 우세를 점하지만 '''또또''' 운이 나쁘게도 눈 먼 화살에 한 쪽 눈을 맞고 고작 재위 9개월 만에 전사하였고, 지도자를 잃은 잉글랜드군 병사들은 결국 [[헤이스팅스 전투]]에 패배해 월리엄 1세를 왕으로 하는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다. 이후 앵글로색슨 왕조와 영주들을 몰아내고 노르만 왕족과 영주들이 잉글랜드의 지배계급을 차지한다. 공작, 백작, 자작 등으로 이어지는 작위가 있었던 대륙과는 달리 브리튼 섬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러 앵글로색슨 왕국이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도 세력이 비슷한 영주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영주들을 모두 통제하기가 어려웠는데[* 프랑스와 같이 친족들을 영주들의 우두머리인 공작 등으로 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노르만 정복 왕조 이후에는 프랑스와 영국 양쪽에 넓은 영토를 가진 강력한 노르만 영주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앵글로색슨족은 이번에도 살아나는 데 성공하는데, 노르만 왕조가 스티븐 왕을 끝으로 단절되고 헨리 2세(헨리 플랜태저넷)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의 절반과 잉글랜드를 모두 지배하는 앙주 제국이 성립되었다. 리처드 1세 시기에는 [[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맹활약을 했으나 결국 성지 탈환에 실패했고 내정도 파탄을 맞았고 다음 왕인 존 왕은 프랑스 왕국 내의 플랜태저넷의 영지를 대부분 상실해 결지왕, 실지왕, 무영토왕이라고까지 불렸다.[* 다행히 가스코뉴를 비롯한 일부 영지는 지켜냈다.] 이런 존 왕의 실정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존 왕을 협박해 받아낸 것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다. 로빈 후드가 활동한 것도 이 시기다. 이후 국왕과 귀족들의 다툼으로 헨리 3세가 반란군에 패해 포로로 잡히기도 했으나 이내 국왕이 반격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보한다. 그 아들 에드워드 1세는 의회를 최초로 소집했고 웨일스를 복속시키고[* 명목상의 복속은 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인 지배를 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 스코틀랜드를 잔인하게 정복해 잉글랜드 왕이 스코틀랜드 왕까지 겸하게 되어 스코트인들의 망치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인들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결국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에게 패배하면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다. 이후 에드워드 3세 시기가 되면 플랜태저넷이 가진 프랑스 내의 잔존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양털을 보유할 수 있는 플랑드르 확보에 더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와 스코틀랜드의 프랑스와의 연대 등이 겹치며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백년 전쟁이 끝나고 1455년에는 랭케스터와 요크의 대결이었던 [[장미전쟁]]이 30년간 벌어져 헨리 튜더가 승리를 차지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38.116.50)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