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프랑스 (r114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프랑스 왕국]]의 발전 #==== 1500년에 이르면 인구 15,000,000명에 달하는 프랑스 지역의 거의 대부분의 토지가 프랑스 왕령이 되고, 국가 안에서 권력이 막강해졌다.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해서 [[이탈리아]]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투쟁하였으나 이 무렵에는 카를 5세가 있던 합스부르크에게 계속 패배하였다. 이 와중에 종교 개혁으로 왕실에 위기가 닥친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칼뱅 개혁 교회 신자들은 위그노라고 불리었는데 16세기 중반에 이들의 수는 약 5%로 전체 인구에 비해서는 아주 적었으나 왕실에 대항하는 대귀족들이 주로 신봉하였다. 그래서 당시 왕조였던 발루아 왕조, 위그노 측의 부르봉 가문, 가톨릭 측의 기즈 가문은 수십 년간의 위그노 전쟁을 일으켰다. 위그노 전쟁의 결과로 발루아 왕조가 부르봉 왕조로 교체되고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내전을 종결하였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도 종교 개혁으로 많은 전쟁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전이 종결하고 난 후 안정이 되자 프랑스는 외부에 다시 집중한다. 독일 지역에 비해 일찍 내전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이 프랑스로서는 큰 기회가 되었다.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낭트 칙령으로 타협한 것을 바탕으로 리슐리외와 같은 관료의 주도 아래에서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도입한다. 프랑스의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1600년에는 220,000명에 달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면서도 30년 전쟁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신교도들과 동맹하였고, 심지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30년 전쟁이 끝났을 무렵부터 유럽의 패권국 중 하나가 된다. 낭트 칙령이 폐지된 1685년 프랑스의 인구는 21,500,000명이나 되었고 여전히 프랑스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파리]]도 인구가 510,000명으로 엄청나게 증가해 런던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대에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던 위그노들의 이탈로 재정에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루이 15세 시대에도 재정 확대는 잘 되지 않았고 [[7년 전쟁]] 등 큰 전쟁에서 계속 패배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18.119.255.44)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