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프랑스 (r114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프랑스 왕국]]의 성립 #==== 서프랑크의 샤를 2세 치세에 서프랑크군은 동프랑크군을 격파하고 중프랑크의 영역이던 [[로렌]], [[라인란트]] 등지를 점령하였지만 샤를 2세가 급사하고 중세 유럽 게르만계 지배층들이 지배하던 국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상속권의 문제와 지방 세력들을 억제하기 힘든 중앙정부권력에의 문제로 말미암아 패권을 장기 지속하기 어려웠다. 7세기 중엽부터 북게르만계 민족 계통인 [[노르드]]가 [[스칸디나비아]]를 벗어나 유럽 전역에 약탈전쟁을 벌이면서 노르드의 약탈전쟁단이라 할 수 있는 [[바이킹]] 집단의 공세는 서프랑크에도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루이 3세가 한차례 바이킹들을 크게 대파하였지만 루이 3세는 다소 어이없는 사고사로 급사하였으며 이후 지속되는 바이킹들의 침공과 함께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는 서프랑크에서 갈수록 약화되었다.[* 그나마 서프랑크에서는 양반인 것이 중프랑크는 애진작에 멸망했고 독립한 이탈리아 지역에는 이미 카롤링거가 아닌 다른 가문이 왕가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동프랑크 역시 카롤링거 직계 혈통이 일찍 끊겨 제후들의 선거 상속 체제로 변화하고 있었다. 서프랑크는 최후까지 카롤링거가 잔존했으므로 이것은 프랑스가 자신들이 프랑크와 카롤루스의 정통성을 가장 크게 이어받았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루이 3세가 급사하고 루이 3세의 동생인 샤를로망 2세 역시 급사해버리면서 공석이 된 서프랑크 왕위를 동프랑크 군주인 카를 3세가 잠시 차지하였을 때에는 프랑크가 다시 하나로 합쳐질 가능성도 없지 않았지만 카를 3세가 서프랑크 방면을 침공하는 노르드 바이킹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돌려보내자 싸우지도 않고 외적에게 돈을 바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서프랑크 제후들의 전면적인 반란과 봉기에 직면하였으며 마침 동프랑크 왕위를 노리던 조카 아르눌프 역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를 3세는 퇴위당하였으며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의 분열은 이 시점에서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카를 3세가 퇴위당한 상태에서 서프랑크 제후들을 규합하여 파리 공방전에서 노르드 바이킹 대군세를 수적 열세에도 격파하는데 성공한 카페 가문의 외드가 서프랑크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카롤링거 왕조를 대신하여 서프랑크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것이 역사적인 [[카페 왕조]]의 첫 시작이었다. 외드의 모친은 루도비쿠스 1세의 딸인 아델라이드였기에 모계로 카롤링거 혈통을 계승했다는 점 역시 주요하였다. 그러나 외드에게는 친자가 없었으며 카롤링거 왕조 서프랑크의 2대 국왕이던 루이 2세의 아들인 샤를 3세가 카롤링거 직계 혈통의 명분으로 서프랑크 왕위 계승을 주장할 때 외드는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샤를 3세는 본래는 자신의 형들인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에게 밀려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 결국 외드는 사망할 때에 카페 가문의 친척이 아니라 샤를 3세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다. 샤를 3세가 서프랑크 왕위에 즉위하며 카롤링거 왕조가 복권되었을 시기, 샤를 3세는 서프랑크를 침략하는 노르드 바이킹 무리의 한 일파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그들을 서프랑크 땅에 정착시켜 자신의 부하로 삼아 다른 바이킹 무리들과 싸우게끔 이이제이를 유도하였는데 이것이 서프랑크-프랑스 문화에 동화된 노르드 출신들을 의미하는 [[노르만족]]의 역사적인 첫 시작이다. 노르만족이 정착한 장소가 바로 [[노르망디]]이며 이후 노르만족은 서프랑크-프랑스 귀족 사회에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노르만족 항목을 참조. 그러나 샤를 3세가 카롤링거 가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서프랑크 내에서 카페 가문의 인기는 여전히 드높은 상태였다. 이미 카페 가문의 외드가 한 차례 왕좌를 거머쥐었다는 점에서 카페 가문은 멸문당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카롤링거에게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외드의 동생으로써 마찬가지로 아델라이드의 아들이며 따라서 카롤링거의 혈통을 모계로 이어받은 로베르 1세는 노르드 바이킹들의 침공을 누차 격파하면서 서프랑크 제후들 사이에서 더욱 큰 명망을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샤를 3세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로베르 1세는 서프랑크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샤를 3세를 밀어내고 왕좌에 올랐지만 샤를 3세 역시 자체 세력을 이끌고 이에 대항하면서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수아송 전투(923년)]]에서 로베르 1세가 승리하면서 로베르가 서프랑크 왕위를 거의 거머쥐는 듯 했으나 급사하면서[* 샤를 3세에 의한 암살설 존재.] 로베르의 사위인 라울이 왕위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 라울 역시 급사하면서 샤를 3세의 아들인 루이 4세가 서프랑크 왕좌를 되찾으며 카롤링거 왕조가 다시금 복권되었다. 그러나 카페 가문의 서프랑크 내 위세는 여전히 거대했으므로 루이 4세는 치세 내내 카페 가문과 권력 다툼을 벌여야했는데 루이 4세와 그의 아들인 로테르, 로테르의 아들인 루이 5세가 줄줄이 요절하면서 최후까지 잔존한 서프랑크 카롤링거 왕조도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위그 르 그랑의 아들인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 왕좌에 앉으면서 본격적으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클로비스 1세의 메로빙거 왕조가 프랑스 역사의 실질적인 시작이라면 [[카페 왕조]]의 시작은 프랑스 중세 역사의 실질적 개막이라고 볼 수 있으며 카페 왕조의 부계 직계 혈통은 분가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도를레앙 왕조는 물론 부르고뉴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의 방계 가문들, 당주 왕조 등으로도 이어지는데다 그러한 카페 왕조의 부계 직계 혈통이 향후 프랑스를 천년 가까이 지배하게 되므로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카페 왕조는 루도비쿠스 1세의 딸인 아델라이드로부터 카롤링거 왕조의 모계 혈통을 이어받았으므로 이를 기반으로 자신들이 카롤루스 대제의 후예임을 어필하며 정통성을 굳힐 수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중세 초기의 지방 제후 세력들을 억제하며 중앙집권화를 이룩하기에는 여전히 힘이 미력하였다. 따라서 위그 카페의 치세에부터 카페 왕조 프랑스의 7대 국왕인 필리프 2세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200여년 이상 카페 왕조는 자국 내의 제후 세력들과의 권력 분쟁과 왕권 강화에 집중해야했다. 중세 초 봉건 체제에서 기인하는 제후들의 독자적 행보와 분리독립 현상의 대표적인 예시가 필리프 1세 치세에 프랑스 왕의 신하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고드윈슨 왕조를 무너뜨리며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여 [[노르만 왕조]]를 건설하고 프랑스로부터 사실상 독립해버린 경우이다. 노르망디 공작이 노르망디 영토를 그대로 들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으므로 노르망디 역시 잉글랜드 왕이 다스리는 영토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외에도 프랑스 왕에게 충성하는 [[노르만족]] 계열의 제후인 로베르 기스카르가 독자적으로 나아가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기도 하였으며 [[십자군]] 전쟁의 1차 십자군 역시 프랑스 왕의 의사와는 별개로 프랑스 제후들이 주축이 되어[* 일부는 노르만, 네덜란드, 독일 출신이다.]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로도 프랑스 서북 지역인 앙주의 프랑스인 제후 앙리가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가 단절되자 모계 계승권을 주장하여 잉글랜드의 왕인 헨리 2세로 즉위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 잉글랜드가 시작되었는데 이로인해 앙주 지역 역시 잉글랜드로 넘어가게 되었다. 루이 7세가 아키텐의 제후이던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이혼[* 정확히는 혼인 무효이다. [[가톨릭]]은 이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하자 헨리 2세가 엘레오노르와 재혼하고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 등의 아들들을 보면서 아키텐마저 잉글랜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의 프랑스 권역의 절반 이상이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가문의 영역이 되었으며 카페 가문의 위상은 더할 나위없이 약화되었으므로 만약 카페 가문에 걸출한 군주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카롤링거 가문이 카페 가문에게 프랑스 왕위를 찬탈당하였듯이 플랜태저넷 가문이 프랑스 왕위를 카페 가문으로부터 빼앗아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루이 7세의 아들인 필리프 2세라는 뛰어난 명군이 즉위하였고 그는 탁월한 내정 개혁과 법제 구축, 권모술수를 통한 제후 세력 억제와 왕실 직할지 증대를 통한 세수 증대, 군사력 확충 등을 이룩하여 힘을 끌어모았으며 리처드 1세와 정치적 암투를 벌이면서도 그와의 직접적인 결전은 최대한 회피하며 파비우스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샬루-샤브롤 공방전에서 정찰 도중 화살에 맞아 급사하자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여 존 왕의 잉글랜드 대군을 각지에서 격파하고 아키텐과 노르망디 일부를 제외한 플랜태저넷 잉글랜드령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였다. 필리프 2세 시기에 여러 법제가 개편되면서 왕호 역시 '프랑크인의 왕'에서 '프랑스의 왕'으로 바뀌었는데 프랑크인, 갈로-로만인이 융합되면서 형성된 프랑스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의 실질 태동기가 이 시기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이후 존 왕과 오토 4세, 페르디낭 부르고뉴 등이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플랑드르 연합군이 결성되어 프랑스에 도전하였으나 필리프 2세는 이를 [[부빈 전투]]에서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카페 왕조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필리프 2세 치세 이후 루이 8세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노리고 잉글랜드를 침공하기도 하였으며 루이 9세 때에는 7차 십자군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필리프 4세 치세의 카페 왕조 프랑스의 국력은 절정에 달하여 플랑드르를 격파하여 사실상 속령화하고 혼란한 상태이던 신성로마제국을 압박하여 동부 영토를 일부 확장하였으며 [[아비뇽 유수]]를 일으켜 교황청을 사실상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필리프 4세는 이후 프랑스 내에서 고리대금업 등으로 악명 높던 [[성전 기사단]]에 여러 죄목을 씌워 숙청하면서 성전 기사단이 축재한 재산을 국고로 환원시킬 수 있었다. 또한 필리프 2세에서 필리프 4세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 남프랑스의 카타리파 이단 기독교 교세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일으켜 남프랑스 제후들을 재복속시키면서 남프랑스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하게 굳혔다. 그러나 필리프 4세 급사 이후 카페 왕조 국왕들이 줄줄이 요절하면서 카페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었으며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의 발루아 가문이 왕위를 이으면서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사실 동아시아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발루아, 부르봉 등의 카페 계열 분가들은 모계도 아니고 부계로 카페 가문의 후예들인 관계로 굳이 분가를 할 이유도 없는 집안들이라 사실상 한 가문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분할 봉건 상속의 전통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비단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들이 최상위 작위를 상속한 형제와 차상위 작위를 상속받은 자신의 위치를 분리시키고자 본가에서 가문을 따로 분리시키는 경우가 잦았는데 이를 Cadet Branch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유럽 각 지역이 중앙집권화되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된 이후에조차도 이미 관습화되어 지속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이런 부계 분가 가문들은 자신들과 본가들을 분리시키기는 했어도 본가와 자신들이 사실상 동일한 집안임을 인지하였다. 발루아 가문이나 부르봉 가문, 도를레앙 가문 등 모두가 자신들을 공식적으로 '''카페 가문'''이라고 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모두 자신들과 카페 본가가 실질적으로 하나의 계열임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인해 카페 왕조가 닦은 왕권은 다시 급속도로 추락하였으며 발루아 왕조는 귀족들의 도전에 직면하여야 했다. 필리프 6세는 즉위하자마자 플랑드르의 도전에 맞서 승리를 거두면서 국가를 안정화시키는 듯하였지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모계 상속을 통한 프랑스 왕위의 권리를 주장하며 도전하면서 [[백년전쟁]]이 발발하였는데 크레시 전투에서 크게 참패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필리프 6세의 아들인 장 2세의 치세에는 잉글랜드군을 이끄는 명장인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푸아티에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프랑스와 발루아 왕조는 큰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5세가 왕좌에 등극하고 준동하는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군제를 재편하며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같은 명장을 기용하여 반격에 나서면서 백년전쟁은 다시 프랑스의 우위로 넘어갔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게클랭과 치열한 공방을 펼쳤으나 과로(추정) 및 질병으로 급사하였으며 프랑스군은 [[코르슈렐 전투]], [[퐁발랭 전투]], [[시세 전투]] 등에서 연승을 거두며 잉글랜드군을 대파하고 백년전쟁을 거의 승전 직전까지 끌고 갔으며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시점으로부터 1380년에 이르면 잉글랜드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 방면 영토는 크게 줄었다. 그러나 게클랭이 1380년에 전사하고 동년 샤를 5세 역시 급사하였으며 샤를 5세의 아들인 [[샤를 6세]]는 정신병을 앓고 있어 정무 집행이 불가능한 금치산자였고 이를 방아쇠로 하여 귀족들 간의 대대적인 내전이 벌어지자[*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간의 내전.] 전세는 다시 잉글랜드 쪽으로 넘어갔다. 당시 잉글랜드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분가인 랭커스터 가문이 플랜태저넷 가문을 축출하고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한 상태였는데 이 랭커스터 왕조의 2대 국왕인 헨리 5세는 매우 유능한 지휘관이었던데다 당시 프랑스 귀족 내전 상황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던 부르고뉴파에게 외교 공작을 시도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는 것에 성공하면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파 군세는 연합하여 프랑스를 공격할 수 있었다. 결국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프랑스 아르마냑파 귀족 연합군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하고 [[파리]]와 [[랭스]]가 함락당하자 백년전쟁은 거의 잉글랜드 측의 승리로 끝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헨리 5세가 급사하고 얼마안가 금치산자이던 샤를 6세 역시 사망하면서 전황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으며 샤를 6세의 아들인 샤를 7세는 그 시간을 빌어 귀족들 간의 내전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병력을 추스릴 수 있었다. 또한 그 시기 잔 다르크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발루아 왕조의 권위를 드높이고 병력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이 잔 다르크의 활약을 본 프랑스 내 제후들이 그간 랭커스터 가문과 발루아 가문 사이에서 간을 보던 태도를 버리고 발루아 가문에 충성하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다시 프랑스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파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랭스와 오를레앙을 수복하였으며 이후 잔 다르크 본인은 파리 공성전에서 샤를 7세의 미비한 지원 등의 이유로 패하고 잉글랜드군, 부르고뉴군에게 사로잡혀 화형을 당하였지만 이미 전세는 발루아 왕조 측에 매우 유리해졌으며 아르튀르 드 리슈몽 등이 이끄는 발루아 왕조 프랑스군은 파리를 탈환하고 이후 노르망디, 아키텐 전역으로 공세를 펼쳐 셸부르 전투, 루앙 전투, [[포미니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잉글랜드군을 사실상 재기불능으로 만들었으며 장 뷔로의 군세가 존 탈보트의 잉글랜드군을 보르도에서 완전히 격멸하면서 아키텐과 가스코뉴 전체가 발루아 가문의 프랑스령으로 넘어갔다. 이후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으며 [[칼레]]만이 잉글랜드령으로 남게 되었다.[* 100여년 뒤에 칼레 역시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어 프랑스령이 되었다.] 백년전쟁 시기에 특기할만한 점은 백년전쟁이 귀족들끼리 이합집산하는 전형적인 왕위계승전쟁의 성격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국가와 국가 간의 전면전에 가까운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잉글랜드군이 보급 문제 때문에 프랑스 방면에서 보급을 확충하기 위한 약탈을 자주 행하면서 프랑스 농민들이 발루아 가문에 친화적인 정서를 가지게 되었고 잔 다르크는 그러한 프랑스 평민들이 가지게 된 친발루아, 프랑스 국가주의 정서의 결정체라고 보는 학설도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당시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횡행하던 시기였으며 이런 판국에서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다보니 [[자크리의 난]]과 같은 불만을 품은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그만큼 프랑스 국내는 크게 황폐화되어 과거 필리프 2세에서 필리프 4세로 이어지던 카페 왕조의 황금기 시절에 비하면 프랑스의 힘이 많이 쇠약해진 시기로도 여겨진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발루아 왕조는 백년전쟁의 승리를 통해 얻은 왕실의 권위 및 프랑스인 민족 관념과 프랑스 국가주의에 힘입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을 억제하면서 중앙집권화로의 길을 걷고 병력과 경제력을 재확충하면서 근대 프랑스로의 길을 밟아나가게 되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22.181.209)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