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 (r1판 으로 되돌리기) [include(대전,세종,충남)] ||<-4><tablealign=right><tablewidth=360><tablebordercolor=#008040><tablebgcolor=#008040><bgcolor=#fff,#1f2023> '''{{{#000,#fff [[파일:충청남도 휘장.svg|height=20]] [[충청남도|{{{#000,#fff 충청남도}}}]]의 [[자치군|{{{#000,#fff 자치군}}}]]}}}'''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ff,#1f2023><rowbgcolor=#fff,#1f2023> [[파일:부여군 CI.svg|height=65]]||{{{#000 '''{{{+1 부여군}}}'''[br]扶餘郡[br]{{{-1 Buyeo County}}}}}} ||}}} || ||<-4><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부여군, 너비=100%, 높이=100%)]}}} || ||<-2><width=120> {{{#fff '''군청 소재지'''}}} ||<-2><bgcolor=#fff,#1f2023> 부여읍 사비로 33 (동남리 725) || ||<-2> {{{#fff '''광역자치단체'''}}} ||<-2><bgcolor=#fff,#1f2023> [[충청남도]] || ||<-2> {{{#fff '''하위 행정구역'''}}} ||<-2><bgcolor=#fff,#1f2023> 1[[읍(행정구역)|읍]] 15[[면(행정구역)|면]] || ||<-2> {{{#fff '''면적'''}}} ||<-2><bgcolor=#fff,#1f2023> 624.53㎢ || ||<-2> {{{#fff '''인구'''}}} ||<-2><bgcolor=#fff,#1f2023> 65,039명[* 2021년 2월 주민등록인구] || ||<-2> {{{#fff '''인구밀도'''}}} ||<-2><bgcolor=#fff,#1f2023> 105.06명/㎢ || ||<-2><bgcolor=#008040> [[부여군수|{{{#fff '''군수'''}}}]] ||<-2><bgcolor=#004ea2> [include(틀:더불어민주당/행정구역)] [[박정현(1964년 6월)|{{{#ffffff 박정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ffffff (초선)}}}]],, || ||<|2><-2><bgcolor=#008040> '''[[부여군의회|{{{#fff 군의회}}}]]''' ||<-2><bgcolor=#004ea2> [include(틀:더불어민주당/행정구역)] {{{#ffffff 7석}}} || ||<-2><bgcolor=#e61e2b> [include(틀:국민의힘/행정구역)] {{{#ffffff 4석}}} || ||<|2><-2><bgcolor=#008040> {{{#fff '''도의원'''}}} ||<-2><bgcolor=#004ea2> [include(틀:더불어민주당/행정구역)] {{{#ffffff 1석}}} || ||<-2><bgcolor=#e61e2b> [include(틀:국민의힘/행정구역)] {{{#ffffff 1석}}} || ||<-2><bgcolor=#008040> [[공주시·부여군·청양군|{{{#fff '''국회의원'''}}}]] ||<-2><rowbgcolor=#e61e2b> [include(틀:국민의힘/행정구역)] [[정진석(정치인)|{{{#ffffff 정진석}}}]] ,,[[제21대 국회의원 선거|{{{#ffffff (5선)}}}]],, || ||<|3><width=60> {{{#fff '''상징'''}}} ||<width=60> {{{#fff '''군화'''}}} ||<-2><bgcolor=#fff,#1f2023> [[모란]] || || {{{#fff '''군목'''}}} ||<-2><bgcolor=#fff,#1f2023> [[은행나무]] || || {{{#fff '''군조'''}}} ||<-2><bgcolor=#fff,#1f2023> [[비둘기]] || ||<-2> {{{#fff '''마스코트'''}}} ||<-2><bgcolor=#fff,#1f2023> [[파일:부여군 마스코트.svg|width=60%]][br]{{{-2 금동이}}} || ||<-2> {{{#fff '''브랜드'''}}} ||<-2><bgcolor=#fff,#1f2023> [[파일:부여군 공동브랜드.svg|width=80%]] || ||<-2> {{{#fff '''지역전화'''}}} ||<-2><bgcolor=#fff,#1f2023> '''041''' || ||<-2> {{{#fff '''홈페이지'''}}} ||<-2><bgcolor=#fff,#1f2023> [[http://buyeo.go.kr/|[[파일:부여군 CI.svg|height=25]]]] || ||<-2> {{{#fff '''SNS'''}}} ||<-2><bgcolor=#fff,#1f2023> [[https://www.facebook.com/buyeosarangbaekje|[[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width=20]]]] [[https://twitter.com/buyeo2013|[[파일:트위터 아이콘.svg|width=20]]]] [[http://blog.naver.com/buyeoblog|[[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width=20]]]] || [목차] [clearfix] == 개요 == [[충청남도]] 남부에 있는 [[군(행정구역)|군]]. 동쪽으로 [[논산시]], 서쪽으로 [[보령시]]와 [[서천군]], 북쪽으로 [[청양군]]과 [[공주시]], 남쪽으로 [[전라북도]] [[익산시]],[[군산시]]와 접한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사비]]가 있었기에 [[백제문화단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가 이 지역에 있다. '부여'라는 이름은 [[한국사 관련 정보|한국사]]에 등장하는 [[부여]]에서 나온 것이 맞다. 이 지역은 [[부여]]라는 나라가 실존했던 위치와 전혀 무관하지만 과거 [[백제]]는 시조 [[온조왕]]이 부여 왕족에서 나왔고, 성씨도 부여씨였다. 한때는 [[성왕(백제)|백제 성왕]]이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꿨을 정도로 부여 계승의식을 가졌으며 그 [[백제]]의 [[수도(행정구역)|수도]]였던 [[사비]]가 이곳이었기에 이후 지명이 부여가 되었다. [[공주시]]([[백제]] 때의 [[웅진]])와 함께 백제문화제를 개회식과 폐막식을 번갈아가면서 진행하고 있으며, 2010년에 전 군수 [[이용우(1961)|이용우]]의 노력으로 공주와 합쳐져서 세계대백제전을 진행하였다. == 역사 == [[기원전]]에는 [[진국(국가)|진국]], 이후 삼한 중 [[마한]] 고포국의 영역이었다가 같은 마한의 [[백제]]국으로 복속되었다. 이후 소부리(所夫里), 소우리, 사비 등의 지명으로 불렸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본격적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이미 5세기 말인 [[동성왕]] 시기부터 왕이 자주 사비로 사냥을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부터 정치적 중요성이 수도 [[웅진성]](현재의 [[공주시]]) 다음으로 큰 도시가 아니었나 추측하거나 혹은 동성왕대부터 의도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도시일 것이라 추측한다.[* 이러한 점은 [[고구려]] 마지막 수도인 [[평양성]]과 매우 흡사하다. 평양 역시 313년 [[미천왕]]의 수복 이후 고구려령으로 편입되었고 [[장수왕]] 시기 이전부터 제 2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고국원왕]]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소도 평양이고 [[광개토대왕]]대에 이미 평양 지역에 9개의 [[사찰]]을 지었다는 기사나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평양에서 출발했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평양 역시 427년 장수왕의 천도 이전부터 완성되어있던 도시라고 볼 수 있겠다.] [[백제]] [[성왕(백제)|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538년]] [[웅진성]](지금의 [[공주시]])에서 부여로 천도한 이래로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6대 122년간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결국 부여가 도시개발이 안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고 말았다.[* 이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시]]도 마찬가지이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해 궁성을 비롯한 많은 문물이 소실되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한 백제인이 [[금동대향로]]를 땅 속에 묻은 것이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다. [[신라]] [[경덕왕]]의 전국 지명 한화정책 때 부여군으로 개칭했고 그 아래로 석산현(石山縣, 석성면), 열성현(悅城縣, [[청양군]] 정산면) 2개 속현을 두었다. [[고려시대]] 때 감무가 설치되었고 [[조선시대]] 때는 부여현으로 재편되는 등 '부여'란 이름을 간직해왔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석성군 일부, 홍산군, 임천군을 통합하여 현재의 부여군 영역이 되었다. [[1960년]] 부여면이 부여읍으로 승격하였다. [[일제강점기|일제시대]] 말기인 [[1939년]]에, 일본이 '내선일체'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일환으로 부여 부소산 일대(지금의 삼충사 위치)에 관폐대사[* 지금은 폐지된 최고위 신사의 등급으로 관폐대사 – 국폐대사 – 관폐중사 – 국폐중사 – 관폐소사 – 국폐소사 순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서울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이 실제로 완공되어 종교시설로 기능하던 유일한 관폐대사였다.] 부여신궁을 건축하고자 공사를 시작하였다. [[진구 황후]]를 비롯하여 백제와 관계 있는 일본의 옛 천황들의 신령 4위를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물을 완공되기 전에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나라가 광복하자, 만들다 만 부여신궁 건물을 부여청년동맹원들이 파괴하였다. 조선총독부가 부여신궁을 세우는데 너무 시골이라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아예 부여를 신도(神都)라 칭하며 대대적으로 도시화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부여 내의 시가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는데 그 영향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 몇해 전 충남도청 이전에 든 비용이 당시 돈으로 16만 원이었는데, 부여신궁의 총 공사비는 24만 원이었다. 더군다나 [[히로히토]] 천황이 직접 공사 계획을 발표했다('충청남도 인터넷 신문' 인용). 당시 신궁에 모시려던 이가 [[임나일본부설]]에도 나오는 [[진구 황후]] 등이었던 점과 부여가 고대 일본과 관계가 깊은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란 점 등을 드는 얘기가 있다. 부여신궁을 개발하면서 이 일대의 도로나 도시 정비 계획까지 잡혀있었으니 이때 개발이 진척되었더라면 금세 '부여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바 료타로]]의 '한나라(한국) 기행'에서, '일제가 망한 건 좋은데, 부여 일대 개발때까지는 버텼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의 인터뷰가 소개된다.[* 물론, 친일파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부여가 개발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나온 대화.] 실제로 현재 부여군은 발전 상태에 비해서 읍내의 도로가 굉장히 잘 되었다. 도로정비까지 가다가 일본이 패망해서 그만... [[1960년대|1960]]~[[1970년대]]까지 [[금강]] 내륙수운이 원활히 돌아갈 때 인근의 [[강경읍|강경]]과 더불어 상당한 발전을 구가하였다. 하지만 부여에는 꽤 오랫동안 철도는 물론이거니와 고속도로도 없었던 데다, [[1960년대]]~[[1990년대]]에 이루어진 경제 개발 정책으로 인해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통하는 충청 내륙 지역들과 달리 부여군을 비롯한 충남 서부 지역들은 인구 유출을 겪게 되었으며, 1990년 [[금강하구둑]]의 완공으로 금강 내륙수운이 완전히 정지됨에 따라 부여의 발전 역시 정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군의 인구도 계속하여 감소하는 추세이다. 그래도 아직 부여읍이 인구 2만 선은 유지했고[* 2021년 3월에 딱 3명 차이로 2만 선이 붕괴했다.], 규암면도 인구 1만이 넘고 [[코아루]]나 [[휴엔하임]] 등이 지어질 정도이므로, 군 치고는 그래도 아직 심각하게 몰락하지는 않았다. 변경 사항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