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사담 후세인

최근 수정 시각:



사담 후세인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프로필
성명
사담 후세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

Saddam Hussein Abd al-Majid al-Tikriti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출생
1937년 4월 28일

이라크 왕국 알-아우자[1]
사망
2006년 12월 30일 (향년 69세)
이라크 바그다드
소속 정당
재임 기간
이라크 대통령
1979년 7월 16일 ~ 2003년 4월 9일
서명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후세인 압둘 마지드(알-마지드)
어머니 수브하 탈파
배우자
본처 사지다 탈파
사미라 샤반다르
애인 니달 알함다니
자녀
슬하 2남 3녀[2]
장남 우다이 후세인 (1964 - 2003)
차남 쿠사이 후세인 (1966 - 2003)
장녀 라가드 후세인
라나, 할라
친인척
종교
신체
186cm | 95kg[3]
이라크 수비대
군사 경력
복무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
1975년 ~ 1968년 ~ 1968년
최종 계급
총사령관
기타 이력
이라크 대통령

1. 들어가기 전에2. 개요3. 상세4. 일생
4.1. 사담 후세인 정부4.2. 영향4.3. 사담 정권의 몰락
5. 사상적 측면6. 평가
6.1. 긍정적인 평가6.2. 부정적인 평가6.3. 총평
7. 비판
7.1. 두자일 사법살인7.2. 안팔 캠페인
8. 결론9. 여담
9.1. 의문의 1승
10. 가족 관계11. 어록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1. 들어가기 전에 [편집]



이 문서가 다루는 대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대상의 모습은 천사와 악마처럼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ㄴ 빛은 경제 성장과 세속주의 성향, 어둠은 철권 통치 및 전쟁광이었단 점



이 문서의 대상은 공과 과가 너무나도 극명해 찬양하거나 까내리기만 하기에 애매한 고인입니다.

고인을 희화화하거나 비하해야 할지 너무 고민됩니다.




이 문서는 독재와 관련된 내용에 대하여 다룹니다.

??? : 참아야죠 뭐





"전쟁하자는 거냐"

이 문서는 전쟁 관련 내용, 혹은 유사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후세인는/은 사실 하페즈에게 깊은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후세인는/은 누구보다 하페즈를 사랑하면서 왜 본심을 숨기는걸까?



이 문서는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영웅에 대해 다룹니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이라크 내전 이후 상대적 재평가



이 문서는 선녀에 대해 다룹니다!

미인은 꽃과 같아서 잎이 있어야 그 미가 살아나는 법입니다.
“다시 보니 선녀 같다!”



이 문서는 눈새에 대해 다룹니다!!!!

눈치 좀 챙겨라 씹새야



이 문서는 자식농사를 망친 대상에 대해 다룹니다.

병신 난자/정자 중 재수없게도 하나가 세상에 나와버렸습니다.



이라크은(는) 어떤 곳일까...

2. 개요 [편집]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나는 이라크 대통령이다.”
ㅡ 2005년 10월 19일 두자일 사건 첫 재판 인정신문에서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사담 후세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 (Saddam Hussein Abd al-Majid al-Tikriti, 1937년 4월 28일 ~ 2006년 12월 30일)이란, 과거 이라크를 23년 273일간 지배했던 독재자로, 소속 정당은 이라크 바트당이다.

일명 '사막의 독재자'. 이라크 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출신 인물[4]으로, 세속적 범아랍주의와 아랍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이라크 바트주의의 지도자였다.

21세기 들어 동네 힘쎈 그 나라에 의해 몰락했는데, 이후 2022년 현재까지도 이라크 뿐만 아니라 중동 내에서 평가가 갈리고 있으며, 한 쪽에서는 '범아랍주의의 지도자'로 칭송받는가 하면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바그다드의 도살자'로 평가가 갈리고 있다.

3. 상세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원래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정부의 부통령이었는데, 석유국유화를 철두철미하게 진행하고 고유가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사회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해서 한때 다 망해가던 이라크를 중상위권 국가로 끌어올린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다 점차 권력욕에 취했는지 알-바크르를 병환 때문에 정치 못 한다 하면서 쫓아내고 지가 대통령 낼름낼름 받아 먹었다. 이후 그대로 타락해서 이란-이라크 전쟁걸프전을 일으켜 지가 한 업적을 그대로 까먹었으며, 끝내는 9.11 테러 직후 제대로 맛 간 미국을 도발하다 교수형대에 서게 된다. 다만 독재를 하면서도 무능하기만 한 건 아니었는데, 이슬람 극단주의를 잘 진압하고 이라크를 지역강국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비록 실패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이라크를 이란과 맞붙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시킨 것도 후세인의 공이다.

그리고 후세인이 몰락하자 그대로 이슬람 근본주의의 고삐가 풀리고 다에쉬란 막장 단체가 등장하며 이라크의 상황은 더 막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문에 이라크 현지에서는 후세인 때가 나았다고 재평가 하는 여론도 꽤나 존재하는 상황.

간단히 말하면 현대 이라크를 만든 인물으로 평가할 만한 인물이다.

4. 일생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자세한 내용은 사담 후세인/일생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1. 사담 후세인 정부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자세한 내용은 바트 이라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2. 영향 [편집]



이 문서는 지옥 그 자체에 대해 다룹니다.
헬조선 헬조선 하지만 여기에 갔다 오면 헬조선이 헤븐조선으로 보일 것입니다.

가지 마 씨발





이 문서는 선녀에 대해 다룹니다!

미인은 꽃과 같아서 잎이 있어야 그 미가 살아나는 법입니다.
“다시 보니 선녀 같다!”



이 문서는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영웅에 대해 다룹니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무너지는 후세인 동상.
미국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바그다드의 이라크 대통령 궁
나름 소수파 애들 데리고 이라크 오랫동안 잘 틀어쥐고 있었는데 미국이 얘 목만 따고는 대책을 안세워서 이라크에선 매드 맥스 시대가 개막되었다.

아따 우덜 사담 슨상님 계실 적엔 이런 일 없었는디...

집권 기간 동안 주요 지지층은 티크리트를 비롯한 이라크 북부 수니파 지역 주민들이었다. 주요 지지층 자체는 이라크 내 소수 수니파 세력이었으나, 기독교인들과 집시들도 다수 사담을 지지했다고. 특히 사담에게 거의 우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대접을 받은 집시들은 이라크 전쟁 시기, 군대까지 꾸려 반 사담 연대에 맞섰고, 이들은 2023년 현재까지도 사담을 그리워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담 사후 사담을 지지하던 이라크 북부 지역은 이라크 신정부가 들어서자 급격히 반정부 성향으로 고개를 틀었는데, 거기다 누리 알-말리키의 종파주의적 정책까지 더해지며 신정부에 대한 반감은 더해졌다. 그 사이 후세인이 그렇게 경계하던 이슬람 극단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며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주변에서 등장한 것이 ISIL. 이 ISIL이 이라크 중북부 지역 대다수를 먹게 되며 2014 이라크 내전이 발발했고, 그 결과 누리 알-말리키 총리가 사퇴하고 이라크 정부는 ISIL과의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다행히 현재는 리더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트럼프에게 암살당하며 거의 몰락한 줄 알았으나.. ISIL의 아프간 지부인 호라산 이슬람 국가또다시 폭탄 테러를 일으키며 다시 한번 관심을 받고 있다.

한편 사담의 측근들은 끝까지 체포 당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도주 행각을 이어가고 있는 사담 정권의 2인자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를 제외하면 전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다만 재판 과정이 너무 정치 보복성이었단 점이 문제가 되었는데, 누리 알-말리키를 중심으로 하는 신 이라크 정부는 구 정부에 대한 정치 탄압에만 앞장섰다. 사베르 압델 알-두리술탄 하심 같은 유능한 관료들도 싸그리 학살 혐의를 씌워 감옥으로 보냈고, 후세인 등을 고문하기도 했으며, 특히 "케미컬 알리"로 유명했던 알리 하산 알-마지드바르잔 이브라힘 알-티크리티 등을 체포 직후 재빨리 사형이 집행시켜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5]

일부 친 사담 세력은 이라크 내의 반군이 되어 버렸는데, 대표적인 세력으로는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가 이끄는 나크슈반디 군대(일명 JRTN)와 모하메드 유니스 알-아흐메드의 알-아우다가 있다. 저 두 사람은 사담이 생전 본인이 체포될 경우 후계자로 선점해두고 있던 인물들이라고. 나크슈반디 군대는 아예 다에시와도 손을 잡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결별한 상황.

여담으로 사후 사담의 무덤이 이라크 내전 속에 파괴되는 고인능욕까지 당했다. #

4.3. 사담 정권의 몰락 [편집]

미국 정부는 후세인 정권 인사들 중 총 55인을 지명수배했고, 2003년 기준 41명을 체포하는데 성공한다.
이라크 혁명사령부 위원회 부의장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
이라크 부총리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 부통령
타하 야신 라마단
이라크 정보국장
바르잔 이브라힘 알-티크리티
이라크 정보국장
알리 하산 알-마지드
이라크 대통령 비서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
핵심 측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혁명사령부 위원회 부의장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와 후세인의 비서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 정보국장 알리 하산 알-마지드, '타리크 아지즈'란 이명으로 유명한 부총리 미하일 유한나 등인데,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는 2003년에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당했다. 이는 이라크 전쟁에서의 가장 큰 성과로 꼽히며 후세인을 곧 잡을 수 있다는 징조로 보여지기도 했다.

타리크 아지즈는 이상하리만큼 너무 순순히 항복해 미군의 스파이가 아니었냐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이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그를 사형시키는 게 이라크 내의 기독교 탄압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사형 판결만 받아놓고 계속해서 복역하다 201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알리 하산 알-마지드, 일명 "케미컬 알리".
알리 하산 알-마지드도 비슷한 시기 체포당했는데, 2003년 영국군은 자신들이 알리 하산 알 마지드를 죽였으며 시체도 확인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멀쩡히 살아서 2010년 교수대에 섰다. 재판 과정은 하단 문단 참조.

그렇게 후세인 측근들이 체포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직 혁명사령부 위원회 부의장 겸 부통령이었던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는 체포당하지 않고 제대로 잠적했는데, 그러다 나크슈반디 군대(일명 JRTN)를 이끌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누리 알-말리키 정부를 축출하려 이라크 주요 도시에서 내전을 일으키고 있다.

잠시는 아예 다에시와 연대하기도 하면서 ISIS와 행동을 같이 하는 미친 짓을 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아랍사회주의 계열의 단체이니만큼 끝내는 손절을 떼렸고, 이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협력하며 다에시 소탕에 앞장서는 동시에 반 이란을 내세우고 있다.

5. 사상적 측면 [편집]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바트주의는 아랍사회주의 계열 중에서도 보수적인 계열로, 나세르주의와 카다피주의가 아랍사회주의 중 '사회주의'를 강조했다면, 바트주의는 '아랍', 즉 민족주의를 강조한 사상이다.

그 중에서도 이라크 바트주의는 더욱 사회주의적 색채를 빼고 민족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사담의 사상은 전적으로 이라크 왕국군 육군 소위 출신인 교사이자 사담의 외숙부, 그리고 사담의 정신적 지주였던 하이랄라 탈파로부터 유래한다. 그는 1941년 라쉬드 알리 반란에 참여했다가 군에서 면직되어 5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는 아랍 민족주의자로, 하이랄라 탈파는 가정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튀쳐 나온 후세인을 맞아들여 교육을 시켜주었다. 사담의 적에 굴하지 않는 성격과 민족주의적 범아랍주의 사상(와타니야)은 외숙부의 영향이라고 한다.

사담의 아랍 민족주의, 특히 이라크 민족주의를 외숙부 하이랄라 탈파에게서 얻었다면, 사회주의적 성향은 가말 압델 나세르미셸 아플라크에게서 얻은 것이다. 하지만 라마단 혁명 이후 나세르파와 격렬히 대립하며 사회주의적 성격은 옅어졌다.

7·17 혁명으로 집권한 이후로는 이라크 바트당을 시리아 바트당의 영향력에서 독립시켜, 독립적으로 바트주의를 주창해나갔다.

집권 이후 그는 이라크 바트당을 시리아 바트당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범아랍주의를 주창하면서도, 숙부 하이랄라가 주창한 이라크 민족주의를 국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사상에 대해 그는 '이라크 인민은 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메소포타미아 백성의 자손이다'라고 말했다.

6. 평가 [편집]

6.1. 긍정적인 평가 [편집]

  • 현대 이라크의 기틀을 닦음
  • 석유국유화를 통한 경제성장
  • 여성 인권 상승 및 명예 살인 금지
  • 이슬람 극단주의 탄압, 알-카에다 등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공격
  • 학교 교육 지원, 문맹률 감소
  • 군비 확장
  • 비주류 종교 보호, 종교의 자유 보장
  • 타 독재자들과 달리 끝까지 본인의 소신을 밝히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함.

6.2. 부정적인 평가 [편집]

  • 20여년의 철권 정치
  • 쿠르드족과 시아파 탄압, 두자일 학살 등의 학살 논란

6.3. 총평 [편집]

<<MISS ME YET?>>

이라크 어디엔가에 붙어있을 광고판...
“내가 그립지 않니?”
그가 이라크 정치 전반에 등장한 건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정권 시기 부통령으로 임명되면서였다. 당시 그는 석유국유화를 주도면밀하게 시행하고 유가 부양에도 앞장서서 고유가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사회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시켜서, 쿠데타와 잦은 내부 분란으로 바람 잘날없었던 이라크의 정국을 안정시켜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을 중상위권 국가로까지 성장시킨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사실상 현대 이라크를 완성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러나 대통령 취임 후에는 과거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는데, 바트당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20여년간의 철권 정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완성한 이라크를 다시 작살내고야 말았다. 그나마 초반에는 안정적인 통치를 했으나 단추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그는 이란 혁명을 일으킨 이란의 이슬람주의자들을 경계하며 사우디 등 주변 반이란 국들에게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빚만 잔뜩 남기고 말았으며, 이 덕에 이란의 영향력만 커졌다는 걸 감안하면 사실상 패배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에서 사우디, 쿠웨이트 등 과거의 지원국들은 빚을 갚으라며 안 그래도 이란과의 전쟁으로 작살나 있던 이라크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쿠웨이트를 침공한다는 최악의 수를 두면서 전세계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이후에는 다시 이라크 복구에 힘쓰며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을 도발하는 또다시 최악의 수를 두게 되면서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는 알-카에다를 공격하고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하며 제정 분리를 분명히 했고, 학교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문맹률을 줄였으며, 여성 인권 향상에도 앞장서며 명예 살인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6] 또한 아랍사회주의에 따라 타 종교 신자들도 적극적으로 보호해줬다. 당장 후세인의 최측근이었던 타리크 아지즈도 기독교인이었다. 이 때문에 2018년 기준으로도 수니파와 기독교도 등 이라크 내 소수 종교인들과 세속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후세인 시대를 그리워 하는 이라크인이 꽤 있다고 한다. 후세인 사후 오히려 더 막장이 되어버렸다고. #1 #2

이라크 전쟁 이후에는 ISIL를 중심으로 한 내전 정국에 이라크 시아파 정권 + 미국 지도층의 무능까지 겹치면서 후세인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수니파들 사이에서 다시 스멀스멀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저런 놈들을 나름대로 ㅅㅌㅊ의 통치력으로 잘 통제해온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특히나 시아파 정권의 성급한 사담 처형이 이런 기조를 앞당겼으며, 처형 당시 그의 소신 있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더 불을 지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담담하게 유언을 남기고 용수를 거부하는 등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본인 나름대로의 철학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 결과 사담은 공과를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채 수니파 진영에서는 순교자가, 시아파 진영에서는 악마가 되어버렸다.

7. 비판 [편집]

7.1. 두자일 사법살인 [편집]

1982년 7월 8일, 사담은 바그다드로부터 53km 정도 떨어진 두자일(Dujail)이란 마을을 방문했다가 바그다드로 돌아가던 도중 총을 든 무장 괴한들에 의해 경호원 2명이 죽고 본인도 암살될 뻔한 일이 발생하자, 후세인은 암살범들의 매복을 막기 위해 발라드 지역에서 두자일로 가는 길 양쪽에 있는 과수원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그뿐만 아니라 두자일 마을 주민 상당수를 죽였다는 것. 당시 후세인은 마을 주민 787명을 체포하고 이 중 암살에 가담했다고 판단된 148명을 '혁명 재판소'에 보내 약식재판을 거치게 했다. 1984년 5월 말에는 전쟁이란에 대한 무장 지원을 제공한 반역죄에 대한 유죄도 인정하며 1984년 6월 14일에 이들 전원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는데, 이 사형수들 중 무려 96명이 1985년 3월 23일 단 하루 만에 모두 처형당했다.

7.2. 안팔 캠페인 [편집]

1988년 2월부터 9일까지 이라크 정부는 '쿠르드 반군 그룹을 제거하고 키르쿠크 주의 전략적 부분을 아랍화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안팔 캠페인'을 선포하며 쿠르드족 마을 40여곳에 화학무기를 살포했다.

이 화학전에 사담의 사촌이자 바트당 이라크 북부 사무총장이었던 알리 하산 알-마지드가 개입하며 '케미컬 알리'란 별명을 얻게 된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1993년에 휴먼라이츠워치는 '5만 명 미만일 수 없으며 그 2배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으며, 1995년에 안팔 피해자 권리 수호 위원회는 63,000명이 실종되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며 전체 사망자 수는 7만 명 미만이라고 추정했다. 게다가 수만 명의 여성, 어린이, 노인들마저 수개월 동안 감금되었고, 거의 2천 개에 달하는 마을이 파괴되었다.

8. 결론 [편집]

9. 여담 [편집]

  • 사자나 여러 동물들을 애완동물로 키웠다. 그리고, 후세인 몰락과 같이 이 동물들은 총살당하거나 동물원으로 끌려가 굶어죽는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 이라크 전쟁 당시 그의 현상금은 자그마치 한화로 250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돼서 아무도 250억을 받지 못했다.
  • 이집트의 모하메드 비스흐르는 사담 후세인과 닮아서 화제가 됐는데, 몇몇 단체들은 후세인의 성생활을 그린 야동에 출연시키기 위해 납치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
  • 집권 기간 내내 콧수염과 이라크 군복 차림으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사실 후세인은 이라크군에서 복무한 적이 없다. 걍 이미지 메이킹용. 다만 그와는 별개로 이라크군에 대한 군비 확장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 같은 바트주의 지도자였던 하페즈 알-아사드와는 떨떠름한 관계였는데, 서로에 대해 과한 적대감을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위협으로 봤다. 과거 알-바크르가 사담을 견제하기 위해 바트당을 통합시키고 하페즈를 끌어들여서 후세인의 영향력을 줄이려 한 적 있는데, 사담은 바르크의 이런 의도를 알고 반대 입장을 표했고, 하페즈 역시도 통합 이후 시리아가 이라크의 영향력 안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 반대 입장을 표했다. 이후로는 서로를 서로에 대한 위협으로 본 듯. 실제로 하페즈는 후세인이 벌인 이란-이라크 전쟁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 모두 반 사담 편을 들었다. 다만 사담이 미국에 의해 제대로 억까를 당하고 사형당하자 시리아 내에서 동정 여론이 들끓긴 했다.
  • 아랍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와도 그닥 관계가 좋지 않았다. 오히려 하페즈 이상으로 악연이었는데, 카다피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이란, 걸프전에서는 쿠웨이트, 이라크 전쟁에서는 미국을 지지하며 후세인과 강하게 대립했다. 특히나 이라크 전쟁 시점에서는 사담 조지기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사담과 알-카에다의 관계에 대한 찌라시들을 잔뜩 퍼트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사담 축출 이후에는 사담 편을 들기도 했고 #, 카다피 본인도 얼마 안 있어 사담과 똑닮은 최후를 맞게 된다.

9.1. 의문의 1승 [편집]

??? : 훠훠...

솔직히 이 재앙 새끼는 사담 말고 말리키한테 비비는 게 맞긴 하다. 사담은 유능하기라도 했지, 말리키 문재앙 이 두 재앙 새끼는 정치 보복 말고 뭐 했노

10. 가족 관계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사담 일가의 모습.
장남 우다이 후세인과 차남 쿠사이 후세인, 그리고 손자 무스타파 후세인은 함께 도피했다가 발각, 전원 토우에 맞아 부엉이 바위 쪽으로 갔다.

장남이었던 우다이는 아이큐는 190에 대학교 성적을 올만점을 받을 정도로 천재였으나, 말 그대로 사이코패스여서 후계자 경쟁에서 미리 탈락했다. 하루는 한창 잘 파티를 하는데 뭐가 그리도 꼴받는지 갑자기 아버지의 측근을 곤봉으로 쳐죽여버렸다. 그리고 지네 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을 무슨 브이독아인 줄 알고 있는지 경기에서 졌다고 선수들을 잡아다 콘크리트 공으로 축구 시합을 시키거나 마치 베어너클의 일렉트라 마냥 전기 채찍으로 때려서 인간을 맛이 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토우에 맞아서 죽었다.

반면 쿠사이는 상대적 정상인이긴 했는데, 정치범들을 감옥에 빈공간 만들겠다고 쏴죽이거나 겁 먹고 도망쳤던 후세인의 사위들을 잡아다가 죽이고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닌 거 빼면 형에 비해서는 어디까지나 "상대적" 정상이긴 했다. 이쪽도 형과 함께 사망.

11. 어록 [편집]

12. 관련 문서 [편집]

13. 둘러보기 [편집]

[ 펼치기 · 접기 ]
주요 진영
 [ 범 사우디 진영 ] 
범 사우디아라비아 진영
주요 국가
맹주
중동
남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지원 국가
기타 세력
주요 인물
예멘
(하디 정부)
[1] 1990년대까지, 2010년대 이후 재합류
[2] 2017년까지
[3] 2016년부터
[4] 2021년까지
 [ 범 이란 진영 ] 
범 이란 진영
주요 국가
맹주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지원 국가
기타 세력
주요 인물
[1] 2006년부터
[2] 2017년부터, 2021년까지
[3] 2011년까지
[4] 2016년까지
[5]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주요 사건
타임라인
이란 혁명 (1978 - 1979)
레바논 내전 (1975 - 1990)
이란-이라크 전쟁 (1980 - 1988)
걸프 전쟁 (1990 - 1991)
2006 이라크 내전 (2006 - 2008)
아랍의 봄 (2010 - 현재)
튀니지 혁명 (2010 - 2011)
이집트 혁명 (2011)
예멘 민주화 운동 (2011)
예멘 내전 (2011)
바레인 민주화 운동 (2011 - 현재)
리비아 민주화 운동 (2011)
2011 리비아 내전 (2011)
시리아 내전 (2011 - 현재)
2011 이라크 내전 (2011 - 2013)
2013 이집트 쿠데타 (2013)
2013 이라크 내전 (2013 - 2017)
2014 리비아 내전 (2014 - 2020)
예멘 내전 (2014 - 현재)
카타르 외교 위기 (2017 - 2021)
2017 이라크 내전 (2017 - 현재)
2019 수단 쿠데타 (2019)
바그다드 국제공항 공습 (2020)
2021 수단 쿠데타 (2021 - 현재)
마흐사 아미니 시위 (2022 - 현재)
윤석열 UAE의 적은 이란 발언 논란 (2023)
• 사우디-이란 관계 회복 선언 (2023)
관련 문서
[1] 본래는 티크리트에서 8km 정도 떨어진 알-아우자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러나 알-아우자 마을 자체가 워낙 깡촌이고 치안이 불안정한 동네여서 후세인은 티크리트라 고향을 속였으나, 워낙 티크리트와 가까운 동네긴 해서 티크리트 사람들한테도 동향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특히나 후세인 정부의 주요 지지층 중 하나가 티크리트 주민들이었다.[2] 이들은 본처인 사지다 탈파의 자녀들이고 이 외에 몇 명의 사생아들이 있다.[3] https://www.howtallis.org/saddam-hussein-height-weight-shoe-size/[4] 사실 전세계적으로 가보면 수니파가 절대 다수긴 하다. 이라크가 특이한 케이스.[5] 물론 저들은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마지드는 안팔 캠페인의 주요 책임자였고, 티크리티는 정보국장으로써 인권 탄압에 앞장섰으니.[6] 물론 '그 돼지'들 덕에 꺼림직하게 느껴질 수는 있으나, 이 동네는 ㄹㅇ로 여성 인권이 막장인 동네다. 이런 막장에서 이슬람주의를 탄압하고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한 건 분명히 공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