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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알-바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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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알-바시르
عمر حسن أحمد البشير
프로필

1. 개요2. 상세3. 일생
3.1. 젊은 시절3.2. 쿠데타를 일으키다
4. 오마르 알-바시르 정부
4.1. 이슬람 극단주의 통치
4.1.1. 샤리아 독재4.1.2. 국제 테러단체 지원
4.2. 제노사이드4.3. 경제 정책4.4. 외교 정책
5. 몰락6. 평가
6.1. 긍정적인 평가6.2. 부정적인 평가6.3. 총평
7. 비판8. 여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1. 개요 [편집]

오마르 알-바시르
Omar al-Bashir
남수단이 탈퇴하면 헌법을 바꿀 것이며 그때에는 문화와 인종의 다양성에 대해 말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샤리아와 이슬람이 헌법의 주요 원천이 될 것이며, 이슬람은 공식 종교, 아랍어는 공식 언어가 될 것.
ㅡ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

عمر حسن أحمد البشير
오마르 하산 아흐마드 알-바시르 (Omar Hassan Ahmad al-Bashir, 1944년 1월 1일 ~ )란, 수단을 30여년간 지배한 수단의 독재자로, 수단을 완전히 말아먹은 하르툼 정육점 주인장 새끼이다. 소속 정당은 국민회의.

30년 경력의 수단 디펜딩 챔피언으로, 30년간 1.5년에 한 번 꼴로 나던 쿠데타를 전부 막아내 13전 12승 1패를 기록했다. 그러다 19년에 일어난 쿠데타 방어에 실패해 그대로 깜방행.

20세기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자들 중 하나로 꼽히는데, 에티오피아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적도 기니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라이베리아찰스 테일러, 중앙아프리카공화국장 베델 보카사, 우간다이디 아민,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 등과 동일 선상에 놓이는 인물이다.

내부적으로는 샤리아에 근거한 이슬람 원리주의 통치를 벌였으며, 외부적으로는 알-카에다, 하마스 등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을 양성해 자신의 수족으로 이용해먹은 인물이다.

2. 상세 [편집]

오마르 알-바시르는 군부 출신의 이슬람 극단주의 독재자란 끔찍한 혼종[1]으로, 세계에서 제일 가는 악랄한 독재자 중 하나였으나 야권 세력의 분열 덕에 30년을 날로 먹은 인물이다.

국내에서는 샤리아를 통한 이슬람 원리주의 통치를 벌이고, 남수단과 다르푸르에서는 피부색으로 국민 갈라치기하면서 학살을 하는 마더뻐킹 레이시스트 같은 짓을 벌이면서 다르푸르 학살으로 자국민 무슬림 수십만을 죽였으며, 국외에서는 알-카에다, 신의 저항군 등 테러단체를 지원하고 수많은 국가들과의 외교를 씹창내는 등 수단을 제대로 조져먹은 인물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악의 학살자 중 하나로, 마오쩌둥북한 왕조, 폴 포트킬링필드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독재자로 랭크되어 있다. 대략 죽인 사람 수만 1,640,000명인데, 이는 수단 인구의 3.8배 수준이다. 이 덕에 ICC가 기소한 최초의 국가 원수란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그러다 내전 도중 갑자기 행방불명 됐다. 원래는 그대로 교도소에 있었어야 하는데, 내전으로 전 국토가 개판이 되면서 교도소 역시도 무방비해진 탓.

3. 일생 [편집]

3.1. 젊은 시절 [편집]

1944년 1월 1일에 하르툼에서 북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호쉬 반나가 (Hosh Bannaga)라는 마을에서 소규모 낙농업자의 12명의 자식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교육을 마친 후 하르툼으로 상경해 중등교육을 마치고 사촌 파티마 할리드 (Fatima Khalid)와 결혼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 아내인 와이다드 바비커 오마르 (Widad Babiker Omer)와 결혼했지만, 두 부인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다.

1960년 수단군에 입대하였고, 1966년 이집트 사관학교로 유학을 갔다온 뒤 수단 사관학교를 졸업한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는 수단 서부 사령부에 있었다.

1969년 공수부대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땐 알-바쉬르에 있는 이집트군에서 복무했고, 1975년 아랍에미리트의 군사 고문으로 재직했다. 대령으로 돌아왔을 때인 1981년에는 기갑 낙하산 여단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군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하여 1987년에는 제8보병여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3.2. 쿠데타를 일으키다 [편집]

당시 수단의 총리였던 아메드 알-미르가니 (Ahmed al-Mirghani, 1942~2008)는 1989년 3월 NIF를 제외한 정당연합의 거국내각을 성립시키고 6월 30일 아디스아바바에서 남수단인민해방군측과 국민헌법회의 개최, 외국과의 군사동맹 폐기, 이슬람법 적용범위 축소 등에 합의해 남부와의 협상을 각의에서 통과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가 이슬람 전선(NIF) 등 강경파 세력은 남부 협상에 불만을 가졌고, 1989년 6월 30일 국가 이슬람 전선을 위시한 오마르 알-바시르 준장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은 전복당하고 만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하르툼에 무혈입성한 뒤, 구국혁명사령부(RCCNS)[2] 의장을 역임하며 실질적으로 수단의 지도자로써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는 총리, 국군 총사령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며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켰고, 독립적인 신문을 금지했으며, 주요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을 투옥하는 등 국가 전반을 권위주의 정책으로 통제했다.

1990년에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으나 실패했고, 1991년 1월 1일부터 남부 3개 주를 제외한 전국에서 이슬람법 샤리아가 시행되면서 대통령 중심 연방제와 이슬람 슈라 (Shura) 원칙에 따른 인민의회제 등 새로운 정치제도가 채택되고, 사법은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민사, 형사 모두 샤리아를 적용시켰다.

혁명위원회는 1993년 10월 16일에 열린 특별회의에서 스스로 자진해체하기로 결정하였고, 알-바시르를 혁명위원장 겸 수상을 대통령에 임명시켰다. 쿠테타 배후세력인 NIF는 정재계, 사법부, 군부, 언론계, 학계 등 요직을 독점하여 수단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NIF는 세력을 확대하여 정통 이슬람 국가 건설에 목표를 두고, 이에 반대파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등을 탄압했다.

4. 오마르 알-바시르 정부 [편집]

1996년 오마르 알-바시르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75.68%의 득표율로 임기 5년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1998년, 알-바시르는 국회의장 하산 알-투라비의 반대를 씹고 새 헌법과 정당의 수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1999년 1월 알-바시르는 정치결사법을 발효시켜 1989년 쿠데타 이후 금지되었던 정당활동을 허용하며 형식적으로나마 민주화를 실현하려는 듯 했으나, 그해 12월 알-바시르가 알-투라비 국회의장과의 권력투쟁에서 불리해지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같은 달 12일에는 자신의 땅크를 몰고가서 알-투라비를 강제로 축출시키고 국회를 자신의 무지성 지지자들로 채웠다.

2000년 12월 알-바시르는 비상사태하에 주요 반정부세력들이 보이콧을 선언한 가운데 치뤄진 대선에서 86.5%의 지지율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총선에서는 4년 임기 국회의원 총 360명을 선출했는데, 이 가운데 350석이 여당 국민회의 소속이었다.

2010년 알-바시르는 10년 만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68.24%의 지지율로 또다시 수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앞선 선거들 이상으로 부정부패로 가득차 있었는데, 68%의 지지율은 알-바시르가 국민들을 구금, 협박, 회유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2014년 5월 18일에는 총리 출신의 야권 지도자 샤디크 알-마흐디를 반역죄로 전격 체포했다. 알-마흐디가 재판에 넘겨지면 최대 사형까지 선고 받을 수 있다고 한다.

2015년 대선에서도 야권 주요 후보들의 보이콧 속에서 94.1%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선거 감시단은 투표 기간을 하루 연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저조했다고 발표했고, 미국, 영국, 노르웨이 등의 국가들은 선거의 정당성 및 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4.1. 이슬람 극단주의 통치 [편집]

4.1.1. 샤리아 독재 [편집]

오마르 알 바시르는 행정기관, 군대, 사법부, 대학, 노동조합, 전문직협회, 준국영기관 등 모든 기관을 상대로 단계적인 숙청을 실시했다. 카트미야와 인사르 운동 등 저명한 이슬람 분파의 활동은 금지되었으며, 소유물과 자산 사원과 성지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그 다음엔 무자비한 언론탄압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재판 없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됐다. 또한, 많은 이들이 이른바 "유령의 집"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데, 이곳에 감금된 사람들은 자백을 강요당하며, 불고문과 구타, 전기 고문, 그리고 무자비한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1991년 알-바시르는 '우덜식' 이슬람 형법에 따라서 무장강도를 한 사람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했으며, 간통죄를 범한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고 배교자는 살해하게 했다. 또한 음악과 춤 결혼식을 제한하고, 남녀가 함께 섞여서 춤추는 것을 금지하는 공공질서 법령을 시행했다.

1996년에는 대중 교통과 극장, 영화관, 잔치, 소풍 등 공개된 자리에서 남녀가 합석하는 행위, 이슬람 신자로서 이성을 마주보는 행위, 남녀가 운동하는 여성을 지켜보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을 실시했다. 이쯤 가면 딸레반과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하다.

4.1.2. 국제 테러단체 지원 [편집]

알-바시르 정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아프리카호메이니가 되기로 결심했는지, 이슬람권의 다양한 극단주의 단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91년 말까지 호스니 무바라크 세속주의 정권에 대항한 1,000명의 이집트 반란군을 맞아들이고 알-카에다오사마 빈 라덴에게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오사마 빈 라덴에게 5년간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했고, 하마스를 지원해 하마스가 가자 지구에서 집권하고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의 민간인들을 탄압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거기다 튀니지알제리, 리비아, 소말리아 등에 이슬람 극단주의를 전파하며 해당 국가들의 세속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알-바시르는 우간다조지프 코니가 이끄는 신의 저항군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슬람교도인 그가 기독교도인 조지프 코니를 지원하는 이유는 우간다 대통령인 요웨리 무세베니가 바시르를 경계해 남수단의 반군들을 지원하자 바시르도 똑같이 우간다의 반군을 지원하는 것. 이에 미국은 정반대로 요웨리 무세베니 정부를 지원했다.

1993년에는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를 배후에서 지원해 미국의 심기를 건들기도 했다. 하지만 9.11 급의 타격을 주진 못했는데, 만약 9.11처럼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바로 9.11 직후의 탈레반 꼴이 났을 거다.

1995년 6월에는 아예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 암살 시도를 저지르기도 했다. 무바라크는 아프리카통일기구 정상회담 참여를 위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던 중 테러를 당했는데, 용의자들은 수단에서 암살 작전을 준비해 에티오피아 국경으로 넘어온 이들이었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정부의 조사 결과 실제로 수단 정보 기관이 이 테러에 개입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다 9.11 테러 직후 전세계가 테러리즘에 예민해지자 이런 테러리즘의 주요 후원자로 알려졌던 그는 전세계적으로 경제적인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바시르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원을 이어나가자, 미국은 아예 공습을 때리맥이면서 수단에게 '민주주의'를 선물하겠다고 협박했고, 이 정도가 되어서야 알-바시르는 직접적인 테러 지원만큼은 포기하게 된다. 이 결과 수단 내에서 테러리즘을 지원하던 정부 기구가 사라지고 빈 라덴도 이때 추방되었다고 한다.

4.2. 제노사이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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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경제 정책 [편집]

그나마 로버트 무가베처럼 경제를 말아먹진 않아서, 알-바시르는 수단에 매장된 석유를 수출해 수단의 경제 성장을 촉진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이득은 알-바시르 일가와 측근들에게만 돌아갈 뿐이었다. 적도 기니와 마찬가지로 부의 분배가 공평하지 못했다.

특히 알-바시르의 경제 정책은 석유 원툴이라, 석유가 다 떨어지면 인광석 빵댕이만 믿다가 인광석 다 떨어지고 그대로 운지한 나우루 꼴이 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2011년 석유 매장량이 집중된 남수단이 독립하자 그대로 경제가 무너져 내렸다. 이에 알-바시르는 연료 및 요리용 가스 보조금을 삭감해 경유 가격을 갤런당 8수단파운드(약 1,950원)에서 14파운드로 인상하는데, 이 결과 공공 교통비는 26%가 올랐고, 생필품 등의 물가도 폭등했다.

4.4. 외교 정책 [편집]

좌파친북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이후로는 체포될까봐 쫄아서 해외 방문을 대놓고 피했다. 해외 순방을 하더라도 반서방 국가나 제3지대 국가들을 중심으로 방문하는 정도에 그쳤다. 뭐 어차피 기소 전에도 이미 진작에 외교 관계 다 씹창나서 별 의미는 없었지만.

5. 몰락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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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및 현황








2011 지부티 시위


2011–2012 팔레스타인 시위 | 파타 | 하마스


2011 바레인 시위


2011–2012 쿠웨이트 시위

2011–2012 모로코 시위

2011–2013 모리타니 시위


여파

문화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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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 [편집]

6.1. 긍정적인 평가 [편집]



일부 경제 성장을 시도한 흔적이 있긴 하지만, 인플레이션과 경제 제재에 가로막혀 큰 성과를 보진 못했다. 그마저도 모두가 그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린 게 아니라 지들끼리 노나먹은 게 다라 큰 의미는 없다.

그으나마 아프리카 우주국 설립을 제안하고 우주 진출에 관심을 가진 게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듯. 물론 바시르 축출 이후 완전히 무산되긴 했지만.

6.2. 부정적인 평가 [편집]

  • 30여년간의 철권 통치, 샤리아 폭정
  • 경제적 고립 및 몰락
  • 남수단 분리 독립 문제 및 할라이브 지역 철군
  • 다르푸르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 국제형사재판소 기소
  • 대규모 학살 및 내전 유발, 반정부 시위대 탄압
  • 돈세탁 및 부정부패
  • 반서방 성향, 대외적 고립

6.3. 총평 [편집]

<<독수리와 소녀>>

1993년 3월 26일 남수단 아요드 지방에서 사진 기자 케빈 카터가 찍은 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는 바시르 시절 수단의 모습을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모습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슬람 근본주의와 군부의 끔찍한 혼종으로, 30여년간 수단을 통치하며 수단이란 나라를 완전히 나락으로 보내버린 장본인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부분은 약간의 경제 성장을 제외하면 과장 거르고 봐도 없고,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는 수준.

경제적으로는 초반기에는 석유를 통해 약간의 경제 성장을 이뤄내긴 했지만, 이후로는 사실상 의도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작살을 내놨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당시 수단은 서부가 동부에 비해 훨씬 잘 사는 상황이었다. 이런 지역 간의 경제 불균형을 해결하려면 낙후 지역을 개발하는 게 맞는데 오히려 바시르는 잘 사는 서부를 경제적으로 약탈하고 학살을 저지르며 하향 평준화를 이뤄냈다.

그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호감작을 하고 주변 아랍 국가들마저 적으로 돌렸으며, 심지어 무아마르 카다피호스니 무바라크에 대한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다. 국가 곳간 다 털리고 없는데 없는 살림에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까지 지원했으며, 알-카에다를 지원하고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원도 참 일관성 없게 지원했는데, 이집트리비아 등지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지원하더니 우간다에서는 기독교 신자[3]조지프 코니를 지원하는 등 지원마저도 일관성은 개나 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4]

이런 막장 행보를 보여주니 전세계에 경제 제재를 받고, 안 그래도 이미 작살난 경제가 다시 한번 작살나는 악순환을 만들어버렸다.

이런 인간이 단순히 경제만 조져 놓은 건 당연히 아니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통치를 하며 수많은 지식인들을 잡아서 고문하고 죽였다. 또한 아랍어 사용을 강제하고, 행정기관, 군대, 사법부, 대학, 노동조합, 전문직협회, 준국영기관 등 모든 기관을 상대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당연히 여성 인권은 물론 걍 전 수단 국민들의 인권 자체가 없다 싶이 했고 말이다. 언론은 전부 국유화되어 언론의 자유 따위는 존재할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법 적용도 지 좆대로 하고 있는데, 술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태형을 가하기도 하고 무장 강도의 손발을 자르는 건 기본인데다가, 기독교를 비롯한 타 종교에 대한 탄압도 심각해 기독교로 개종한 임산부에게 태형을 가하고 교수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앞서 서술한 것처럼 여러 차례 서부 지역을 약탈하고 학살했으며, 특히 남수단 지역에 학살과 내전을 일으켰으며, 364만 명 가까이 되는 이들이 이 한 사람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면 국가 안보적으로는 유능했느냐 하면 이것도 아니다.

오히려 수단이 실효지배하던 할라이브 지역에서 수단군을 철수시키면서 할라이브 지역을 통으로 이집트에게 넘겨줬으며, 남수단에 대한 차별도 오져서 끝내는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를 중심으로 하는 남수단 분리주의 세력이 독립을 주장할 명분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거기다가 부정부패까지 저질렀으니 말 다했다.

그런데 이런 막장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남부 반군의 약화 및 반정부 세력의 분열 등으로 초반 29년간은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결국 상단의 문제가 하나하나 터지며 끝내 부르한 군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2022년 기준 현재는 재판으로 넘겨진 상황으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다가 국제형사재판소에도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7. 비판 [편집]

7.1. 수단-남수단 전쟁 [편집]

  자세한 내용은 수단-남수단 전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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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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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다르푸르 학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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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담 [편집]

1989년부터 세계 최악의 10대 독재자 순위에 포함되었고, 2007년에는 김정일로버트 무가베 등의 쟁쟁한 후보들을 누르고 전세계 최악의 독재자 1위에 당당히 등재되기도 했다.

슨상님처럼 지팡이가 주무기다.

9. 관련 문서 [편집]

10. 둘러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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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예멘 내전 (2014 - 현재)
한국 청소년 ISIL 가담 사건 (2015)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2015)
2015 파리 테러 (2015)
2015 앙카라 폭탄 테러 (2015)
코갈림아비아 항공 9268편 테러 (2015)
샌버너디노 총기난사 사건 (2015)
2016 이스탄불 테러 (2016)
2016 자카르타 테러 (2016)
2016 브뤼셀 테러 사건 (2016)
올랜도 나이트클럽 총기난사 사건 (2016)
방글라데시 다카 베이커리 테러 (2016)
2016 니스 테러 (2016)
2016 독일 열차 테러 (2016)
2016 프랑스 성당 테러 (2016)
2016 베를린 트럭 테러 (2016)
이스탄불 클럽 총격 테러 (2017)
2017 맨체스터 경기장 테러 (2017)
2017 스페인 연쇄 테러 (2017)
2017 이라크 내전 (2017 - 현재)
2020 니스 테러 (2020)
2021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2021)
2021 아프가니스탄 내전 (2021 - 현재)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폭탄 테러 (2021)
관련 문서
[1] 보통 중동 정치판의 구도는 군부 계열 좌파 세속주의 독재자 vs 이슬람 원리주의 우파 민주주의자인데, 두 세력의 단점만 쏙쏙 고르면 딱 바시르가 나온다. 거기에 무능한 건 덤.[2] RCCNS 구성원 14명은 모두 이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이었으며, 이들은 행정 권한은 물론 입법 권한도 행사했다.[3] 사실 기독교 신자라기보다는 사이비 교주에 더 가깝긴 할 거다. 일단 본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주장하는 중.[4] 다만 리비아는 서방이 바시르에 대해 기소를 하려 하자 반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