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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턴 퇴근길에 심심해서 써 보는 비비아나X독타X니어 소설. 


2. 최근 명챈에 맛있는 문학이 많이 올라와서 정말 행복해. 새삼 챈은 넓고 인재는 많구나 하는 걸 자주 느껴. 가끔 어떤 글들 보면 내 글이 초라해 보이는 사소한 찐빠가 있긴 한데...그거야 뭐, 내가 더 열심히 써서 좋은 글 뽑아내는 것밖에 해법이 없으니까.   


3. 원래 글래디아 야설을 올리려고 했는데, 미안하다. 꼴리는 글 쓰는 법을 다 까먹어서 며칠째 메모장 켜 놓고 낑낑대는 중이야. 그래도 이번 주말까지는 결과 나올 것 같으니 좀만 더 기다려주라. 링 소설은 아마 밤에 올릴 것 같아.  


4. 이번 글은 4~5부작 정도로 생각 중이야. 분명히 니어 정말 좋아하는데, 왜 니어 글만 쓰면 BSS가 나오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그런 거 싫어하는 명붕이들은 한번 더 생각해보고 읽어 줘. 니어 3부작이나 츠빌링슈튀르메의 가을 안 읽은 사람이면 내용 이해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것도 참고하고.  


5. 소재 추천, 피드백, 아카콘, 추천 전부 환영해. 특히 피드백은 더 양질의 글을 써오기 위한 밑거름이니까, 적극적으로 해 주면 고맙겠다. 


6. 오늘도 모자란 글 읽으러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잡설이 길었네,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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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가을. 


10월 17일 14:42. 


카시미어 카봐렐리엘키. 


하늘에 꾸무룩함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털어낼 듯 짙게 깔린 먹구름 아래에서, 도시는 오늘도 무기질적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전광판에 모습을 드러낸 화려한 갑옷의 기사가, 상큼한 미소와 함께 에너지드링크를 홍보하고. 


우비를 덧입은 시민들은 그를 본체만체하며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자동차의 짜증 가득한 경적 소리. 


대낮부터 불콰한 얼굴로 횡설수설 욕설을 뱉어내는 취객들. 



“또, 또 졌어! 백은의 기사 이 새끼는 왜 내가 돈만 걸면 처발리는 건데!” 



어딘가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오늘의 뉴스 헤드라인. 



“속보입니다, 빛의 기사 마가렛 니어가 정체불명의 남성과 단 둘이 술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어-” 



고막을 어지럽히는 온갖 소음 속에서, 노천 카페에 앉은 비비아나는 초조하게 손등을 두드렸다. 


오랜만에 보는 카시미어 특유의 소란스러운 활기가 영 낯설었다. 


그녀가 지난 1년간 살다 온 라이타니엔의 츠빌링슈튀르메 또한 대도시였지만, 그 쪽은 좀 더 엄숙하고 절제된 느낌이 강했다. 


그에 반해 이곳은….


여전히 여과 기능이 결여된 욕망의 도가니나 다름 없구나.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불평을 지우려, 비비아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렸다. 


따뜻한 거라도 마시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겠지. 



“저기, 주문할게요.”  


“기다리쇼, 지금 주문 밀려서 바빠 죽겠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는 보기 좋게 배신당했다. 


가게 안에서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던 카페 여주인이, 이쪽을 힐끗 보더니 불퉁하게 한 마디를 던지고. 



“...아, 네.” 



살짝 기가 죽은 비비아나는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마음이 편해지기는 커녕 더 싱숭생숭해졌잖아. 


그때. 



“잠깐, 손님. 어디서 본 얼굴인데.” 


“네?” 



여주인의 시선이 다시금 시무룩해진 비비아나를 향했다. 



“이상하게 낯이 익단 말이지. 잠깐 기다려봐.”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 저는….” 


“아, 혹시…양초의 기사님?” 



여주인의 입에서 나온 전혀 뜻밖의 한 마디에, 비비아나는 등골이 오싹해져 오는 걸 느꼈다. 


양초의 기사. 


그녀가 카시미어의 기사였을 때 사용하던 이명이다. 


그녀에게 허울뿐인 영광과,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인기를 가져다 주었던 이름. 


그 이름을 버리고 떠난 지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 줄은. 


어떡하지. 


이대로는 또 성가신 일에 휘말릴 것 같은데. 


전전긍긍하는 비비아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신이 난 여주인이 잰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니, 귀하신 분께서 왜 이런 누추한 곳에.” 


“저, 사장님. 죄송한데…목소리를 조금만….” 


“지난 라이더 스페셜 챔피언십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저희 아들내미가 그거 보고 기사님한테 반해서, 항상 같이 봤거든요. 자기도 나중에 훌륭한 기사가 돼서 저 누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아하하….”  



곤란하다. 


여주인의 새된 목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점점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더 늘어나거나, 우연히 지나가던 파파라치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터. 


그냥 친구를 만나러 왔을 뿐인데,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아니, 그런 한탄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 



“항상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장님, 오늘은 사적인 일로 나온 거라서요.” 


“아, 미, 미안합니다. 내 정신 좀 봐, 너무 신나서.” 



다행히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비비아나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여주인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펜과 영수증 용지였다. 



“...저, 기사님. 실례지만 사인 두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저희 아들한테 한 장 주고, 나머지 한 장은 저희 가게에 걸어 두려고요. 양초의 기사 비비아나 씨의 단골 카페, 이런 느낌으로.” 



얄팍한 상술이다. 


비비아나와 마주치기를 학수고대하는 팬들을 끌어들이려는. 


누군가는 천박하다 하겠지만, 비비아나는 딱히 이 여주인을 까내리고 싶지 않았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더 잘 살고 싶은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욕망이니까. 


딱히 단골이 된 적은 없지만, 한 명의 기사로서 이 정도 요구라면 기쁘게 들어줄 수 있지. 


비비아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여주인이 내미는 펜을 잡았다. 



“네, 해 드릴게요. 아드님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파벨이에요. 파벨 로프스키.” 



그리고 두 장의 사인을 했다. 


그녀의 아들에게는 ‘미래의 대기사 파벨을 응원하며’라는 문구를 덧붙였고. 


카페에 걸어 놓을 사인에는 ‘여유와 친절함에 대한 감사를 담아, 번창을 기원하며.’라는, 약간의 수사학적인 기교를 더했다.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종이를 품에 안고 뛸 듯이 기뻐하는 사장이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뭘요. 그럼, 저기…이제 주문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그럼…드립커피 한 잔 주세요. 각설탕 네 개 넣어서요.” 


“네!” 



그리고 몇 분 뒤. 


테이블에 산더미처럼 쌓인 디저트를 보며, 비비아나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주문했던 커피는 물론이고. 


초콜릿 라바 케이크. 


마카롱. 


거기다가 볼 한가득 담긴 카시미어식 민트 아이스크림까지. 



“...저, 사장님. 저 디저트 주문 안 했는데요.” 


“작은 성의의 표시입니다. 사양 말고 드셔주세요!” 



이걸 어쩌지. 


디저트는 좋아하지만,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평소에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의의 표시라는데 거절할 수도 없잖아. 


그렇게 비비아나가 양 손을 모으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비비아나!” 



허스키하고도 시원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두드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태양처럼 눈부신 사람이 보였다. 


광채를 휘감은 황금빛 눈동자. 


훤칠한 체격과, 평상복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충실히 단련된 신체. 


그리고 입가에 맴도는 당당하고 용맹한 미소. 



“오랜만이네.” 



빛의 기사. 


라이더스페셜 챔피언십 토너먼트 공동 우승자. 


카시미어에 남은 마지막 페가수스. 


그리고 비비아나의 친구. 


오늘 그녀가 만나려고 했던 그 사람, 마가렛 니어가 환하게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가렛!” 



티 한 점 없이 밝은 그녀의 모습에, 비비아나의 몸이 저절로 기립했다. 


카시미어의 풍경, 방금 카페에서 있었던 소요, 그리고 눈 앞의 디저트 더미. 


그 모든 것에 대한 복잡한 상념들이, 햇빛 앞의 그림자처럼 깨끗하게 녹아 없어지고. 


오로지 순수한 기쁨과 경애만이 그녀의 마음 속을 가득 채웠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건강하셨나요?” 


“나는 잘 지냈어. 너야말로 몸은 괜찮아? 라이타니엔에서 큰 일이 있었던 모양이던데.” 


“저도 괜찮아요. 별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무에나 씨가 고생하셨죠. 아, 디저트 좀 드시겠어요?” 



이내 자리에 앉아 밀린 이야기를 나누려던 두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가십거리에 미친 이 도시는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머 어머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빛의 기사님이 우리 카페에!”

 


카페 여주인부터 시작해서. 



“마가렛 언니!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언니 복근에다 빨래하고 싶어요!” 



근처를 지나가던 극성팬들. 



“마, 마가렛 니어 씨! 잠시 인터뷰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감정회의 감염자 인권 조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만-” 



그리고 그녀가 목격되었다는 소식에 황급히 달려온 듯한 기자들까지. 


한산하던 노천 카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비비아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인파가 마가렛을 둘러싸고. 


사인 종이와 카메라 플래시라이트, 그리고 아우성에 가까운 목소리들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일렁거렸다. 


비비아나였다면 적잖이 당황했을 법한 상황. 



“여러분, 조금 진정해 줬으면 좋겠군. 우선 사인 받고 싶은 사람은 내 오른쪽에 줄을 서라. 복근에다 빨래는…거절하도록 하지.”    



하지만 마가렛은 비비아나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침착한 미소와 함께 교통 정리에 들어가는 마가렛. 


광기의 도가니로 치닫는 열성팬들을 부드럽게 진정시키고. 



“당신들은…레드와인 뉴스의 기자인가? 미안하다. 독점 인터뷰는 하지 않고 있어. 일 주일 뒤 로도스 아일랜드 명의로 공식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니, 부디 그때 다시 물어봐 주었으면 한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정중하게 물리치며. 



“사진 찍고 싶은 사람은 이쪽으로 부탁한다. 원하는 포즈가 있으면 말하도록. 최대한 반영하지.” 



약간의 짜증조차 내지 않은 채, 그녀를 원하는 무수한 이들의 요청에 응한다. 


그런 마가렛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줄기의 서광. 


인파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그 어떤 이의 요청에도 침묵하는 법 없이 상냥하게 대답하는. 


만물을 평등하게 비추는 태양과도 같은 사람.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눈부셔서, 비비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카페 여주인 한 명에게도 쩔쩔매던 자신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잖은가. 


새삼 씁쓰레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털어 버린 비비아나였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건 이제 그만두었다. 


아무리 자신의 빛이 미약할지라도, 그 희미한 빛이나마 필요로 하는 곳은 분명 있을 터. 


촛불은 담담히 자신의 자리에서 어둠을 몰아내며, 태양을 동경할 뿐이다. 



“어, 혹시 양초의 기사님?” 


“지, 진짜 비비아나 씨다! 비비아나 씨, 사인해 주세요!” 



그런 그녀의 생각을 긍정하듯, 비비아나의 곁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비비아나는 마가렛처럼 온화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평안하신가요, 여러분.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그렇게 수십 분 뒤. 


장내를 한바탕 뒤흔든 혼란이 겨우 진정되었다. 


주변은 어느 정도 한산해졌고, 모처럼 대량 주문에 행복사하기 직전인 카페 여주인도 더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다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미안해, 비비아나. 민폐를 끼쳤네.”   


“신경쓰지 마세요. 저도 나름 즐거웠으니까요. 당신이야말로 늘 고생이 많으시네요.” 


“고생이랄 것까지도 없어. 기사 된 자의 숙명이니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면서도 밝게 웃는 마가렛. 


터무니없을 정도의 잘생김이 묻어나는 그 미소에, 얼굴이 뜨거워진 비비아나가 부끄러움을 감추려 마카롱을 집어먹은 찰나. 


마가렛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사실 오늘도 출장이 잡혀 있거든.” 


“출장이요?” 


“응.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에. 이번 분기 결산 보고도 올려야 하고, 이것저것 일이 있어서.” 


“...정말 바쁘게 사시네요. 부러워요.” 



거짓 한 점 없는 진심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바쁘게 산다는 건 목표가 확실히 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실제로 마가렛은 카시미어의 감염자 차별 철폐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고.  



“별말씀을. 비비아나, 넌 어때?” 



그에 반해 자신은? 


글쎄, 잘 모르겠다. 



“한가해요. 아침에는 도서관에 가서 시집을 빌린 다음, 근처 카페에 앉아서 읽어요. 그리고 대기사장님과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라이타니엔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죠.” 



일단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구가하는 중이긴 하다. 


사생 팬이나 파파라치, 혹은 기사단 동료들이 없는 느긋한 삶.


하지만 그 생활에는 목적지가 없었다. 


호수 위에 뜬 종이배처럼 바람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떠다닐 뿐. 


물론 나름대로 즐거웠지만, 가끔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비비아나 자신이 뭘 하면 좋을지 감을 못 잡고 있는 상태였다. 



“즐겁겠네” 


“네. 삶의 목표가 없는 것 빼고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삶의 목표라.” 



그런 답답함을 담아 던진 자조적인 농담에, 마가렛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 지금 따로 하는 일은 없는 거지?” 


“네.” 


“앞으로의 계획은 있어?” 


“라이타니엔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어 볼까 생각 중이에요.” 



어쨌거나 카시미어에서 사람들의 욕망과 부대끼며 사는 것보다는 마음 편할 테니까. 


그런 생각에서 던진 말에, 마가렛이 어깨를 으쓱했다. 



“농사 좋지. 그런데 그러기에는 네가 너무 아깝지 않아?” 


“글쎄요.” 


“너 정도의 아츠 실력이나 검술이면, 지금의 테라에서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녀의 말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어쩐지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 들어, 비비아나의 기분이 한껏 고양되려던 찰나. 



“너, 혹시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일해 볼 생각 없어?” 



마가렛이 상상조차 못한 화두를 던졌다. 



“...네?” 


“로도스 아일랜드에 입사해 볼 생각 없냐고.” 



로도스 아일랜드.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저명한 제약회사이자 감염자 구호 단체. 


감염자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비비아나조차 이름은 들어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마가렛이 현재 로도스 아일랜드의 카시미어 지부장을 맡고 있는 것도 있고. 


그런데 갑자기 그 회사에 입사를 하라고? 


당혹감이 들었지만, 비비아나는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로도스 아일랜드에요?” 


“응.” 


“저 약학은 잘 모르는데요.” 

 

“상관없어. 로도스는 다양한 인재를 필요로 하거든. 재앙정보전달자나 학자는 물론이고, 사내 치안 유지를 위한 전투 인력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어.” 


“...음.” 


“보수도 괜찮고, 생활도 편할 거다. 무엇보다 보람 있게 일할 수 있을 거야. 그만큼 좋은 회사니까.” 



비비아나는 고심했다. 


말 몇 마디로 넘어가기에는, 이 제안 자체가 너무 갑작스러운 탓이었다. 


하지만 그 말 몇 마디를 하는 상대가 마가렛 니어다. 


정직함의 화신 같은 사람이 입 발린 말을 할 리가 없잖은가. 



“너는 훌륭한 기사야, 비비아나. 무릇 기사란 항상 약자의 곁에 서 있어아 햐지. 로도스 아일랜드는 항상 소외된 이들을 위해 싸우는 집단이고. 아마 너라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걸.” 



심지어 지금 마가렛의 표정은 전에 없이 밝았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자긍심 어린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호기심이 동하는 비비아나였다. 


도대체 어떤 기업이길래, 그 빛의 기사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까. 



“그런가요.” 


“응. 너와 같은 이상을 품고 나아가는 이들도 많이 만날 수 있을 거고. 예를 들면 사장인 아미야나, 수뇌부 켈시 선생님…그리고 박사도 있지.” 


“박사요?” 



그리고 박사라는 인물이 도마 위에 오르자, 안 그래도 찬란하던 그녀의 얼굴에 해바라기 한 송이가 피었다. 



“...그래, 박사.” 



비비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박사라는 인물은 전에 한 번 본 적 있었다. 


마가렛이 기사 토너먼트 결승전을 치를 때였다. 



“혹시 저번에 기사 토너먼트를 관람하러 오셨던…그 바이저를 뒤집어쓴 분 말씀이신가요?” 



기묘한 차림을 한 채, 관중석 맨 앞 열에서 목이 터져라 마가렛을 응원하던 사람. 


말을 섞어 본 적은 없지만, 그의 모습은 확실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오, 안면이 있었구나. 그럼 이야기가 빠르지.” 



행색을 제외하면 별로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마가렛은 그의 뭘 보고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까. 


호기심 위에 호기심이 쌓이고. 


마가렛이 겸연쩍다는 듯 볼을 긁으며 설명했다. 



“그는…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야. 타인의 고통에 같이 아파해주는 법을 아는 상냥한 사람. 하지만 내면은 더없이 강인한 사람이기도 해. 훌륭한 지휘관인 동시에, 이상적인 벗이기도 하고. 아무튼 한 명의 기사로서 충의를 바치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지.” 


“...아.” 



비비아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의 몇 배로 부드러워진 것 때문도. 


옛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그녀의 아련한 눈빛 때문도 아니었다. 


마가렛의 뺨에 어렴풋이 떠오른 홍조 때문이었다. 


그녀가 늘어놓은 수십 마디의 말보다, 그 작은 감정 표현이 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금방 표정을 수습한 마가렛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어 보였지만, 이미 비비아나의 입 안에는 쓴맛이 감돌고 있었다. 



“너라면 그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네 길을 찾아 줄지도 모르지. 방황하던 나를 한 번 바로잡아 줬던 사람이니 말이야.” 


“...글쎄요.” 



박사라는 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 마가렛 니어를 저토록 들뜨게 하는 걸까. 


담백하고 솔직한 빛의 기사의 입에서 귀족들이나 쓸 법한 미사어구가 나오게 하는 거며. 


자신이 동경하는 사람에게서, 기사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경의를 자연스럽게 받아 가는 걸까. 


조금 질투가 났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박사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마가렛, 저는 좋은 보수나 편한 직장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알고 있어.” 


“하지만 일하는 보람이 있을 거라는 말은 좀 솔깃하네요. 말씀하신 사람들도 한 번 만나 보고 싶고요.” 



마가렛은 박사에게서 뭘 보았길래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까. 


그녀가 발견한 그의 진가를, 자신 또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과연,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신의 길을 찾아 줄 수 있을까. 


기대와 의문,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섞이고 섞인 끝에. 


옴짝거리던 비비아나의 입술이, 마침내 의미를 자아냈다. 



“...한 번, 진지하게 고려해볼게요.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가렛.” 



그 대답에, 마가렛이 시원하게 웃었다. 



“음, 좋은 대답이야. 오늘 출장 가서 박사에게 한 번 이야기해볼게.”  



좋은 대답이라. 


비비아나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금 전보다 두 배쯤 복잡해진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비우기 위해 디저트를 우겨넣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