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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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뒤질 생각을 안 하는 링 눈나 애호 소설임미다. 이벤트 회서리 스포 있으니 주의. 오리지널 설정 있으니까, 그거 싫어하는 명부이들도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읽어 주길 부탁할게. 


2. 이야 글쓰기 잼미따 헤헤. 빌드업할 때도 좋지만, 역시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 제일 쓰는 맛이 난다니까. 물론 명부이들한테도 재밌을지는 아주 다른 문제지만....


3. 이젠 그냥 작가 좃대로 쓰는 이 에피소드, 도대체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면...최소 3화, 최대 4화. 클라이맥스 한두 개, 결말, 그리고 후일담까지. 그것만 다 쓰면 드디어 링과 박사의 여행담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 함. 지금까지 참고 읽어준 명부이들, 고마워. 후딱 해치우고 초심으로 돌아갈게. 


4. 소설 모음집...생각보다 쓴다는 명부이들이 많아서 진짜 놀랐어. 짤도 넣고 해서 좀 예쁘게 꾸며볼까 고민 중인데, 그냥 시리즈로 해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낫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좀 더 생각해볼게. 


5. 댓글, 피드백, 소재 추천, 아카콘 전부 대환영. 특히 댓글은 하나하나 주의 깊게 보고 있으니까, 내 글 보고 느낀 거나 궁금한 거, 불편한 거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 줘. 성심성의껏 대답할게. 


6. 늘 읽어 주는 명붕이들,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 내가 그림은 못 그리지만, 더 좋은 글로 보답할게. 


*작중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었어서 부연설명하는데, 이 독타는 장진주랑 등림의 때 직접 가서 쉐이 애들 만났었다는 설정임.  


잡설이 길었네, 그럼 오늘 글도 즐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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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12일 23:51. 


염국 대황성. 



그렇게 쓸데없는 오해를 푸는 데 모든 힘을 다 쏟은 뒤.



“선선하네. 조금 쌀쌀한 건가.” 


“그대여, 추워? 내 외투 줄까?” 


“형부, 사실 나도 추워. 안아줘.” 


“...그냥 얼어 뒤지십쇼, 박사님.” 



저녁을 먹은 우리 네 사람은 잠시 산책을 나왔다. 


아니, 이걸 산책이라고 인식하는 건 좌락과 슈뿐이겠지. 



“밤바람이 무겁네. 내일도 소나기가 내리려나.” 



나와 링은 싸우러 나온 거니까. 


대황성을 노리는 두 명의 쉐이, 그리고 데몬과. 



“아냐. 내일은 맑을 거래. 분명히 그랬는데 혹시 내일까지 비 오면…어떡하지.” 


“난리납니다. 보리 다 상해요.” 


“미리 수확해야 하나?” 


“그러기엔 덜 영글었는데요.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좌락과 슈.


평화롭기 그지없는 그 모습을 보며 살풋 미소지은 링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외투 속주머니에서 술병과 잔을 꺼내 드는 그녀의 모습에, 슈가 정색을 했다. 



“...언니, 산책 중에 난데없이 웬 술판이야.” 


“한 병 정도는 괜찮잖니. 너도 한 입 하렴.” 


“아니, 이 언니가 진짜…하, 옆에 형부만 없었어도.” 



슈가 앓는소리를 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잔에 따라 들이키는 링. 


써늘한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흔들고. 


경쾌하게 술을 넘기는 링의 목울대가 소심하게 맥동한다. 



“크으, 좋다. 술도 좋고, 바람도 훌륭한데, 곁에 있는 사람들도 더할 나위 없네.” 



유쾌한 기색이 가득한 링의 말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에는 쓰린 비감이 서려 있었다. 


지금부터 가족과 칼날을 맞대야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혹여나 현실이 될지 모를 패배의 가능성을, 속으로 되새기고 있기 때문일까. 


글쎄. 


이런 감정은 네가 말해 주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나도 한 잔 줘.” 



그래도 역시 네 그런 표정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런 마음을 담아 링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한 잔 달라고.” 


“...아하. 그래, 그대라면 자격이 있지. 한 잔 받으시게.” 

 


피식 웃은 링이 마시던 잔을 내게 건넨다. 


조심스레 받아들어 입에 대자, 매콤하기까지 한 쌉쌀함이 입안에 휘몰아치고. 


절로 기침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기니, 화끈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감과 함께 입 안에 달달한 뒷맛이 남았다. 


이건 열도자구나. 


링이 가장 즐겨 마시는 술. 


얼굴이 뜨끈해진 나를 보며, 링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나, 웃음도 잠시. 


이내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시선이 나를 꿰뚫는다. 



“맛있어?” 



짧디짧은 물음. 


부(賦)*를 좋아하는 그녀가 이 정도로 단촐한 문장을 내뱉는 경우는 드물었다. 


얼핏 들으면 그냥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 아닌가 싶을 정도. 


(주: 부는 산문과 시의 중간 형태를 취하는 중국의 전통 문학. 소동파의 적벽부가 대표적) 


하지만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어여쁜 그녀의 연보랏빛 눈빛이, 채 말로 풀어내지 못한 의미를 담아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대여. 


내 가족 일 때문에 또 민폐를 끼쳐서 미안해. 


하지만 그대가 전에 말했듯, 내 존재 자체가 그대에게 있어 행복이라면. 


이번 사건도 나를 위해 감내해 줄 수 있을까. 


열도자의 첫 맛이 부담스러워도, 참고 마시면 달콤한 끝맛을 음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대 곁에 서 있는 나를 위해 이 고난을 함께 견뎌줄 수 있을까, 하고.  


그 애타는 물음에,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쌉쌀하고 달콤한 게, 딱 좋아.” 



뭘 당연한 말씀을. 


이미 너도 알고 있잖아. 


그래도 네가 또 말로 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몇 번이고 이야기할게. 


링, 너와 함께라면 고통 후의 보상뿐만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 



“응. 고마워, 그대여.” 



그 의미가 전달된 듯, 그제야 조금 가벼워진 표정으로 미소짓는 링. 


하지만 중요한 싸움을 앞둔 지금은 이것만으로 부족하려나. 


뭔가 더 강한 확신을 주고 싶은데.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괜찮을 거라는 거, 알지?” 


“응, 그대여. 입에 담는 게 새삼스러워질 정도로 신뢰하고 있어.” 


“너도 괜찮을 거고.” 


“맞아. 나도 슈도, 괜찮을 거야.” 



그 짧은 문답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를 완연히 씻어내고. 



“그대를 실망시키지 않을게.” 



내가 알던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은 링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시무룩해진 링도 귀엽지만, 역시 네 당당한 모습이 훨씬 좋아. 


그런 마음을 담아 이마에 살짝 키스하자,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헤. 진짜 사이 좋네, 두 사람. 나중에 아이 두셋쯤 생겨도 계속 알콩달콩할 것 같아.” 


“...씁.” 



흐뭇하게 웃는 슈와, 쓰디쓴 표정으로 혀를 차는 좌락.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심호흡을 했다. 


싸울 준비는 만전이다. 


전사는 결의를 다졌고, 책사는 계략을 가다듬었다. 


그럼 이제 전장으로 나아갈 시간이겠지. 



“그럼 갈게, 링.” 


“응. 이따 봐, 그대여.” 


“...박사님, 어디 가십니까?” 


“너도 좀 같이 가자, 좌락아.” 


“형부? 이 시간에 어디 가게?” 


“슈야, 너는 오랜만에 이 언니랑 오붓하게 이야기나 하자꾸나.” 



나는 좌락을 끌고. 


링은 슈를 붙들어맨 채. 


각자의 전선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간다. 


반드시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날카로운 결기와. 


소중한 것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담아. 



“...오늘 어째 좀 이상하십니다, 박사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데요?” 


“보면 알아.”    



그렇게 꿍얼거리는 좌락을 데리고 대황성 시내로 들어왔다. 


나름 고층 빌딩들이 몇 개 들어서 있었지만, 개중 불이 켜진 건 정말 몇 개 없었다. 


도시 전체의 기능이 작물 재배에 편중된 탓일까. 


분명히 유흥가가 한창 영업할 시간임에도, 시내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좋아. 


민간인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거니까. 


인도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자, 좌락이 나를 해괴한 놈 보듯 쳐다보았다. 


이 녀석도 중요한 역할이었지, 참. 



“좌락,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또 뭔데요.” 


“내가 신호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가서, 잠든 농민들을 전부 깨워줘. 그리고 병충해 퇴치제 들고 밖으로 나오라고 해 주라.” 



아무리 링이라고 한들, 슈에 대황성까지 한 번에 지키는 건 힘든 일일 터. 


그랬기에 좌락을 통해 대황성 주민들을 미리 준비시킨 거였다. 


링과 슈의 소모를 줄이고. 


그들의 손으로 데몬에게 대항할 수 있게끔. 


한밤중, 불시에 그들을 깨워 주민들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듦으로서, 그들이 데몬의 모습을 명확히 인식하고 두려움을 품을 가능성도 최대한 감소시켰다.  


자화자찬하기도 그렇지만, 꽤나 잘 짠 책략이었다. 



“저 속 터집니다, 박사님. 그냥 속 시원하게 설명 한 번 해 주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좌락의 표정에는 답답함이 가득했다. 


무례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설명도 않고 하루 종일 사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 누구라도 불쾌감을 느낄 터. 


하지만 도무지 그에게 상황을 설명해 줄 여유가 나지 않았다. 


데몬, 염국, 사세대, 쉐이.


엮여 있는 요소가 너무나도 많고, 그 요소들이 정확히 어떻게 얽혀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 불완전한 추측을 전부 좌락에게 털어놓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미안하다, 좌락. 아까 얘기했던 그 병충해가 얼마 안 가서 들이닥칠 거야. 자세한 사정은...설명해 줄 수 없어. 적어도 지금은.” 


“하, 진짜.” 


“하지만 이것만큼은 믿어 줬으면 해. 이건 염국을 위한 일이고, 슈를 위한 일이야. 맹세할게.”  


“......” 


“너는 나를 여러 번 봤잖아. 상촉에서도, 옥문에서도, 그리고 여기 대황성에서도. 네가 본 나는 근거 없는 소리로 사람을 속일 만큼 못 믿을 놈이야?”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안함과 믿어 달라는 간절함을 담아, 녀석에게 고개를 푹 숙이는 정도밖에 없었다.  



“부탁한다, 좌락. 네가 도와줘야 해.” 



좌락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타개책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성공 확률이 상당히 희박해진다. 


실패율이 올라간다는 건, 곧 슈의 안위가 그만큼 위태로워진다는 뜻. 


나는 그저 좌락이 긍정적인 대답을 해 주길 기대하며, 이 무거운 침묵을 온 몸으로 견딜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고개 드십쇼, 박사님.” 



좌락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일단 그 부탁은 받겠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을 전부 신뢰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 


“당신 말마따나, 저는 당신을 몇 번 봤었죠. 별로 긴 인연은 아니었지만, 당신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판단할 근거는 충분히 얻었습니다.” 



긴 한숨과 함께 하늘을 우러른 좌락이, 이내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그 미소에 담긴 함의는.


내가 녀석에게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믿음이었다. 



“그저 그 판단의 끝에, 당신이 한 번쯤 속아넘어가 줘도 괜찮을 만큼 좋은 분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뿐입니다.”  


“...고맙다.” 


“하지만 전부 끝난 뒤에는 확실하게 설명해주셔야 할 겁니다.” 


“당연하지. 전부 이야기할게.” 



의외의 고평가에 가슴이 훈훈해지고. 


처음 봤을 때부터 조금씩 상향조정되던 좌락에 대한 평가가 그대로 떡상했다. 


이 정도로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은 로도스에서도 손에 꼽는데. 


이 녀석, 배포 엄청 크구나. 


기회 되면 무조건 로도스로 영입해야지. 



“...그런데 박사님, 링 씨와 슈 씨는 도대체 뭘 하는 겁니까.” 



조금 표정이 풀어진 좌락이 눈을 끔뻑였다. 


순박한 청년다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몰라. 자매끼리 술이라도 먹고 싶은가 보지.” 


“슈 씨, 일찍 주무셔야 하는데요. 내일도 보리밭에 해충 방제 작업을-” 



하지만 적은, 우리가 잠깐의 평화를 만끽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큭.” 



쐐애애액-


저 멀리서부터, 비행체의 프로펠러나 낼 법한 날카로운 파공음이 아스라이 들려오고.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에서 별빛의 존재가 점점 지워진다.


코를 통해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이 급격히 무거워지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계절은 늦은 봄일진대,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서 싸늘한 겨울의 온도가 느껴졌다. 


사미에서 질리도록 느꼈던 데몬의 기척. 


멀리서 그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뇌를 갉아먹으며, 그 빈 자리를 순수한 공포로 가득 채우는 괴이의 출두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는.


사미의 주술로 나를 지켜 줄 발라크빈이나 산탈라도. 


묵직한 활을 들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을 꿰뚫을 티폰도 없었다. 



“...윽!” 



검게, 더 검게. 


달의 빛이 가리워지고, 암흑이 밤하늘을 더욱 진하게 물들여 간다. 


다가오는 파멸을 경고하듯 온 피부의 털이 바짝 서고, 입 안의 침이 마른다. 


온 몸의 본능이 지금이라도 도망치라고 요란히 경종을 울리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의 떨림을 억눌렀다. 


이런 데서 도망칠 것 같았으면 애초에 링을 사랑하지 않았어. 



“박사님, 이건…!” 


이변을 눈치챈 걸까, 좌락의 표정이 굳었다. 



“가, 좌락. 지금이야.” 


“하지만 박사님은-” 


“난 됐으니까 가라고, 빨리!” 



그 공포를 잊기 위해 일부러 더 거칠게 소리치자, 좌락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사하실 거죠?” 


“그래.” 


“믿겠습니다, 박사님. 그럼.” 



이내 뒤돌아 부리나케 달려가는 좌락. 


녀석의 그림자가 내 곁에서 사라지고, 나는 숨통을 조여 오는 공포 앞에 홀로 내던져졌다. 


그 사실을 불식시키기 위해,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좋아. 


괜찮아. 


전부 예상했어. 


나는 박사. 


링의 남편이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들이 믿고 따르는 전술지휘관이며, 슈의 형부. 


아내가 싸우고 있는데, 꼴사납게 물러설 수는 없는 입장이고.


지휘관으로서 부하에게 받은 신뢰에 부응해야 하는 사람이며. 


생면부지의 나를 스스럼없이 가족이라 불러 준, 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는 이. 


그런 나이기에, 이겨야 하는 전장에서 도망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덜덜 떨리는 손을 품 안에 넣어 시의 그림을 꺼내며,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덤벼라, 쉐이. 


인간의 방식으로 상대해 줄 테니. 


여기서부터가 내 전쟁터다. 



—---



제 2천년기, 1102년 봄. 


5월 13일 00:01. 


염국 대황성, 논밭.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링의 코끝을 스쳤다. 


누군가는 바람을 그저 공기의 흐름일 뿐이라 여긴다. 


하지만 링은 알고 있었다. 


때때로 바람은 사람의 말보다 더욱 많은 것을 속삭이고는 한다는 것을. 


이를테면, 지금 이 바람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역겨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세계를 집어삼키는 것만을 바라며, 게걸스럽게 입맛을 다시는 괴이의 탐욕. 


이제는 되돌릴 수조차 없을 만큼 뒤틀려버린 가족애와. 


무수한 사람이 죽어나갈 게 뻔한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누군가의 냉혹함. 



“...언니, 이건.” 



그리고 그녀 곁에서 잘게 몸을 떠는 자매의 불안함까지. 


시로 쓰려고 해도 말문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심상이었다. 


하지만 링은 그저 웃었다. 


태평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그녀를, 슈가 망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 알고 있었어?” 


“응.” 


“언제부터? 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말했다가 네가 뭔 짓을 할지 알고.” 

  


그 말대로였다. 


섵불리 이 상황을 이야기했다가.


슈가 제멋대로 뛰쳐나가 무리하게 데몬을 정화하다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남은 사람들은 어떡하란 말인가.  



“...형부는? 형부도 알아?” 


“응.” 


“...나…미안해. 미안해, 언니. 내가 괜히 두 사람을 대황성으로 오라고 해서….” 



고개를 푹 숙이는 슈를 보며, 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죄책감은 뼈저릴 만큼 이해하고 있다. 


그녀조차도 박사에게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품었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고개 들어, 슈. 어깨 펴고.” 


“...언니.” 


“나야 말할 것도 없고. 그이도 네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너와 만나고, 네게 가족이라 인정받은 것 자체가 그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단다.” 



하지만 링은 알고 있었다. 


슈의 상냥함이 박사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가족이 된 걸 환영한다는 이 아이의 말이, 내심 지쳐 있던 박사의 가슴을 얼마나 따스하게 위로해 주었는지. 


그것만으로 박사가 슈에게 감사를 느낄 이유는 충분했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남편이 입은 은혜를 아내가 갚는 것 역시 지당한 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려무나, 슈. 나도 박사도, 네 가족으로서 함께 책임질 테니.” 


“...응. 고마워, 언니.” 


“자, 한 잔 쭉 들이키고 털어버리렴.”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링의 잔을 받는 슈.  


그런 그녀에게 미소지으며, 링은 품 속에서 여벌의 잔을 꺼내 술을 따랐다. 


꼴꼴꼴, 맑은 액체가 넓적한 나무 잔을 가득히 채우고.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 출렁거린다. 


벌주에 가까운 그 잔을, 조심스레 길바닥에 내려놓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빠도 한 잔 받아.” 


“...오빠라고? 언니,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에 슈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를 냈지만, 링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의 시선이, 길을 따라 점점 먼 곳을 향하고.


마침내는 한 지점에 고정된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야산. 


논두렁 길과 산이 맞닿은 지점이었다. 



“뭐 해? 동생이 따른 잔을 거절할 셈이야?” 


“......” 


“섭섭한걸. 나는 여전히 오빠를 형제로서 아끼는데. 이제 오빠에게 나는 술 한 잔 나눌 가치도 없는 남이 되어 버린 걸까?” 



저 언니가 왜 저러지. 


슈의 표정에 걱정이 어리기 시작할 무렵. 



“미안하다, 링.” 



두 사람의 귓가에,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숫제 공포까지 느껴지는 익숙한 음성에, 슈가 표정을 굳히고. 



“금주 중이라서 말이야.” 



산을 뒤덮은 어둠으로부터 장신의 남성이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그의 그림자가 땅에 겹칠 때마다, 사위를 감싼 밤이 검게 죽어가고. 


고요히 우짖던 풀벌레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스러져 간다. 


이윽고 완전히 드러난 그의 얼굴에, 슈의 얼굴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왕, 오빠.” 


“오랜만이구나, 슈.” 


“오빠가 왜 여기에….” 



착잡한 기색이 가득한 그녀의 물음을 무시하며, 왕은 링에게서 조금 떨어진 길바닥에 조용히 앉았다.



“잔은 거절해도 되겠느냐.” 


“아니. 벌주니까 쭉 들이켜. 감히 귀여운 여동생을 기다리게 하다니.” 


“...예나 지금이나, 네게는 당할 도리가 없군.” 



씁쓸한 웃음과 함께, 잔을 집어 한 입에 털어 넣는 왕.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이성적인 모습에 속으로 안도하며, 링은 작게 미소지었다. 


혹시나 대화로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반짝 피어나고. 



“어때?” 


“...쓰구나. 인간들은 이런 걸 왜 마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익숙해지면 나름 맛있어.” 


“글쎄. 오라비는 억겁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구나. 너도 이 기회에 끊어내는 게 어떠하냐.” 


“싫어. 난 지금이 좋아. 오빠야말로 딱 한 잔만 더 해 볼래? 두 번째는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잖아.” 


“거절하마. 맨정신으로 있는 편이 그나마 덜 괴로우니.” 



뜻을 꺾을 생각은 없느냐. 


그런 희망을 담아 넌지시 던진 물음이 단칼에 거절당하며. 


봄 꿈 같은 바램이 좌절된다.  



“슬픈 일이네.” 


“슬픈 일이지.” 


“오빠가 인간들을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늘 바랬었는데.” 


“오라비도 나름대로 힘써 봤으니, 너무 힐난하지는 말았으면 좋겠구나.” 


“힐난할 생각 없어. 오빠의 결론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응. 오빠가 겨우내 핀 서리꽃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마음만 받아 두마. 그보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한다.” 


“인간을 싫어하면서, 경조사는 인간의 법도대로 따지는 거야?” 


“네 경조사이니 신경쓰는 거란다, 동생아. 혼수는 근사한 걸로 보내 주마.” 


“음…고맙긴 한데, 역시 꺼림칙하니까 거절할래.” 



와락 표정을 구기는 왕 앞에서, 링은 한바탕 깔깔 웃었다. 


가슴이 아파 오고, 눈에서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변함없이 동생을 아끼는 왕의 마음에, 줄곧 답답했던 가슴 한 구석이 후련해졌고. 



“...오빠, 나는 인간을 사랑하고 있어.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단다.” 


“하지만 오빠는 아니잖아.” 


“유감스럽게도.” 



두 번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에. 


마음을 시뻘겋게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한다. 


함께 망망한 세월을 견디었거늘, 돌이켜 보니 파국이로다. 


쪼개진 길을 이을 도리 없으니 이 비통함을 어찌할꼬. 


그 모든 심상을 뭉뚱그려 웃음으로 털어낸 링은, 이내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술잔을 내려놓은 그녀의 손에 엷은 황금빛 광채가 깃들고.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등불이 달린 지팡이가 은은한 빛을 뿜는다. 


그런 그녀의 곁에, 슈가 단호한 표정으로 섰다. 



“언니, 나도 같이 싸울게.” 


“무리는 말려무나, 슈.” 


“응. 고마워.”    

 


“결국, 이리 될 수밖에 없는 게냐.”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깊은 한탄을 토해 낸 왕의 몸 주위에서, 시커먼 안개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고막을 찢을 듯 울려퍼지는 날카로운 울음의 무리. 


밤하늘을 탐욕스럽게 씹어 삼키는 그림자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수천 쌍의 붉은 눈동자. 


고요하던 밤이, 무너져 간다. 


그 사실을 일깨우듯, 어둠 속에서 떨어져 나온 왕의 한 마디가 고막을 맴돈다. 



“슬슬 깨닫거라, 링. 네 손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단다.” 



그리고 네가 움켜쥐어야 할 건 수도 없이 많지. 


대황성도. 


슈도.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남자도. 


그 작은 손으로 전부 지켜낼 수 있겠느냐. 


그 의문에 맞서, 링은 어깨를 으쓱했다. 



“헤, 어떠려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지켜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해서 싸우는 게 아냐, 왕 오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야 하기에 싸우는 거지. 


그건 이 테라 전체에서 인간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동기부여의 발로이고. 


그게 곧 인간의 강함이야. 

 

총웨 오빠도, 나도, 슈도 오래 전에 배운 걸 오빠만 모르는구나. 


그렇다면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하지 않겠지. 


그저 이 두 주먹에 결의를 담아, 있는 힘껏 때려부술 뿐이야. 


오빠가 깨달을 때까지. 


그녀의 지팡이가 대지를 후려치자 눈이 멀 듯한 광휘가 작렬하고. 


그 빛을 정면으로 바라본 악귀의 무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날개를 마구 파닥이며 아우성친다. 


하지만 링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용맹하게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와라, 악귀. 


인간에게 사랑받고 인간을 사랑하는 쉐이가, 그들의 방식으로 네놈들을 상대하마. 



“옛날처럼 한 번 걸판지게 놀아 보자고, 오빠.” 



여기서부터는 링의 싸움이니라. 




쉐이 합체까지, D-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