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기의 가장 활발한 논의가 바로 신성과 초월자와 초월자에 대한 인식 내지는 인간의 초월에 대한 논의인데

영원 혹은 무한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인간이 이거를 어떻게 바라볼거냐에 대한 담론들이 바로 중세기 철학의 큰 논점입니노


신성에 대한 고대 중세기 논의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맛보기를 보여주자면

플라톤에 의하면 이 세상은 이데아계에서 모사의 방식으로 생겨나는데 이 과정에서 데미우르고스라는 존재가 물질들을 갖고 막 만들었다 (fabricatio : 조합해서 만들다)고 주장을 하는데, 그러면 현상계의 시작점이 시공간 안에서 제시가 되지요?

그렇다면 그 시작점 이전에 무엇이 있는가? 라고 했을 때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랑 이데아계가 있어요 라고 하겠지

그러나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에서는 이 데미우르고스가 조합하는데 쓴 물질들 역시 현상계의 시작점 이전에 존재했다는 주장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러한 물질들은 제1 질료 혹은 제1 물질 즉 prima materia, materia prima 소리를 듣게 되고 결국 태초에는 그 세 개가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

그러면 신적인 것에 대한 논의에서 적어도 이 세계는 신적인 건 아니니, 그럼 무엇이 신적이냐고 했을 때 이 세계에 앞서 존재한 것들이 그러하다, 신성을 띤다고 하게 되고 그러한 신성을 띤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와 다르고, 앞서 존재하고, 그런 것들이 신성을 띤다고 하게 되는 것이 고대 중세기 신성에 대한 논의입니다.


1. 강한 실재론 

플라톤 - 신플라톤주의 - 아우구스티노 계보를 따르는 강한 실재론은 사실 우리랑 굉장히 잘 맞는 조합임
중세철학을 공부하려면 신플라톤주의부터 깨고 오너라 하는 것도 이런 담론에서 영향이 큰 탓이고

강한 실재론의 세계에서는 초월계인 이데아계와, 가지계 혹은 이데아계의 모사계인 현상계 또는 물질계 이렇게 세계가 나뉘게 되는데

그러면 이 관점에서는 세계가 2개 존재하게 됩니다


완벽한 세계인 이데아계와 결함을 갖고 있는 현상계의 존재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천국과 지상계의 존재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지고, 이데아계로부터의 유출과 복귀 개념 역시 창조와 구원 개념과 아주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아주 쉽습니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지상계의 모든 것 특히 인간은 하느님의 생각 안의 완전한 어떤 것의 모사품인지라 결함을 지니고 살게 되는데 자유의지의 결함, 시공간의 결함, 선의 결함 등 여러 개의 논의들에 대해서 손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그렇다면 이 결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완전한 것이 먼저 제시되기 때문에 완전함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결함있으나 일단 갖고 있기 때문에 완전함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논지를 지니게 되고 이게 그리스도교 안에서 접목되면 기도나 미사 등 하느님과의 인간적 관계 안에서 영원함과 친교를 이루고 마지막에는 영원함과 하나가 될 수 있다, 혹은 하느님이 은총을 베푸신다면 살아서 초월적인 상태로 살 수 있다 (= 성인 성녀, 기적 사건 등) 의 논의에 아주 쉽게 도달할 수 있어요 그러한 고로 초월계와 지상계는 끊임없이 소통하는 관계를 갖게 되고 이는 신의 섭리함이나 모든 성인의 통공 등과 연결이 되어요


이 계보를 따르게 되면 어떤 논의들, 윤리도덕적 논의들 특히, 완전함이 먼저 제시되고 그것을 따라야 하는 당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상당히 빡센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뭐가 맞는지 알면 그대로 해라, 그러나 그 맞는 것의 턱이 꽤 높게 드러날 수 밖에 없기 때문

이상주의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에 이상에 대한 현실의 비교가 빡세게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법에 대한 논의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아니면 내가 그러해서 그렇게 느끼는것이던지..


2. 약한 실재론, 임재적 실재론

아리스토텔레스 - 아퀴나스 계보를 잇는 이 입장은 위의 플라톤주의적 입장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취하는 입장인데

세계가 2개라는 점에서 거부감 혹은 당위성을 못 느끼거나, 세계가 2개가 있더라도 현재 우리가 가진 것에 주력하자는 입장이거나 하는 사람들이 주로 택하는 노선입니노


이데아계와 모사계의 대비를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약화시키고, 이데아들은 어디 딴데 있는게 아니라 각 존재자들 안에 형상으로 있다는게 이 사람들의 논지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강한 실재론자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유한 태도를 지니게 됩니노


강한 실재론에서 신성인 것은 이데아계로 제시되는 반면, 약한 실재론에서는 형상을 신성인 것으로 보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순수 형상은 신 뿐이다고 주장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모든 물체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라는 면에서 보면 각 이데아들은 물질 안에 존재하게 되고, 질료 안에 숨어 있으며 각 질료가 외부적으로 보여주는 상태에 따라 형상들이 강하게 혹은 약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바로 이 사람들의 논지일겁니다 아마도 (순수 질료 따위는 없습니노)


때문에 이 사람들의 세계는 하나 뿐이고 2개가 있더라도 현상계가 우선권을 갖게 됩니노

이러한 모습들 역시 우리와 대치되지 않는게, 주님의 기도를 함 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다섯 줄에서 우리의 모든 논의가 드러나게 되는데,

첫 2~3줄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강한 실재론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고 (~빛나시며 혹은 ~오시며 까지)

그 다음 2~3줄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약한 실재론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혹은 아버지의 뜻이~ 부터) 아마도


신성에 대한 논의에서 약한 실재론 역시 신성이 있고, 인간은 신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역시 인간은 초월에 대한 논의에 접근할 수 있고 역시 초월에 대한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노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약한 실재론의 노선 위에 서게 되면 강한 실재론자들이 이상주의나 논의들에 대한 기준 등에 집중할 때 이 사람들은 실천적 면모에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이런 사람들은 친환경 운동이나 빈민구제 활동 등에서 주로 활동하게 됩니다

물론 강한 실재론자들이 이런걸 안한다는 뜻은 아님 그 사람들 역시 그러한 높은 기준에 맞게 행동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런 것에도 실천하러 나옵니노


3. 유명론

그러나 유명론?

돌아오지 마라 오캄에서 살아라이

신앙적 진리와 철학적 진리는 다르다는 말 하나로 정리가 되는 데, 위 2개는 모두 신앙적 진리 초월적 진리는 모두 철학적 진리의 연장선 상에 있던 거를 감안하면 이 연장선을 끊어버립니다

초월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다 는 논의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으로 접근하게 되면 모순인 사상들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놀라운 광경이 드러납니다 기독교 페미니즘 기독교 공산주의 등...


왜냐?

신앙 진리와 철학 진리는 다르니까 둘 다 같이 하겠다 이말입니다


참 괘씸하거든요

인간의 초월가능성도 끊어버리기 때문에 그냥 이런 분들은 구태여 미사 안나와도 상관 없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