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묵상을 설정해봄


복음 : 예수님이 부활하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고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알리나 에이 설마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고 사명을 부여하고 승천하시는 장면 (마르코의 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나 결국 부활하시어 두 여자 앞에서 나타나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신다. 내 제자들에게 가서 나의 부활을 알려라고 하신다. 그래서 두 여인들은 사도들에게 가서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서 직접 나타나시어 꾸짖으시고 사명을 부여하신다. 사도들의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손수 뽑으시고 곁에 두셨으며 공생활 내내 늘 함께 하게 하였고 그들 옆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결국 예수님의 가장 최측근이며 가장 가까이에서 그 가르침을 배우고 또 서로 인격적인 관계도 맺어가며 예수님과 함께 지낸 이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점이 참 아쉽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여자들을 보고도 믿지 못했다. 여자들은 단박에 믿었는데도 말이다. 사실 여자들도 귀신이거나 환각이겠거니 하고 말았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믿었다 적어도. 왜 사도들은 믿지 못했을까?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여자들에게 나타났을까? 남자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고? 


그것은 예수님은 가장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예수님은 약자들의 편에 섰으며, 유대민족도 그들이 약하기 때문에 선택받았다고 했다. 약자인 여자들 앞에서 나타나서, 사회적 강자인 남자들인 사도들로 보내어 진리를 설파하는 모습은 약자들의 대변인인 모세가 파라오를 만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결국 똑같이 사회적 강자의 위치에 서있는 자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경험을 해봐야 알아들었다. 파라오는 재앙이 10개가 덮쳐야, 사도들은 예수님이 기어이 나타나서 혼내고 나서야 믿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수난기에도 여자들이 곁에 있었다. 그 남자 사도들은 다 도망가고, 베로니카만이 예수님의 얼굴을 천으로 닦아주었고, 성모님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동행하셨다. 복음 안에서 여자들의 모습은 남자들은 그들이 사회적 강자인데다가 더 많은 이익을(예수님과 함께하는)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큰 시련 앞에서 무력했으며 여자들이 나서서 그거를 메꾸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들 앞에서 나타나신걸까..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인 여자들의 편에 서서 남자들을 꾸짖었다. 남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득 되는 거는 다 받아먹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반면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멀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런 훌륭한 여성들이 무능한 남자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갖는다면 더 올바를 수 있다는 가능성 혹은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예수님은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계시고, 강자를 처부술 준비가 되어계신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만나뵈었을 때 부르신 노래 마니피캇에서도 이 부분이 적절하게 드러난다. 여자들 둘이서 있는 자리에서 성모님은 임신한 채로, 약자를 위하고 강자를 처부수신다고 고백한다. 여자들의 힘은 구약에서도 여럿 드러나고, 특히 유딧기에서 도드라진다. 수많은 남성 장정들이 할 수 없던 일을 여자 혼자서 해낸 것이다. 여기서도 그렇다. 여자들에게 더 올바른 덕목과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함을 속에 갖춘 남자들이 기득권을 쥐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주시고 승천하신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누구의 편일까라고 했을 때 답은 자명하다. 여자들이 더 이상 유능한데도 불구한 약자가 아닌, 무능한 남성들이 꽉 잡고 있는 사회와 유리 천장을 깨고,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서 리드해줘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메시지이지 아닐까 싶다. 예수님께서도 여자들은 더 잘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자, 어떻게 방어 하실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