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창문을 두드리는 밤이면 노옹(老翁 : 늙은 남자)은 벽난로 앞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는다.

그러면 그의 오랜 반려인 노부인이 넓은 담요를 가지고서 뒤따라 흔들의자에 앉는데,

그럴 때면 노부인은 가지런히 개어진 담요를 펼쳐 노옹과 나란히 덮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부부는 장작이 타닥타닥 타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없이 상념에 빠진다.

이건 부부가 나이를 지긋이 먹은 뒤로 생긴 버릇이자 습관이었고 겨울철의 일상이었다.

 

"예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지."

 

"뭐가요?"

 

"우리가 아직 젊었을 때 말이야."

 

노부인은 남편의 어깨에서 고개를 떼고 그를 올려다봤다.

노옹의 눈동자는 희미했으나 초점만큼은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실 젊었다기보다는 철부지에 가까웠었지."

 

"당신은 언제나 성숙했어요. 진짜 철부지는 저였죠."

 

노부인은 다시 노옹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남편이 이어서 할 말을 기다렸으나 어느새 저 자신도 남편처럼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우리 둘 다 나름의 상처가 있었죠. 당신은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저는 아버지가 바람난 가정에서 자랐고요."

 

"지금 보면 그게 전화위복이 된 거 같아. 덕분에 당신과 친해질 수 있었으니까."

 

"그렇죠. 당신과 함께 살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별별 일을 다 보내고 나니까 부모 한 쪽이 없이 자랐다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네요."

 

부모 중 한쪽이 없다는 것만으로 놀림을 받았던 탓인지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소년은 자기만 아는 마을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소녀를 데려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소녀가 빵이나 쿠키를 구울 때면 언제나 이 인분씩 구워서 소년과 함께 나눠 먹었다.

 

둘은 언제나 붙어서 다녔고 또래 애들로부터 부부 같다는 놀림을 자주 듣곤 했다.

 

"그래... 추억이었던 거야."

 

"추억이죠..."

 

...침묵.

때마침 눈보라가 잦아들고 장작이 사그라지는 소리도 멈췄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노부부는 눈을 감았으나 동시에 기억 속에서 눈을 떴다.

그 속에서 노부부는 소년과 소녀였다.

 

봄이면 꽃을 따다가 화관을 만들어 서로의 머리에 씌워줬다.

여름이면 강에서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웃었다.

가을이면 둘이서 동산에 소풍을 갔다.

겨울이면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했다.

 

봄은 여름이, 여름은 가을이, 가을은 겨울이, 겨울은 다시 봄이 되었다.

소년과 소녀는 청년과 처녀로 자라났다.

 

그 즈음부터 청년은 처녀를 볼 때마다 속이 타는 듯 했다.

반대로 처녀는 청년을 볼 때마다 그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둘은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를 털어놓지 못했다.

대신 피하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청년은 가급적 처녀를 만나지 않았고 설령 길을 가다 마주치는 한이 있더라도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청년이 그러하니 처녀도 마찬가지로 무시로 일관했다.

 

둘의 사이는 멀어지는 듯 했으나 이내 반전을 맞이했다.

 

스스로의 감정을 무시한다고 해서 감정이 가라앉는 건 아닌 것처럼 둘은 밤이면 밤마다 속을 앓았다.

어둑한 밤에 잠을 청하려 눈감을 때면 서로가 떠올랐다.

몸을 뒤척이며 가까스로 잠들어도 서로가 신경 쓰여 선잠을 자고 말았다.

 

결국 자신의 감정에게 먼저 항복한 사람은 청년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청년은 처녀의 집 문을 쾅쾅 두드렸다.

열린 문에서 처녀가 잠옷을 입은 채로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처녀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청년임을 알고서 퉁명스럽게 맞았다.

왜 왔냐고 처녀는 말했다.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처녀를 끌어안았다.

처녀를 끌어안고 처녀의 머릿결에 코를 가까이 대고서 숨을 쉬기도 했다.

양손에 잡히는 처녀의 팔뚝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마치 금단증세가 온 것처럼 청년은 처녀의 모든 것을 자신의 몸에 가까이 두려 했다.

 

반면, 처녀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청년의 품이 답답하기도 해서 버둥거렸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이거 놓으라고 처녀는 따졌다.

뒤이어 처녀의 어머니가 현관에서 일은 소란을 듣고서 나왔다.

그럼에도 청년은 처녀의 어머니가 둘의 그 모습을 목격해도 여전히 처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기어코 처녀의 어머니가 큰 소리를 치고 나서야 처녀는 청년의 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아침에 벌어진 소란을 뒤로 하고 청년과 처녀는 서로에 대해 오랫동안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청년이 처녀를 무시하게 된 경위, 서로가 품고 있는 감정에 대한 고백.

그리고 처녀의 어머니께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사과까지.

 

어쨌거나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청년과 처녀는 이 일로 인해 사귀게 되었다.

 

“아이들은 우리가 연인이 된 일을 들을 때마다 웃곤 했죠.”

 

“우스울 만 해. 서로 무시하고 지내다가 하루 만에 갑자기 사귀게 됐으니까.”

 

“그때가 좋았죠. 젊고 활기가 넘치고...”

 

“정력도 넘쳤지.”

 

그 말에 노옹과 노부인은 너 나 할 것 없이 껄껄 깔깔 웃었다.

 

노부부의 말대로 젊을 적의 둘은 혈기왕성했다.

한창 대의 나이니 어쩔 수 없었다.

 

연인이 되긴 했으나 그것만으론 애끓는 마음을 달래긴 어려웠다.

떨어져있으면 함께 있고 싶고, 함께 있으면 서로를 껴안고 싶었다.

서로를 껴안으면 입을 맞추고 싶었고 입을 맞추면 그 이후의 것까지 하고 싶었다.

다만 입맞춤 이후의 일은 결혼 후로 미뤄두었으니 이것이 애끓는 마음을 달래지 못한 이유였다.

 

그 대신 연인은 결혼하기 전까지 추억을 가꿔나갔다.

결혼하고 나면 곧 아이가 생길 테고 그 뒤로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힘들 테니 지금 많이 보내자는 뜻이었다.

 

그렇게 연인은 서로에게 시간을 쏟으며 온 마을에다가 추억을 장식했다.

하도 많이 장식했던 터라 나중에는 일일이 다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젊었을 때를 떠올리니 당신에게 미안했던 일도 떠오르네요.”

 

“아아, 그때 그 일 말이야? 당신이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린 거?”

 

“네에. 그래서는 안됐는데요...”

 

“됐어. 이젠 다 지난 일인 걸. 그리고 나도 당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해. 만약 내 일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테니까.”

 

둘은 다시 기억 속에 잠긴다.

둘이 한창 연인이었던 시절로...

 

처녀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처녀가 아이였던 때에 다른 여인과 바람났기 때문이었다.

 

처녀의 아버지는 마을과 도시를 오가던 상인이었다.

한 번 상행을 나가면 짧게는 며칠에서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녀의 어머니가 오매불망 남편을 그리워한 것과 달리, 처녀의 아버지는 아내와 딸을 잊고서 외간여자를 만나고 다녔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처녀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바람피운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그로 인해 처녀의 아버지는 영영 마을을 떠나게 됐고 처녀의 가정은 무너졌다.

 

처녀는 그러한 과정들을 어린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자랐다.

부모가 서로에게 집안 물건들을 던지던 것과 큰 언성들이 오가는 것을.

 

또한 아버지가 떠난 이후 변해버린 집안의 꼴도 보면서 자랐다.

홀로 남은 어머니가 술에 취해 흐느끼던 것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것을.

 

이 일은 처녀가 점차 아버지에 대한 결핍과 상실감을 느끼고 연인을 의심하게 되는 원인이었다.

 

처녀의 연인인 청년은 본인 스스로는 몰라도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런 탓에 청년은 다른 처녀들에게도 여러 호의를 샀다.

 

은근슬쩍 찾아와 말이라도 한 번 더 거는 처녀가 있었다.

자신이 담근 잼인데 맛 좀 봐달라며 한 병을 통째로 주는 처녀가 있었다.

어떤 옷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한 번 봐달라는 처녀가 있었다.

청년에게 연인과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의미심장하게 묻는 처녀가 있었다.

그 외에도 온갖 마을 처녀들이 청년에게 찾아왔다.

 

청년은 이와 같은 처녀들의 유혹을 점잖게 거절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처녀를 안심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처녀는 청년이 다른 처녀의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아버지가 바람난 과거를 떠올렸다.

 

처녀는,

 

처음에는 청년을 믿었다.

자신이 청년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냐면서.

 

다음에는 청년을 의심하지 않으려 했다.

연인 사이에 믿음이 있어야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청년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조금 순진한 구석이 있으니까 자기가 멀리서 지켜봐야 한다고 합리화했다.

 

나중에는 청년을 불신하게 되었다.

자기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청년이 다른 처녀들과 함께 있는 것에 분노했다.

 

“그때는 정말 미쳤었나봐요. 어딜 의심할 데가 없어서 당신을 의심했는지...”

 

“됐어. 이젠 다 옛날 일이고 다행히도 잘 풀렸잖아.”

 

처녀는 청년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처음에는 제 자신도 이러한 방법을 쓰기 꺼려했었다.

소문이란 게 얼마나 재빠르고 변덕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처녀는 다른 처녀가 청년에게 몰래 입을 맞추는 일을 목격하고 만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처녀는 청년의 인기를 조금 깎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이후, 처녀는 조금씩 마을 주민들에게 청년의 험담을 조금씩 했다.

청년이 거짓말쟁이라느니,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느니.

남의 실수나 단점을 깎아내린다느니, 둘이서만 있을 때 자신을 거칠게 대한다느니.

 

청년에 대해서 막 험담하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도 처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이나 다른 처녀들이나 청년을 건실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처녀가 계속 반복해서 험담을 하다 보니 하나 둘씩 험담을 진짜로 믿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처녀가 해준 험담 속에서 청년의 모습을 찾았다.

 

청년이 농담을 하면 주민들은 그걸 거짓말이라고 받아들였다.

예전에는 청년이 늦잠을 자면 관대하게 넘어갔지만 이제는 게으름쟁이로 여기게 됐다.

청년 앞에서 실수나 단점을 보이면 청년이 그걸 약점으로 잡을까봐 더는 청년 근처로 주민들이 모이지 않았다.

그리고 험담을 시작한 처녀에게도 청년과 헤어질 것을 권유했다.

 

“또래 여자애들은 저보고 당신이랑 헤어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죠. 이러다가 큰일 난다면서요. 그제가 돼서야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나도 그때는 정말 당황스러웠어. 친구들은 점점 나를 피하고 마을 어른들은 나를 자주 꾸짖었으니까. 책잡힐 일을 한 기억이 없는데 주변에선 발뺌한다고 쏘아붙이고 말이야.”

 

“미안해요, 여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해도 여전히 부끄럽네요.”

 

“아냐, 이 나이 먹도록 계속 듣고 또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이젠 좀 지긋지긋하네. 뭐, 그래도 그때는 좀 억울했었어. 주변에서 왜 그러는지 몰라서 이유를 물어보니까 몰라서 묻느냐는 대답만 돌아오고.”

 

혼자가 된 청년은 유일하게 자신 곁에 남은 처녀와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처녀라도 곁에 남아있어 줘서 다행이라는 위안과 함께.

 

청년은 처녀가 고마웠다.

주변에서 뭐라 수군거려도 변함없이 곁을 지켜줬으니까.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결혼식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어. 이러다가 당신마저 떠날까봐 두려웠거든. 결혼하면 떠나가진 않겠거니 했지.”

 

“당신이 결혼식을 입에 담았을 때는 정말 기뻤지만 또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했어요. 당신을 험담한 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걱정하기도 했죠.”

 

“그래. 나중에 당신이 내 험담을 처음 시작한 장본인인 걸 알았을 때는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청년은 묻고 또 물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냐고.

 

그럴 때마다 네 행실이 문제라는 답이 돌아왔으나 청년은 만족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을 찾아가 자신의 무엇이 문제인지 물었다.

청년은 쉬지 않고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을 찾아 나섰고 끝내 알게 되었다.

유일하게 자신 곁에 남아준 처녀가 모든 소문과 험담의 원흉이었다는 사실을.

 

청년은 그 길로 처녀를 찾아갔다.

야밤에 처녀의 집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며 처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처녀는 자다 말고 눈을 비비며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분노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말했다.

네가 내 험담을 주도했느냐고.

그나마 온 힘을 쥐어짠 덕분에 상기된 목소리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청년이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처녀는 부정했다.

만약 사실대로 말했다간 청년이 자신을 떠날까봐.

아니면 분노한 청년의 손에 해코지를 당할까봐.

처녀는 그게 두려웠다.

 

청년은 재차 물었다.

정말이냐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질 수 있겠냐고.

 

처녀는 재차 대답했다.

억울하다고. 자신이 왜 연인에 대한 험담을 하겠냐고.

 

먼저 수긍한 쪽은 청년이었다.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요즘 예민해져서 그랬다고 사과했다.

 

그 말을 끝으로 처녀의 집을 떠나려고 등을 돌린 순간, 청년은 말 한 마디를 듣고 말았다.

 

저것 봐, 청년이 처녀를 해코지하려 한다.

 

또한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민들 몇 명을 볼 수 있었다.

 

주민들은 반원을 그리듯 청년을 둘러쌌다.

그들은 마치 짐승을 구석으로 몰아서 사냥할 때처럼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그들 중 대표로 나선 주민이 청년을 다그쳤다.

처녀한테서 떨어지라고.

 

청년은 주민들에게 외쳤다.

오해라고, 자신은 절대로 처녀를 해코지할 생각이 없노라고.

그저 험담을 퍼뜨린 장본인이 처녀라는 말을 들어서 진상만 알고자 왔던 거라고.

 

청년이 아무리 해명한다 한들 주민들은 계속해서 처녀에게서 떨어지라고 다그치기만 했다.

결국, 청년은 이별의 뜻으로 처녀를 한 번 돌아보고 주민들 앞으로 나섰다.

주민들은 청년의 양팔을 단단히 잡고서 연행하려 했다.

청년도 묵묵히 순응하려던 그때, 주민들 사이에서 말 한 마디가 울려 퍼졌다.

 

우리가 늦었으면 처녀가 청년의 손에 해코지를 당했을 거야, 처녀가 했던 말이 맞았어.

 

그 말은 얌전히 끌려가던 청년이 광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때 많이 놀랐어? 화나서 그런지 그때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당신이 그렇게 화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살아생전 처음 봤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바로 제압돼서 집이었나 하여튼 어두운 곳에 한동안 갇혀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집이 아니라 안 쓰는 마을 창고였어요. 당신은 거기에 이틀 정도 갇혀있었고요.”

 

“아아, 이제야 생각나네, 참. 창고에 갇혀서 종일 멍만 때렸지. 어떤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충격을 받아서.”

 

“미안해요.”

 

“됐대도.”

 

창고에서 풀려난 청년은 그 뒤로 집에 틀어박혀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아무도 청년을 집밖으로 끌어내려 하지 않았고 이들 중에는 처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처녀의 심정은 어떻게든 청년에게 사과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해명해봤자 마을 주민들이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설령 믿어줘도 그건 또 문제인 것이, 그랬다간 청년이 그 동안 받은 박대를 처녀 자신이 받게 될 것이었다.

적어도 청년에게 찾아가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으나 낮에는 보는 눈 때문에, 밤에는 청년이 복수심에 해코지할까 두려워서 못했다.

 

시간은 처녀의 마음만큼이나 무심하게 지나가더니 어느덧 겨울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마을이 고립될 정도로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날씨가 이러하니 원래라면 날이 좀 풀리고 나서야 다른 마을이나 도시로 왕래하겠지만 당장 왕래해야 하는 일이 마을에 터졌다.

 

마을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이들한테서 집단으로 기침과 발열이 발생하고서부터였다.

 

아이들이 무리를 이뤄 노는 일이야 흔하니 한 명만 감기에 걸려도 여러 명이 다 같이 걸리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른들은 역병의 집단 발병을 마을의 연례행사로 받아들였다.

며칠에서 몇 주 뒤면 다들 낫겠거니 했다.

 

문제는 발열 이외의 증상들이 나타난 뒤부터였다.

감기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증상들이 아이들에게서 나타났다.

그제야 어른들은 아이들이 걸린 질병이 감기가 아님을 깨달았지만 깨달은 시점이 너무 늦었다.

 

그때쯤에는 어른들마저 아이들이 걸린 병에 걸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 중 몸이 약한 편에 속한 아이들은 증세가 악화되어 하나 둘씩 쓰러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을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돌았다.

좋은 소식은 지금 마을에 도는 역병의 정체와 치료제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것이었다.

나쁜 소식은 그 치료제가 마을에는 없고 마을에서 좀 떨어진 도시에 가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날씨가 이러하고 어른들도 골골대니 누가 도시까지 가서 치료제를 가져오겠는가.

모두가 좌절하여 얌전히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때 주민들의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번뜩였다.

집에 처박혀서 사람과 단절되어 있던 탓에 역병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청년이 있었다.

때마침 청년은 개썰매를 잘 끌지 않았던가.

 

주민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청년에게 주며 부탁했다.

우리가 잘못했으니 제발 도시까지 가서 치료제를 사달라고.

 

청년들이 나오지 않자, 주민들은 돈을 청년의 집 현관문 앞에 두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속으로 청년이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라며.

 

“옛날 일이라 얼마였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잘 안 나고 대충 새 인생 살 수 있을 정도라고만 기억해.”

 

“당신은 그때 그 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나요?”

 

“솔직히, 고민 좀 했지. 날 이 지경으로 몰아놓고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잘도 도와주겠다고 생각했어.”

 

청년은 망설였다.

무엇을 위해서 마을 주민들을 도와줘야 하는가.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무엇을 믿고 이 돈을 턱하니 두고 갔는가.

 

“하지만 당신은 결국 개썰매를 끌고 도시까지 가서 치료제를 구한 다음 마을에 돌아왔죠. 뭐가 당신의 마음을 움직인 건가요?”

 

청년이 망설이면서 하루를 보내자 이튿날 아침에 마을 주민들이 다시금 찾아왔다.

그들은 청년에게 애원했다.

허나 그것만으론 청년의 마음을 돌리기에 부족했다.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기를 청년이 기다리던 그때, 처녀가 거론됐다.

 

“당신이 사경을 헤맨다는 말을 들었어. 그 말에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

 

청년은 마을 주민들의 안내를 받으며 처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병세가 심한 이들은 따로 격리된 곳에서 간호를 받고 있는데, 처녀가 거기 있다는 게 주민의 설명이었다.

 

“그랬었나요? 저는 당신이 온 줄 모르고 있었는데요.”

 

“내가 왔을 때 당신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모를 수밖에 없지. 어쨌거나 당신 병세가 심상찮은 걸 알고서 바로 돈을 챙겨서 도시로 출발했어.”

 

청년은 개썰매를 끄는 동안 개가 쉬어야 할 때를 빼곤 쉬지 않았다.

강행군에 몸과 정신이 지칠 법도 했으나 청년의 눈은 오로지 도시 방향을 향했다.

 

“늙고 나서 보니 그때는 진짜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니까. 온 사방이 다 새하얗고 도시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몸은 점점 지치기나 하고...”

 

“한편, 당신이 치료제를 사러 자리를 비우니까 마을 주민들은 얼굴에 화색이 오르더라고요. 이제 살았다는 말이 나돌았죠.”

 

마을 주민들은 병자들을 간호할 때마다 이렇게 속삭여줬다.

청년이 치료제를 사러 마을로 갔으니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하지만 처녀는 청년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청년의 연인인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가 청년을 배신했는데 청년이 뭐가 좋다고 마을로 돌아오겠냐고.

어차피 죽게 될 몸, 마지막 가는 길에 처녀는 모두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청년에 대한 험담과 헛소문은 모두 자신이 퍼뜨린 거고 근거도 없는 말이었노라고.

근데도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 청년을 따돌렸노라고.

청년도 모든 험담과 헛소문의 장본인이 자신임을 알게 됐으니 청년이 마을로 돌아올 근거는 없노라고.

 

처녀가 그리 말을 남기니, 치료제만을 기다리던 마을 주민들은 절망하고 말았다.

뒤이어 청년에게 했던 것처럼 처녀에게 비난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이제 죽었다며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마다 처녀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였으나 절망했다는 점만큼은 공통적이었다.

 

며칠이 지나서 간호해주던 사람도 더는 간호하지 못할 만큼 병세가 악화되어 모두가 죽음을 기다리던 그때.

 

“당신이 나타났죠. 몹시도 지쳐보였지만 눈만큼은 생생히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청년이 타고 온 개썰매엔 온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사용해도 충분할 만한 분량의 치료제가 있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청년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치료제를 받아갔다.

청년은 치료제를 하나 들고 처녀에게로 갔다.

 

“모든 게 희미하게 보였지만 유독 당신 얼굴은 또렷했죠. 당신은 굳은 얼굴로 제게 입을 벌리라고 하더니 제 입에 치료제를 손수 넣어줬어요.”

 

“그래, 용케도 그랬지. 나도 그때는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잘도 당신 입에 치료제를 넣어줬어.”

 

청년은 처녀의 입에 치료제를 직접 넣어준 뒤에야 지쳐서 쓰러졌다.

 

치료제를 먹은 주민들은 빠르게 차도를 보였다.

반면, 몸을 혹사해서 그런지 청년은 마을로 돌아온 직후 혹독하게 병을 앓았다.

어찌나 혹독했는지 치료제를 먹어도 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 치르지 않은 잔병치레를 그때 다 받은 모양인지 온 몸이 다 아프더라니까.”

 

“저는 그런 당신을 곁에서 돌봤고요.”

 

처녀는 잘못을 뉘우칠 기회라 여기며 병이 막 낫자마자 청년을 돌보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사람들이 처녀를 염치도 모르는 여인이라고 욕해도 처녀는 묵묵히 청년을 돌봤다.

 

“당신이 깨어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왜 마을을, 저를 안 떠나고 돌아왔는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자 처녀는 밤새도록 청년을 간호했다.

미음과 소금물을 먹여주고 물수건을 청년의 이마에 올려줬다.

그리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며 병마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힘을 북돋아줬다.

 

처녀의 노력이 빛을 발한 건지, 얼마 뒤 청년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내가 깨어나서 처음으로 한 말이... 다행이라고 했던가? 하여튼 비슷했을 거야.”

 

“맞아요. 당신은 저를 보고 다행이라고 했어요. 제가 당신에게 미음을 먹여주려고 가지고 오던 차에 깨어났죠.”

 

청년이 먼저 입을 열긴 했으나 그 뒤로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기애애하거나 감동적인 말을 하기에는 서로의 사이가 너무나도 멀어졌으니까.

예전 사춘기 때 서로를 무시하던 것처럼 둘은 잠깐 그러고 있었다.

 

다만 사춘기 때는 청년이 먼저 다가왔지만 이번에는 처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돌아왔냐고 했죠?”

 

“응, 내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기껏 선심 쓴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죠.”

 

“순간 내가 정말 떠나길 바라나 생각했다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당신의 답은 정말 근사했죠. 전 아직도 그 말만은 똑똑히 기억한답니다.”

 

네가 여기 있으니까.

그게 청년의 답이었다.

 

처녀는 그 말을 듣고서 입을 열지 못했다.

석고상이라도 된 것 마냥 그 자리에 계속 서서 청년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럼에도 눈시울은 시뻘건 꽃봉오리처럼 변해서 금세 터질 것 같았다.

 

“당신 그때 참 예쁘더라고. 정말로 미웠는데 울먹이니까 또 예뻐서 말을 못하겠고.”

 

“그래서 결혼한 뒤로 밤마다 저를 울린 건가요?”

 

“꼭 밤이 아니라 대낮이여도 울렸지. 당신도 좋았으면서, 뭘 이제 와서 싫은 척은.”

 

노부인은 조용히 웃으며 노옹의 허벅지를 꼬집었고 노옹은 엄살을 부렸다.

 

“아아, 농담 갖고 왜 이래.”

 

“하던 얘기나 마저 해요.”

 

“흠흠, 뭐... 어쨌든 내가 당신보고 곁으로 오라고 했었지. 그러고서 또 물었었고. 왜 내 헛소문이나 험담을 퍼뜨린 거냐며.”

 

처녀는 청년과의 관계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간 뒤에야 솔직할 수 있었다.

마을 처녀들에게 인기가 많은 청년을 보니 과거에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바람난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래서 마을 처녀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정도로만 평판을 조금 낮추려 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청년의 평판이 빠르게, 깊게 추락해서 사실대로 말했다간 헤어지게 될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청년이 찾아왔을 때 거짓말을 하게 된 거다.

이게 처녀가 청년에게 밝힌 진상의 전부였다.

 

모든 일이 처녀의 어리석은 판단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때문에 청년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

처녀는 청년의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고서 청년이 자신을 떠나리라고 지레짐작하였다.

 

끝내 처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애처로이 울며 잘못했다고 뭐든 할 테니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청년은 그런 처녀를 보고서 한 마디를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는데, 너마저 병으로 잃을 수는 없어서 돌아온 거라고.

 

둘은 한쪽 부모를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 공통점에서 비롯된 행동은 서로 달랐다.

처녀는 청년이 아버지처럼 자신을 떠날까봐 험담을 했다.

청년은 처녀가 어머니처럼 병으로 죽을까봐 치료제를 구하러 먼 도시까지 왕복했다.

 

처녀는 청년에 대한 믿음을 잃었으나 청년은 처녀에 대한 사랑을 잃지 못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슷한 처지였던 둘이 이렇게나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을 테니.

 

“그러고서 당신은 저를 끌어안아줬죠.”

 

“한동안 그러고 있었지. 금세라도 헤어질 것 같은 사이였는데 금세 화해하고 말았고.”

 

“그 후로도 우리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별별 일로 많이 다투곤 했죠.”

 

“하도 많아서 그런지 이제 와선 무슨 일로 싸웠는지 다 기억을 못 해.”

 

“저도 그래요. 우리도 이제 늙었으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또렷이 기억나는 건 싸우고 나면 곧 화해한다는 거야.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거지.”

 

“다투는 만큼 사랑하니 그럴 수밖에요. 우리 인생이 그랬죠.”

 

처녀는 청년이 깨어난 뒤에도 청년의 병수발을 들었다.

사실, 병수발을 든다는 건 핑계에 가까웠고 둘이 지내는 모습은 신혼 생활을 미리 체험하는 모양새였다.

어느덧 청년이 완치하고 몇 달 뒤, 삼월이 되자 봄이 겨울의 기세를 꺾었다.

따뜻하고 산뜻한 봄바람이 불어올 적에 청년과 처녀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간 청년이 처녀의 잘못을 변호해주고 처녀도 반성하며 지낸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둘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청년과 처녀는 부부가 되고서 알콩달콩하게 지냈다.

 

아침이면 청년은 처녀가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먹고서 일터로 나갔고 처녀는 집안일을 했다.

해가 중천에 뜨면 청년은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왔다가 처녀와 잠깐 사랑만 나누고 다시 일터로 나갔다.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면 청년은 처녀와 저녁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모두가 잠들 밤이 되어도 부부는 사랑을 나누느라 달이 기우는 줄도 몰랐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결혼식이 있던 해의 십이월에, 해가 바뀌기도 전에 부부의 첫 자식이 태어났다.

보통 아이가 어미의 태에서 아홉 달에서 열 달 정도 지내다가 태어나는 걸 생각하면 부부는 결혼 직후에 아이가 생긴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부부와 첫 자식을 보고서 감탄만 쏟아냈다.

청년과 처녀가 서로를 어찌나 사랑했는지는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여, 부부는 서로를, 그리고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사랑하며 살았다.

 

시간은 그물에 걸린 강물처럼,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처럼 막힘없이 흘러갔다.

 

자식들은 자라고 커가다가 저마다의 짝을 찾았다.

 

청년의 아버지와 처녀의 어머니가 임종을 맞이했다.

 

손주가 태어남으로써 자연스레 부부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부부는 늙어가며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부터 세상의 온갖 변화들을 지켜보며 살았다.

 

“좋은 삶이었죠?”

 

“당신과 자식, 손주들 덕분에 행복했지.”

 

“저도 그래요.”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노부부가 추억을 회상할 때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침묵이 깨지는 일이 없었다.

벽난로에서 타들어가던 장작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도 노부부는 새로운 장작에 불을 지피지 않았다.


더 이상 둘에겐 벽난로의 온기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이 순간의 고요면 충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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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개썰매를 끌고 치료제를 가져온 건 실화를 기반으로 한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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