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종 결전 전날 밤.


마지막 하루만큼은 하고싶던 것을 하며 보내자는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런 이유에서 용사 일행은 마왕 토벌 전날, 용사가 나고자란 북쪽 마을 어귀에서 각자 헤어졌다.


죽기 직전 동정을 떼야겠다는 놈도 있고, 칼을 갈겠다는 녀석도 있었다. 동생과 저녁식사를 하고 오겠다는 아이도 있고, 멍 때리며 눈 내리는 하늘을 지켜보겠다는 분도 계셨다.


용사는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


그의 어머니는 선대의 마녀이자, 이계의 난봉꾼으로서 마왕에 대해 여러가지를 알고 계셨다.


용사는 그녀로부터 과학적 마법론과 검술을 배워 신검(神劍; 에고이스트)을 손에 넣고, 자동 계산의 검술(ASA; 오토소드)을 익혔다. 


이제 인간 누구도 그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어머니조차도.


내리쬐는 가로등 사이로 시커멓게 비어버린 하늘을 올려다 보면, 여전히 육각무늬의 예쁜 눈송이들은 하늘하늘 내려온다. 


죽은 눈으로 맥없이 응시하는 눈앞엔 여전히 성탄의 밤을 준비하는 북쪽 고향 마을의 소복한 분위기가 있었다. 


눈 내린 거리에 모인 현악단이 평화의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한다. 


그 유랑 악단 주위엔 생계 유지를 위해 벗어둔 모자가 놓여있다. 코흘리개 꼬마와 수다쟁이 동네 아줌마의 동전 몇 푼어치가 그 모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용사는 가만히 서서 눈을 맞으며 그리웠던 고향의 풍경을 되새겼다.


사박 사박. 용사는 쌓인 눈을 한걸음 한걸음 밟아나가며 태어났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낡은 문고리엔 침엽수 가지를 둥글게 만 조촐한 성탄 장식이 달려 있고, 그 옆엔 '행복한 용사님의 집' 이라고 없는 솜씨로 조악하게 만든 작은 나무 팻말이 걸려 있었다. 16년 전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묘한 온기와 짤막한 단풍꿀의 박하 향이 추억처럼 아득히 뇌에 박혀 온다.


"다녀왔습니다."


허공에 뿌려지는 인사말.


결론. 멍청하게도 이럴 줄 알면서 무의식적으로 이곳에 찾아 왔버렸다는 것. 


당연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새벽처럼 거실과 주방은 짙푸른 침묵만이 있었다. 


주방 찬장의 조미료 진열장에 모셔진 후추 통에 먼지만 가득 쌓여 있을 뿐이었다. 용사는 유년기의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대략 그가 아직 순진무구한 소년이었을 적 일이다.


'레미, 편지를 쓸 때엔 펜을 기울여서 써야 한단다. 편지지에 날카로운 펜촉이 닿아서는 안되거든.'

'호박 파이가 좋니? 아니면 사과 파이가 좋니?'

'아버지는 레미 네가 태어나기 전에 마계전선에 지원하셨단다. 멋지지?'

'레미. 용사 따위의 운명을 물려줘서 엄마가 미안해.'

'호호호, 후추를 너무 많이 넣었나 보구나. 요새 눈이 잘 안보여서 그만.'

'레미… 엄마가 내일 마왕이 된다면 어떻게 할거니?'


어머니는 전대 용사에게 영원한 봉인(죽음)을 당했다. 


그 일이 있던 후로 그는 용사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건 운명이었다.


용사가 된다는 것의 의미. 그것은 복수귀의 고독을 물려받는 것. 


마을 처녀의 순수한 고백을 이 악물고 짖밟아야 하며.


굳은 결단에 찬 그 칼날은 태아를 써는 데 몰두해야 하고.


최종장엔 마왕의 목을 쳐 부수고 동귀어진해야 할 운명.


그리고. 이제 최종장까지는 하루도 남지 않았다.


이번 마왕은 사탄의 성녀 에스케리카. 내일이면 그녀도… 


그런 식의 생각을 반복하던 도중, 용사는 안방에서 인기척을 감지하고는 조심스레 다가가 보았다.


방 문 틈으로 뭔가가 보이는 듯 했다. 그림자일까. 환영일까.


그것은 그림자도, 환영도 아니었다. 명백한 인간형의 무언가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살갗이 미묘하게 드러나는 고딕 양식의 드레스. 


머리 위로 길게 자라난 염소의 뿔. 고급스럽다는 생각까지 드는 단정한 흑수정빛 긴 머리. 


그리고 보라색 불덩이가 개화하는 듯 한 자수정의 깊은 눈동자. 


용사는 그것과 똑바로 마주쳤다. 자신이 알고 있던 마왕과 정확히 같은 그 모습에.





#2

"그래서, 넌 마왕이고 마지막 해야 할 일이 떠올라서 여기 왔다는 거지?"


혀 끝을 잠깐 내밀었다가 눈을 깔고 손가락을 비비던 그녀는 용사의 눈을 교묘하게 피하며, 문 바깥을 가리켰다.


촛불의 그림자가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용사와 마왕 사이의 묘한 대기를 일그러뜨린다.


마왕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이 쪽 언어가 어색한지 손짓 발짓을 전부 동원해 자신의 말을 설명한다.


"서, 성탄 축제. 마을에… 에스카, 카토. 베르타?"


"이봐. 성탄절 축제를 즐기고 싶다면 여기가 아니라-"


그녀는 따지듯 내밀어진 용사의 팔을 탁 하고 잡으며,


"에스케리카와 함께. 축제. 함께 해줘. 마지막 해야 할 일과 소원이야. 메리슘."


용사는 간절한 시선을 느꼈다. 마지막 해야 할 일.


그녀의 절박한 시선이 용사의 팔과 문고리를 오간다. 


어정쩡한 미소를 조금 머금은 그녀의 귀여운 머리칼이 살랑인다. 


내일 운명이 결정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불합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감정은 오묘하고도 신기해서 절대로 이번 생 안엔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고 용사는 확신했다. 


그래. 어차피 결전은 내일이다. 라고 생각한다. 


"내일은 죽여야 할 상대로 만나겠네."


그의 짧은 빈정거림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살짝 갸우뚱 하며 '그럼 가자!' 하며 용사를 끌고 나갔다. 


그 악마처럼 예쁜 얼굴에 환하기 짝이없는 웃음 꽃이 핀다. 


힘껏 잡아당기는 그 팔엔 양기가 가득 차 이번 성탄 축제의 활기찬 기운이 절로 느껴졌다. 


마왕 안내를 위해 이곳의 지리를 기억해 내려던 찰나, 마왕이라는 소녀(사탄의 성녀 에스케리카)는 기쁨에 젖어 온 사방을 튀어다녔다. 


얼마나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으면. 그녀의 고딕 드레스가 휘날리며 만들어낸 미약한 바람이 어둠이 깔린 코스모스 언덕을 가르며 마치 코스모스 자체가 그 바람결의 일부분처럼 되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 마다 한겨울 야시장의 약간 뜨뜻한 등불들이 그녀의 잿빛 살갗을 핑크빛으로 물들인다. 


에스케리카는 완전히 '소원'을 잊은 듯 했다.


"저기. 함께 다니고 싶다며?"


용사는 그녀로부터 두 시간 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고작 글자 몇 자 따위로 표현하기조차 벅찬 이 막막하고 덧없는 감정이 그의 눈 안쪽에서 지긋이 맴돌았다. 살짝 지끈거리기도 했다. 


초저녁 말기 무렵의 환한 야시장 불빛에 어지럼증을 느낀 건지, 미묘한 감정 탓인지 헷갈릴 정도로 이국적인 감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역사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지.'


하고, 용사는 생각했다. 대략 28년 전의 오늘이었다. 성탄 기념을 위해 마족과 인간이 모두 싸움을 멈추던 날.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이려고 안달이 난 마족과 인간이 악수를 하고 만담을 나누던 날.


서로를 죽이기 위해 인생을 걸어온 용사와 마왕이 결전 하루 전날 축제를 즐긴다.


저 멀리 거리의 악단들로부터 들려오는 <G선상의 아리아> 가 들려주는 선율은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날 밤의 고요 같았다.


마왕이 드레스를 펄럭이며 용사에게 다가온다. 그녀의 손에 달콤한 사탕 몇 자루가 들려 있다.


"나는 사탕이 좋아. 용사 씨는? 어때."


"글쎄. 이가 썩는다고 야단은 많이 맞은 것 같은데."


"용사 씨는 뭘 모르는구나. 달콤한 건. 키슈… 좋은 거야."


"몰라서 유감이네. 나는 어째서 에스케리카, 당신이 결전 하루 전날 여기에 찾아온 건지 궁금한데. 죽으러 온 거야? 난 여기서 조금만 마음 먹으면 널 죽일 수 있어. 네가 마왕성 밖에선 저기 있는 평범한 마을 소녀와 다를 것이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거든."


자칭 마왕이라는 그 소녀는 전혀 모르겠다는 투의 얼굴로 두 눈을 꿈뻑이며 의문에 찬 고양이가 되어 용사를 올려다보았다. 약올리는 꼬마아이같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다.


"싫었어. 내일 싸우는거. 그래서 용사 씨를 만나서. 오늘만은 메르켸프… 화해하자고 하러 왔어. 그런 것도 몰랐던 거야?"


"나는 운명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장난인 척 넘어가려는 부류를 무척이나 싫어해. 넌 내일 나와 싸워야 해. 그건 신조차 절대 바꾸지 못하는 운명이고, 절대 그냥 '화해하자' 따위로 넘어갈 수 없는 문제야. 네 목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걸려있는지… 알기나 해?"


"그래. 알고 있어. 그치만, 나는 싸우기 싫은걸."


"약한 소리 할거면 이 자리에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그딴 정신머리로 꼴에 마왕이라고? 바로 내일. 둘 다 죽을 때까지 싸울 운명인 걸 인지하고는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대체 왜..! 실망이다. 에스케리카."


"화해했으면 좋겠어. 그냥.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샤이탄… 인간과 마족이 죽었는지 계속 봐왔잖아. 내 목에 걸린 사람들의 수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희생됐잖아. 알고 있어?"


"이제와서 싸우기 싫다거나 화해하고 싶다거나 따위의 말은 통하지 않아. 애초에 이 증오의 연쇄는 네가 시작한 것도 아니지. 우리는 훨씬 이전 세대부터 그렇게 싸워왔고, 너와 내가 죽으면 그 다음 용사와 마왕이 서로를 죽이려고 하겠지. 결코 그 억센 연쇄작용은 끊을 수가 없어. 자연 법칙을 거스르려고 하지 말라고."


그녀는 걷다가 말고 잠시 지나치던 노란 등불의 누들 점포에서 올라오는 김을 노려보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이내 손가락을 튕기며,


"아하! 용사 씨는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라시튜, 누들? 이라는 거. 계속해서 이어지는 거. 하지만 이거? 목 안막히고 먹고 싶으면. 적당히 먹기좋게 잘라야 해."


용사는 작은 한숨을 그냥 숨인 것처럼 거짓으로 내뱉은 뒤, 호주머니에서 클래식한 은시계를 꺼냈다.


"이봐, 지금이 오후 열 시라는 건 알고 있기나 한 거야? 두 시간 후면 성탄 축제를 명분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임시 휴전은 끝나. 다시 말하지만 네가 마왕성 바깥에서 힘 못쓰는 건 알고 있어. 나는 두 시간 후면 네 심장을 반으로 갈라버릴 수도 있을 테지."


그 마족 여성은 용사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능청스레 점포의 높은 자리 의자에 낑낑대며 올라탄다.


"모르겠어. 용사 씨.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


"그야, 그게 우리 일이잖아."


"일?"


"그래. 일."


"용사 씨는 내가 싫어?"


"응. 죽여야 할 만큼 싫어."


"그럼 왜 죽이지 않는데? 여기서."


용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그의 자유의지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반면에 그녀. 에스케리카에겐 의지라는 것이 있는듯 했다. 그 높은 의자에 앉아 열심히 누들을 먹고 있다. 한껏 재채기도 한다. 사레에 걸린 걸까.


"국물이 매워. 용사 씨. 물 있어?"


고요히 침묵을 지키던 용사는 '소원'을 떠올리곤, 머뭇거렸다.


완전히 어색해지기 직전에. 답이 나왔다.


"...소금 통 옆에 있는게 물이야."


사실 용사는 마왕의 이전 질문에는 답할 수 있었다. 


'왜 죽이지 않는데? 여기서.'


여기서. 마왕성을 벗어났기에 아무 힘도 없어진 그녀를 죽일 수 있음에도 결단코 마왕성에서 <완전한 사탄의 성녀>가 된 그녀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는.


16년동안 칼을 갈아온 목적지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관성처럼 달려온 이 자리에 남은 것이 허무라니.


납득할 수 있을리가. 그럴리가.


어서 마왕성에 그녀를 감금해서라도 완전체가 된 마왕과 결전의 사투를 벌여야 한다.


툭 치면 픽 하고 쓰러질 법한 마왕. 그따위 걸 죽이기 위해 이 험준한 길을 달려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결전 하루 전날 마왕이 성을 나온다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저기. 용사. 여기는 먹고 나서 돈이란 걸 내야 하나 봐. 돈이 뭐지?"


마왕은 그새 점원과 잡담을 시도하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가 익숙하지 않아 중간중간 짤막한 마족어가 작게 튀어나오고 있다.


"아, 손가락에 낀 이거. 주면 돈이란 거, 안 내도 돼? 주면 타무크, 그러니까... 마음껏 먹어도 좋다고?"


내버려 두면 그대로 바가지를 쓸것임에 틀림없을 정도로. 마왕은 언어 이외에 인간의 세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까의 사탕은 돈을 내고 가져온 걸까.


"음. 그것도 좋지만, 나 오늘 하루 밖에 남은 시간이 없어. 엣. 아, 뭐야. 그러면 돈이란 거, 안 내도 상관 없다는 거야?"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 야토 헤라사, 꼬뉴... 그래서... 하루 정도 시간이 남았단 것도 사실, 저기 옆에 있는 용사 씨 마음에 따라서 두 시간 남짓일 수도 있고, 스물 세시간이 될지도 몰라."


"글쎄.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은데, 아직 복잡한 문장은 어렵네. 오늘을 위해서 공부했지만 역시나 모자랐나 봐. 그치만 공부만 하다간 오늘을 놓치게 되니까. 여기서 보낼 수 있는 건 오늘 하루 뿐이거든. 아마 내 마지막 날이야."


"아. 하루만 시간이 있다면, 산에 있는 사원에 가 보라고? 음. 사원에 가면 나 맞아 죽을지도 몰라. 다른 곳 없어?"


대화가 끊겼다. 듣고있던 용사는 어느덧 부담스런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어올리자, 누들 점포의 점원과 에스케리카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용사 씨. 어디를 가야. 메토... 그러니까. 마지막 하루를 잘 보냈다고 생각될 수 있을까.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어. 사실. 나. 다른 곳엔 가 본적이 없거든."


점원이 말을 다시 붙이자, 마왕이 고개를 휙, 돌려 점원을 다시 쳐다본다.


"아, 이 마을에 있는 그 사원이란 거. 가도 맞아 죽지 않을 거라고? 저, 정말이야? 책으로 봤을 때는 거기. 가면 무조건 죽을 거랬어. 뭐? 죽을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런 책이 어디 있냐고?"


용사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결정을 내린다.


"글쎄. 죽지 않을지도 모르지. 열심히 기도하고 회개한다면."


거짓말이다. 사원에 사탄의 성녀를 알고 있는 자가 하나라도 있다면. 마왕의 권능이 발휘되지 않는 지금 시점에. 그녀의 최후는 '맞아 죽는다'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들 점포 점원이 말한 곳은 이 북쪽 마을의 아주 작은 사원이다. 사탄의 성녀를 아무도 모를지도 모른다. 이곳의 점원처럼.


"자, 용사 씨. 열 시 반이야. 사원에 도착하면 열한 시가 될 거고. 거기서 한 시간을 보내면, 당신이 나를 살리던 죽이던. 마음대로 해."


"같이 가준다고는 하지 않았어."


"아... 용사 씨가 같이 가 줄 필요는 없어. 용사 씨 일행분들도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잖아? 내 소원이라는 거. 애초에 용사 씨가 들어줄 의무도 없고."


"그럼 누굴 기다리길래 출발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야. 넌 마왕이고 인간의 나라인 이곳에 네 편은 아무도 없어. 기다려도 누구도 같이 가 줄 리 없지."


용사는 차가운 말투로 일관했지만 에스케리카는 그자리에서 그대로 있었다. 육각의 눈송이가 내리는 겨울하늘을 향해, 손을 모으며.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마을의 성탄 축제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자정은 곧이었다. 어느덧 최후의 시간은 삼십 분도 남지 않았다.


용사의 심장은 마치 폭주한 기관차처럼 덜컹거렸다.


마왕 에스케리카와 용사의 끝이 다가오고, 파티원들이 다시 약속 장소로 모이기 시작했다.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하던 거리의 현악단은 어느새 <보칼리제>를 연주하고 있었다. 우울한 선율이 거리를 메워 안듯이 에워싼다. 용사 파티의 성전사와 암투꾼, 마법소녀와 요정궁사와 짐꾼은 엄숙한 표정으로 용사 옆에 선다.


사천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스케리카는 눈 내리는 밤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을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사원. 그곳에 그렇게 가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걸까.


무심코 던져버린 '기도하고 회개하면 가도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시도중인 것일까. 어차피 내일 죽는 것은 확정지어 졌는데. 두려울 게 있을까. 의문만이 가득했다.


악의 결정체이자 연쇄적 비극의 주범인 그녀가 지금부터 마음을 비워 기도한다면, 자애로우신 신님은 그녀의 순수를 알아 주실까.


생각을 하던 찰나. 기도하던 에스케리카의 목에 직선이 그려졌다.


"레미. 뭘 하고 있는 거야? 이건... 마왕이잖아?"





#3

"이제 네가 마왕의 운명을 이어 받겠네요. 알고 있었죠? 선과 악의 결정체가 사실 희생 재물에 가깝다는 불편한 진실? 인간도, 마족도 둘 다. 자. 에스케리카. 거의 다 된 것 같아요. 어서 날개를 펼쳐보세요. 그리고, 눈을 떠, 손길을 느껴요. 그리고. 그리고... 약속을 하는 거예요."


검은 그림자는 한 마족 여성의 손목에 글자를 새긴다.


"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어요. 새 이야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비극이 싹틀 테죠. 밤하늘의 별이 하루를 연주하듯이. 반복될거예요."


"응. 알고 있어. 하지만. 왜 그렇게 되야 하는 건데?"


"그야. 그렇게 정해진 게 우리네들의 운명인걸요. 이 이야기에 행복한 끝은 없도록 예정되어 있으니까."


"그거. 끝이 기쁨은 아닐 거란 얘기?"


"미안해요. 마족 소녀. 하지만 세상은 잔인해서. 네가 인간이던 마족이던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그럼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이야긴 아니겠네. 이 이야기 전체에서. 배드 앤딩이라도 좋은 순간들은 있잖아? 내가 이대로 살았어도 엔딩은 '죽는다'라는 배드엔딩 아니야? <이야기>가 배드엔딩이라서 잔인한 거면. <이야기>가 없는 세상도 잔인한 게 아닐까."


"좋을대로 생각해요. <규칙>을 깨서 복수의 연쇄를 멈추는 선택권은 너와 용사에게 달렸으니까요. 그치만. 너희 둘은 서로를 증오할 수 밖에 없는 상대잖아요. 그걸 이해하세요. 그리고 깨진 <규칙>을 감당해야 할 인물도 너희들이죠."


"알겠어. 뭔가 깨달은 것 같다. 이대로 마왕성에서 빠져나가지만 않으면. 뭐든 해도 된다는 거지? 이제 혼자 남아도 될까?"


"이야기의 <규칙>을 뒤집고 싶은 게 아니었나요?"


"뒤집지 않고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아서."


"행운을 빌어요."


그림자는 그렇게 떠나갔다.


흑수정빛의 에스케리카는 고고한 석좌에 앉아 기지개를 켠다.


앞으로 이어질 무료한 수만 번의 낮과 밤을 맞을 준비를 한다.





#4

성전사의 칼끝이 에스케리카의 목에 겨눠져 있다.


"용사여. 홀린 것인가?"


요정 궁사가 거든다.


"레미. 잘 됐구나. 이대로 여기서 손쉽게 마왕을 없앨 수 있겠지."


암투꾼도 신이 났다.


"휴우, 내일 뒤지는 줄 알았는데. 해피 엔드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야."


마법소녀는 결의에 찬 듯하다.


"정의는 항상 승리하는 법이죠!"


용사는 머뭇거리는 중이다. 어떤 몸짓도 나오지 않는다. 왠지 가시로 얽힌 관에 들어가 있는 기분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있다.


그러다, 한 명.


"레미 씨가 그녀를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도 있을 거 아닙니까. 한 번 얘기를 들어봅시다."


짐꾼이 성전사를 막아섰다.


시간이 생겼다. 왜 결전 하루 전날 성 밖으로 나왔는지.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용사는 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자정까지 단 1분이 남았다. 용사의 얼굴은 가운데 너머로 전부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이내 메마른 음성이 나왔다.


"서약에 정해진 결전일은 언제지?"


암투꾼이 짧게 답했다.


"내일. 아니, 1분 뒤."


"내일이라 함은, 굳이 그 시작 시간에 맞출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렇다고 볼 수는 있겠죠오."


기분이 상한듯 마법소녀가 말끝을 올렸다.


"그렇다면 내일 안으로 내가 처리할게."


그러자, 난동이 난다. 암투꾼은 주춤하고, 성전사는 팔짱을 끼며, 마법소녀는 따지듯 허리에 손을 짚는다.


"자, 잠깐만. 용사. 녀석이 마법이라도 써서 다시 마왕성으로 돌아가면 끝장이라고."


"효율적으로 생각해라 용사여."


"당신. 정의로운 용사가 아니던가요? 하루빨리, 이 악의 결정체를 처형시켜야죠!"


요정 궁사는 이미 활시위를 마왕 쪽으로 겨누는 중이었다. 용사는 무심하게 그들을 제지했다.


"잠깐만. 확인해야 할 게 있어."


그러는 와중에, 에스케리카의 기도가 끝났고,


"무, 무슨 사악한 주술을 쓰려는 거죠? 사탄의 성녀."


"아, 이거. 기도하면 사원에 가도 죽지 않는다고 해서. 한번 해 봤어."


전원이 침묵한다.


"..."





#5

사천왕들은 잿빛 홀에 서있다. 햇빛이 들지 않는 홀에는 마왕과 사천왕 다섯 뿐이다.


"좀 나가 줄래? 혼자 있고 싶어."


사천왕은 계속 서있다.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6

철없던 시절의 에스케리카는 마왕성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말아달라는 사천왕의 간청을 듣고 아무렇지 않았다.


원래 밖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마족의 생태계란 약육강식의 야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여린 마족 소녀에겐 틀어박히는 것이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성의 한 켠에 있는 도서관이 마족 소녀에겐 전부였다. 동물의 학명을 외우고, 선악의 계보를 따라가며. 라플라스의 마녀를 동경하고, 정치의 추잡함을 비소하면서.


"하늘붉은 해파리해면... 변증법... 보호무역주의... 야곱의 사다리..."


그렇게 어른이 됐다.


산속 모든 풀꽃의 꽃말을 알고 있었지만 닭꼬치의 맛은 몰랐다. 혼잣말이 버릇이 됐다.


마왕의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휑한 마왕성의 경계 안쪽 뿐. 나갈 수 있는 것은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기 하루 전부터.


세상이 헛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덧없을 줄은 몰랐다. 마왕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어린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책에서 읽은 정보들로 머릿속은 가득차 있는데. 그걸 증명해줄 현실은 바깥에만 있었다.


실험체가 된 기분.


저 바깥에서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용사>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도.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무감각해졌다.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아무도 없어요..? 사천왕. 대답 좀 해 줘."


사천왕은 석화된 형태에서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마왕으로 사는거, 이제 질렸어요. 여기서 꺼내주세요. 제발."


쾅쾅쾅 하고 성문을 두들겨 보지만, 아무도 없었다.


마족 소녀는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외로웠던 그녀는. 인간의 언어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용사 씨는 어떤 사람일까."


동화책을 읽어나가며 용사가 누구인지 학습한다.


"용사. 멋진 사람이구나."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해 학습한다는 것과도 같았다. 용사는 반드시 이야기의 마지막에 마왕을 죽이니까.


"나. 절대 이 사람이랑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어."


결전 하루 전날. 마왕성을 나가도 좋은 날. 그리고 생애 마지막 날을 외롭지 않게 끝내고 싶었다.


"용사님. 용사님. 죽기 전에 당신께 한 마디만 하고 싶어요."


"토케. 마르헨 슈우."


"인간어로는... 이 싸움. 하지 말아요."


"아니... 여기선 좀 더 대담하게! 반말로 가는거야."


"저기 용사 씨. 화해하는거 어때?"


자신이 왜 마왕이 됐는지. 그녀는 기억하지도 못했다. 거울을 보면서, 좋은 드레스를 고르면서, 어떻게든 운명을 회피할 생각만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악마적이었다.


주어진 운명에 반항하고, 용사의 증오는 완전히 무시했으니.





#7

두 남녀가 어둑한 밤눈에 젖은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겨울이라 해도 그나마 따뜻한 밤인지, 풀벌레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마왕. 이건 내 변덕이야. 무슨 말인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치만 용사 씨의 변덕 덕분에 약 23시간 정도가 남았어."


허리 뒤로 뒷짐을 진 에스케리카의 걸음걸이는 가벼웠다. 그녀는 걷는 도중, 허리를 굽혀본다. 손에서 작은 빛이 흐른다. 원을 그리는 그 빛이 길목의 일부를 감싼다.


"풀꽃을 보는 거야?"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마법을 쓰고 있어. 이곳의 여름 쯤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서."


"북쪽 마을의 여름은 그다지 따뜻하진 않아. 간신히 꽃이 피는 정도지."


"아, 도라지꽃도 있으려나? 난 그게 참 좋아. 이 지역에 많이 난다고 알고 있거든."


"꽃 따위에 흥미는 없어. 그런 것에 흥미를 가질만한 놈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아왔거든."


"나는 용사 씨가 바깥에서 뭘 했는지 정말 궁금한데, 용사씨는 내가 궁금하지 않은 거야? 아주 안좋은 의미지만. 우리, 운명의 상대라고도 할 수 있잖아?"


"궁금하지 않아. 내 어머니를 죽인 용사. 그 용사 파티의 마족 주술사 딸이 마왕이 되었고, 난 그저 널 죽이면 끝이니까."


"그렇네. 그러면 끝이지. 그치만 날 죽인 다음엔?"


"이번 이야기는 아마 동귀어진이야. 끝이란 건 너도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나저나 마왕성 바깥에선 약해진다더니. 이건 고위 마법이잖아."


"응. 고위 마법이지. 이런 곳에 낭비하고는 있지만."


"너, 애초부터 마왕성으로 도망칠 수 있었으면서 도망치지 않은 거야?"


용사의 표정이 잠시 당혹감으로 구겨진다.


"무슨 의도지? 내 동료가 네 목에 칼을 댔잖아! 근데 왜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 있었냐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야?"


"상관 없었어. 어차피, 이야기 속에서 결정지어진 내용은. 오늘 죽는 거야. 만약 거기서 나를 죽이라고 했으면, 난 레미 씨랑 이렇게 산을 오를 수는 없었겠지."


이름을 불렸다. 용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와하하 하고 웃어넘긴다. 손이 다 시려운지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가볍게 뗀다. 


"이봐, 이 산의 여름 풍경은 잘 보이나?"


"잘 보여! 마족의 눈은 밤에 맞춰져 있으니까. 와, 정말 꽃이 많네. 내가 좋아하는 도라지꽃도 보여."


"왜 좋아하는데? 에스케리카."


용사 쪽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증표가 그의 닫힌 생각을 살짝 만졌다. 운명을 회피하려고 휴전을 제안한 줄로만 알았지만.


왠지 마왕은 정말로 이 비극의 굴레를 끊어내고 싶어서 그렇게 진심으로 기도한 것처럼 보였다.


"좋아 할 수밖에 없을걸? 책에서 봤는데, 이 꽃은 화관 끝이 종(bell)이 펼쳐진 모양으로 끝이 오각별 모양으로 갈라지고, 꽃받침도 오각별 모양으로 갈라지고, 열매도 맛있거든. 특히, 개화 초기에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서 별 모양 풍선같지!"


"글쎄. 별 모양이라. 그보단 진짜 별이 좋잖아? 네가 말하는 개화 초기의 도라지꽃이란 건, 별의 대체재 정도라고."


"맞아. 나와서 진짜 별을 보니까 훨씬 좋았어. 아득하고, 밝게 빛나고, 화원처럼 하늘에 펼쳐져 있지. 하지만, 난 별이란 걸 인쇄된 종이로만 봐서, 감흥이 없었어. 이틀 전까지만 해도 화분에 있던 이 꽃을 보면서 그 별이란 걸 줄곧 상상하고 있었거든."


"별을 처음 본다니. 무슨 소리야 그게. 마왕성은 넓잖아?"


"확실히, 울타리로 둘러쳐진 부분은 넓다고 알아. 그치만 난 성 바깥으론 못 나가거든. 울타리가 있는 곳까지 가려고 하면 왠지 발걸음이 멈췄어."


"좋아. 남은 하루 안에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네. 뭘 하던지 간에 다 처음이라 흥미로운 것 투성이일 텐데."


이에, 에스케리카는 슬쩍 미소지으며 도라지꽃 한 송이를 꺽는다.


"무슨 의미지?"


"레미 씨에게 주고 싶어서."


"이제 곧 정상이야. 계단도 막바지고. 거기가 꽃을 주기엔 더 분위기가 날 걸. 물론 거절할 거지만."


"아직 끝까지 듣지 않았잖아? 내가 이 꽃을 좋아하는 이유."


"뭔데."


에스케리카의 자줏빛 눈동자가 빛난다. 왠지 좋아하는 걸 설명하기 직전의 눈빛.


"이 꽃은 꽃말이 정말 예쁘거든."


"뭐길래."


"그건 마지막에 알려줄게."


"뭐가 됐던, 난 받지 않을 거야."


"당신을 용사로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하려는게 아니야, 레미 씨."


"알겠어, 더 큰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거라면 그것도 거절이야."


"그냥 한 마디만 하고 싶은데."


"할 거면 여기서 해. 에스케리카. 꽃을 내밀면서 할 만한 말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쿡쿡 웃는다.


"거절한다며?"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야기>에는 내일이 사망 확정 날짜니까. 이번 이야기는 동귀어진이었거든. 그런고로. 들어는 둘게. 그리고. 아까 화내서 미안해. 잠깐 어이가 없었어."


"그럼 한마디. 시작해도 돼?"


"뭐 그리 뜸을 들이지? 한 마디 뿐이잖아."


꿀꺽, 하고 숨을 고른 뒤. 에스케리카는 입을 뗀다.


"저기, 이런 말. 너무 늦었겠지만."


"고마워... 요."





#8

어느덧 용사와 마왕은 정상 쯤에 위치한 작은 사원에 도달했다.


"이 냄새라면, 새벽 두시가 거의 다 된 것같아."


깊은 새벽 시간. 사원은 불이 꺼져 있었고, 마왕과 용사는 그 앞의 작은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나무 사이로 별이 잔뜩 보이는 그런 자리였다.


"우와아, 정말로 사원이라는 곳에 와도 아무렇지 않네."


"글쎄다. 낮에 왔으면 얘기가 달라졌을지도. 낮에 오지 못해 아쉽긴 하네. 네가 원하는 기도는 못 드릴 것 같다."


"아니야. 밤에 와서 더 좋은 것 같아. 동경하던 별들이 나무 위로 저렇게 빽빽하니까. 봐, 저 쪽에 쌍둥이자리가 보여. 황소자리는 저 쪽. 황소자리엔 파란 빛의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있지. 옛날부터 잘 보이던 별이라서 모든 문명권엔 그 기록이 남아있다고 해."


"그것 참 의미있는 정보네. 비꼬는 건 아니야. 나도 가끔 방향을 가늠할 때면 저 별을 사용했는데, 그 별의 이름을 지금 처음 알았어."


"오, 종이로만 보던 별을 진짜로 보니까. 왠지, 왠지 무서워. 하늘이 이쪽으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


"그래...?"


용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눈은 웃고있지 않았다. 어느새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적대해왔던 인물과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다는 부분이 거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용사는 의문이 들었다. 사탄의 성녀인 에스케리카는 어떻게, 숙적이자 용사인 레미 본인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감히 <이야기>가 정한 틀을 벗어날 생각을 해서 결전 직전에 용사의 고향집으로 올 생각을 했을까.


애초에 용사 본인의 소재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저기, 에스케리카. 갑작스러운 질문이지만."


"뭔데? 시간 없으니까 빨리."


"너는, 나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어?"


이에, 예상치 못했다는 듯. 이전의 새끼고양이 꿈뻑이는 표정을 짓는다.


"용서?"


"그래. 난 아직 좀 힘든 것 같아. 내게 용사라는 운명을 쥐어준 게 바로 에스케리카. 너였으니까."


"용서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어. 이해가 안되는데."


"뭐? 그건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아토... 애초에 용사 씨는 부정을 쏟아낼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어. 저마다 마음속 그릇엔 여러가지 용도가 있잖아, 용사 씨는 적어도 부정을 담아낼 수는 없는 용기였어."


"바꿔 말하면, 내 생각을 하는 동안, 절대로 나쁜 감정은 들 수가 없었단 거냐?"


용사는 픽 웃었다. 억지 웃음이다.


"그래. 난 한 가지 진실만 알고 있었어. 용사라는 존재가 결전의 날 나를 죽이러 올 것이라는 거. 그 전까지는 마왕성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거."


그 말을 듣고 용사는 자신의 안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막아내려 애쓰기 시작했다. 둘 다 이 잔혹한 이야기 속에서 비극의 배역을 받았는데. 자신만이 그 운명을 증오해, 부정을 상대에게 덮어씌웠다.


선한 배역을 받았지만, 악인이 된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워져만 갔다.


"내가 앞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로 정해져 버린 거지. 용사 씨. 레미 씨. 당신... 말이예요."


그렇게 말하고, 에스케리카는 용사의 옆구리를 손으로 감았다.


"그래서 결심했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인데, 어떻게 보자마자 서로 싸울 수가 있을까. 라고. 정말 당신에 대해 한 순간도 궁금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용사 본인은 마왕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이 이야기를 끝내기 위한 목표. 복수극의 끝. 새로운 비극의 바톤을 넘겨주기 위한 피의 마라톤. 마왕 토벌 자체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용사는 그녀를 같은 인격을 지닌 존재로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의 체크리스트 중 가장 마지막 줄 정도의 취급이었다.


"에스케리카."


용사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용사 씨? 어디 아파?"


미안하다는 말을 머금고, 그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이 세계가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거. 알고서 하는 말이지?"


"당연하지. 이미 다 알고 약속해서 마왕이 된 거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어떻게랄까. 당신이 잔혹하다고 하는 이 <이야기>라는 건, 사실 우리의 생보다는 훨씬 희망적이잖아.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던 배드엔딩이던 어떻게든 정해지지만, 목숨은 언제나 죽음으로 배드앤딩이야."


"진짜 바보냐. 너..."


"용사 씨. 아직 엔딩은 오지 않았잖아? 그럼 그 사이엔 계속 행복해도 좋다는 거 아니겠어?"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지 않고 남은 하루를 즐기겠다는 거야? 고작 하루를 위해 너나 나나 16년을 소모해 버렸잖아. 지나간 16년이 아깝지도 않아? 즐길 거면 처음부터 즐겨 버렸어야지. 하루만 남았을 때 즐겨서야, 무슨 바보같은 짓이야."


"그야, 바보가 맞으니까."


"넌 내가 몰랐던 별의 이름도, 꽃의 이름과 꽃말도, 전부 알고 있잖아. 어떻게 네가 바보인 건데."


"분야라는게 있잖아! 상식적으로, 책으로 습득할 수 있는 쪽은 척척박사지만. 나, 솔직히 용사 씨를 대하는 것도 상당히 어렵다고. 그리고 처음부터 나도 많은 걸 알지는 못했으니까. 이미 그걸 깨달았을 땐 너무 늦었기도 하고. 그래서-"


"에스케리카."


"저... 이름을 부르는 건 좋은데, 용사 씨. 좀만 더 가까이 붙어 줬으면 좋겠어. 알아? 마족은 은근히 추위에 약해."


용사는 살짝 왼쪽으로 가 그녀에게 좀더 가까워진다.


"아, 뭐야- 아직 추워."


그녀가 용사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용사도 이내 에스케리카의 옆구리를 감싼다.


"에스케리카. 증오의 연쇄를 끊어 줘서 고마워."


머뭇거리는 용사를 향해, 에스케리카는 묻는다.


"또?"


"내가 너를 죽이려 했을 때조차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그러지 않았다면. 그때 너를 죽였다면. 혹은 네가 도망쳐서 어쩔 수 없게 된 내가 동료들을 이끌고 마왕성을 쳐들어가 네 명을 끊었다면. 마지막 진실을 들은 난, 아마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야. 하하. 그게 나중에 동귀어진으로 변질되어 기록된 거려나."


"또?"


"네가 나를 용서한 것처럼. 나도 너를 용서할게."


에스케리카는 용사를 꽉 껴안는다. 찰나동안의 버둥거림이 있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어느새 눈도 그치고, 소복해진 사원 지붕 위로 동이 트고 있었다.




 

#9

해가 중천이다. 


사원에서 사람이 나올 시각이 되자, 문이 열렸다.


에스케리카와 용사 레미는 같이 기도를 드렸다. 서로의 죄악이 이해의 과실로 변하고, 후회는 사라졌다. 잔혹한 운명만이 앞에 남았다.


"이제 우리 둘 다 죽을 시간이 열 시간도 남지 않았어. 이제 어쩌게 에스케리카. 이 바보야."


"그럼, 확 <이야기>에서 벗어나 보는건 어때?"


터무니없는 대답. 그렇지만 끝내주는 해결책이 아닐 수 없다.


"뭣, 가능은 한 거지?"


에스케리카는 포털을 열어 마왕성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엔딩 시점을 영원히 미래로 던져 버리면 돼. 마왕의 권능이라면 가능한 일이야."


"다시 한 번 물을게. 가능은 한 거지?"


"엔딩 중에 해피 엔딩 아니면 배드 엔딩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오픈엔딩... 그러니까, 엔딩이라는 개념에는 당연히 열린 결말도 포함이니까."


"그래서, 준비물은?"


"내가 준 꽃. 그게 오픈 엔딩으로 이야기 틀을 바꾸는 마법의 재료가 될 거야."


"뭐야. 그 꽃. 네 마왕성에도 한 송이 있었다며. 진작에 할 수 있었던 거 아냐?"


"아쉽지만. 좀 복잡해. 그 꽃을 주문에 담으려면,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해. 추측건대, 나를 성에 가둬둔 이유가 이 '의미'라는 것을 찾지 못하게 방해해서 이 세계의 엔딩을 고정하려는 의도같아. 뭐. 나같은 초슈퍼하이퍼 천재 마왕님에게, 멋지게 파훼당했지만."


"의미라..."


"가령, 레미 씨가 내 꽃을 정말로 안받아 줬다거나. 이 꽃의 꽃말이 '소망'과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는 도라지꽃이 아니었다던가. 레미 씨가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던가. 내가 당신을 증오하면서 어른이 되었다던가. 그런 가능성 세계에서는 이 꽃에 '의미'가 담기지 않았겠지?"


"뭐야. 그럼, 그때부터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는 꽃을 나에게 줬던 거였어? 첫날 만난 남자한테 그런거야?"


"일종의 큰 그림이라고나 할까. 훗."


"뭐. 아무래도 좋아. 이제 <이야기>는 사라지겠네."


"응. 잔혹했던 <이야기>는 사라지고, 영원한 사랑과 소망으로 표상되는 열린 결말로 나아가겠지."



comment : 이대로 열린결말이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