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소설에 빙의했다. (5~9화)


6화 무언가 잘못되었다. (공백 포함 5911자, 공백 미포함 4329자)


“저야 좋죠.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요.“


일이 생각 이상으로 잘 풀린다.


오히려 저쪽에서 내게 사냥을 제안하다니.


‘..그래도 1회차에서 쌓은 연을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나 보네.’


좋은 현상이다.


“음.. 일단은 어디 물이 있는 곳 근처로 가보시죠. 5일 동안 먹을 식수는 필요할 테니까요.”


“아, 네.”


저벅. 저벅.


우리는 물이 존재하는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요수초를 얻은 샘이 있긴 하지만, 자칫 그러다가 한가인이 나보다 먼저 샘에 가게 된다면 낭패이니 그곳을 말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식량으로 쓸만한 건 본 적 있으세요?”


“..아마 여기 나무에 열매가 몇 개씩 달려있을 거에요. 그걸 따먹으면 되겠죠.”


“와, 그 사이에 그런 것까지 관찰하신 거예요? 눈썰미가 좋으신가 봐요.”


‘..소설로 직접 써서 아는 거긴 한데..’


대수림.


현재 우리가 위치한 곳이며 말 그대로 거대한 숲.


이 숲은 의외로 살아남기가 좋은 장소다. 


몬스터들만 없었다면.


애초에 이곳은 ‘생존’을 위한 곳인 만큼, 물은 물론이고 식량도 부족하지 않다.


이 대수림에 오른쪽에 있는 얕은 강과 곳곳의 샘.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과일들.


적어도 의식주 중 ‘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 관찰력은 좋은 편이라서요. 아, 그러고 보니까 통성명도 아직 안 했네요. 천의찬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가인이라고 해요. 스물한 살이고 지구에서는 대학생이었어요.“


”스물여섯이고 대충 글 쓰는 일을 했었습니다.“


“음..그러면 오빠라고 부를게요! 오빠는 말 편히 하세요!”


“..그럴까?”


우리는 다시 한번 통성명을 하고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일 회차와는 달리, 오히려 한가인 쪽에서 대화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니 중간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또다시 친분을 쌓아올리며 얼마나 이동했을까.


“오빠, 저거 강 아니에요?”


“..맞는 것 같네.”


우리는 강이라고 하기는 뭐한, 얇은 물줄기를 발견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다고 해야하나?


‘..이런 건 쓴 적이 없는데.‘


찰랑-


손을 대어보니 분명한 물이다.


스읍-


나는 손으로 물을 떠 한 모금 마셔보았다.


시원하고 청량했다.


뭐, 튜토리얼의 맵을 직접 그리거나 한 건 아니니 자연스레 생겨난 것인 듯하—


[요정들의 물을 섭취하셨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뭐!?’


물이 나의 목을 넘어가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인아, 너도 마셔봐.“


”…? 네.“


한가인도 물을 마셨고,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빠! 이거 스탯이 오르는데요!?”


..뭐지…?


나는 이런 걸 쓴 적이 없는데?


‘영약이다.‘


그것도 희귀한 편에 속하는 스탯을 올려주는 영약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생겨났다고?


내가 직접 설정한 게 아닌데도?


‘말도 안 돼.’


이런 건 개연성 수정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생겨날 게 아니란 말이다!


왜 이런 게 나타난 거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가장 가능성 있는 건 역시..‘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것으로 추측되는 절대신 한가인.


하지만..


’왜?‘


정말로 그녀가 이걸 만들었다면 왜?


한가인을 돕고 싶었다면 이런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많다.


내가 속으로 당황하고 있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의 @&%₩확인.]


[#&@&%&%&@]


[모든 스탯이 추가로 1 상승합니다.]


”..무슨..!“


그만 육성으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누가 그러지 않을까.


저런 ‘망가진 듯한’ 문자들이 떠오르는데!


하지만 나를 더욱 놀래킨 건 다음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효과는 회귀로 초기화되지 않습니다.]


싸아아-!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황급히 한가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저 밝게 웃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뭐냐…!‘


회귀로 초기화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지하의 그들에게 회귀가 감지될 텐데..!!


[이 효과는 지하 삼 층. ’외신들‘에게 감지되지 않습니다.]


“…!!!”


***


외신(外神)


말 그대로 외계의 신들을 뜻한다.


다른 차원의 강대한 창조신.


또한 다른 차원들을 침략하는 악의 무리.


그들은 아주 오래전, 이 세계를 침략했고 패배했다.


그렇기에 이 탑의 '지하’에 갇혀있는 것이지만..


‘계약자들로 상층에도 영향을 미치지.‘


이 탑 안에는 놈들의 계약자들이 있다.


놈들의 사악한 힘을 다루는 악당들이.


’그리고 나는 그놈들을 에피소드별 악당으로 해서 스토리를 진행시켰고.’


그 외신들은 한가인을 지독히도 싫어하며 증오한다.


그 이유는 후반부에나 가서 밝혀지지만, 아마 놈들이 가장 죽이고 싶은 인간을 고르라고 하면 그녀가 될 것이 뻔할 정도.


그렇기에 회귀를 발설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다.


회귀는 그놈들이 그녀를 인식하게 해주는 증표나 다름없으니까.


일정 수준 이상에 달하는 이들은 회귀를 감지할 수 있다.


그 수준이 그리 높지도 않다.


신의 사도나 천사 정도만 되어도 회귀를 알아챌 수 있으니까.


다만 외신들이 머무는 지하는 특수한 공간이기에 알 수 없는 것일 뿐.


‘..그래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거지.’


만약 회귀라는 것을 외신의 계약자들이 알게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시간이 되감기는 게 아니라 미래에서 얻은 힘이 과거로 움직인다면…외신들에게 들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 기연을 숨길 수가 있다니.


‘..그 암 덩어리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건 좋지만.. 어떻게?’


절대신이 이런 짓을 했을 리가 없다.


기연을 한가인에게 주지 않고 내게 바치다니.


절대신은 오히려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나를 증오해야 정상이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작가의 소설에서 작가가 모르는 내용이 있다고?


“…오빠?”


한가인이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평온한 체 했지만, 사실은 아직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라니..’


머리가 복잡하다.


’정리해 보자.‘


..절대신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그 과정에서 개연성의 부족이라는 명목으로 세계가 수정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언가’가 힘을 행사해 이런 변화들을 더 만들어냈다.


‘이게 맞나..?’


..알 수 없다.


이것들은 그저 추측일 뿐.


‘..어차피 이 상태에서 더 알 수 있는 건 없어.’


진정하자.


..일단은.


 탑을 오르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가보자.


‘..젠장, 쉽지만은 않다는 거지?‘


하하핫.


그래.


차라리 좋다.


너무 쉽기만 한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지.


‘..어디 한 번 해보자.’


지금은 그저 미약한 인간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네놈의 정체를 밝혀주마!


“뭔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응? 아냐, 그냥 이런 게 다른 곳에도 있나 해서.”


“다른 곳을 찾으러 가볼까요?”


“…글쎄. 일단은 여기서 쉬자.”


철푸덕-!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근처의 나무에 몸을 기댔다.


한가인도 나의 눈치를 보더니 땅에 편한 자세로 누웠다.


“으아아…”


긴장이 풀린듯한 신음소리.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아, 너무도 많은 일은 겪은 그녀이기에 저런 행동이 이해되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피식하며 헛웃음을 내뱉고는 상태창을 띄워보았다.


‘상태창.‘


어차피 스킬은 같다.


스탯만 확인해보니 꽤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근력:10 민첩:10 체력:8 지력:10 마나:4]


높다.


‘평범한 인간’의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치다.


오죽하면 튜토리얼을 끝내는 5회차의 그녀도 이 정도에 닿지 못했을까.


그러나..


‘부족해.’


무언가가 개입한 이 세상에서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숫자였다.


저 물 같은 새로운 히든 피스가 얼마나 더 있을까.


그리고 저 고층의 등반자들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럴 리가 없지.’


고층의 이들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것들이다.


47층의 화가는 용을 그려 탑에 현신시키고, 51층의 인류 최강자는 튜토리얼에서 세계수를 갈랐다.


그런 이들이 새로운 히든 피스까지 먹었다면 얼마나 강해졌겠나.


더욱 더.


’강해져야만 한다.’


저벅. 저벅.


“하아.”


어째…그냥 식수나 찾아보려고 했던 건데 일이 복잡해졌다.


오히려 좋아 같은 상황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이렇게 되면.. 그 눈을 가진 여자를 찾아야 되겠는데.‘


저벅. 저벅.


이럴 줄 알았다면 '그녀'의 행적을 더 자세하게 서술해둘 걸 그랬다.


대략적인 위치라도 알면 찾아가볼 텐데.


’어차피 튜토리얼이 끝나게 되면 만나니까 상관은 없지만..‘


그녀의 성격이 문제가 될텐데 걱정이다.


저벅. 저벅.


..아까부터 뭐지?


“오,오빠..발소리가..!”


나한테만 들리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단검 들어.”


“네..?”


“정신 붙잡아. 세상이 이 모양인데 사람이라고 멀쩡하겠어?“


설령 악의가 없다고 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선동가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까.


더구나 한가인의 외모.


너무나 뛰어난 그것이 더욱 위험을 증폭시킨다.


저벅. 저벅.


점점 소리가 커진다.


‘한 명이 아니다.‘


들리는 것에 의하면 놈들은 다수.


꿀꺽-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물 찾았습니다~!“

“다행히 금방 발견했네요.”

“여기에 거점을 만들어도 되겠는데요?“


마침내 놈들이 우리와 마주쳤다.


‘..열 하나. 아니, 열둘인가.’


꽤나 많은 수.


이내 놈들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다른 분들이 이미 계셨네요…?“


무리 중, 한 여자가 우리를 보고 읊조렸다.


그런 여자를 본 나는.


‘…찾았다.‘


환희에 겨워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긴 갈색의 머리카락.


꽤나 큰 키.


아름다운 외모.


무엇보다 저 금색의 눈.


틀림없다.


[무한 회귀 능력을 얻었다]의 조연.


'오딘의 눈'을 가진 자.


그리고 나를 모티브로 과거를 설정해놓은 여자.


최아린이다.


‘..운이 좋네.’


아니, 운이 맞나?


이것또한 무언가가 개입한 결과가 아닐까.


’..아무래도 좋다.‘


저 여자는 함정이라 해도 가져야만 하니까.


그때, 한 남자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우리에게 말했다.

 

우락부락한데다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


“하하. 이곳을 먼저 발견하신 분들이신가 보군요. 저희도 물을 좀 써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나름 정중하게 내게 요청했다.


‘..흐음. 왜 이렇게 신사적이지?’


최아린의 앞이어서 그런 건가?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곧 놈이 한 행동의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의 뒤쪽으로 가있는 눈동자.


내 뒤에는 한가인이 있었고, 놈의 눈에서 보이는 건.


명백한 탐욕이었다.


빠직.


’저딴 놈이 한가인에게?‘


그런 탐욕은 놈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내게 한없이 역겹게 받아들여졌다.


놈은…살인자니까.


그것도 이 탑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람을 죽인.


‘어디서 추잡한 살인자 따위가 감히..’


아무래도 한번 손을 봐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가인은 놈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나의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크..크흠. 자~! 모두 충분히 목을 축여두십시오!”


남자가 머쓱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무리에 있던 최아린의 얼굴에 역겹다는 표정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졌다.


하긴 누가 그러지 않을까.


현실에서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저러는데.


물론 놈이 살인자인 걸 알고도 같이 있는 최아린도 정상은 아니지만.


‘..맘에 드는데?’


그렇지만 살인자까지 이용하는 행동이 내게는 아주 맘에 들었다.


탑은 평화롭지 않고, 저런 행동은 경악스러운 것이 아닌, 뛰어난 기지를 보인 것뿐이니까.


”하하.“


최아린이 한가인을 바라보았고, 나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다음에 할 행동을 알 수 있었기에.


최아린.


그녀의 스킬은 [마모된 오딘의 눈].


무려 S+급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타인의 상태창을 관측 하는 것.


그래.


그녀는 한가인의 회귀를 알아챌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


한가인을 지켜보던 눈에서 흔들림이 일어났다.


혼란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


무한 회귀라는 스킬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에 비하면, 그리 큰 반응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번에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흠. 격이 높은 존재가 아니면 못 피하니까 내 상태창도 보이겠지.’


어차피 회귀는 발설할 수 없으니 상관없지만, 그래도 내가 동반 회귀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지 않게 입을 좀 막아놔야겠—


”꺄아아악-!!“


돌연, 나를 지켜보던 그녀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투두둑. 투둑.


피눈물이 땅을 적신다.


“꺄아아악-!!”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이게 무슨 일이지?


“무슨!?”


저런 반응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관측이 실패했을 때.


아니, 그때도 이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꺄아아악! 아린 씨!!”

“네놈!! 무슨 짓이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7화 최아린. (공백 포함 8248, 공백 미포함 6058자)


성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이룬 삶이라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인생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최아린은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입사해 빠른 승진을 거친 자신의 삶이.


바로 성공한 삶이라 생각했다.


'꿈도 좋지만, 그 꿈이라는 걸 위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건 아니지.’


화가가 되고 싶다고 배를 곪으며 붓을 사는 그런 인생은 질색이다.


꿈은 그저 꿈.


우리는 현실에서 먹고 현실에서 잔다.


현실에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꿈은 허울 좋은 말로 몽상가를 포장한 단어일 뿐이야.’


그녀는 꿈을 좇으며 살아가는 이들을 혐오했고,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지독한 현실주의자라고 평가했다.


그녀의 부모는 사고로 죽기 전까지 그녀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아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았다.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다.


퍼엉-!


촤아악-!


자신이 처한 상황을.


“..사람이..죽었어?”


사람의 머리가 터져나간다.


거짓이 아니다.


쓸모없다고 여겼던 꿈이.


현실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말도 안 돼!!“


저런 게 현실일 리가—


투둑-!


자신의 발아래에 고인 피 웅덩이에 파문이 일어났다.


그녀의 머리에서 떨어진 식은땀이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하..하.“


그 이후의 잠깐은 그저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이딴 것이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싫었으니까.


그 때, 저 멀리서 몬스터들이 진격해왔다.


그런 광경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이곳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하.“


무엇보다 꿈 같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현실다운 현실이었다.


자신이 겪은 적이 없는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는.


진짜 현실이었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이게 현실이라면 지금 해야 할 건..”


도망치기.


냉정하게 생각해서 자신이 저런 괴물과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혼자서 도망치면 그것도 위험해.”


이 숲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튜토리얼이라는 것이 끝날 때까지 몬스터들을 만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자신 대신 싸워 줄 사람들이, 적어도 같이 움직일 사람들이 필요하다.


휘익-!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도망치는 이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 앞으로 돌진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적은 수는 아니었다.


”..하. 굳이 몬스터들이랑 싸우러 가는 멍청이들은 뭐야.“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


타다다닥-


아린은 한 발 먼저 도망친 사람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같이 무리를 꾸릴 사람들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말라 비틀어진 놈은 제외. 뚱뚱한 놈도 제외.”


..이런.


생각보다 멀쩡한 놈들이 별로 없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가.


지금 저 뒤에 가있는 놈들은 앞에서 내려오는 먼지만 보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니까.


고작 먼지만 보고도 무서워서 도망친 떨거지들.


“..아까 스킬이란 게 주어졌다고 했었나?”


만약 좋은 스킬이라면.. 굳이 도망쳐야 할 이유도 없을 테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뛰며 상태창을 불러냈다.


‘상태창!’


띠링-!


「이름: 최아린

 종족: 인간

 성별: 여성

 나이: 26


직업: 무직

스킬: 오딘의 눈 (S+)


스탯: 근력:4 민첩:4 체력:4 지력:10 마나:0


설명: 당신은 매우 뛰어난 두뇌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사가 어울리는 훌륭한 인재입니다.」


분위기에 맞지 않는 명랑한 효과음과 함께 나타나는 상태창.


‘S+..!?’


그것의 내용을 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당첨된 복권임을.


「오딘의 눈 (S+)

타 생물체의 상태창과 짧은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관조하려는 생물체를 시야에 담고 능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순간 스킬이 발동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설명을 읽자마자, 저 앞의 사람들을 눈동자에 담았다.


동시에 스킬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세웠다.


[스킬 발동]


[오딘의 눈]


빠직-


너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능력을 써서일까?


눈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


그녀는 그 아픔에 무심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통증이 사라졌고, 그녀는 마침내 눈을 떴다. 


“..이건!!”


푸른 상태창으로 가득 메워진 세계.


무수히 많은 정보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새로운 세상.


그것이 그녀를 반겼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된 기분이었다.


“..하..하..“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성.


잠시 멍하게 있던 그녀는.


짜악-!


자신의 뺨을 때리며 고개를 휘저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아무리 랭크가 높아도 이건 전투에 도움되는 스킬이 아니다.


여유를 부릴 시간 따윈 없다.


‘고랭크의 전투 스킬! 아니라면 힐러라도..!!’


그녀의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였다.


‘..손성윤, c급 스킬. 박상철, d+급 스킬..’


인재가 없다.


“…도망치는 머저리들이 다 그렇지!”


타닥-


그녀는 뒤로 도망치던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 앞에서 뒤늦게 달려오는 이들을 관조했다.


“..이놈도 꽝. 저놈도 꽝…”


진짜 s+급이 높기는 한가 보네.


참 빌어먹게도…!


“어딘가에 괜찮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지..!!”


그녀는 계속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몇 명이나 관찰했을까.


마침내 그토록 찾던 상태창이 떠올랐다.


그녀가 원하던 사람의.


「이름: 김동건

 종족: 인간

 성별: 남성

 나이: 31


직업: 무직

스킬: 전투의 감각 (B+)


스탯: 근력:6 민첩:6 체력:6 지력:4 마나:0」


또한.


[설명: 지구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독이 든 성배라고 했었나요?]


더 없이 위험한 사람의 상태창이.


두근-! 두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까.


이렇게나 충격적인 설명을 보았는데.


”…살인자.“


편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거친 인상과 어울린다.


스킬도, 설명도.


‘B+…라.’


높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높은 랭크다.


아무리 살인자라고 해도 함께할 가치가 있다.


‘왜..하필 저런 놈에게 좋은 스킬이..’


어쩔 수 없다.


..현실을 부정해봐야 좋은 일은 없고, 그녀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마주한다면, 그 상황을 차악으로 바꿀 방법을 모색할 뿐.


‘일단 지금 당장은 괜찮아. 쾌락 살인마가 아니라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혼란스럽다고 해도 이곳에는 수천 명의, 어쩌면 만 단위의 사람이 모여있다.


그런 곳에서 대놓고 살인을 하지는 않을 터.


‘..괜찮을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살인마와 함께하는 일은 꺼려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괜찮지 않아도 별수가 없다.’


아무리 걱정된다고 해도 목숨이 달려있기에, 그녀의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또한 이것이 현실적으로도 맞는 결정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되어서 노리개가 된다고 해도.. 죽는 것보단 낫겠지.’


..침착하자.


지금 해야 할 건 최악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최선의 길을 찾는 것.


그리고 그 최선의 길은, 저 남자를 이용해 살아남는 것이다.


마침 이 아름다운 몸뚱아리가 있으니 호감을 사는 건 어렵지는 않으리라.


고심을 마친 그녀는 뒤쪽에서 뛰어오는 김동건이라는 남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에게 소리쳤다.


“저기요!!”


“..?”


그는 아린이 내지른 소리에, 발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 고블린들을 상대하려면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같이 움직이시지 않겠어요, 오빠?“


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는 잠시 멈춰서 아린을 바라보았다.


아린을 흝어보는 끈적한 눈빛.


“좋습니다…같이 가시죠.”


이내, 그는 흔쾌히 그녀의 요청을 수락했다.


필시 그녀의 외모를 보고, 음심을 품은 것일 테다.


한편, 그들의 대화를 들은 다른 사람들은 잠시 눈치를 보더니, 그들의 무리에 끼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저..저기. 저도 같이..”

“방어 스킬이 있습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하하. 사람은 많을수록 좋겠죠.”


그런 사람들에 반응에, 남자는 애써 웃으며 그들을 받아들였다.


‘다행이네.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면 적어도 나를 덮치지는 못하겠어.’


일이 잘 풀려간다.


그렇게 그들의 무리에는 대략 열 명의 사람들이 더 합류했다.


그들은 서로 통성명을 한 후, 일단 고블린들에게서 몸을 피했다.


타다다닥- 타다닥-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더 이상 괴물들이 시야에 잡히지 않게 되었다.


‘좋아, 그러면 이제 뭘 해야 하지?’


..생존.


튜토리얼의 통과 조건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은 꼽으라 한다면 단연 식량과 물.


”여기 아무나 식량 같은 걸 갖고 계시거나, 찾은 분 계신가요?“


그녀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살인마만이 의견을 내놓았다.


”음. 아마 고블린들의 살을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능성은 있지만, 너무 위험하다.


‘..식량이 있을 만한 곳이라..’


이곳은 숲이다.


숲에서 식량을 확보하는 방법은..


”…열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고 결국 나무마다 맺힌 탐스러운 열매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행들은 그제서야 아!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흠. 그럼 제가 나무를 타서 열매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이 정도면 그냥 나무를 세게 치기만 해도 떨어질 것처럼 보이네요.”


역시나일까.


퍽-!


후두두둑-!


나무를 치니 열매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신기한 열매네요..”


괴상한 생김새를 가진 열매.


그것들을 취하니 곧 시스템이 요목과라는 이름을 알려주었다.


아삭-!


한 입 베어 무니,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맛이 낫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귀중한 식량이었다.


아린이 속한 일행은 어느 정도의 열매를 챙긴 후, 마저 식수를 찾기 위해 이동했다.


그리고 그동안은.


‘…역겨워.’

”와 정말 대단하세요!“


”하하.. 이 스킬이……“


살인마의 치근덕거림이 이어졌다.


자신이 나이가 더 많다는 점을 들먹여 말까지 놓는 꼬라지가 역겹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맞장구 쳐주되 몸을 가까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남자의 속이 들끓었다.


‘아 x발. 넘어올 것 같으면서도 안 넘어오네. 이래서 똑똑한 년들이 싫다니까.’


쩝-


‘하아.. 얼굴은 반반한 게 많이 놀았을 것처럼 생겨서는.. 사람만 적었으면 그냥 덮쳐버리는 건데.‘


그러나 아린은 그의 생각이 어떻든,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십 분 즈음이 지나고.


그들은 마침내 계곡과도 비슷한 시냇물을 발견했다.


“물 찾았습니다~!“

“다행히 금방 발견했네요.”

“여기에 거점을 만들어도 되겠는데요?“


..범상치 않은 물이다.


물은 생물이 아니기에 상태창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평범한 물이 아닐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건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자, 두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럭저럭 훈훈하게 생긴 남자 하나와 질투가 생길 만큼 예쁜 여자 하나.


”..다른 분들이 이미 계셨네요…?“


아린이 말을 내뱉자, 살인마가 그들에게 물었다.


“하하. 이곳을 먼저 발견하신 분들이신가 보군요. 저희도 물을 좀 써도 되겠습니까?”


꽤나 정중한 물음.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당연하게도 아름다운 여자에게 향해져 있었다.


“물론입니다.”


남자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여자는 겁을 먹은 듯 남자의 뒤로 숨었다.


‘..원숭이 같은 놈.’


아직 일행이 아닌 사람한테도 저럴 정도라니.


이러다간 무슨 사달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역시 튜토리얼이 끝나가면 때를 봐서 죽이는 게 나으려나.’


밤에 보초를 설 때, 몰래 잠을 자는 그를 찾아가 그를 죽이고, 대충 웃을 찢어 자신을 덮치려 했다고 거짓말하면 그만이다.


아니면, 저 멀쩡해 보이는 남자를 끌어들여 죽여도 되고.


‘..저 사람들은 멀쩡하긴 하려나.‘


확인해보자.


후우-


우선 여자부터.


스킬을 발동하겠다는 의지를 품는다.


찌릿-! 찌릿-!


’..윽.‘


어째선지 아까 많은 대상들에게 스킬을 쓴 때보다도 더 큰 고통이 찾아왔다.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야.‘


1초. 2초. 3초.


고통은 점점 줄어갔고, 마침내 그녀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띠링!


「이름: 한가인

 종족: 인간

 성별: 여성

 나이: 21


직업: 무직

스킬: 무한 회귀 (EX)


스탯: 근력:4 민첩:5 체력:4 지력:6 마나:0


설명: 무한한 회귀의 능력을 가진 회귀자입니다! 현재는 한번 회귀한 상태로군요!」


‘..뭐!?‘


[설명: 무한한 회귀의 능력을 가진 회귀자입니다! 현재는 한번 회귀한 상태로군요!]


‘회귀자…?’


“….”


회귀자라는 말도 나오지가 않는다.


어떤 금제라도 걸려있는 건가?


“..하..하.”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있을 수가 있지?


듣도보도 못한 EX의 등급.


..저런 게 가능은 한 건가?


‘차라리 상태창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겠는데.’


..만약 저 능력이 사실이라면..


절대로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 그녀에게 찍혀 회차마다 죽어나가는 건 사양이니까.


..잠깐.


’그러면 저 회귀자와 동행하고 있는 남자는 뭐지?‘


..단순히 선한 사람?


그게 아니면 엄청난 스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스킬 발동.’


화악-!


신안(神眼)의 힘이 남자를 감싼다.


이제 곧 남자의 상태창이 떠오를 것이다.


그래, 그랬어야만 했다.


그런데..


푸확-!!


시스템의 효과음이 아닌 불길한 소리.


그런 소리가 그녀에게 들려왔다.


’…평소와 소리가 다르네?‘


무슨 일이 일어난—


투둑.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어?”


주르르륵-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피눈물.


곧 엄청난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꺄아아아악!!“


띠링!! 띠링!! 띠링!!


[위대한 존재@&%₩!!!!]

[@&%₩@&%₩!!]

[@&=%+-₩@]


[능력의 사용이 불가합니다!!]


갑자기 폭주하는 시스템.


아린은 그런 시스템과 함께 느껴지는 격통에 눈을 감았고.


풀썩-!


이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


“으…여기는..?”


푸르른 하늘과 그것을 가리는 나무들.


막 깨어나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것들이 비쳐지기 시작했다.


‘..쓰러졌던 건가?‘


지끈-! 


“으윽..”


머리가 깨져버릴 듯한 두통.


목이 마르다.


“..열매를 저기다 쌓아놓은 건가.”


솟구쳐 오르는 갈증에, 그녀는 근처에 놓여있는 요목과 하나를 집어 먹었다.


이런 끔찍한 음식이라도 먹어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가 어쩐지 서글펐다.


“하아..”


무언가를 먹고 나니, 두통이 금세 가셨다.


요목과가 생물들을 편안하게 한다더니 그 효과인 듯싶었다.


“왜..이런 상황이 된 거지?”


아. 그래.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그 기괴한 문자들..‘


싸아아-!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온다.


정말 끔찍했던-


“우웨엑!!”


투두두둑.


“허억…허억.”


그 광경을 생각하니 구역질이 났다.


결국 한바탕 토악질을 한 이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그건 대체 뭐였지..?”


..떠올리기도 싫다.


그렇게 그녀가 고개를 휘저으며 몸부림치던 그때.


“어? 여기 아린 씨 일어나셨어요!!”


일행 중 하나가 그녀의 상태를 보고 소리쳤고 잠시 후, 사람들이 그녀에게 몰려왔다.


”아린아! 괜찮은 거냐!?


물론, 그들 중 가장 먼저 달려온 건 역시나 살인마였다.


얼핏 보면 일행을 아끼는 리더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기절했다 깨어났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몸을 훑어보는 눈빛이 그의 됨됨이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네.. 다행히 몸은 멀쩡하네요. 제가 왜 쓰러지게 된 건지 아시나요?“


“아! 마침 놈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분명 음흉한 짓거리를 저질렀겠지.”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뒤쪽으로 크게 소리쳤다.


“네놈들이 결백하다면 빨리 와라!!!”


…놈들?


‘설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있겠어.’


하지만 이곳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꿈이 아니었고, 곧 ’놈들'이 찾아왔다.


”아…아.“


스킬을 쓰려다가 실패한 그 남자와 회귀자.


”아린아. 혹시 이놈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하진 않았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놈들은 최악의 상대였다.


남자는 불평하며 아린에게 고개를 돌렸고, 물었다.


”아린 씨. 제가 무슨 수작을 부렸습니까?“


그러면서 그가 짓는 푸근한 미소가.


”아아..아.“


마치 악마의 미소처럼 느껴졌다.



8화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꺄아아악! 아린 씨!!”

“네놈!! 무슨 짓이냐!!”


최아린이 쓰러진다.


그것도 피를 뿜으며.


“..하핫.”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오,오빠..?”


조심스레 나를 올려다보는 한가인.


나도 영문을 모르겠는데 어쩌라는 걸까.


“무슨 짓을 한 거냐!!”


살인자 놈이 전투 자세를 취하며 내게 소리쳤다.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설정이어서 그런걸까, 전투를 돕는 스킬이 있어서 그런 걸까.


꽤나 형태가 잡힌 듯한 자세였다.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 그 말을 믿으라고!? 아린이가 너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쓰러졌는데!? 정신을 건드리는 스킬이라도 있는 거겠지!!”


“그런 힘이 있으면 당연히 당신한테 쓰지 왜 저기 여성 분에게 쓰겠습니까.”


정론이었다.


정신계 능력이 있고, 저들을 해칠 마음을 먹었다면 그 능력을 사용할 대상은 가장 위험해 보이는 놈.


바로 저쪽의 살인자였겠지.


“그리고 애초에 저분이 깨어나면 물어보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뭘 믿고 그때까지 기다리지? 네가 무슨 수를 쓸 줄 알고..”


“…그럼 어쩌라는 거죠?“


내가 반문하자, 그는 저열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그쪽의 여자를 넘겨라. 대충 인질인 셈 치지. 네가 이상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무사할거다.“


빠직.


’….x발‘


저 놈이 한가인을 거론하자 화가 솟구쳐 올랐다.


왜일까.


‘네깟 놈이 건드려도 될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만들었다.


내가 설정했고 내가 창조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란 말이다.


‘개 같은 놈이….!’


고작 삼류 악당 놈이 범접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참자..!’


참아야 한다.


화를 내면 안 된다.


만약 몸 밖으로 화를 표출한다면.


저놈을 이 자리에서 으깨버릴 것만 같으니까.


‘…진정해야 한다. 굳이 한가인 앞에서 힘을 쓸 이유는 없다.’


나중에 최아린과 말을 맞춰 죽이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하. 차라리 놈이 먼저 덤벼온다면 좋을 텐데.


‘..움직이지는 않나.’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쉽네.


“그건 안 될 것 같군요. 남자들이 드글대는 무리에 가인이를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 네놈들을 못 믿겠다는 말.


”이 x끼가..!!! 그럼 너희들이 무언가를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하. 비약이 심하시군요. 저희 입장에서는 당신들을 만나자마자 웬 여자가 피를 뿜고, 험악하게 생겨먹은 인간이 동료를 넘기라고 하는데 따르겠습니까? 오히려 그쪽에서 흉계를 꾸미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ㅇ—”


그때, 나와 살인마 간의 언성이 격해지자 놈의 무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와 말을 끊었다.


“저분의 말도 트, 틀리지는 않은 거 같은데 그, 그냥 옆에서 관찰만 해도 되지 않을까요?”


뚱뚱한 체형의 안경을 쓴 남자. 


분명 세계수의 안에서 보았던 놈이다.


이름이..뭐였지?


‘손성윤이었나?’


뭐,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상관은 없겠지.


‘놈도 자기가 원해서 나온 것 같지는 않고.’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니, 일이 터질까 노심초사하는 상태였다.


놈은 아마 등 떠밀려 나온 놈일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괜찮겠죠.“


놈의 말에 살인마도 순순히 뜻을 굽혔다.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놈이기에 내린 결정이었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살인마는 나를 한번 째려보고 무리로 돌아갔다.


…분수도 모르는 주제에.


“오빠… 괜찮으세요?”


내가 잠시동안 멍하게 있자, 한가인이 걱정된다는 듯 말을 걸었다.


자신이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면서도, 걱정스러워하는 눈치.


“멀쩡하니까 걱정 마. 그냥 약간 피곤해서 그런 거야.”


나는 얕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담- 쓰담-


“앗..”


그녀는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한 듯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모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되었다.


‘스킨쉽에 관대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지금 회차에서는 아직 만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뭐, 친밀도를 쌓으려고 한 행위이고, 선만 넘지 않는다면 문제 될 일은 없을 테다.


그녀도 내게 호감이 없지는 않을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잠시동안의 휴식을 즐겼다.


그 동안은 아까의 말싸움이 무색한 듯, 적막만이 이어졌다.


다만, 살인마 놈의 시선이 느껴져 불편하기는 했다.


‘스탯이 올라가면서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게 이런 때는 안 좋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웅성. 웅성.


어느샌가 사람들이 모인 장소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살인마 놈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네놈들이 결백하다면 빨리 와라!!!”


적대감이 흘러넘치는 목소리.


거참. 


진짜로 뭘 한 것도 없는데 미움만 받네.


“하핫..”


놈의 목소리가 들려온 지점으로 발을 옮기니, 그 부근에 있던 이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아린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얼굴이.


참 보기가 좋았다.


”아린아. 혹시 이놈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하진 않았냐?“


살인마 놈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나는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나도 왜 그랬던 건지 궁금하긴 하다만..‘


저 두려움이 서린 얼굴만 보아도 내가 관여되어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의뭉스럽다.


’진짜 왜 그랬던 거지?’


최아린의 능력은 모든 이들에게 통하지는 않는다.


저 위의 인류 최강자만 보아도 그렇고, 탑의 10층마다 존재하는 보스몹에게도 무용지물이다.


능력이 통하는 조건은 격이 높은 존재가 아닐 것.


달리 말하자면 격이 높은 존재들에게는 쓸모가 없는 능력이다.


‘..내가 격이 높은 존재라고?’


그럴리가 없다.


격은 강함과도 그리 다르지 않은 개념이지만..


나는 그저 튜토리얼을 치르는 뉴비.


회귀자인 한가인도 막지 못하는데, 내가 능력을 차단하고 저런 반응까지 일으킨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설마 내가 작가이기에 그런 건가?‘


그나마 이유를 짐작한다면 두 가지.


하나는 내가 이 세상을 만든 작가이기에 높은 격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가 또 손을 썼다.‘


예를 들어 그 무언가가 자신의 힘이 서린 가호를 내게 내렸다면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어차피 추측일 뿐이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나는 상념을 털어버린 후, 다시 눈앞의 여자를 응시했다.


“아..아아.”


얼이 빠진 듯 신음을 흘리는 게 꽤나 웃기다.


아, 정말 이런 표정을 보면 너무 괴롭히고 싶어진단 말이지.


…참자.


그래도 중요한 사람이다.


미소를 짓고, 웃으며 말하자.


”아린 씨. 제가 무슨 수작을 부렸습니까?“


나는 한가인을 구해줄 때와 마찬가지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린아, 옆에 사람들 다 모여있으니까 이놈이 무슨 짓을 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 이 오빠가 지켜줄게.”


“….아뇨, 저분들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에요. 아까..요정의 장난이라면서 저주가 내려져서..”


살인마가 눈치 없게 끼어들긴 했지만, 아린은 적당한 변명을 대서 우리를 변호했다.


‘..요정의 장난이라.’


적당한 이유다.


사람을 웃으며 터뜨리는 놈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진 않으니까.


실제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보시죠,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런 나의 행동을 본 살인마 놈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 걱정이 과했나 보군요.”


요동치는 입꼬리.


벌게지는 얼굴.


참으로 보기 좋다.


“하, 걱정이 과했다라.. 네, 뭐 그런 걸로 하죠.”


한번 더 비꼬는 나의 말에 놈의 면상이 터질 듯 울그락불그락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놈에게서 멀어졌다.


“…헤헤.”


한가인이 숨죽여 웃는 모습이 보였다.


‘….’


이런 한가인을 탐내다니.


곧 죽여주마.


***


‘이런 씹어먹을 새끼가..!!’


김동건.


대구의 폭력 조직 중 하나의 부두목이자, 그 부근의 조직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나름대로 이름이 퍼진 깡패.


일진에서 조폭이 된 평범한 건달.


그는 오늘 치욕을 맞이했다.


바로.


-하, 걱정이 과했다라.. 네, 뭐 그런 걸로 하죠.


어느 한 사내에 의해서.


‘…저놈들은 왜 그 새끼 편을 들고 난리야!!’


심지어 그의 일행들도 그를 말리며, 은근슬쩍 저 남자의 편을 들었다.


무슨 일이 터질까 막은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 일행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비호한다는 게 어이없었다.


”x발, 다 이 얼굴 때문이지…!“


그도 알았다.


자신의 험상궂은 외모는 선입견을 만들기에 충분했고, 사실 선입견도 아니었다.


또한 놈의 태도가 너무 능청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거리낄 것이 없다는 양.


‘보통 놈이 아니다.’


아까 최아린에게 일어난 일이 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밝혀졌으나, 그 침착함만 보아도 정상인 놈은 아니었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데도 태연자약한 태도라니.


‘분명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다.’


아무리 요정의 짓을 보았더라도, 그 짧은 시간 사이에 피에 익숙해질 수는 없는 노릇.


그 남자 뒤에 숨던 여자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수십 명을 죽였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서는 당황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놈은 태연했다.


‘..말로만 듣던 사이코패스인가.‘


하하.


이 곳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는 경악했다.


최아린을 만났을 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장소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위험하다.‘


놈이 사이코패스가 맞던, 아니던 위험했다.


맞다면 폭탄을 이고 다니게 되는 셈이고.


아니라면 그만큼이나 적응이 빠른 놈이라는 뜻.


‘게다가 입만 산 놈도 아닌 것 같았지.’


만약 그때 자신이 그에게 달려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대로 그놈은 나가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놈의 시선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발을 보고 있었다.’


발이란 몸을 쓰기 위해 가장 먼저 움직여야 하는 부위.


당연한 사실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싸움에서는 그 분위기나, 흥분에 못이겨 주먹을 보고 피한다거나 어깨를 본다는 멍청한 생각을 한다.


그런데 놈은 달랐다.


싸움을 모르는 놈이 아니었다.


또한 자신의 스킬, 전투의 감각마저도 놈이 초짜가 아니라 가리켰다.


‘싸웠다면…’


적어도 놈이 허무하게 지지는 않았으리라.


‘만약 가능하다면 서로 떨어지는 게 좋겠지만.’


..최아린의 시선이 그를 향해있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혼자 쉬고 싶어서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반응이라면 필시 일행은 많을수록 좋으니 같이 가자고 주장할 테다.


그리고 유약하기 짝이 없는 나머지 놈들은 동의할 테고.


‘….최아린은 왜 그랬던 거지?’


요정들의 장난이라고 했었나.


그게….


진짜일까?


‘..안 되겠군.’


정체도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이 다닐 수는 없다.


어떻게든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반인을 죽이는 건 처음인가. 뭐, 놈도 일반인은 아닌 것 같지만.’


그리고 그를 죽인다면..


‘그 여자도 반반했지..’


할짝..


그 얼굴을 떠올리니 하루라도 빨리 그를 살해해야겠다는 욕망이 강해진다.


그렇게 살인마, 김동건은 천의찬을 죽일 것을 다짐했다.


위험하니 죽이겠다는 전형적인 악당의 생각.


그 중에서도 단순한 삼류 악당의 생각.


그는 알지 못했다.


왜 자신이 일진에서 조폭이 되는 삼류 악당의 길을 걸어왔는지.


왜 그렇게 그에게 화가 났었는지.


또한 몰랐다.


모든 그것들이.


상상력이 부족한 어느 한 삼류 작가에 의한 것이었음은.


***


한편, 다른 무리와 조금 떨어진 쪽에서 휴식하고 있던 의찬과 가인은 한 손님을 마주했다.


“이쪽을 찾아오실 줄은 몰랐군요.”


나는 그녀에게 능청을 떨며 말을 건넸고.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말을 받았다.


“..당신이라면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나의 눈앞에 있는 건 앞서 말싸움을 촉발시켰던 원인.


최아린이였다.


“…괜찮으신 거예요?”


그런 최아린을 보고 한가인이 물었다.


직접 그녀의 거부 반응을 본 만큼 걱정이 되는 모양.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멀쩡해요. 그보다 잠깐 이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오빠랑요? 그냥 여기서 얘기해도..“


”…죄송하지만 개인적인 일이여서요.“


그녀의 말에 한가인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이렇게 된 이상, 아무래도 의심을 받는 건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네.


”흐음. 그러면 조금 걸으면서 얘기하죠. 가인아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 말에 가인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가시죠.“


나는 최아린에게 한번 눈빛을 보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얼마나 걸었을까.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거리가 되자, 그녀가 멈춰 서서 입을 열었다.


”…당신 정체가 뭐에요?“


”하핫… 정체라니.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제 스킬을 아세요?“


당연히. 알고말고.


”오딘의 눈, S+급. 기능은 타 생물체의 상태창을 훔쳐보는 것.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걸 어떻게..! 아니, 당신이라면..”


그녀는 잠시 나를 보더니 시선을 돌리며 수긍했다.


“그러면 제가 당신에게 그 스킬을 사용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겠네요..”


모른다.


단지…


“거부 반응이 일어났겠죠.“


이렇게 추측할 뿐.


”..네. 당신을 대상으로 스킬을 쓰려고 하니, 깨진 듯한 글자들이 떠오르며 시스템이 폭주했죠. 그리고 제가 그런 꼴이 되었고요… 그때를 생각하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네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흐트러짐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도대체 누구길래..그런 반응이..“


”..글쎄요. 누구일 것 같나요? 신? 아니면 악마?“


”당신 옆에 그 여자가 회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 당신도 상태창을 훔쳐보는 스킬이나, 비슷한 능력이 있는 거겠죠. 그런 능력에다 제 스킬을 튕겨내는 것까지..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제 정체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터억.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사람이건 아니건. 신이든 악마든. 그게 그리 중요합니까? 더 중요한 건..“


파악-


그때, 옆에서 고블린 두 마리가 나를 노리고 덮쳐왔다.


-키에에엑!


그러나 그들은.


서겅-!


어느샌가 나의 손에 쥐어진, 푸른 검기로 둘러싸인 단검에 의해 갈라졌다.


툭.


반으로 잘려 떨어지는 놈들의 시체.


“…제가 그 무리의 모든 사람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을만한 힘을 가졌다는 거겠죠.”


꽤나 충격적인 광경이었을 텐데도 낯빛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예상했던 거겠지.


애초에 그녀의 눈으로 저 고블린들이 포착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말하지 않은 건.. 내가 어느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테스트한 건가.


“제가 당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그러면 그 회귀자에게 의심받게 되겠죠. 뭔가 얻을 게 있어서 그녀 옆에서 머무는 거 아닌가요?“


역시 똑똑하다.


“예, 맞습니다.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서요. 당신을 제거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왜 그렇게 순순히 말씀하시는 거에요? 저를 협박하셔서 입을 막으실 수도 있을 텐데.“


”당신이 필요하니까요.“


나의 직설적인 말에, 순간 그녀의 얼굴에 당황이라는 감정이 드러났다.


”이 세상은 왜인지 제가 아는 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그래서 아린 씨의 눈이 필요한 거죠. 복종이 아니라 ‘협력’입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똑똑한 당신에게 강압적으로 행동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제 그늘에서 벗어날 테니까요.“


”…그 말은 다른 사람이었다면 방법이 바뀌었을 거라는…. 말 이겠죠?“


나는 그저 미소 지었다.


”..알겠어요. 당신에게 협력할게요..“


”당연히 회귀자에게는 저라는 존재가 이상하다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최대한 이 몬스터들을 죽여보는 게 좋을 겁니다. 이놈들을 죽여서 업적을 얻으면 스탯이 오르거든요.“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어느 날 그 살인자가 죽어있으면 말을 좀 맞춰주십시오.“


”네, 그렇게 할게요.“


“좋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면 됩니다.”


나의 말을 들은 그녀는, 발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제 이름은 천의찬입니다. '개인적인 일’로 대화를 나눴는데 이름도 모르면 안 되잖아요?”


내가 소리쳤다.


저 멀리서 최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후우-


동시에, 그녀의 안도의 한숨도 들려왔다.


그래도 사람이라고 긴장했던 건가.


“하핫..“


그래도 성공적인 대화였다.


“…패를 좀 많이 까보인 것 같긴 하지만..”


회귀자에게 내 정체가 밝혀지면 안 된다는 건 대놓고 말했다.


상태창을 볼 수는 없으나 정보는 안다는 내용도 흘렸다.


불가피한 행동이었지만 워낙 똑똑하고 교활하다고도 할 수 있는 저 여자이니, 약간 걱정되었다.


뭐, 그래도 그 이상으로 현실주의자인 사람이니 괜찮을 거다.


정체불명의 나를 상대로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지.


“그보다..기괴한 문자들이 떠오르며 시스템이 폭주했다고 했나?”


내가 물을 마셨을 때와 같은 현상이다.


….꺼림칙하네.


분명히 ’무언가’는 나를 도와주고 있다.


아마 이번에는 가호 같은 게 내려져서 그녀의 스킬을 차단했던 거겠지.


“…도움..이 되긴 하는데.”


..그러나 계속해서 그것의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정체를 짐작조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안했다.


”하핫..“


하지만 동시에 희열감도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파삭.


-쿠에에엑!!


또 어디선가 고블린들이 나를 덮쳐왔다.


푸욱-!


나는 단검으로 가장 앞에 있는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서겅-!


그리고 단검을 회수하며 다시 하나를 베어 죽였다.


마지막 놈은 그나마 내게 조잡한 돌 도끼를 휘둘렀지만, 그 도끼는 나의 검기에 잘려나갔다.


곧 마지막도 깔끔하게 고기 조각들이 되었다.


”괜찮아, 나는 잘 하고 있어.“


나는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최선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이상 잘 할수는 없다.


불안해 하지 말자.


…그래도 빨리 오크가 나왔으면 좋겠다.


놈들을 죽여서 업적을 얻는다면 더 강해질 수 있으리라.


“한가인한테는 어떻게 말하지..?”


문득 남겨두고 온 나의 회귀자가 떠올랐다.


어떻게 설명을 할까.


이미 스킬을 거짓으로 말해버려서 스킬 타령을 할 수도 없는—


‘..아니, 잠깐.’


어쩌면…오히려 나라는 존재를 더 중요하게 만들어줄…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고블린들의 시체를 내버려둔 채, 미소를 띠고 무리로 돌아갔다.


***


“오셨어요, 오빠?“


무리로 돌아가자 한가인이 나를 반겨주었다.


평소와 같은 얼굴.


딱히 최아린이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무슨 얘기를 하신 거에요?”


그녀는 예상한 대로 곧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왔다.


대충 둘러대도 되긴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깝지.


“그냥 내 스킬 때문에 조금 대화한 거야.“


“스킬…?“


”……[시간을 보는 자 (A+)]. 그게 내 스킬이야.“


”..시간을 보는 자요?“


한가인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가 아는 내 스킬은.


[글 쓰기 (F)] 니까.


“원래라면 숨기려고 했는데, 아린 씨가 어떻게 알아챘는지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그냥 이참에 너한테도 말을 해두려고.“


내가 원래는 말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하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수긍했다.


좋아, 이것으로 1회차에 저질러놓은 일은 치웠다.


”왜 숨기려고 하신 거에요?“


“그게, 이 스킬로 보이는 게 조금 꺼림칙해서. 굳이 말해서 좋을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숨겼지.“


나의 말에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꺼림칙하다니요?“


그녀의 되물음에 나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네가 우락부락한 초록색의 괴물한테 도끼로 등을 찍히는 모습이 보이거든.“


동시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네?”


내가 말한 상황은 1회차의 마지막.


그래, 나는 이제부터.


유일하게.


과거의 회차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게 무슨.”


나만이 너의 과거를 볼 수 있다.


지나가버린 행동을 나만이 기억할 수 있다.


나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러니…


내게 더욱 의지하고.


의존해라.



9화 사냥&살인 (공포8554 공미포 6320자)


저게 무슨 말이지?


‘내가 도끼에 찍히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그건 분명히 1회차의 마지막일 텐데…!


‘..시간을 보는 자.’


미래를 보는 자가 아니다.


‘시간’을 보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 보인다고요?”


“응. 아까부터 계속 그런 장면이 떠오르네. 네가 다치고, 나는 남은 몬스터와 싸우는 장면이 보여.”


한가인은 혼란스러웠다.


이미 사라진 과거를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말이 안 돼?


‘..하. 그럴 리가.’


무심코 실소가 흘러나왔다.


말이 안 되기는.


애초에 이런 상황부터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인데..


‘..과거가 보인다고?’


기뻐해야할 일이다.


1회차가 끝나고, 자신을 몰라보던 의찬 때문에 속상하지 않았나.


‘…내 발버둥이 잊혀지지 않을 수 있는 건가.’


줄기에 돋아나는 잔가지들도.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건가.


앞으로 얼마나 많이 죽게 될까.


‘..튜토리얼에서도 이미 한번을 죽었지.‘


그럼 일 층에서는. 이 층에서는 몇 번을 사망할까.


셀수도 없이 죽으리라.


그런데.


그 죽음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스킬이 나타났다.


‘다행이네.’


이 한마디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능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그 힘의 주인이.


천의찬이란 사람이기에 더.


***


‘…생각한 것만큼 반응이 격렬하지는 않네.’


하긴, 지금으로서는 이게 맞다.


소설 속의 그녀는 무한한 회귀와 초기화를 반복하는 사람들과의 인연 때문에 피폐해지기를 거듭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겨우 2회차에 불과하다.


지친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특이한 능력이네요.”


“..아무렇지도 않아? 네가 죽는 모습이 보이는데..”


“만약 그게 미래라면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죠.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럼 다행이고. 생각보다 담담해서 놀랐네. 그래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저쪽은 잘못 건드리면 단체로 부서질 듯한 분위기니까…”


한가인은 말을 흐리더니 다시 밝은 분위기로 말했다.


“그런 건 치워두고 일단은 그냥 쉬어요. 언제 그 몬스터들이 올지 모르잖—“


-키에에엑!!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말이 끊기고 고블린놈의 괴성이 들려왔다.


지성이 담겨있지 않은, 그저 사기를 돋우는 괴성.


그런 소리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괴..괴물들이..!!

-젠장..!

-꺄아아악!


혼란스러워하는 일행들.


그건 살인마 놈도 다르지 않았다.


‘얼굴이 창백하네.’


아마도 순간 수천에 달하는 고블린들의 군대가 떠올라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성따위가 없는 몬스터들은 '무리'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흩어지니까.


오죽하면 소설에서 만난 고블린 무리 중에 열 이상이 모여있는 게 없었을까.


그러나 저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다.


오직 최아린만이.


“…”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마 몬스터를 죽여서 스탯을 올리라는 나의 말 때문이겠지.


‘..최아린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아마 괴물처럼 보이지 않을까?


‘..뭐든 상관은 없지.’


그녀가 나를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최아린이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여기서 무력적으로는 가장 약할 여자한테 휘둘리는 꼴이 웃겼다.


몇분이 지났을까.


잠시동안 대화를 나눈 그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물론, 최아린을 가장 앞에 두고.


“..소리를 들어보니 점점 괴물들이 다가오는 것 같은데 함께 힘을 합치시지 않겠어요? 물론 아까 일로  기분이 상하셨겠지만, 더 이상의 충돌은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요.“


”하하.. 저희야 좋죠.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최아린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것을 붙잡았다.


”…….“


옆에서 살인자 놈의 눈빛이 느껴진다.


슬쩍 앞을 보니 최아린도 황당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흠, 흠! 그러면 모두 주위를 살펴보면서 경계해주세요.“


최아린이 또 한 문장을 말하자, 모두 단검을 손에 꽉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최아린이 그들의 정신적 지주라도 된 모양.


살인자, 김동건은 평온했지만 다른 이들은 벌벌 떠는 상태였다.


‘..이게 맞는 건가?’


분명 일반인들은 정신이 벼랑 끝에 몰려있는 상황일테지만 이건 좀 과하지 않나?


..분명 소설에서도 이 정도까지는…


‘..그래. 여기는 더 이상 소설이 아니지.’


새삼 이렇게 되니,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느껴진다.


…그 허황된 소설을 쓴 작가가 할 말은 아닌가.


아무튼 우리들은 경계 상태에 들어섰다.


그렇게.


1초.


10초.


1분.


그리고 정확히 일 분 하고도 삼십이 초가 더 지났을 때.


-키에엑!!

-퀘우웨엑!

-쿠악!!


열두마리의 고블린들이 우리와 마주쳤다.


나의 입장에서는 잡몹에 불과했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리라.


저 흉측한 형태와 괴성.


그것을 마주한 이들 중 한 명이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으, 으아아아!!!”


[스킬 발동]


”[파이어 볼]!!!“


돌진한 건 바로 일전의 안경남.


그가 허공에서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활활 타오르는 구체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마침내 그 불의 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려하게 움직여.


퍼엉-!!


앞의 고블린 중 하나의 머리에 명중했다.


고블린이 타버린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진다.


털썩.


그리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죽은 것이다.


“하..하, 하하하하!! 죽였다!! 내가 죽였다고!!”


그 순간만은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곧 이지가 없는 괴물들은 그 위력에 놀라서 주춤했고.


-키..키익.

-케에에..


그것에 맞서는 인간들은 스킬의 위력에 전율했다.


-와..아..!

-…대단해..!

-미친!!!


하늘을 찌를듯한 인간들의 사기.


“…싸, 싸우자!!”


그것은 누군가가 한 단어를 말하고.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도화선이 타들어 가기 시작할 때.


“우와아아!!!”

“싸우자!!”

“죽여라아!!”


마침내 폭발해, 인간들이 고블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채앵! 퍼엉!! 퍽!


살인마는 감각을 떠올리려는 듯 조용히 고블린을 찔러 죽인다.


한가인은 움찔대면서도 필사적으로 괴물에게 맞선다.


최아린은 다른 사람과 힘을 합치지만, 막타는 자신이 가져갔다.


‘..참. 특색있는 인간들이구만.’


촤악-!


나는 고블린 한 마리의 목을 베어 넘긴 후, 힘을 다 쓴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앉았다.


어차피 고블린도 다 죽은 상황이었으니 상관은 없었다.


최다 킬은 앞서의 안경남.


놈이 파이어 볼을 난사한 결과였다.


“..하하하!! 업적이다!!”


근력 스탯을 하나 올려주는 [튜토리얼의 고블린 살해자]를 얻고 좋아하는 놈.


그런 놈을 보니.


“하하하핫….”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세계의 마법은.


그러니까 저놈이 썼던 것과 같은 종류의 스킬은 마나를 소모한다.


그런데 그 마나는 일 층에 올라가서 연공법을 배우거나, 직업을 얻거나, 영약을 먹지 않는 이상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놈은 어떻게 마법을 쓴 걸까.


‘선천진기.’


혹은 마나 오브 라이프.


즉, 생명력이다.


놈은 자신의 생명력을 이루는 에너지를 불태워 스킬을 시전한 거다.


그러나 그것을 놈이 알 턱이 없다.


그러니 그렇게 스킬을 난사한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선천진기를 사용한 반동은..‘


즉각적으로 찾아온다.


“하하!! 하하! 하하…”


점점 작아지는 웃음소리.


“하..흐..끄으으윽…!!”


흘러나오는 신음소리.


“끄아아아악!!!!”


푸화악-!!


그리고 마침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어느샌가 많이 봐버린 광경이다.


-꺄아아악!!

-괜찮으십니까!?


놈은 곧 얼마 전, 최아린이 누워있던 자리로 이송되었다.


저놈, 저 정도면 적어도 생식 기능을 잃었을 거다.


한마디로 고자가 되었단 말이다.


‘…푸하하핫!!!’


나는 한가인이 옆에 있기에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크게 웃었다.


아아..


정말 바보 같지 않나.


자기가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도 몰랐다니.


‘하하핫..!’


내가 조소하자, 곧 또 다른 비명이 튀어나왔다.


-끄악!!

-크아아악!!

-아아악!!!


벌써 수도 없이 들은 익숙한 비명소리.


이내, 서너 명의 사람들이 더 쓰러졌다.


그러나 안경남과 같이 심한 반응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건 놈이 무식하게 생각 없이 스킬을 난사해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이상 반응으로 일어난 소동은 곧 진정되었다.


앞으로 얼마의 고블린들이 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환자들에게 몰려가 호들갑을 떨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수많은 고블린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났다.


”허억… 허억.“


적어도 오십은 넘게 상대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여유롭게 몬스터를 도살하던 살인마조차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보다 체력이 약했던 한가인이 어떤 상태일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악…학.. 살려줘요..오빠. 더 이상은 못 싸우겠어요오..“


한가인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이 무색하게도.


-키에에엑!!!


고블린들은 또다시 쳐들어왔다.


사람들은 또다시 힘든 몸을 일으켜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마냥 절망하기만 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묘한 열망이 그들의 눈빛에 섞여 있었다.


그 이유는…


[일정 수 이상의 고블린을 처치하셨습니다.]


[칭호가 업그레이드됩니다.]


{튜토리얼의 고블린 소탕자}

[튜토리얼에서 고블린을 열 마리 이상 죽인 이에게 주어지는 칭호. 근력을 2 증가시킨다.]


고블린을 얼마나 죽였는지에 따라, 발전하는 칭호 때문이리라.


***


이십 시간이 지났다.


[20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오크들의 군세가 전장에 도착합니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에 떠오르는 푸른 화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더욱더 강대한 군세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떠올라있었다.


그 정체는 1회차에 종지부를 찍은 몬스터, 오크.


“…!”


한가인이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그래도 자신을 죽인 상대이니 이해가 갔다.


“후우..”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분간은 몬스터가 이곳에 오지 않을 거다.


모두 세계수가 내뿜는 기운에 이끌려 그곳으로 갔으니까.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다.


“..하아.”

“으으으…”

“..”


모두 다운된 분위기다.


“..간단하게 진지라도 구축해보죠. 앞에 함정이라도 깔아두면 조금 낫지 않겠어요?”


그 분위기 속에서 최아린이 말했다.


계속해서 몬스터가 온다면 그것들에게 방해받아 함정은 설치하지 못할 터.


최아린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내 반응을 보고 숨통이 트일 거라는 걸 눈치챘나?’


참, 귀신같은 여자다.


우리는 지친 채로 밟는 순간 땅이 주저앉는 함정 같은 것들을 설치했다.


‘저 살인마 놈도 꽤 지쳐 보이네.’


저 상태에서 오크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테다.


나중에 오크가 찾아왔을 때 실수인 척 놈에게 떠넘겨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잖아?’


굳이 죽이는 걸 다른 생물의 손을 빌려 할 필요가 있나?


그리고 도끼에 찍혀 죽는 건…


너무 편안한 죽음이지 않나.


나는 그 길로 곧장 최아린을 찾아갔다.


***


‘x발!!’


김동건은 홀로 숨죽여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분명 몬스터를 흘려 저 천의찬이란 남자를 죽일 생각이었건만..


‘내가 먼저 죽게 생겼네..!!! 젠장….! 젠장!!’


생각보다 몰려오는 몬스터들이 많았다.


분명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그 안경 쓴 놈이 x랄하며 쓰러진 이후로 사기가 낮아졌다.


심지어 놈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놈을 죽이는 게 맞나?’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놈은 큰 전력이다.


그놈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까드드득!!”


젠장..!!


***


최아린이 대뜸 자신을 찾아온 나를 보고는 당황하며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하하.. 저희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보는 사이였던가요?“


“그런 사이가 맞지 않았나요.”


”예, 그렇지요.“


최아린이 이상한 것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흘겨보았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에 불침번을 마지막으로 서는 쪽에 저랑 당신, 그리고 그 살인자 놈을 넣자고 말하세요. 오늘 놈을 죽일 겁니다.“


”아니, 불침번을 서자고 할 건 또 어떻게..“


최아린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는 무슨. 


소설 속에서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그런 거지.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 상황에서는 사람 한명 한명이 중요한데.. 갑자기 힘을 드러내시는 걸 꺼리시지 않으셨어요?”


한가인의 물음에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건 괜찮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우연히 몬스터에게‘ 죽을 거지만 다른 사람 중 한 명이 우연히 '직업’을 얻어 강해질 거거든요.”


“..직업이라는 것도 있었나요… 알았어요. 이따가 그렇게 말할게요.“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은 후, 나는 한가인에게로 돌아갔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녀.


그녀는 1회차까지 합치면 하루가 넘게 잠을 자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함.. 오빠?”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자도 돼.”


곧 최아린이 우리들을 불러모았다.


그녀는 시간이 늦어가니,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잠을 자자고 제안했다.


세 그룹을 만들어서 움직이는 형식.


본래라면 다섯 그룹으로 나눠도 되었겠지만, 아직도 누워있는 이들이 있었기에 인원이 적었다.


그렇게 일 조에 한가인과 기타 등등.


이 조에 기타 등등.


그리고 삼 조에 나와 최아린, 그리고 살인마가 편성되었다.


첫 번째로 일 조가 두 시간 동안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확실히 스탯이 높아지니까 몸의 컨디션에도 영향을 미치네.‘


원래라면 지금은 숙면을 취하는 시간이지만 딱히 잠이 오지는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의 몸은 이상하리만큼 쌩쌩했으니까.


아마도 높아진 스탯의 영향이리라.


어느샌가 일 조의 시간이 끝났다.


이 조의 사람들이 일어나고, 교대한다.


또 얼마 후, 이제는 우리가 불침번을 설 시간이 되었다.


“..저, 저기 이제 교대 시간이에요..”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나뭇잎을 깔아놓은 채 누워있는 내게 말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내 그 소년은 최아린과 살인자 놈을 깨운 후, 곯아떨어졌다.


“….“


세 명의 인간들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최아린이 우리의 눈치를 보며 땀을 뻘뻘 흘렸다.


“하핫..”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저건 저 살인자를 죽이라는 신호일까?


‘재촉하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뭐, 놈은 나도 죽이고 싶으니까.’


나는 오른쪽의 살인자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내지르려는 순간-!


”지난번의 일은 다시 사과하겠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뭐?’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고작 하루만 몬스터들을 상대했을 뿐인데도 모두가 지쳐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크라는 새로운 몬스터까지 상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놈이..


”더 이상 케케묵은 감정을 가지고 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러니…기 싸움은 그만 합시다.”


화해를 하자고 말하는 건가?


“이제 정말로 화해하고, 함께 위기를 헤쳐나갑시다.”


내가 놈의 손을 잡으리라는 확신에 차있는 눈.


그것을 보니 실소가 터져나왔다.


“하..하..하하하하하핫!!!!!”


화해!?


케케묵은 감정은 버리자고!?


“어림도 없는 소리.”


터무니없는 말에 오히려 흥분되었던 정신이 맑아진다.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지?


화해라니..


어떻게 그렇게나 멍청한 말을.


“어이가 없어.“


한번 시작했다면.


당연히 끝을 봐야지 않겠나.


설령 누군가가 죽더라도.


움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놈이 당황하며 몸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푸욱-!


그런 발버둥이 통할 리가 없다.


품에서 꺼낸 단검이 놈의 배에 박혀 들어간다.


투,투둑.


피가 떨어진다.


놈의 당황한 얼굴이 보인다.


아.


역시 이런 건.


기분이 좋다.


***


김동건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자신이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명백한 화해를 요청하는 행동.


‘…….어쩔 수 없다. 죽이는 건 포기하자.‘


새로운 몬스터가 얼마나 강할지도 알 수 없고, 만약 그리 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사람이 필요한 때였다.


그 사람이 누구더라도.


’…하아.‘


저놈을 따르는 여자는 아깝긴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가 없다.


‘쳇, 그래도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게 맞다.’


지금이라면 놈도 이 손을 잡을 거다.


바보 천치가 아니라면 당연한 행동일 테다.


비록 지금까지 적의를 보이기는 했어도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라.


”…..“


뭐지?


놈이 손을 잡지 않는다.


그는 의문을 품고 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표정이지?’


무표정.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때.


“하..하하하핫!!!”


놈이 광소를 터트렸다.


‘…뭐냐.’


갑자기 그의 스킬이 경종을 울려댔다.


저 남자가 위험하다고.


“….!”


김동건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회수하고는 전투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푸욱-!


저 사내 앞에서는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커헉…!”


배에 꽂힌 단검을 타고 피가 흘러내린다.


복부에 고통이 엄습해 온다.


“으윽…ㅇ, 왜….!”


그는 눈앞의 사내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직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내의 입이 열렸다.


소름끼치는 미소와 함께.


“왜라니….. 당연한 일이잖아?“


10화.


“쿨럭..!”


놈이 힘없는 기침소리를 내며 피를 내뱉었다.


고통스러워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흐음, 여기서 더 하다가는 자는 사람들이 깰 테니 잠깐 멀리 나갔다 오겠습니다. 잠시 이곳을 부탁드립니다, 아린 씨.”


“….네.”


나의 말에 최아린이 겁에 질린 채로 대답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애써 침착하려는 모습이…꽤나 귀여웠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을 죽일 일은, 당신이 스스로 초래하지 않는 이상은 없을테니.”


“…네.”


그녀에게 한번 엄포를 놓은 나는 살인마 놈을 들쳐멘 후, 조금을 이동했다.


적지는 않은 거리였으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미 나의 몸은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왜..나를 죽이려는 거냐..!! 내가 사라진다면 너희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


충분한 거리를 이동해 멈춰서자 놈이 소리쳤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눈치였다. 


그런 놈의 반응에 나는 폭소하고야 말았다.


“하하하하핫!!!!”


어떻게 저렇게 멍청할 수가 있지?


“하하핫….네 저항을 무시하고 너를 찌른 것만 봐도 내가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알 수 있지 않나? 몰라서 그러는 건지, 그냥 현실 부정을 하는 건지..”


놈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 그래도 새 몬스터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를텐데..!!”


“알아.”


“…뭐?”


“안다고. 그놈들이 초록색의 피부를 가진 것도, 무슨 무기를 쓰는지도, 그리고 놈들의 근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전부!!“


약간의 광기를 흘리며 내뱉은 말에 놈이 떨며 물었다.


”너는…너는 누구냐!! 미래라도 아는거냐!?“


”안다..라. 그렇게 따진다면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걸 알았지. 이 탑이 왜 만들어졌는지부터 네놈의 과거까지 다..“


”…..“


어찌보면 터무니없기도 한 나의 말에 놈이 침묵했다.


어떻게든 살 방법을 모색하려는 놈의 생각이 훤히 보였다.


정말.


바보같다.


“하핫… 너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한거야?”


“…”


“만약 내가 여기서 널 놔준다 해도 배에 검이 박힌 상태인데?”


현실을 자각시켜